2010년 6월 26일 토요일

아랍세계 사역에 있어서의 보안과 안전

원제: SECURITY AND SAFETY ISSUES IN MISSION IN THE ARAB WORLD
저자: TAYLOR GRAEME SMYTHE, PHD, PRISCA SMYTHE, MD, JACOB VOLPE
원문보기: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5%20SmytheVolpe-SecurityofPersonnel.pdf
1 서론
최근의 신학교 회의에서 사역자가 될 학생들은 위험하게 살고 또한 복음을 위해 위험한 사람들이 되도록 도전 받았다. 미래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자신이 구축해 놓은 편안함과 안전의 영역을 벗어나, 심지어 그것이 위험한 곳이나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비용을 계산해 보기 위함이었다.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을 훈련하는 사역자들에게 이것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훈련 자나 훈련 받는 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이다.

2 용어의 정의
이 주제를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보기 위해서 용어를 먼저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안전: 이 말은 육체적, 사회적, 감정적, 정신적인 피해로부터 보호 받고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감정적인 안전과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뜻하는 좀 더 특정 용어인 “안전한 사람들”이나 “안전한 장소”라는 말과는 대조된다.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황에서 “안전한 장소”란 무슬림들이 기꺼이 자리하는 행사나 장소가 될 것이고, 문화적인 장벽이 높지 않은 곳일 것이고, 그런 곳에서 무슬림들은 복음을 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어느 한 무슬림이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동떨어진 곳에 있는 야외파티장이 “안전한 장소”가 될 것이고, 반대로 서구 스타일의 교회 예배나 성경 공부는 “안전하지 않은 장소”가 될 것이다.

보안: 일반적으로 비밀로 지켜지는 숨겨진 진짜 정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숨기는 것이 개인에게 안전과 보호를 제공해 준다.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그들의 물리적인 존재 (즉, 비자)와 선교사 개인의 안전 혹은 개종자의 안전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접근 제한 국가에 있는 국제 선교 사역자들에게 이는 숨겨진 단체나 조직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는 문제까지도 함께 연루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개종자 역시 공공연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밝혀지게 되면 위험에 노출된다. 두 경우 모두 정체성을 숨기는 것이 복음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일정 수준의 안전을 제공해준다. 여기서 “보안”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성도들의 인내와 관련된 신학적인 논제와는 구분되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위험: 유익이 되거나 그 반대되는 결과를 이끌 수 있는 행동을 일컫는다. 이 정의에서 우리가 비록 위험에 대한 평가나 그 위험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 더 상세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지만, 결과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볼 때 그렇지 않은 행동들도 있지만, 반면에 어떤 행동들은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험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예들은 주로 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잘못된 사역 모델의 예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 문화적으로 어리석고 민감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
- 닫혀진 나라에서 공공연히 복음 활동을 하거나, 관계를 먼저 형성하지 않은 채 전도지를 배포하고 아무런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
- 공공연히 꾸란과 선지자, 혹은 지역 지도자나 문화를 공격하는 것.
- 지역의 관습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

제자를 만들거나 교회를 개척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목표나 결과를 가지고 있다면 계산된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부주의하게 접근하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3 보안 및 위험과 관련된 문화적 요인들
문화적, 지역적 차이에 따라 (즉, 어디에서 왔는가에 따라 –번역자) 안전과, 보안, 위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달라질 수 있는데, 이는 개종자를 제자화하는데 있어서 특정 상황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어떤 문화적 지역적 차이들은 우리의 사회 경제적인 이해를 반영하고 있고, 우리가 기능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감정적 필요의 수준에 대해 다른 기대를 갖게 만든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서 온 선교 사역자들은 자녀 교육이나 가족과 관계된 문제들 (배우자와 떨어져 있는 문제, 부모님을 돌보는 문제, 조부모들의 기대를 다루는 문제 같은 것들)에 있어서 사는 기준에 대한 다양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문화에서는 보험과 퇴직금이 위험을 감수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한 부분이 되고, 다른 문화에서는 미래를 계획하는 것에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고, 현재에 더 집중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모험을 감행하는데, 이는 반드시 문화적인 특성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특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부상하고 있는 선교 운동 중에는 순교를 하나님의 일을 앞당기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으로 보는 운동들도 있는데, 따라서 그곳에 속한 사역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각오가 더 많이 되어 있다. 옛 세대의 사역자들이 그랬듯이 그들이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뒤로 두고 떠나지는 않지만, 이러한 운동에 속한 사역자들은 사역지에 갈 때 “편도” 티켓을 끊어서 간다. 차선책이란 없는 것이다. 반대로 다른 단체들은 사역자들을 선교지에서 빼 내는 것에 대해 좀 더 상세한 정책을 가지고 있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인질로 잡힐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특별히 훈련을 하기도 한다. 위험에 대처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영역이 존재하는데, 그 한쪽 끝에는 전혀 위험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위험을 찾아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 끝에는 위험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복종하고 그 이름에 신실할 때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나라에서 온 사역자들은 불편하고 보안이 되지 않는 환경을 잘 참아낼 수 있는데, 이는 삶의 편안함에 대해 다소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다른 믿는 자들에게 좋은 본이 될 수 있다. 위험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지만 보편적이지는 않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기대를 가질 수 있고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 기꺼이 포기하는 것을 결심할 수 있다. 다문화 그리고 다국적의 팀과, 교회와, 조직은 성숙과 은혜가 필요하고, 율법주의와 판단하는 태도를 피해야 한다. 성경적 원칙의 다양한 이해와 적용이 있을 수 있고, 위험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다른 가정과 가치가 존재할 수 있으며, 특정 상황을 다루는 서로 다른 전략과 접근이 가능한 곳에서 개인의 인식이 좋은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

4 성경의 선례와 보안 문제
내부자 운동과 상황화된 교회 개척 전략에 기초한 실용적인 이유들에 더하여,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잠시 그들의 정체성을 숨기도록 격려하거나 혹은 적어도 허락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는 밤에 몰래 와서 예수님을 만났다. (3장)
- 에스더는 삼촌 모르드개로부터 그녀의 유대인 신분을 숨기라는 명을 받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그 명을 지켰다. (4장)
- 나아만은 열왕기하 5장에서 그의 왕 벤 하닷과 함께 이방 신전에 계속해서 가게 될 것에 대해 선지자에게 미리 용서를 구했다. 예수님은 누가복은 4장에서 나아만의 순전한 믿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예들을 볼 때, 우리는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이 비밀 신자들로서 그들의 정체를 숨겨도 된다고, 하나님은 때로 당신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일하시기도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을 제자 훈련 시키는 사람들은 이렇게 비밀로 지키는 것을 그들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한 때의 일로 받아들인다. 비밀로 지키는 것이 규범이 될 수는 없으며, 끝까지 그럴 수도 없다. 그들이 존재하는 진정한 목적이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사역자들 자신도 때로 이중의 정체성(외부로 드러나는 것, 숨겨진 것)을 가지게 된다.

4.1 비용을 계산하기 Counting the cost
대부분의 개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정체를 밝힐 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게 된다. 공동체를 잃게 되고, 직업과 생계, 가족, 어쩌면 결혼까지도 잃게 된다. 만일 그가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에 합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로 정체가 밝혀진 그 신자는 내부자 운동의 일원이 될 확률도 희박하다. 두려움 때문에 정체를 숨기기로 한 개종자와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는 개종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4.2 정체성을 숨기는 전략적인 이유
비밀신자에 대한 위의 예 이외에도, 성경에는 대담해져야 할 때와 조용해야 할 때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의 대담함과 그리스인들 사이를 순회하면서 한 활동, 기꺼이 희생하려 했던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가르침과는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벨론에 자리잡고 살면서 (정체를 숨기라고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이방인 정치 지도자들의 안녕을 구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평안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안전을 위해 바울은 바구니에 달려 내려서 다마스커스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곧 예루살렘을 향해 갔는데 그 곳은 그에게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종종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덫을 놓으려고 던진 질문들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셨다. 아직 고난 당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규범을 가지고 있다.
신약의 몇 본문들은 분명하게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아래의 히브리서 10장의 본문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고난과 손실을 견디고 담대하게 끝까지 믿음을 지켰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10:32-39)

마가복은 8:38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말씀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고난이나 수치를 당할 것이 두려워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비밀로 하는 것은 순전한 믿음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종자들을 제자화할 때 그들의 정체가 밝혀질 경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고 고난이 현실로 다가온다. 개종자들을 훈련 시키는 자들은 위험과 고난 사이에는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보통 훈련 자나 외부에서 온 사역 자보다는 개종자나 현지인이 고난으로 인해 더 심각한 결과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6 비밀 엄수와 제자화
보안과 안전을 유지하면서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을 제자화하기 위한 방법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모든 성경을 가르치되 자신의 정체를 밝힐 필요에 대한 것도 가르치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고난 당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영생은 대가를 치를만한 것이고 우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마10:28)
- 훈련하는 사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기꺼이 고난 받는 본을 보여야 한다. 개종자에 비해 외국인 사역자가 당하는 고난은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볼 수 있지만, 훈련자가 삶을 통해 보여주는 본은 이러한 진리가 말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것이다.
- 다른 사람과 관련된 잠언의 지혜를 포함하는 모든 성경에 나오는 지혜를 분명하게 가르치라. 그리고 경건과, 성령의 열매, 원수 사랑,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고용주와 고용자 등에 관한 기준을 말하는 성경의 명령을 가르치라. 그렇게 함으로써 개종자들은 쾌활하면서도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악행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의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벧전 2)
- 개종자가 언제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종자 스스로 성령의 뜻을 좇아 행하도록 하라. 시련이 닥치면 성령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주실 것이다. 제자 훈련 중에 있는 많은 개종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신앙과 충성을 공개할 것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이는 긴 여정이면, 따라서 개종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할 때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고,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에 그것을 알리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개종자는 스스로의 의지로 그러한 결심에 도달해야 하며, 강요는 오히려 좋지 않은 감정을 낳게 한다. 개종자를 훈련하는 자가 기독교 배경의 외국인일 경우 특히 그러하다. 보안에 문제가 생기는 대부분의 경우 외국인 그리스도인과 현지인 개종자가 당하는 고난은 정도가 다르다. 외국인 그리스도인의 경우 비자를 받지 못하게 되지만, 현지인 개종자는 직업과 가족, 삶을 잃을 수 있고 고국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

7 결론
이슬람권 사역자들에게 일반적인 보안과 안전에 관한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성경은 대체로 성숙한 제자라면 비용을 계산해보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십자가를 지도록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는 고난이 따르게 마련이다. 새로운 신자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비밀을 지키며 조용해야 하는 때에 대해서는 동기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특수한 상황을 평가하는데 유용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글을 맺으려 한다.
- 그는 “전략적으로 조용한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가?
- 개종자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요청 받는 상황에 처해있는가?
- 물리적 위협(고통, 빼앗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인가?
- 우리는 겨자씨만한 믿음에서 시작하여 두려움을 이길 만한 분량으로 믿음이 자라도록 돕고 있는가?

