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2024-02-08T02:32:05.340-08:00중동 이슬람 선교 저널 Korean Edition of 'St. Francis Magazine'이 블로그는 www.stfrancismagazine.info 의 글들을 선별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Blogger17125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17603667449595791232010-06-26T06:33:00.000-07:002010-06-26T06:41:06.987-07:00아랍세계 사역에 있어서의 보안과 안전원제: SECURITY AND SAFETY ISSUES IN MISSION IN THE ARAB WORLD<br />저자: TAYLOR GRAEME SMYTHE, PHD, PRISCA SMYTHE, MD, JACOB VOLPE<br />원문보기: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5%20SmytheVolpe-SecurityofPersonnel.pd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5%20SmytheVolpe-SecurityofPersonnel.pdf</a><br />1 서론<br />최근의 신학교 회의에서 사역자가 될 학생들은 위험하게 살고 또한 복음을 위해 위험한 사람들이 되도록 도전 받았다. 미래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자신이 구축해 놓은 편안함과 안전의 영역을 벗어나, 심지어 그것이 위험한 곳이나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비용을 계산해 보기 위함이었다.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을 훈련하는 사역자들에게 이것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훈련 자나 훈련 받는 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이다.<br /><br />2 용어의 정의<br />이 주제를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보기 위해서 용어를 먼저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br /><br />안전: 이 말은 육체적, 사회적, 감정적, 정신적인 피해로부터 보호 받고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감정적인 안전과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뜻하는 좀 더 특정 용어인 “안전한 사람들”이나 “안전한 장소”라는 말과는 대조된다.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황에서 “안전한 장소”란 무슬림들이 기꺼이 자리하는 행사나 장소가 될 것이고, 문화적인 장벽이 높지 않은 곳일 것이고, 그런 곳에서 무슬림들은 복음을 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어느 한 무슬림이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동떨어진 곳에 있는 야외파티장이 “안전한 장소”가 될 것이고, 반대로 서구 스타일의 교회 예배나 성경 공부는 “안전하지 않은 장소”가 될 것이다.<br /><br />보안: 일반적으로 비밀로 지켜지는 숨겨진 진짜 정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숨기는 것이 개인에게 안전과 보호를 제공해 준다.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그들의 물리적인 존재 (즉, 비자)와 선교사 개인의 안전 혹은 개종자의 안전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접근 제한 국가에 있는 국제 선교 사역자들에게 이는 숨겨진 단체나 조직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는 문제까지도 함께 연루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개종자 역시 공공연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밝혀지게 되면 위험에 노출된다. 두 경우 모두 정체성을 숨기는 것이 복음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일정 수준의 안전을 제공해준다. 여기서 “보안”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성도들의 인내와 관련된 신학적인 논제와는 구분되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br /><br />위험: 유익이 되거나 그 반대되는 결과를 이끌 수 있는 행동을 일컫는다. 이 정의에서 우리가 비록 위험에 대한 평가나 그 위험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 더 상세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지만, 결과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볼 때 그렇지 않은 행동들도 있지만, 반면에 어떤 행동들은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험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예들은 주로 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잘못된 사역 모델의 예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br />- 문화적으로 어리석고 민감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br />- 닫혀진 나라에서 공공연히 복음 활동을 하거나, 관계를 먼저 형성하지 않은 채 전도지를 배포하고 아무런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br />- 공공연히 꾸란과 선지자, 혹은 지역 지도자나 문화를 공격하는 것.<br />- 지역의 관습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br /><br />제자를 만들거나 교회를 개척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목표나 결과를 가지고 있다면 계산된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부주의하게 접근하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br /><br />3 보안 및 위험과 관련된 문화적 요인들<br />문화적, 지역적 차이에 따라 (즉, 어디에서 왔는가에 따라 –번역자) 안전과, 보안, 위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달라질 수 있는데, 이는 개종자를 제자화하는데 있어서 특정 상황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어떤 문화적 지역적 차이들은 우리의 사회 경제적인 이해를 반영하고 있고, 우리가 기능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감정적 필요의 수준에 대해 다른 기대를 갖게 만든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서 온 선교 사역자들은 자녀 교육이나 가족과 관계된 문제들 (배우자와 떨어져 있는 문제, 부모님을 돌보는 문제, 조부모들의 기대를 다루는 문제 같은 것들)에 있어서 사는 기준에 대한 다양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문화에서는 보험과 퇴직금이 위험을 감수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한 부분이 되고, 다른 문화에서는 미래를 계획하는 것에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고, 현재에 더 집중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모험을 감행하는데, 이는 반드시 문화적인 특성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특성을 반영하기도 한다.