각 개종자의 상황이 독특하고 따라서 많은 기도와 지혜로 각 상황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믿는 자들과 다른 사역 자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때도 있다. 다양한 견해와 성경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서로(사역자와 믿는자들)에 대해 은혜를 베풀고 서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무슬림 여성과의 대화

글쓴이: 비비안 스테이시 Vivienne Stacey
원제: Conversations with Muslim Women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images/pdf/vivienne/ChristianConversationswitMuslimwomen.pdf

그리스도께서 각각의 여성들과 한 대화를 보면 주님이 그들을 백성으로 보셨으며, 그들 각자의 종교와 사회적 배경을 존중하고 이해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또한 그들의 심리적인 필요도 매우 잘 알고 계셨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요14:1-12)나, 간음한 여인과 하신 대화(요8:1-11), 마리아와 마르다와 하신 대화(요11), 어머니와 나누신 대화(요19:25-27), 그리고 부활 후에 막달라 마리아와 하신 대화 (요20:1-18)를 연구해 보면 도움이 된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다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주님의 예를 보거나,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무슬림 여성과의 대화라는 특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미 있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한 번 만나고 끝날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여성이 만나서 서로를 알게 되고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우정을 쌓게 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종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어느 단계에서부터인가 상대방의 종교적, 사회적, 심리적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상태. 그 무슬림 여성이 매우 종교적이어서 종교적인 모든 요구사항들을 실천하는 사람인가? 이슬람의 어느 분파에 속한 사람인가? 순니인가, 쉬아인가, 이슬람미인가 아니면 다른 종파의 사람인가? 혹시 그녀는 수피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녀가 관계하고 있는 수피는 어떤 그룹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일부 사우디 아라비아의 여인들처럼 교육받지 못했고, 무슬림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을 방금 알게 된 그런 여성인가? 수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들과 전에 만나본 적이 있는 여성인가? 아직 그리스도인을 만나본 적은 없더라도, 영문학이나 독문학 같은 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를 그 여성의 사회적인 상태로 인도해준다.


사회적 상태. 그녀는 문맹인가? 교육은 잘 받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어느 시스템에서 교육을 받았는가? 프랑스 유럽 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알제리아 사람인가, 아니면 고향에 있는 이슬람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인가? 그녀는 총명한가? 그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배운 적이 있는가? 그녀는 인도인 무슬림인가, 아니면 터키인, 인도네시아인, 오만인 무슬림인가? 그녀는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느 부분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 그녀의 나라에서 여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그녀는 튀니지 같이 일찍 개혁을 이룬 나라에서 여성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왔는가, 아니면 꾸란이 헌법인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인가? 시골에서 왔는가, 도시에서만 산 사람인가? 그녀의 가족은 어떤가? 결혼했나? 나이는? 이 모든 질문들이 대화를 나눌 때 기억하고 있으면 좋은 것들이다.

심리적 상태. 우리의 무슬림 친구는 관심을 갖는다면 지적인 질문들에 더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심리적인 두려움에 더 관심이 있는가? 그녀는 아마 그녀의 남편이 자신과 이혼하거나, 두 번째 부인을 얻지 않을까, 혹은 출산의 위험이나, 악한 눈, 그리고 영적 세계의 적대적인 세력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제리아에서는 성자숭배를 금하고 있지만,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찾아가서 고대의 주술이나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 이런 많은 것들이 이슬람보다는 무속신앙에서 전래된 것들이다.

짧게나마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요인들 세 가지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매우 간략한 연구를 통해서도 우리는 많은 종류의 무슬림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나누거나, 복음에 대해 말할 때, 한 가지 접근이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접근과 방법들이 있다. 여기서는 낭송 및 노래, 기도, 핵심어 이렇게 세 가지 정도만 살펴보기로 하자.


낭송 및 노래 RECITATION AND SONG. 꾸란이라는 말의 의미는 낭송이다. 아랍어로 꾸란은 큰 소리로 낭송하는 것 혹은 읊조리거나, 암송하는 것이다. 듣는 것 보다는 읽는 것에 익숙해 있는 서구인들에게는 꾸란을 읊조리는 것이 경건한 무슬림에게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단어들과, 소리, 재능 있는 사람이 읊조리는 고전 아랍어는 그 의미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들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작년 겨울 말에 파키스탄으로 건너왔다. 그들 중 두 명의 여성이 의료적 치료를 필요로 했는데, 가족들과 함께 기독교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의사는 그들이 걸프 석유국인 카타르에 관해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노래에서는 대화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편: 내가 카타르에 가서 당신에게 많고 많은 돈을 벌어다 줄께.
아내: 거기에 가지 말아요. 카타르에 가면 문제가 많이 생길 거예요. 만일 신께서 그곳에서 당신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줄 수 있다면, 왜 여기에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공급해 주실 수 없겠어요? 카타르에 가지 마세요.

이 무슬림 가족은 이런 식으로 그들이 피운 모닥불 가에서 밤에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있었다. 한 여성이 그 의사에게 아는 노래 중에 하나를 불러보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그 여성 의사는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결혼 잔치에 관한 비유를 노래로 만들어서 불러주었다. 잔치에 올 수 없다고 변명하는 내용들은 그 의사가 상대하는 환자들이 입원을 하기 싫을 때 하는 변명들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 노래는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이미 만들어서 부르던 것이었다.)

그 여성의사가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후렴: 나는 초대를 받았지만 당신의 잔치에 갈 수 없어요.
내 소는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는 젖을 내주지 않아요.
나는 집에 어린 아이들이 많은데 집이 동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잔치에 갈 수가 없어요.
1절: 한 사람이 집에서 잔치를 열었어요. 그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종을 보내서 사람들에게 알렸어요. 음식이 준비되었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변명을 해대기 시작했어요. 나는 갈수가 없어요.
2절: 이 말을 듣고 집 주인은 몹시 화가 나서 종들에게 말했어요. “거리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 절름발이, 중풍병자, 눈먼 사람들을 데리고 와라. 내 집을 가득 채워라. 나는 갈수가 없어요.
3절: 예수님이 해 주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영생과 구원을 얻을 수 있어요. 나는 갈수 없어요.

노래를 해 달라고 했던 여성은 주의 깊게 듣고 나서 질문을 하고, 집에 가서 자기들도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적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여의사는 그것을 적어서 그 이야기가 쓰여 있는 소책자, 즉 누가복음과 함께 주었다. 두 번째 가족 역시 노래를 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여의사는 마태복음에 있는 이야기를 노래로 엮은 것을 적어서 마태복음과 함께 두 번째 가족에게 주었다. 그 두 가족은 그 노래를 불렀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복음서를 큰 소리로 읽었다. 이처럼 그 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의사소통 방법을 통해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다.


기도. 기도는 매우 익숙한 인간의 표현 방식이다. 무슬림들은 그들이 정기적으로 하는 기도(쌀라)를 매우 강조한다. 또한 좀더 개인적인 기도인 두아(dua)도 강조한다. 위기가 닥치거나, 특별한 경우가 되면 무슬림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도 기도를 부탁할 것이다. 내가 아는 몇 명의 그리스도인 산파들은 무슬림들이 출산의 위험에 매우 예민하며, 그들의 문화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미신과 관습으로 인해 몹시 두려워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산파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곤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 산파는 다음과 같이 말해 줄 수 있다: “당신은 이제 갓난 아기의 엄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이 아기가 안전하게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베푸신 사랑과 선하심에 감사 드리고, 이 가정에 새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영원한 주요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이 아기처럼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처럼 산고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당신처럼 기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의 아기에게 자연스러운 출산을 통해 육체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영적인 태어남을 통해 당신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해 줄 수 있는 기도는 아래와 같다: “창조자이신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으로 인해 이 아기가 안전하게 태어나고 산모도 고통에서 해방되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제 간구하옵는 것은 당신이 육체의 생명을 주신 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영원한 생명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멘.”

핵심어. 그리스도는 이 방법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보여주셨는데, 그 대화에서 핵심어는 물이었다. 한 번은 푼자비 마을에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나에게 몇 채의 집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자신의 일가 친척이 되는 부족들은 이 백 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나의 일가친척들은 그것보다 더 많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내가 그녀에게 집은 매우 안전해서 도둑이 들 염려도 없고 수리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자 그녀는 매우 진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아요.” 나는 요한복음 14장 1-6절을 읽어주었고 그녀는 주의 깊게 들었다. 내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주로 사용하는 핵심어들은 부적, 베일, 비 라는 단어들이다. 접촉 점으로 삼을 수 있는 많은 종교적인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순례, 금식, 신조 같은 것들이 그런 단어들이다. 그런 단어들은 좀 더 지적이고 신학적인 논의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슬림 여성들 중에는 그런 논의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여성들은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남성들은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무슬림 사회지만, 때로는 부부가 다른 부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여러 유형의 무슬림 여성들과 접촉해 보면서, 그리고 여기서 지면상으로 나눈 단 세 가지의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나는 어떤 표준적인 여성이나 딱 집어서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표준적인 방법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살아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만남이 우리의 모든 영적, 지적, 문화적 경험들과 그 이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시켜 주신 모든 것들을 끌어 모아야 하는 최 일선의 상황이 된다. 우리가 부지런히 스스로를 준비시킨 후에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한다. 그분만이 다른 어떤 진리가 아닌 주 예수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상황화를 이루기 위한 교회 개척의 경계선

원제: MAKING SENSE OF CONTEXTUALIZATION: A GUIDE ON SETTING PARAMETERS FOR CHURCH PLANTERS
글쓴이: TIMOTHY HERALD[1]
원문보기: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10%20TimothyHerald-makingsenseofcontextualization(1).pdf

1 서론
‘적응주의자 accommodationists’와 ‘거부주의자 rejectionists’[2] 사이의 긴 논쟁은 무슬림 세계의 교회 개척[3] 역사에서 지겨울 정도로 계속된 문제이다. 이것은 학문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내가 만나 본 다양한 이슬람 지역의, 다양한 교파 배경의, 그리고 다양한 파송 단체들의 이슬람 지역 교회 개척 팀들이 초보자나 숙련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이 문제를 계속해서 대화의 주제로 삼고 있었다. 대부분은 각자 이 주제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주제에 대한 뜨거운 열기로 미루어보건대, 그 논쟁에 뛰어들어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나의 생각을 갖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할 수 없이 이 글에 나의 생각을 밝혀놓았다. 이는 내가 정한 경계선들이 선교신학 문서들이나 전 세계에서 실제로 교회개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논의되는 다양한 선교 철학적 발상의 와중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나의 동료들의 강한 주장에 힘입는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 나는 먼저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할 것이다. 즉, 개종자들로 이루어진 모임이 건강한 상태에 있는지를 어떻게 가늠할 것인지 그 영역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영역들 안에 어떤 평가의 기준들이 있어야 하는지를 제시해 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종종 선동적이 되어버리는 문제인, 무슬림 배경의 회중들이 꾸란이나 무함마드에[4] 대해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에게 속했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모임이 이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건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 전체를 요약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적응주의자들과 거부주의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정보들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2 문제(들)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자 하는 우리의 섬김은 우리를 무슬림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사역을 평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교회 개척 팀에 합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그들이 개척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결과로 기대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면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른 교회 구조들(전통적인 구조, 셀 혹은 가정 구조)과 다양한 지도자의 스타일 (여러 사람이 다스리는 스타일, 몇 명의 장로들, 혹은 한 명의 지도자)이 존재하며, 또한 다양한 교리적 차이 (개혁주의, 은사주의 등)가 있고, 많은 삶의 영역과 예배에 있어서 다양한 정도의 상황화 (옷 입는 방법, 언어, 의식, 정체성 등)가 가능하다.
구조나, 지도자, 교리적 차이에 대한 관점들은 결정하기가 쉽다. 개혁주의는 개혁주의를 의미하고, 가정교회 구조는 가정교회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화의 경우에는 사실상 아무도 같은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C5”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다른 문화권의 교회 개척자들을 의미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꾸란을 지니고 있는 채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모두 트래비스가 C5 형태를 이야기 했을 때 그가 의미한 것이 아니다.[5] ‘내부자’나 ‘빼내기’ 등의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역 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러한 사역 철학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을 사단으로까지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요인들은 무슬림 세계에서 하는 사역들을 조금씩 앞당기는데 서로 돕는 역할을 해 왔고, 특별한 이름표 없이 사역이 이루어지고,성급하게 전체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 제시되지 않도록 도왔다. 이런 점에서 개척 팀이 상황화라는 문제에 있어서 정확히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하는 것을 어림해 보고자 시도하면서 나는 적지 않은 슬픔을 느꼈다. 그로 인해 나는 몇 가지 원칙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 개척 팀이 건강한 교회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된 혼합주의로 빠져들고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6] 바라기는 현재 논의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방어해야 하는 사람들이건, 아니면 단순히 관찰자의 입장에 있건 간에) 이 방법을 적용하여 보면서 양 편이 모두 자신들이 판단하고 있는 방법론과 다른 교회 개척 팀들의 방법론의 기준을 다시 한 번 재고해 보게 되는 것이다.

3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먼저, 우리는 교회개척 팀을 평가하면서 그들이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교회가 현재 어느 시점에 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 기준을 삼지 않는 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고 싶다. 현재의 상황을 평가해 보는 것이 어느 영역에 제자화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한 팀이 건강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혼합주의적인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는 그 팀이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그가 첫 편지를 보내기 전의 상황을 가지고 우리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교회 개척 팀(바울 자신을 포함하는) 을 평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교회는 간음과, 분열, 심지어는 배고픈 형제 자매들 앞에서 마구 먹어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오히려 그의 팀은 그들이 고린도 교회를 어디로 이끌고자 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팀이 했던 모든 교회 개척에 대해서 똑같이 적용된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적용하면서 회중이 세례를 받는지 안 받는지를 묻는 것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것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당신의 생각에는 무엇이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보는가?” 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답은 그 교회 개척 팀이 새 신자들을 어디로 이끌고자 하는가를 알자는 것이다.

내가 본 글의 초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양 편의 논의들을 읽어 보았을 때 우리는 마치 지역 교회가 현재 보이는 모습이 앞으로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종종 생각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별로 좋은 예측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새 신자들의 신학과 실천이 시간이 변하면서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청년 신자 그룹들의 신학과 습관도 시간과 함께 변화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건강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를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4 기준 Criteria
4.1 기준의 필요성
우리가 평가해야 하는 것은 교회 개척 팀이 기도하는 그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채, 그 다음 질문은 “우리가 평가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압둘 아사드 Abdul Asad 는[7] 그 목표가 C단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C5 공동체로 시작하는 교회는 장차 C4를 향해서 나갈 것이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게 될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C5 공동체가 개척 팀에 의해 영향을 받는 내용 즉, C5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내용은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다. 나는 압둘 아사드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C단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못 이해되고 있고 무슬림 사역 내에서 몹시 왜곡되어 있다.[8] C4와 C5에 대해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9]
따라서 우리가 목표하는 공동체가 가야 하는 곳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의 영역과, 교리적 신앙의 영역, 행위와 의식의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 이상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팀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좀 더 나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평가를 위해 네 가지 영역을 제안하기는 했지만, 이 각 영역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종종 서구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정통은 정통실천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통 실천이 정통을 낳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네 가지 영역(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교리적 신앙, 행위와, 의식)이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나는 삶의 다양한 면을 (그리고 따라서 믿음의 다른 면들을) 구획 짓는 경향이 있는 세속 사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나는 근동에 있는 무슬림들 가운데 살면서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은 교리적 신앙이 행동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 만큼, 의식 역시 신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꽤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내가 전체적인 건강에 대해 생각하면서 단순히 교리적 신앙만이 아니라 네 측면을 모두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4.2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역사적 사건)은 우리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으며, 누구와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빈 무덤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의미하는 것이고, 인간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전체 믿음에 절대적인 기초가 된다. 이 신앙 고백이 다른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간다. 따라서 부정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부정확하다면 우리의 믿음은 열매 없는 것이 되고 만다.[10] 이것을 명심한다면 공동체가 그 신앙과 실천, 삶의 기초로 삼고 있는 신앙 고백이 그 공동체를 평가하는데 절대적인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복음의 내용에 일관성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이 뿔뿔이 흩어져버리게 되기 때문에, 이 영역이 가장 근원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고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이 영역을 부지런히 평가해 보아야 한다. 다행히도, 복음의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응주의자나 거부주의자나 별 이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사실, 가장 적응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팀의 경우에도, 그들이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슬람의 내용을 사용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면서도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1]

교회 개척 팀이 스펙트럼의 어느 끝에 자리를 잡고 있든지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기준을 정해 놓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서구의 자유주의 학파의 영향은 복음의 내용이 뒤틀리고 빗나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가장 좋은 기준은 사도 신경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내용을 가지고 있고, 보편적으로 확증된 것이며, 짧고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 온 것이다. 공동체가 거부주의자이건 적응주의자이건 상관 없이 그들이 사도신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직 가르칠 것이 남아있는 것이다.[12] 그리고, 만일 어떤 팀이 공동체를 이끌 때 그러한 기본적인 복음의 내용을 고백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자 하지 않는 다면 그들이 어떤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염려가 제기될 수 있다.

4.3 행위 Virtue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행위의 문제들을 많이 다루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무슬림에서 개종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도전이 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이 행동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의도까지도 모두 정결해지도록 부르신다. 예수님이 보고 들으셨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그렇게 보고 듣는 눈과 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을 열심히 따르는 공동체의 목표이다. 산상수훈이 매우 훌륭한 기중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에게 그것이 매우 이해되는 말씀이고 (문화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회 내에서 문화에 반하여 행동하라는 말씀이 그들의 상황에 잘 맞기 때문이다.[13] 우리는 그들이 개척하고 있는 공동체가 산상수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명령을 행위의 목표로 삼고 그에 순종하도록 가르치지 않는 교회 개척 팀에 대해 심각한 염려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산상수훈을 가지고 교회 개척 팀의 행위 기준을 평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패와 우리를 보낸 교회 공동체가 서구에서 계속 해서 실패하고 있는 것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처제를 택하고, 배우자를 학대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가 갖는 이혼율(단호한 일처제) 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서구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배우자 학대의 통계를 기억하면서 어느 공동체나 그들의 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죄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는 여전히 같다 – 변화된 삶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 예수님의 기준을 따라 살기에 실패했을 때 하는 회개는 변하지 않는 목표이다.

4.4 교리 Doctrine
거부주의자들이 적응주의자들에 대해서 염려하는 가장 큰 부분이 바로 교리(바른 지적 신앙)에 대한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구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상황화 되었는지에 대한 짧은 설명이 왜 이슬람권에서 일하는 서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 문제가 그렇게도 중요한 논제가 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그리스-로마 유산과, 개혁, 계몽이 서구에서 교리가 형성되는데 가장 중대한 기여를 한 것들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철학적 지적 영향들로 인해, 우리의 문명은 전체적으로 철학과 바른 사고에 매료되었고, 따라서 바른 지적 신앙에 열중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관심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무슨 질문을 던지는가를 지배해 왔다. 본 논의에 초점을 맞추어보자면, 우리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무슨 질문을 던지는가를 지배해 온 것이다. 우리가 하는 질문들은 단순한 행동(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한 이해까지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즉,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 이러한 것들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른 교리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의 상황화가 때로는 행위와, 의식, 내용을 잃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14] 서구 신자나, 공동체, 혹은 교회개척 팀의 경우에, 교리에 초점을 맞추느라 믿음의 다른 영역에 소홀해진다면, 우리는 마음만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할 것이다.[15]

왜 바른 교리의 문제가 이 논의에서 그렇게도 중요한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모든 신념들이 똑같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신념들은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지만, 다른 것들은 기독교의 특별한 표현과는 구분되는 것이고, 또 다른 것들은 단지 추측이거나, 가정이거나, 전통이거나, 의견인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이지를 교회개척팀이 마음 속에 그릴 때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가? 니케아 신조가 그 본질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짧고,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훌륭한 기준이 될 수 있다.[16]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 것은, 문제는 공동체가 현재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교리적 목표이고 그러한 방향으로 그들이 인도함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쯤 해서, 거부주의자들은 아마도 ‘그것 봐! 그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예수님을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극도로 상황화된 공동체는 스스로를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라고 본다. – 번역자) 이러한 반응은 실제로 순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렸던 강조가 니케아 신조를 정확하게 모두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새로 신자가 된 형제였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만 동행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초기 공동체를 형성하는 단계에서도 함께 동행해야 한다. 한 명의 무슬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만이 아니라 (즉,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계-번역자),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번역자) 계속해서 바른 교리를 알려주고, 어떤 잘못을 먼저 지적해 줄지, 그리고 어떻게 지적해 줄지에 대해 지혜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17]
“무슬림 신자들”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 실재로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바로 이슬람 사회 내에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형제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산 증인들이다. 사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덜 익은 푸른 열매를 따려고 하지 않고, 대신에 성령님의 때를 기다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상황 안에서 니케아 신조를 이해하고자 하는데 상당히 열려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공동체는 아마도 “니케아의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우리 마음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려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적으로는 분명하게 니카아 신조를 고백합니다.” 하고 말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즉, 그들이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 (문화, 언어 등)에만 민감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도 생각해 줄 줄 알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18] 그러나 이것은 과정이고,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가 개종의 모든 경우에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심지어 데살로니가 교회도 니케아 신조에 반대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19]