<br /><br />부상하고 있는 선교 운동 중에는 순교를 하나님의 일을 앞당기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으로 보는 운동들도 있는데, 따라서 그곳에 속한 사역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각오가 더 많이 되어 있다. 옛 세대의 사역자들이 그랬듯이 그들이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뒤로 두고 떠나지는 않지만, 이러한 운동에 속한 사역자들은 사역지에 갈 때 “편도” 티켓을 끊어서 간다. 차선책이란 없는 것이다. 반대로 다른 단체들은 사역자들을 선교지에서 빼 내는 것에 대해 좀 더 상세한 정책을 가지고 있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인질로 잡힐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특별히 훈련을 하기도 한다. 위험에 대처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영역이 존재하는데, 그 한쪽 끝에는 전혀 위험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위험을 찾아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 끝에는 위험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복종하고 그 이름에 신실할 때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나라에서 온 사역자들은 불편하고 보안이 되지 않는 환경을 잘 참아낼 수 있는데, 이는 삶의 편안함에 대해 다소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다른 믿는 자들에게 좋은 본이 될 수 있다. 위험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지만 보편적이지는 않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기대를 가질 수 있고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 기꺼이 포기하는 것을 결심할 수 있다. 다문화 그리고 다국적의 팀과, 교회와, 조직은 성숙과 은혜가 필요하고, 율법주의와 판단하는 태도를 피해야 한다. 성경적 원칙의 다양한 이해와 적용이 있을 수 있고, 위험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다른 가정과 가치가 존재할 수 있으며, 특정 상황을 다루는 서로 다른 전략과 접근이 가능한 곳에서 개인의 인식이 좋은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br /><br />4 성경의 선례와 보안 문제<br />내부자 운동과 상황화된 교회 개척 전략에 기초한 실용적인 이유들에 더하여,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잠시 그들의 정체성을 숨기도록 격려하거나 혹은 적어도 허락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br />-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는 밤에 몰래 와서 예수님을 만났다. (3장)<br />- 에스더는 삼촌 모르드개로부터 그녀의 유대인 신분을 숨기라는 명을 받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그 명을 지켰다. (4장)<br />- 나아만은 열왕기하 5장에서 그의 왕 벤 하닷과 함께 이방 신전에 계속해서 가게 될 것에 대해 선지자에게 미리 용서를 구했다. 예수님은 누가복은 4장에서 나아만의 순전한 믿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씀하셨다.<br /><br />이러한 예들을 볼 때, 우리는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이 비밀 신자들로서 그들의 정체를 숨겨도 된다고, 하나님은 때로 당신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일하시기도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을 제자 훈련 시키는 사람들은 이렇게 비밀로 지키는 것을 그들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한 때의 일로 받아들인다. 비밀로 지키는 것이 규범이 될 수는 없으며, 끝까지 그럴 수도 없다. 그들이 존재하는 진정한 목적이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사역자들 자신도 때로 이중의 정체성(외부로 드러나는 것, 숨겨진 것)을 가지게 된다.<br /><br />4.1 비용을 계산하기 Counting the cost<br />대부분의 개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정체를 밝힐 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게 된다. 공동체를 잃게 되고, 직업과 생계, 가족, 어쩌면 결혼까지도 잃게 된다. 만일 그가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에 합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로 정체가 밝혀진 그 신자는 내부자 운동의 일원이 될 확률도 희박하다. 두려움 때문에 정체를 숨기기로 한 개종자와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는 개종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br /><br />4.2 정체성을 숨기는 전략적인 이유<br />비밀신자에 대한 위의 예 이외에도, 성경에는 대담해져야 할 때와 조용해야 할 때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의 대담함과 그리스인들 사이를 순회하면서 한 활동, 기꺼이 희생하려 했던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가르침과는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벨론에 자리잡고 살면서 (정체를 숨기라고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이방인 정치 지도자들의 안녕을 구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평안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안전을 위해 바울은 바구니에 달려 내려서 다마스커스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곧 예루살렘을 향해 갔는데 그 곳은 그에게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종종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덫을 놓으려고 던진 질문들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셨다. 아직 고난 당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br /><br />5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규범을 가지고 있다.<br />신약의 몇 본문들은 분명하게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아래의 히브리서 10장의 본문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고난과 손실을 견디고 담대하게 끝까지 믿음을 지켰는지에 대해 말해준다.<br /><br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10:32-39)<br /><br />마가복은 8:38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br /><br />이 말씀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고난이나 수치를 당할 것이 두려워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비밀로 하는 것은 순전한 믿음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종자들을 제자화할 때 그들의 정체가 밝혀질 경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고 고난이 현실로 다가온다. 