반면에, 어떤 적응주의자들은 “그거 별로 좋지 않네요. 그 신조는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로 생긴 공동체가 그들의 신조와 신앙의 진술을 결정하도록 그들에게 맡겨야 합니다.”하고 말할 수도 있다.[20] 이것 역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새로 생긴 공동체가 새로 믿게 된 형제들이고 자매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신조를 통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영이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고 계시다면, 왜 그들을 수 세기 동안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동일한 최소한의 교리 고백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21]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예배 중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상황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는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팀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는 니케아 신조와 같은 신앙를 가르치는 것을 불편해 한다면 우리는 그 팀이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개척하고자 하는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4.5 의식 Rituals
세례와 성찬식은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 받아들여지는 두 개의 보편적인 의식들이다. 세례는 시작하는 의식이고, 성찬식은 계속되는 교제와 형제들 사이의 선한 함께함(동거)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이 용어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별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만일 공동체가 정결케 하는 의식에 대해 그들의 상황에 맞는 용어(alghusl al-‘adhiim 처럼)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만일 그들이 우리가 영어로 하듯이 세례를 음역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적응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의식들은 그들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습을 굳이 새로운 공동체에게 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두 사람이 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면 형제들이 세례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제들이 아직 순례 중에 있으며, 믿음 안에서 성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의식이며, 사도행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었고, 내가 알기로는 폐기된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이 두 가지 의식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도록 그들과 함께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잘 훈계하고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개척 팀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즉, 형제들이 첫 발을 내디딜 때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 함께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식은 우리가 함께 나누는 신앙에서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세례와 성찬식이 없는 공동체를 목표로 하는 교회 개척 팀에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에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새로운 공동체들도 있을 것이다. 즉, 세례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정기적으로 성만찬을 하는 소위 “성숙한” 공동체들 중에는 지옥의 자녀들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미성숙한 사람들 때문에 혹은 스스로의 심판을 위해 먹고 마시는 사람들 때문에 주님이 하라고 하신 두 의식을 오해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공동체가 나아가는 방향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5 무함마드와 꾸란
첫째로, 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라거나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로,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무함마드를 높이 보고 있고, 그가 그의 백성들이 하나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러한 면에서 보여준 노력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이고,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만난 세 명의 교회 개척자들에 대해서 심각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는 것(그를 깎아 내리는 것)과, 꾸란을 불신하는 태도가 효과적인 증거에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내가 만난 다른 교회 개척자들에 대해서도 나는 동일하게 심각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다.

이러한 나의 분명한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고,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며, 삶이 변화 받았지만, 여전히 무함마드를 높게 보는 무슬림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갖는 문제의식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몇 명의 그런 젊은이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참으로 신선한 것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슬람 배경을 가진 한 믿는 젊은 형제에게 (믿은 지가 3년 된) 무함마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무함마드가 예수님을 가리킨 예언자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본다고 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예수님이 신이시고 구원자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답했다. 꾸란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22] 성경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느냐고 했더니, 그는 두 경전이 서로 차이가 없다고 했다. “다른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만든 전통이기 때문에, 그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꾸란을 재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23] 그에게 꾸란을 정기적으로 읽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꾸란을 읽지, 대부분의 시간은 성경을 읽는데 사용한다고 대답했다.

이 형제가 한 간증 중에서 또 하나 격려가 되는 부분은 그들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열려 있는 가를 보는 것이다. 위의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 형제는 사실 설명을 시작하면서 “내가 지금 현재 처해 있는 위치에서 볼 때 나는 무함마드가…. 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매우 건강한 것이다. 그는 무함마드의 역할에 대해 씨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무함마드의 가르침(그리스도 없는 법)을 따라 살 때 보다 분명히 더 잘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 그래야 하듯이 말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그가 무함마드를 예언자라고 말하고, 꾸란을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은 것은 교회 개척 팀에게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만일 그가 무함마드를 증오하고 그를 멸시하는 태도를 갖도록 만들었다면 그가 가족들에게 효과적인 증거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역시 교회 개척 팀에게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24]

6 정체성
상황화된 사역에 관해 근래에 논의되고 있는 것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슬림의 정체성이 그 문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숙하게 될 때 자아와 공동체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방향을 잡아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에 대한 논의는 내가 알기로는 선교신학 문서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에 따라 결정된다. 즉, 이슬람이 종교일 뿐인지[25] 아니면 사회, 문화, 문명인지 하는 문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만일 이슬람이 종교일 뿐이라면, 우리는 그 자리를 밀어내도록 해야 한다. 만일 종교가 이슬람 문명의 한 요소일 뿐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구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26]


수 년간 문서들을 연구해보고, 무슬림들과 관계를 하면서 (종교 지도자들과도 만나보고, 일반인들도 보고), 나는 이슬람이 종교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7] 이슬람은 사회이고, 문화고, 그 자체가 문명일 수 있다.[28] 나의 생각이 맞는다면, 우리가 너무 심하게 사람들을 그들의 유산에서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그 사회 내에 임하도록 그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예로 사용하곤 한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나는 문화적으로 미국인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미국인이다. 미국에서는 낙태가 합법이고, 옷을 별로 단정하게 입지 않아도 되고, 간통이 받아들여진다. 나는 그러면 어떠해야 할까? 신학적으로 나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나는 미국 문화가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나의 이런 자세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나의 증거를 약하게 할 것이다. 나는 단지 참여하지 않는 것뿐이다. 미국 정부와 사회가 허용하는 것들 그리고 심지어 격려하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와 상반된다면 그것은 나의 영역 밖이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나쁜 미국인으로 만들까? 누군가는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나를 더 좋은 미국인으로 만든다고 반박하고 싶다. 따라서 나는 미국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며,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 더 큰 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더 나은 미국 시민으로 만든다고 설명할 것이다. 내가 미국인의 삶의 어떤 부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부끄럽지 않으며, 여전히 나 자신은 미국인으로 남아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정체성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정체성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듣는 것에 매우 열려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네가 가는 길이 내가 가는 길과 같은 곳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포스트 모던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아마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러한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의 또 다른 한 면은 노동자(redneck[29])로서의 정체성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바깥 일을 좋아하고, 블루 칼라들이 하는 일을 힘들어 하며, 대형 트럭과 싼 음료를 즐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취하도록 맥주를 마시지 않으며, 인종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노동자들은 내가 한 물 갔다고 말할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웃기지 말라고 해! 누군가가 나의 노동자로서의 유산을 가져가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분명한 모욕으로 간주할 것이다. 나는 거의 확실한 노동자이지만, 구속 받은 사람이다. 이 그룹(구속 받은 사람의 그룹)에 속하기 위한 열쇠는 하나님 나라에 위배되는 공동체 내의 현존하는 어떤 철학이나, 태도, 행동에도 하나님 나라가 우선하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정체성이 모든 다른 것에 우선하는 것이다. 이는 이슬람 문명에도 적용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만들어낸 어떤 종교 이상이다. 움마(공동체)는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정치, 가족, 부족과 사업까지 모두 포함한다. 이슬람에 등을 돌리는 것은 종교적인 면 이외의 영역에 있어서도 공동체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에서 종교적인 부분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떠난” 사람이 사실상 움마의 다른 면에도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30] 이슬람 세계에서 내가 만난 몇몇 교회 개척 자들은 이슬람 내의 교회 개척 운동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를 거절하는 공동체에 대해서 말해 주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형제 자매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떠나지만, 그들의 유산은 굳게 잡아야 한다는 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무슬림 (복종하는 자)으로 여기며,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무슬림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운동 중에 하나가 다르 알-이슬람[31]의 심장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형제들은 신앙을 위해서 심한 박해를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보다 더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무슬림)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 다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도 동시에 이슬람과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와 같아, 내가 미국인이고, 포스트 모던 시대에 살고, 노동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처럼, 사실상 질문은 어느 정체성이 가장 우선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 공동체가 (성경의) 예수님의 왕 되심과 그분의 가르침보다 꾸란에 더 복종한다면 이것은 건강하지 못하고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공동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적응주의자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32] 대부분은 예수님을 왕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그 분의 백성으로 보고 있고, 이것이 그들을 대표하는 가장 우선하는 정체성으로 여기고 있다.

7 적용
본 글을 통해 적용주의자와 거부주의자 모두에 대해 동일하게 깊은 숙고를 하게 되었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목적은 내가 어느 한 교회 개척 팀과 함께 일할 것을 고려해 볼 때 그 팀이 건강한 교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건강하지 못한 혼합주의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내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하는 것을 나누는 것이다. 다르 알 이슬람에서 섬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팀과 얼마나 많이 상호작용 하는가의 문제와는 상관 없이, 우리는 교회 개척을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방법론이 좀 바뀔 필요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슬람권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계속해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방법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다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좀 다른 말이지만, 나는 어렵지만 매혹적인 무슬림 사역 세계로 첫 발을 디딘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광대한 양의 문서와 의견들 사이를 지나면서 기도 가운데 결정하고 어떤 사역 철학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이끄시는지를 따라 나갈 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는 거부주의자들과 적응주의자들에게 하는 다소 직접적인 제안들과 질문들로 글을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째로 거부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 공동체가 (적응주의자든, 거부주의자든)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보다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실제 신앙(복음의 내용과 교리)과 실천 (행위와 의식)이 향하고 있는 목표를 바탕으로 평가를 내려야 한다. 또한 다소 불분명한 용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고 평가를 내려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슬람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거부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대개 종교로만 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33] 종교는 단지 이슬람의 한 면을 뿐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적응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공동체를 위해 거부주의자들이 개발해 놓은 몇 가지 형태의 기준에서 보이는 교리적 의식적 관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고, 우리가 그들(예수님을 따르는 무슬림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만큼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슬림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 중에 하나가 기독교 역사와 용어에 대한 이해와 학습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방법이 그들의 방법보다 낫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이슬람을 문명으로 보고 그것을 구속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문명에 대한 불만족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그분 자신에게 모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양편 모두가, 나 자신을 포함해서, 겸손과, 인내, 그리고 하나됨이라는 건강에 좋은 쓴 약을 삼킬 필요가 있다. 나는 양 편에서 논의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서로에게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맺은 열매들에게도 이러한 우리의 자세를 물려주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슬람을 떠난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이슬람에 남은 사람들은 자라가면서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과연 어떤 본을 보이고 있는가?

[1] 가명. Timothy는 여러 곳에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개척에 관여하고 있다. 그의 주요 사역은 아랍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다. herald.tim@gmail.com를 통해 그와 직접 교류할 수 있다.
[2] 이 두 용어는 본 글에서 계속 등장하게 될 것이다. 거부주의자들은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적응주의자들은 이슬람을 하나의 문화, 혹은 문명으로 보면서 어느 정도의 (그 정도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차이가 있지만) 가능성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는 Duane Alexander Miller가 St. Francis Magazine 5:3 (June 2009) 에 발표한 ‘재고: 이슬람적 기독교에 대한 한 적응주의자의 해석 Reappropriation: An Accommodationist Hermeneutic of Islamic Christianity’이라는 글에서 초보적인 형태로 등장했는데, 그는 출판되지 않은 글 ‘이슬람적 기독교에 대한 두 경향의 가설: 적응주의자와 거부주의자 The Two Stream Hypothesis in Islamic Christianity: Accommodationists and Rejectionists’라는 글에서 이를 ‘두 경향의 가설’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나의 의견에는 그가 사용한 이 두 용어가 선교신학적으로 종종 사용되는 그리고 때로 오용되기도 하는 모호한 용어들 (즉, C5나, 빼어냄, 내부, 상황적인 등)보다 훨씬 명확한 것 같다.
[3] “교회란 무엇인가?” 혹은 “교회개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교회이고 무엇이 교회가 아닌가에 대한 내 의견이 본문에서 부분적으로 종종 등장하기는 하겠지만 논지에 필요한 단순한 정의 정도에 만족해야 할 뿐, 불행히도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전체적인 의견은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 정의를 정리해보자면, 교회란 스스로를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을 따르는데 헌신한 공동체로 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4] “무함마드는 누구인가?”와 “꾸란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그가 받은 계시(꾸란)가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꾸란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은, 그의 사도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대신하여 말한 사람 (예언자)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5] Travis, John, ‘The C1 to C6 Spectrum’ in Evangelical Mission Quarterly 34:4 (October 1998) 과 Travis, John, ‘Messianic Muslim Follower of Isa: A Closer Look at C5 Believers and Congregation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17:1 (Spring 2000)을 보라.
[6] 거부주의자의 경계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지만, 적어도 빼내기의 사역 철학을 피하는 것에는 나도 동일하게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는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저자는 빼내기의 사역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 – 번역자.)
[7] Abdul Asad, ‘Rethinking the Insider Movement Debate: Global Historical Insights’ in St. Francis Magazine 5:4 (August 2009)을 보라.
[8] Abdul Asad는 사실 C4와 C5의 신학과 실천에 있어서 그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말할 때 C단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라비스에 의하면 그 두 단계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정체성에 대한 것 뿐이다. 그들은 이상한 그리스도인 혹은 이상한 무슬림들인가? 이것이 내가 C단계(위의 각주 5를 보라)에 대해 읽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이었고 2008년에 트라비스와 대화하고 나서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용어 사용이 상황화 논의에 있어서 주요 이슈들 중 하나이다. 일관성 없이 어디에나 사용되는 용어에 대해서 우리는 용어에 대한 일단의 오해를 없애고 우리가 개척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9] 또한 개인이 속한 기구의 정책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에 나는 한 미국인 형제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선교학에 대한 학위 두 개를 가지고 있었고 절대적으로 “C5 형태가 아닌” 기구를 섬기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특별한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그것이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C단계 중 어디에 해당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 C4” 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운동을 2008년에 존 트라비스에게 설명했을 때 그는 그것이 “성경적인 C5 운동의 아주 좋은 예”라고 말했다.
[10]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1] 이는 교회 개척 팀이 거부주의자의 사역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은 일단의 지역 지도자들을 소개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부주의자의 사역 철학을 가지고 있는 교회 개척 팀이 기른 지도자들이었다. 그 팀은 아랍어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하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언어)가 아니라 교회 개척 팀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아랍어로 질문을 하자 대부분의 지역 형제 자매들은 복음의 내용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매우 적응주의자적인 방법을 계발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외국이 교회 개척 팀이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지역 공동체에게는 C4로 보이지만, 교회 개척 팀에게는 스스로를 C3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12] 사도신경의 고백은 “구원 받기” 위해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가 고백하도록 해야 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13] 어떻게 그리고 왜 산상수훈이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에게 이해가능하고 도전이 되는가를 자세히 다루는 것은 본 연구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산상수훈을 무슬림과 함께 읽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그 내용이 문화적으로 그들과 가깝고, 이슬람 사회에 혁명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14] 이것을 동방 정교회(서구 복음주의보다 지형적, 문화적, 의식적으로 이슬람과 훨씬 가까운)와 비교해 보라. 동방정교회는 교리보다 의식을 더 강조한다. 동방 정교회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에 대해서는 Timothy Ware, The Orthodox Church (London: Penguin, 1997)을 보라.
[15] 서구 복음주의 전통에서 이 문제로 교제가 깨어진다는 사실이 좋은 증거가 된다. 우리는 행위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공동체, 교파 등을 형성한다.
[16] 이슬람 세계에 맞게 상황화된 형태의 니케아 기독교에 대해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Abu Daoud, ‘Mission and Sacrament Part III: A Paleo-Orthodox Approach to Contextualization in the Muslim World’, St. Francis Magazine 5:2 (April 2009)를 보라.
[17] 사도 바울은 때로는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처럼 온유했고, 때로는 상당히 담대하게 질책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바울의 본을 잘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의 새로운 형제들과 동행할 때, 강하게 질책해야 하는지 부드럽게 격려해야 하는지를 잘 결정해야 할 것이다.
[18] 또한 단순히 니케아에 나오는 특별한 질문들뿐만 아니라, 그 답에 사용되는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 혹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유일하신 분” 이라는 표현은 4세기에 라틴이나 그리스에서는 매우 상이한 차이를 가졌겠지만, 21세기에 아랍어나 우르두어, 혹은 만다린에서는 그렇게 상이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다. 공동체 내에 이런 인식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성숙한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19] 살후 2: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20]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 Eastern Orthodoxy, 네스토리안주의, 동양 정교회 Oriental Orthodoxy, 서구 개혁주의,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심지어 Branch Davidians도 성경과 일치한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어떤 이들은 꽤 다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21] 더 나아가, 서구 복음주의에서 등장하고 있는 어떤 개인주의적인 선교신학 이론들과는 상반되게 신약 모델은 서로 의존적이다. 보편적인 교회내에 있는 지역 공동체는 그들의 배경에 상관없이 서로 배우고 서로 서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22] 나의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대답은 좀 예외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적응주의자 형제들은 꾸란이 중요하고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성경과 일치하는 부분에 한해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꾸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23]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가 한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구약은 꾸란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꾸란을 사용하는 방법이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과, 정경이 아닌 유대 문서들, 이방의 시들과 심지어는 이방의 “예언자들”까지도 다루면서 사용했던 방법과 전혀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복음주의 안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이지만, 그 방법론이 유사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신약이 영감을 받은 구약의 저자들과, 영감 받지 않은 이방인 저자들의 것들을 사용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우리 형제들이 꾸란의 문서와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 이의도 없는 것 뿐이다. 적응주의자들이 이슬람 문서를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Duane Alexander Miller가 St.Francis Magazine 5:3 (June 2009)에서 발표한 ‘Reappropriation: An Accommodationist Hermeneutic of Islamic Christianity’를 추천하고 싶다. 우리의 형제들이 사용한 방법들을 영역화하는 것에 더하여, 밀러는 또한 이러한 형태의 이슬람 문서의 사용을, 그리스도에 충성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람을 더 나은 로마 시민으로 만들었던 초기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변증에 비교한다. 그가 한 방법론의 영역화나 비교 모두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24] 이슬람의 배경을 가진 새로 믿게 된 형제들이 공통으로 갖는 감정은 그들의 공동체와 특히 무함마드를 배신했다는 느낌이다. 만일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대신에 서구의 관점으로만 무함마드를 보는 잘못된 정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동을 받게 된다면, 이 새로운 신자는 공개적으로 무함마드를 깎아 내리는 위험을 감수하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보다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적인 폭발(이것은 죄이다)로 인해 증거의 기회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25] 종교라는 말은 참으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이다. 본 논문이 주로 서구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나는 매우 서구적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즉, 신 (혹은 신들)에 관한 일단의 신앙들이라는 의미로 종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26] 각주 2를 보라.
[27] 그가 이슬람 문명을 “다루는” 방식이 나와 다르기는 하지만, 유명한 세속 정치 과학자인 사무엘 헌팅턴 역시 그의 책 ‘문명의 충돌과 세계 질서의 재편’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New York, New York: Touchstone, 1996)에서 이슬람을 나와 마찬가지로 문명으로 보고 있다.
[28]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나는 선교신학자들이 조만 간에 이 주제를 다루기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29] 이는 미국의 시골 지역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햇볕에 목이 타서 붉게 된 것을 말한다. 이들은 미국의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고 (남부가 북부보다 더 태양이 강하고 더 덥다), 보통 컨트리 뮤직이나, 트럭, 상스러운 말, 담배, 술 취함, 문맹, 인종주의 같은 시골의 유산이나 활동과 관계된 외부인(outsider)을 일컫는다.
[30] 움마의 다른 면들을 분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과 함께 우리는 이슬람의 뿌리가 기독교와 유대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섯 기둥은 (무함마드가 사용한 예배의식을 포함하여) 각각 유대교에 혹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J. Dudley Woodberry ‘Contextualization Among Muslims Reusing Common Pillar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13:4 (Oct-Dec 1996)을 보라. 이것이 이교의 영향 및 종족의 영향과 합쳐져서 무함마드는 전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닌 심하게 혼합화된 형태의 기독교인 이슬람을 이끌게 된 것으로 보인다.
[31] 보안상의 문제로 정확한 위치는 밝히지 않는다.
[32] 적어도 내가 아는 공동체들 중에서는 그렇다.
[33] 이것이 바로 우리 가족이 무슬림 사역에 들어섰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관점이다. 삶의 모든 면이 녹아있는 사회 집단에서 그들 가운데 살고 그들로부터 배운 후에야 나의 관점이 변하게 되었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영적 세계의 능력대결: 이슬람과 기독교에서의 초자연 세계

글쓴이: 비비안 스테이시
원제: POWER ENCOUNTER WITH THE SPIRIT WORLD: THE SUPERNATURAL IN ISLAM AND CHRISTIANITY
원문보기: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owerencounter.pdf
1. 서론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T.C.Hammond는 그의 책 In Understandingbe Men (IVP, 1979 p. 66)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 자연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성경은 그분의 일반적인 섭리와 기적적인 활동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

1993년 7월 17일에 케스윅에서 ‘오는 것과 가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던 집회에서 도널드 잉글리쉬 박사는 마가복음 3:13-19를 나누었다. 귀신을 내어쫓는 권위를 위임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한 후 그는 ‘우리는 신약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정한 것들에 표적과 기사를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통해 일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의 말은 청중으로부터 “그게 무슨 말이야?” 하는 반응을 불러왔다.