개종자들을 훈련 시키는 자들은 위험과 고난 사이에는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보통 훈련 자나 외부에서 온 사역 자보다는 개종자나 현지인이 고난으로 인해 더 심각한 결과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br /><br />6 비밀 엄수와 제자화<br />보안과 안전을 유지하면서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을 제자화하기 위한 방법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br /><br />- 모든 성경을 가르치되 자신의 정체를 밝힐 필요에 대한 것도 가르치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고난 당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영생은 대가를 치를만한 것이고 우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마10:28)<br />- 훈련하는 사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기꺼이 고난 받는 본을 보여야 한다. 개종자에 비해 외국인 사역자가 당하는 고난은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볼 수 있지만, 훈련자가 삶을 통해 보여주는 본은 이러한 진리가 말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것이다.<br />- 다른 사람과 관련된 잠언의 지혜를 포함하는 모든 성경에 나오는 지혜를 분명하게 가르치라. 그리고 경건과, 성령의 열매, 원수 사랑,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고용주와 고용자 등에 관한 기준을 말하는 성경의 명령을 가르치라. 그렇게 함으로써 개종자들은 쾌활하면서도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악행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의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벧전 2)<br />- 개종자가 언제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종자 스스로 성령의 뜻을 좇아 행하도록 하라. 시련이 닥치면 성령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주실 것이다. 제자 훈련 중에 있는 많은 개종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신앙과 충성을 공개할 것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이는 긴 여정이면, 따라서 개종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할 때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고,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에 그것을 알리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개종자는 스스로의 의지로 그러한 결심에 도달해야 하며, 강요는 오히려 좋지 않은 감정을 낳게 한다. 개종자를 훈련하는 자가 기독교 배경의 외국인일 경우 특히 그러하다. 보안에 문제가 생기는 대부분의 경우 외국인 그리스도인과 현지인 개종자가 당하는 고난은 정도가 다르다. 외국인 그리스도인의 경우 비자를 받지 못하게 되지만, 현지인 개종자는 직업과 가족, 삶을 잃을 수 있고 고국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br /><br />7 결론<br />이슬람권 사역자들에게 일반적인 보안과 안전에 관한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성경은 대체로 성숙한 제자라면 비용을 계산해보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십자가를 지도록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는 고난이 따르게 마련이다. 새로운 신자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비밀을 지키며 조용해야 하는 때에 대해서는 동기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특수한 상황을 평가하는데 유용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글을 맺으려 한다.<br />- 그는 “전략적으로 조용한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가?<br />- 개종자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요청 받는 상황에 처해있는가?<br />- 물리적 위협(고통, 빼앗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인가?<br />- 우리는 겨자씨만한 믿음에서 시작하여 두려움을 이길 만한 분량으로 믿음이 자라도록 돕고 있는가?<br /><br />각 개종자의 상황이 독특하고 따라서 많은 기도와 지혜로 각 상황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믿는 자들과 다른 사역 자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때도 있다. 다양한 견해와 성경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서로(사역자와 믿는자들)에 대해 은혜를 베풀고 서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83973289709447973772010-06-26T06:28:00.001-07:002010-06-26T06:33:20.090-07:00무슬림 여성과의 대화글쓴이: 비비안 스테이시 Vivienne Stacey<br />원제: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images/pdf/vivienne/ChristianConversationswitMuslimwomen.pdf">Conversations with Muslim Women</a><br />ht<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images/pdf/vivienne/ChristianConversationswitMuslimwomen.pdf">tp://www.stfrancismagazine.info/ja/images/pdf/vivienne/ChristianConversationswitMuslimwomen.pdf</a><br /><br />그리스도께서 각각의 여성들과 한 대화를 보면 주님이 그들을 백성으로 보셨으며, 그들 각자의 종교와 사회적 배경을 존중하고 이해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또한 그들의 심리적인 필요도 매우 잘 알고 계셨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요14:1-12)나, 간음한 여인과 하신 대화(요8:1-11), 마리아와 마르다와 하신 대화(요11), 어머니와 나누신 대화(요19:25-27), 그리고 부활 후에 막달라 마리아와 하신 대화 (요20:1-18)를 연구해 보면 도움이 된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다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주님의 예를 보거나,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무슬림 여성과의 대화라는 특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미 있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한 번 만나고 끝날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여성이 만나서 서로를 알게 되고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우정을 쌓게 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종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어느 단계에서부터인가 상대방의 종교적, 사회적, 심리적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br /><br />종교적 상태. 