1.1 이슬람의 가장 큰 기적
이슬람에서 가장 큰 기적은 꾸란이다. 초기 순니 법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본질이시고 일곱 개의 신적 특성을 가지고 계시다. 그 특성 중에 하나가 말하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해야만 한다. 꾸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꾸란은 그분의 본질과 동일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분과 분리될 수도 없다. 꾸란의 원형은 하늘에 있고, ‘보존된 판’에 아랍어로 쓰여져 있다 (수라85:22). 이것이 꾸란의 ‘모체’이다 (수라13:39).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그것을 한 부분씩 계시하였고, 무함마드는 그것을 기록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기록하게 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영원한 책으로 사람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하셨다. 이 계시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가르치시는 것을 알고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 (수라51:56과 11:7).

1.2 기독교의 가장 큰 기적
기독교에서 가장 큰 기적은 성육신하신, 살아계신 말씀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사람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사람에게 계시하셨는데, 그 분이 바로 살아계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시다 (요1:14). 이 계시의 목적은 예수님이 세상과 믿는 자들에게 계시되어야 하고 (갈1:16),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4:6).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R.V.G. Tasker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바울에게 개종은 기적적인 새로운 탄생이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능력이 반복되어 발휘되는 일이었다. 죄인인 인간의 마음에 있는 어두움을 꿰뚫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빛이 있으라” (창1:3)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깊은 곳에서 원초적으로 마음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어두움이 흩어지는 것 뿐이라고 할 수 있다.’

1.3 계시된 종교와 민속 종교
어느 시점에서인가 계시된 종교들은,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민속 종교를 생산해 낸다. 놋뱀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예언자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것으로 유대 경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민수기 21:4-9).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놋뱀을 그냥 버리고 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유대인들은 아마 광야에서 뱀으로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에게 여행 내내 그 놋뱀을 보관했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로 아마도 그들은 그것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경배의 대상이 되어 그것에게 향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히스기야 왕의 개혁 동안 그 놋뱀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 즉 쓰레기로 간주되어 처리되었다 (왕하 18:4). 구약의 기록 후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기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레미야는 동시대에 살고 있던 칠 세기의 주민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존재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자동보험장치처럼 여겨지는 것을 꾸짖었다. 그들은 성전이 적으로부터 그 도시를 보호해주는 안전장치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영적인 타락은 그들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을 이끌게 되어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적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고 계셨다 (렘7:1-8).
신약에서 의사인 누가는 민속 종교와 관련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 치유를 경험한 여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눅8:43-48). 예수님은 능력이 자신으로부터 나간 것을 아셨다. 후에 그 여인이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바로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라고 밝혔을 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민속 종교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셨다. 그것이 기적적이기는 하지만 마술적인 치유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신중한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어떻게 그들의 병자를 침상 채로 거리에 눕혀놓아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라도 병자들에게 드리워지기를 바랬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행5:14-16). 그 배후에는 미신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역시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온 모든 사람들이 치유되었다는 기록을 읽게 된다. 비슷한 일들이 바울이 가르치고 설교할 때도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19:10-1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베개 밑에 성경을 놓거나, 목에 십자가를 걸어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도 한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비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이나 십자가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성경이나 십자가에 기계적이거나 마술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그것은 사용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다. 민속 기독교는 필리핀과 남아메리카에서 흔하게 나타나지만, 모든 대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에서 하는 일들 중에는 그들의 경전이 의도하는 것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다른 점에서 각각 다양한 정도로 계시된 것에서 벗어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마술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경전의 숭배나 경전을 마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경전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만든다. 주문이나 성자에 대한 지나친 경의는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서 하나님의 의지하는데 방해가 된다. 문맹이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베나지르 부토는 그의 자서전 ‘동방의 딸’에서 1969년 카라치를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45쪽): 나는 조각된 나무로 된 출입구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나의 머리 위로 나의 새 성 꾸란을 지나가게 하고 있었다. 나는 꾸란에 입맞추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함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처형당하기 전에 그는 딸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142쪽): Lal Shahbaz Qalander에 가서 기도해라. 지난 축일 이후에 그곳에 가지 못했구나. 그는 가장 유명한 성자 중 한 분이시다. 나의 할머니도 나의 아버지가 아기적 몹시 아파서 거의 죽게 되셨을 때 그 사당에 가서 기도하셨단다. 하나님께서 같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빌 머스크는 그의 책 ‘이슬람의 숨겨진 얼굴’에서 일반 무슬림들이 행하는 민속적인 행위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민속 종교의 관습들이 갖는 미신적인 부분이 많은 무슬림들의 주의를 끈다.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중심으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2. 이슬람에서 내가 관찰한 미신들에 대한 간단한 서술
2.1 사당에서 일어나는 기적들
나는 부르스 니콜라스 박사와 한 그룹의 학생들을 데리고 인도의 Pune 근처 마을인 Shivapur에 있는 수피 까마르 알리 다르베쉬의 사당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우리는 돌들이 공중에 뜨는 현상을 지켜 보았다. 두 개의 커다란 둥근 돌이 서로 가깝게 놓여있었다. 우리는 약 70킬로그램쯤 되는 그 큰 돌이 성자의 능력으로 2미터 가까이나 되게 공중에 뜨는 것을 보았다. 열 한 명의 남자들이 오직 집게 손가락만을 사용하여 하나가 되어 그 성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둥근 돌을 몇 분 동안 공중에 떠 있게 하였다. 무슬림들과, 힌두교인들, 그리스도인들이 수 백 명씩 매일 그 사당에 왔는데, 그 이유는 이 기적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근처에 있는 샘의 물을 가져다가 치료에 사용하거나 그 성자에게 기도해서 치유를 받기 위해서였다.

내가 보기에 그런 기적들과 치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존 와이트가 쓴 책에서 일부를 옮기고 싶다 (John White, Greater than Riches, IVP 1992, p. 55): ‘사단의 능력은 타락한 신의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심하게 오염된 물도 여전히 물이고 또 물처럼 보일 것이다. 또한 깨끗한 물과 같은 맛을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단이 일으키는 기적이 “심지어 택함 받은 자”까지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지옥의 권세는 점차로 얽매어 오고, 결국에는 죽음과 파멸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구속하고,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깨끗하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회복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고후 11:14)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인 것 혹은 그렇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2.2 귀신축출 Exorcism
오만의 수도인 Muscat에서 나는 무슬림 귀신 축출사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저녁에 몇 시간씩 그 일을 하고, 악한 영을 쫓아내는 일을 하였다. 그 귀신 축출사가 하는 주문과, 그 일을 당하는 사람의 날카로운 말소리를 듣는 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보다는 하나님을 조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님을 조정하기는 것보다도 사단과 악한 영, 혹은 진 jinn 을 받아들이기를 택하기도 한다. 꾸란은 하나님이 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한다: ‘나는 진과 인류를 창조하여 그들이 나를 경배하도록 하였다’. (수라 51:56) 선한 영향을 미치는 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진들은 악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존경 받는 파키스탄의 신학자 Kausar Niazi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들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서 인간을 소유하고 조정하여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한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위에 대한 논쟁과는 별도로 경험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수 많은 신학 박사들의 저술들이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진이 인간의 몸에서 도망가도록 만들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요즘에도 한 경건한 학자가 필자에게 와서 그의 아내가 수년 동안 고통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어떤 의학적인 치료도 그녀를 치료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신비로운 학문에 능통한 한 사람을 만나 그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진의 장난으로 그녀가 고통 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후부터는 그녀가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남편이 꾸란을 읽어주었다. 점차로 그녀가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그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경련이 일어나는 동안 진이 그 경건한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다. 그는 Qasida Burda를 암송하고 있었기에 쉬지 않고 그것을 외울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Qasida 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한 번은 그가 진에게 그의 존재를 증명해 보라고 요구했다. 갑자기 신선하고 향기로운 카르다멈 식물 가지가 그의 무릎에 떨어졌다. (Creation of Man, pp.48-49)

2.3 부적이나 주문들 Amulets or charms
꾸란 구절들을 담고 있는 부적을 목에 걸고 다니면 악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보호해 준다.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무슬림들은 세상 사람들이 행운의 물건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부적들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위에서 말한 Qasida Burda에 있는 구절들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부적으로 사용된다. 유명한 시 평론가인 Al-Bajuri는 105-115의 구절들에 대해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친구와 다투고 나서 이 구절을 사자의 가죽에 적어서 터번 안에 넣고 그 친구에게 아무 말 없이 다가간다면 그 친구가 친근하게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라고 했다. (Ritchie p.18을 보라)
하나님의 99가지 이름들 역시 종종 마술적인 주문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Al-Halim이라는 이름 (관대하신 분이라는 뜻)에 대해서는 만일 농부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 그가 뿌려둔 씨와 함께 놓는다면 그 농부의 작물은 어떤 병이나 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악한 눈에 대한 두려움과 사단의 영향을 미리 예방하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민속 종교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Murray T. Titus는 그의 책 ‘인도와 파키스탄의 이슬람’ (Islam in India and Pakistan, 1959에 개정 재판됨) 에서 성자 숭배에 대해 말하면서, 성자가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성자들의 무덤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소송한 사람이 재판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찾아오기도 하고, 말을 잃어버린 농부도 오고, 아이를 갖고 싶은 여인도 찾아 오고, 아들이 병에 걸린 아버지가 치유를 받기 위해 찾기도 하고, 사업에 성공하고 싶은 사업가도 찾아오고, 운 좋은 날이 되게 해 달라고 사냥꾼도 찾아오고, 심지어 도박꾼도 찾아온다.’ (138쪽)

1989년에 출판된 빌 머스크 박사의 책 ‘이슬람의 숨겨진 얼굴’ The Unseen Face of Islam 에 의하면 그 때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Fatima Mernissi가 모로코에서 지낸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쓴 자서전적인 책 ‘하렘의 내부’ The Harem Within는 그녀와 그녀의 남자 형제 사미르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학살당했을 때 그 피에 젖은 시체들이 집으로 운반되는 것을 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너를 금요일마다 계속 Moulay Driss 신전에 데리고 가서 거룩한 사람들에게 너를 보고해주는 의식을 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일년 내내 네가 다시 잘 자게 될 때까지 네 베개 아래에다 꾸란 부적을 놓아두어야겠다.” (24쪽)

2.4 유품들
파키스탄 라호르에 있는 Badshahi 모스크에서 나는 순니와 쉬아 모두가 관심을 갖는 27개의 유품들이 전시된 곳을 방문해 보았다. 유리 칸막이 뒤로 무함마드가 집었던 지팡이와, 그가 신었던 세 개의 샌들, 속옷, 마법의 바둑판 무늬가 그려진 군기, 파티마의 손수건과 기도 매트, 카르발라 전장에서 가져 온 흙. 그 유품들을 보는 사람들 중에는 가능한 유품에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쓰면서 유품들로부터 축복이 그들에게 옮겨오도록 하기 위해 유리에 손과 얼굴을 비벼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특히 쉬아 사람들은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순교한 곳인 카르발라에서 온 흙을 보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Kausar Niazi는 그의 책 ‘우리의 인도자 이슬람’ Islam our Guide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p. 185):
부카리의 전통에 의하면 우쓰만이 말하기를 믿는 자들의 어머니인 움 살라마가 성스러운 예언자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은으로 된 관에 가지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 악한 눈의 희생물이 되거나, 어떤 다른 병으로 고생할 때면 그녀에게 갔다. 그녀는 그 머리카락을 물에 넣고 아픈 사람에게 그 물을 마시게 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의 병이 낳았다.


2.5 위해를 가하는 마술 Harmful magic
파키스탄에 있는 한 푼자비 마을에서 나와 나의 두 동료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마술사들의 강한 힘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일을 나의 책 ‘사단을 이기시는 그리스도’ Christ Supreme over Satan 에 기록한 바 있다. 다른 마을에서 사역이 있을 때 우리는 하루의 사역을 마치고 저녁마다 방 한 칸짜리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 집은 빌린 것으로 열흘 동안 우리의 거처가 될 곳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해 저녁 예배를 드렸는데 한 이십 명쯤 되는 사람들이 정원에 와서 앉았다. 정원 밖에서는 어둠에 묻혀 있는 마을 광장에서 이백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조용히 자발적으로 숨어서 모임에 동참하곤 했다. 이것이 아마도 그 악한 마술사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질병과, 악몽, 어둠 속에 보이는 형체들, 침대 머리맡의 전갈, 이상한 노크소리, 그리고 이상한 모양의 핏자국 등이 발생했다. 하나님은 곧 질병을 낫게 하시고, 우리 세 명 중 한 명은 항상 망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빛의 벽이 건물을 둘러싸는 것을 보았다. 후에 우리는 그 집이 사단을 숭배하는 의식을 행하던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 가족이 회개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서게 되도록 도전하고 기도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스가랴 2:5) 그 후 몇 달 동안 그 가족들과 관련된 친척들을 합해 여러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경험했다.

2.6 귀신이 나오는 집 Demon infested buildings
나는 무슬림들이 악한 영들이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여러 집들에서 살아 보았다. 우리가 살아본 경험으로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어떤 때는 선교사들이 몇 년 전에 그런 집들을 싸게 사기도 했는데, 그 집들은 악한 영들이 살고 있어서 사람들이 살기 두려워하는 집들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런 집들 중 몇 개는 다른 나라에 있었다. 이 초기 선교사들 중에 몇 명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능력과 그의 피의 능력으로 그 집들을 정켤케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는 했지만 먼저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2.7 꾸란과 하디스의 민속적 관습에 대한 태도 Note on the attitudes of the Qur’an and Hadith to folk practices.
꾸란은 마법이 죄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Surah 113:4). 그러나 신명기 18:10-12 (10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에 나오는 것과 같이 마술적인 영역에 대해 무엇이 죄인지를 분명하게 해 놓지 않았다. 꾸란은 심지어 이슬람 이전 시대에 만연했던 정령숭배의 몇 가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수라 56:75는 점성술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56:75 실로 지는 별들을 두고 맹세하나니 너희가 알고만 있다면 실로 이것은 하나의 위대한 맹세로), 사실 해와 달에 대한 숭배는 꾸란에서 금지되어 있다. (수라 41:37 하나님의 예증 가운데 밤과 낮이 있고 태양과 달이 있노라 그러므로 태양과 달을 숭배하지 말라. 진실로 너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그것들을 창조한 그분만을 경배하라.)

무슬림 세계에서 사십 년이 넘도록 사고, 일하고, 여행하면서 나는 꾸란을 바탕으로 하는 이슬람이나 민속 이슬람이 서로 뒤엉켜서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꾸란이 정령숭배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고, 하디스는 심지어 많은 민속 행위들을 승인해주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민속 이슬람에는 사단이 활동하는 증거가 보이는데, 이는 정령숭배를 밑바탕으로 하는 모든 민속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스크와 사당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결박이 끊어지고 갇힌 자들이 풀려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무슬림 사역을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 전쟁의 특별한 영역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3. 이슬람의 미신행위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과 능력대결

3.1 영적 전쟁
먼저, 영적 전쟁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보도록 하자. 영적 전쟁은 사단에 대항하는 것이고, 사단은 그에 상응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기적을 행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분명하게 과시한다. 그러나 사단이 사용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그의 전술의 일부에 불과하다. 신약은 사단이 사용하는 초자연적인 능력보다도 사단이 인간의 연약한 부분을 공격한다는 것을 더 강조한다 (갈5:19-21).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사단과의 영적 전쟁은 악한 초자연적인 현상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에서 일어나는 부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행위들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3.2 치유와 기도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다. 무슬림들은 아플 때 종종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기도해주는 것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족 단위로 수 백 명의 무슬림들과 함께 기도를 해 보았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미리 말하고 허락을 구한 후 기도한다. 보통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분의 사랑에 감사 드리고, 그 환자의 이름을 부르며 위해서 기도하는데 이사야 53:5와 같은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만일 그 환자가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예수님의 명예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며, 만일 그 사람의 병이 나면 그 사람은 보통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때로 병이 사단에게서 온 경우가 있는데, 베드로의 장모의 경우가 그랬다. 예수님은 열을 꾸짖으셨고, 그녀는 곧 병이 나았다 (눅 4:38-39).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단에게서 온 병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할 권세를 주셨다. 병에 사단적인 요소가 있다면 기도로 가장 쉽게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기도를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한다. 병의 원인은 복잡한 경우가 많다. 때때로 병의 치유는 기도와 치료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경우 역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를 보여 주셨다 (막8:23-25). 치유는 병자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막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3.3 축사
축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단이다. 축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축사를 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두 명이나 세 명이 함께 팀으로 일하는 것이 좋다. “엠마오로 가는 길의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 Muslims and Christians on the Emmaus Road 에 내가 쓴 글 (17장 축사와 치유 The practice of exorcism and healing)에서 좀 더 자세하게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그 글을 쓰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한 작은 기독교 병원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 병원의 이집트인 의료 책임자가 기독교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나를 며칠간 초대하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악한 영에 사로잡힌 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여성과 관련하고 있는 작은 팀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 팀은 그 여인의 남편인 헌신된 그리스도인과, 정신과 의사, 그리고 그 의료관리자로 이루어져있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 교회에서 그 여인을 만났다. 나는 통역자를 통해 그녀를 인터뷰하여 내가 스스로 진단해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곧 그녀가 아직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녀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보게 되도록 도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나는 그 통역자에게 내가 그녀를 위해 기도할 것인데 영어로 할 것이기 때문에 통역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영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 십 분 동안 큰 소리로 기도했지만, 내가 기도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사야의 말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는 부분을 인용하자 잠잠하던 그 여인이 자제심을 잃고 발광하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과 그 의사는 그녀를 신도들이 앉는 걸상에서 단상으로 데리고 갔는데 세 사람이 그녀를 붙들어야 했다. 나는 그들이 내린 진단이 맞았으며 그녀가 사단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확신했다. 여러 사단이 그녀를 붙들고 있었는데 사단들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말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그리고 언제 사단들이 그녀에게 들어갔는지를 알아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사당에 간 적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언젠가 특별한 영적인 목적으로 그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사당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녀의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세 시간씩 그녀와 악한 권세와 씨름했다. 그녀는 내가 머무는 동안 악한 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얼마 후에 구원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4 건물을 정결케 함
무슬림들은 때로 건물 임대를 거절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곳에 악한 영이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들은 주로 건물의 특정 부분에 거주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건물을 정켤케 하는 것은 무슬림들에게 확신을 주는 증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때로 건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곳에 들어가 살기 전에 정결하게 하는 과정을 하지 않아서 사역에 피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건물이 지어진 곳에서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건물을 짓는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악한 영들을 달랬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건물의 기초를 놓기 전에 동물 제사를 지냈을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마술이나 신비적인 행위들을 한 경우도 있다. 나는 점치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살았던 집을 정결케 하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곳에 이상한 표시가 되어 있고, 어떤 영역에 가면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살고 난 후에 살았던 한 그리스도인은 그 집의 내력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정결하게 하는 예배를 드리자 그 집이 얼마나 평화와 주님의 임재로 가득 찼는지를 보게 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때로 한 장소가 주변 환경이나 그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조용히 진행되는 정결하게 하는 예배는 내어 쫓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최근에, 내 친구 하나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의논했던 이전예배를 이틀 전에 드렸어. 알랜과 우리의 렉터가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초대되어 가셨던 집들을 기억했지.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집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길에 있는 모든 집들에 대해 생각했지. 열 네 명이 모였었는데, 딱 맞게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정도의 숫자였지. 우리 이웃들이 많이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 후에 많은 집들이 마음을 열어주었어.’

여기에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장소를 정결케 하는 교회 기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님,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단을 속히 멸하소서. 이 장소(방, 집, 교회)를 모든 악한 영, 모든 헛된 상상과, 투영들과, 악한 속임으로부터 구원하사,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지정된 곳으로 쫓겨가게 하사, 그곳에 영원히 머물게 하소서. 하나님, 평화를 주러 오신 성육하신 하나님이시여 평화를 주소서. 아멘.

3.5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과 꿈들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을 보거나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Seppo Syrianen은 파키스탄에서 짧게 조사를 하였는데 성경에 대해 듣거나, 읽는 것,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과 꿈이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였다. 우리가 무슬림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비전과 꿈을 보도록 기도할 수 있다. 파키스탄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한 선교사는 1994년 3월 2일자 기도편지에 이렇게 썼다: ‘라마단 27일째 밤은 무슬림들에게 매우 특별합니다. 그들은 그 밤에 특별한 계시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몇 명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터키에서 개종한 사람들 중 적어도 35%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꿈이나 비전에 반응한 사람들이었다. 이슬람의 탄생지이자 심장부인 사우디 아라비아를 포함한 다른 많은 중동 나라들에서도 사람들은 꿈을 통해 성경을 읽게 되고 찾게 된다. 그들이 글로 쓰여진 말씀 (성경)을 발견하면 꿈이나 비전은 중단되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비전을 본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와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전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요점은 그 경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다른 것에서 온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예수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실제의 예수님은 성경에서 찾게 될 것이다.

3.6 부적과 주문들
부적은 주로 하나님의 이름이나 꾸란에 나온 구절들, 혹은 그에 상응하는 숫자를 담고 있다. 부적을 먹을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으며 때로 그 사람과 사단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부지중에 얽매일 수 있다. 나는 때로 부적을 목에 걸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묻는다. 그가 어떤 구절이 들어있다고 대답하면 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실지 우리 마음에 간직하는 것을 더 좋아하실지를 묻는다. 그 대답은 항상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로마서 5장 8절과 같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내가 이 구절을 말해주고 그 뜻을 잘 설명해 준 후에 그 신학적인 것을 염려하는 무슬림 여성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3.7 주술, 저주, 악한 눈
내 그리스도인 친구 몇 명은 무슬림들이 그들에게 내린 저주나 주문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적이 있다. 한 작은 튀니지 마을에서 있었던 일과,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카라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 타격은 주로 질병이나 몇 달간 심지어는 몇 년간 계속되는 우울로 나타나는데 그 일을 당한 사람이나 그 원인을 발견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 저주나 주문을 끊을 때까지 계속된다. 누군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미운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거나, 주문 거는 사람에게 나쁜 주문을 부탁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스 정교회가 주요 종교인 나라에서 지난 4년을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Alfred Guillaume은 그의 책 ‘이슬람의 전통’ The Traditions of Islam 에서 하디스 즉, 전통이 이슬람 이전 시대의 정령숭배적인 관습들을 많이 담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는 ‘Auf b.
Malik Al Ashja’i의 말을 인용한다 (119쪽): ‘우리는 무지의 시대에 주문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도시여, 그것들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고, 그 분은 “나에게 너의 주문을 보여봐라. 다신교(shirk)의 흔적이 없는 주문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

여러 나라에 사는 많은 무슬림들이 악한 눈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가 두려움을 다루도록 도우시는지 나눌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눈동자로 인도하시는지 말할 수 있다. (시32: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주문이나 악한 눈의 영향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이겨낼 수 없다. 한 헌신된 그리스도인 친구가 한 무슬림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에게 좋은 차가 있었는데 그 차를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하루는 와서 우리를 열심히 설득했지만 우리는 팔지 않겠다고 했죠.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 몇 시간 후에 심한 사고가 나서 그 차를 폐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악한 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또 다른 여인은 이런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내 여동생이 한동안 아팠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누군가 말하기를 악한 눈의 영향이라는 거예요. 그녀는 말하기를 우리가 빨간 고추들을 태우면 악한 눈의 효력이 없어질 거라고 했어요.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엄마는 손해 볼 거야 없지 않느냐며 빨간 고추들을 태웠죠. 그리고 나서 바로 동생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악한 눈에서 보호 받기 위해 부적을 지니고 다닌다. 또한 아이를 칭찬하거나 예쁘다고 할 때 질투하는 마음이 있어서 누군가가 그 아이를 악한 눈으로 보게 될 것을 염려하여 부적을 지니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질투를 다루고자 하시는지 나눌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통해 우리에게 깨끗한 새로운 마음을 주실 수 있다 (시편 51: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선한 목자가 되셔서 주님은 당신의 양들을 주목하여 보시고 보호하신다. 그분은 또한 옥에 갇힌 자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악한 권세를 끊으실 수 있다.

3.8 사단의 힘을 결박하기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를 사용하는 것은 때로 복음을 전할 길을 열어주고, 해가 되는 마술을 행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막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9 악한 날에 견디는 법
영적 전쟁에서 견디는 길은 이겨내는 길뿐이다. (에베소서 6:10-19).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4. 결론
4.1 사단과 그와 관계된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은 교회에서 초창기에 행했던 세례식의 한 부분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기름을 바르고 축사를 행한 후 세례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사단과의 관계 끊기가 없기 때문에 개종자들이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4.2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가르치고, 필요하다면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롬 15:18-19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4.3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무슬림과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사역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방법이나 의식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

4.4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전쟁에서 강한 능력이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히 11:3 and 고후4:6). 영원하시고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시자 동시에 말씀 그 자체셨다. (요1:1, 14) 씨앗의 비유에서 ‘씨앗은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 logos 를 말한다. 로고스는 신약에서 330번 나왔다. ‘말씀’을 가리키는 다른 그리스어는 레마 rhema 인데 그것은 70번 사용이 되었다. 레마는 입밖에 내어 말함, 물질, 토픽, 명령 혹은 격언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6:17에서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레마)’이다. 이는 방어도하고 공격도하는 무기이다. 영적인 대립이 있을 특정 경우들에 사용할 수 있는 말씀을 정리해 보았다.

A.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씀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단순히 ‘메리를 고쳐주소서’ 하고 기도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녀의 상황과 관계가 있는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이것이 아마 치유사역은 종종 성만찬을 행한 후에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만찬 중에 레마를 말한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 야고보서 5:15도 도움이 된다.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B. 두려움과 싸우는 말씀 Scripture in combating fear
‘두려워 말라...’. 성경은 ‘두려워 말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왕과 제사장(계1:6)들로서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할 때 그랬던 것처럼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수 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C. 영적 모욕에 대항하는 말씀 Scripture in resisting spiritual assault
70인역으로 마4: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과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을 보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단과 대항하실 때 어떻게 말씀을 사용하셨는지가 분명하게 나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D. 중보와 찬양의 말씀 Scripture intercession and in praise
초대 교회는 중보할 때 말씀을 많이 사용하였다. 당시 일어나도 있던 일들과 경험들에 적용하고 그들의 기도에 말씀을 포함했다. (행4:25-26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말씀을 사용하였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시56:4).

E. 집을 정결케 하는 말씀 Scripture in house cleansing
그리스도인의 집이나 ‘거룩한 땅이어야 하는 곳은 그곳이 아무리 사방이 악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의 대사를 위한 특권을 부여 받은 땅이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대사는 여분의 영역적 권리를 누린다’고 두 명의 유명한 하나님의 일꾼들인 Mildred Cable and Francesca French은 그들의 공동저서 ‘그리스도의 대사들 Ambassadors for Christ’ 에서 쓰고 있다. (152-154쪽 ‘대사의 영광’ The Splendour of the Embassy 장에 나와있다.)

F.축사에 관한 말씀 Scripture in exorcism of evil spirits
악한 영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예수님의 피와 그 이름의 능력을 당해낼 수 없다.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축사를 할 때 우리의 권위를 세워주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사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우리가 말씀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면 영적 전쟁에서 방해를 받게 된다.

5. 그룹 토의를 위한 제언

5.1 다양한 배경의 불신자들이 속박에서 풀려야 한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5.2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오늘날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의 사역에 적응해야 할까?
How do we apply this in our ministry to Muslims today?

5.3 왜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무슬림들에게 죄사함의 확신을 주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일까?

5.4 왜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꿈과 비전을 통해 예수님 자신을 계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5.5 한 무슬림이 당신에게 와서 그가 예수님에 대해 본 비전을 설명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5.6 치유나 다른 필요를 가지고 있는 무슬림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까?

5.7 어떤 종류의 능력대결에 관여하게 되든지 우리는 미리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6. 간략한 참고도서 목록
Note: a courtesy visit to your local mosque will be very instructive.
Generally, the mosque authorities will receive you well and explain
their point of view. They are generally generous in giving literature
in the local language and in English. Sometimes they have a bookstall
with inexpensive materials. Acquiring such primary material
will help us understand our neighbours better.
Ali, Muhammad A Manual of Hadith Curzon Press, London and Dublin, 1944, reprinted 1983
Atiya, Nayra Khul-Khaal: Five Egyptian Women Tell Their Stories
The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1987
Bhutto, Benazir Daughter of the East, Mandarin, London, 1988
Fernea, Elizabeth A Street in Marrakesh, Anchor Press, Garden City, New York, 1980
Green, Michael I believe in Satan’s downfall, Hodder and Stoughton, London, 1980
Groothhuis, Douglas R. Unmasking the New Age, IVP, Downers Grove, Illinois, 1986
Guillaume, Alfred The Traditions of Islam, Universal Books, Lahore, 1977
Jeffery, Patricia Frogs in a Well:Indian Women in Purdah, Zed Press, London, 1981
Mawdudi, Abdul A’la The Fundamentals of Islam, Islamic Publications Ltd. Lahore
Towards Understanding Islam, Islamic Foundation, Leicester, 1981
Mernissi, Fatima The Harem Within. Tales of a Moroccan Girlhood. Bantam Books, London, 1995
Musk, Bill The Unseen Face of Islam: Sharing the Gospel with Ordinary Muslims, Marc Europe, 1989
Niazi, Kausar Creation of Man. Sh. Muhammad Ashraf, Lahore, 1975
To the Prophet. Sh. Muhammad Ashraf, Lahore, 1976
Islam our Guide. Sh. Muhammad Ashraf, Lahore, 1976
Padwick, Constance Muslim Devotions. A Study of Prayer Manuals in Common Use. SPCK, London, 1961
Pickthall, Mohammed The Meaning of the Glorious Koran, Mentor Books, London, n.d. Qasida Burda (The Prophet’s Mantle) Arabic with translation into various languages eg. Urdu, Persian, Turkish, Berber, Swahili, English Qur’an Arabic with Urdu and English parallel translations.
Taj Company, Karachi Ritchie, James McL Qasidatu-l-Burda Translations and Presentation.
Article in Encounter, No 171-172 Pontificio Istituto di Studi Arabi e d’Islamistica, Rome. 1991
Sheikh, Bilquis I Dared to Call Him Father, Kingsway/STL, Eastbourne/ Bromley, 1978
Shems, Friedlander with al-Hajj Shaikh Muzaffereddin Ninety-Nine Names of Allah, Wildwood House/
Graham Brash, Singapore, 1980
Stacey, Vivienne. Christ Supreme over Satan, Masihi Isha’at Khana, Lahore, 1986. 4th English Edition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