그 무슬림 여성이 매우 종교적이어서 종교적인 모든 요구사항들을 실천하는 사람인가? 이슬람의 어느 분파에 속한 사람인가? 순니인가, 쉬아인가, 이슬람미인가 아니면 다른 종파의 사람인가? 혹시 그녀는 수피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녀가 관계하고 있는 수피는 어떤 그룹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일부 사우디 아라비아의 여인들처럼 교육받지 못했고, 무슬림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을 방금 알게 된 그런 여성인가? 수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들과 전에 만나본 적이 있는 여성인가? 아직 그리스도인을 만나본 적은 없더라도, 영문학이나 독문학 같은 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를 그 여성의 사회적인 상태로 인도해준다.<br /><br /><br />사회적 상태. 그녀는 문맹인가? 교육은 잘 받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어느 시스템에서 교육을 받았는가? 프랑스 유럽 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알제리아 사람인가, 아니면 고향에 있는 이슬람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인가? 그녀는 총명한가? 그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배운 적이 있는가? 그녀는 인도인 무슬림인가, 아니면 터키인, 인도네시아인, 오만인 무슬림인가? 그녀는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느 부분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 그녀의 나라에서 여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그녀는 튀니지 같이 일찍 개혁을 이룬 나라에서 여성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왔는가, 아니면 꾸란이 헌법인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인가? 시골에서 왔는가, 도시에서만 산 사람인가? 그녀의 가족은 어떤가? 결혼했나? 나이는? 이 모든 질문들이 대화를 나눌 때 기억하고 있으면 좋은 것들이다.<br /><br />심리적 상태. 우리의 무슬림 친구는 관심을 갖는다면 지적인 질문들에 더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심리적인 두려움에 더 관심이 있는가? 그녀는 아마 그녀의 남편이 자신과 이혼하거나, 두 번째 부인을 얻지 않을까, 혹은 출산의 위험이나, 악한 눈, 그리고 영적 세계의 적대적인 세력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제리아에서는 성자숭배를 금하고 있지만,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찾아가서 고대의 주술이나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 이런 많은 것들이 이슬람보다는 무속신앙에서 전래된 것들이다.<br /><br />짧게나마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요인들 세 가지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매우 간략한 연구를 통해서도 우리는 많은 종류의 무슬림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나누거나, 복음에 대해 말할 때, 한 가지 접근이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접근과 방법들이 있다. 여기서는 낭송 및 노래, 기도, 핵심어 이렇게 세 가지 정도만 살펴보기로 하자.<br /><br /><br />낭송 및 노래 RECITATION AND SONG. 꾸란이라는 말의 의미는 낭송이다. 아랍어로 꾸란은 큰 소리로 낭송하는 것 혹은 읊조리거나, 암송하는 것이다. 듣는 것 보다는 읽는 것에 익숙해 있는 서구인들에게는 꾸란을 읊조리는 것이 경건한 무슬림에게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단어들과, 소리, 재능 있는 사람이 읊조리는 고전 아랍어는 그 의미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들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작년 겨울 말에 파키스탄으로 건너왔다. 그들 중 두 명의 여성이 의료적 치료를 필요로 했는데, 가족들과 함께 기독교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의사는 그들이 걸프 석유국인 카타르에 관해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노래에서는 대화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br /><br />남편: 내가 카타르에 가서 당신에게 많고 많은 돈을 벌어다 줄께.<br />아내: 거기에 가지 말아요. 카타르에 가면 문제가 많이 생길 거예요. 만일 신께서 그곳에서 당신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줄 수 있다면, 왜 여기에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공급해 주실 수 없겠어요? 카타르에 가지 마세요.<br /><br />이 무슬림 가족은 이런 식으로 그들이 피운 모닥불 가에서 밤에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있었다. 한 여성이 그 의사에게 아는 노래 중에 하나를 불러보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그 여성 의사는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결혼 잔치에 관한 비유를 노래로 만들어서 불러주었다. 잔치에 올 수 없다고 변명하는 내용들은 그 의사가 상대하는 환자들이 입원을 하기 싫을 때 하는 변명들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 노래는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이미 만들어서 부르던 것이었다.)<br /><br />그 여성의사가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br />후렴: 나는 초대를 받았지만 당신의 잔치에 갈 수 없어요.<br />내 소는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는 젖을 내주지 않아요.<br />나는 집에 어린 아이들이 많은데 집이 동떨어진 곳에 있어요.<br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잔치에 갈 수가 없어요.<br />1절: 한 사람이 집에서 잔치를 열었어요. 그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종을 보내서 사람들에게 알렸어요. 음식이 준비되었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변명을 해대기 시작했어요. 나는 갈수가 없어요.<br />2절: 이 말을 듣고 집 주인은 몹시 화가 나서 종들에게 말했어요. “거리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 절름발이, 중풍병자, 눈먼 사람들을 데리고 와라. 내 집을 가득 채워라. 나는 갈수가 없어요.<br />3절: 예수님이 해 주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영생과 구원을 얻을 수 있어요. 나는 갈수 없어요. <br /><br />노래를 해 달라고 했던 여성은 주의 깊게 듣고 나서 질문을 하고, 집에 가서 자기들도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적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여의사는 그것을 적어서 그 이야기가 쓰여 있는 소책자, 즉 누가복음과 함께 주었다. 두 번째 가족 역시 노래를 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여의사는 마태복음에 있는 이야기를 노래로 엮은 것을 적어서 마태복음과 함께 두 번째 가족에게 주었다. 그 두 가족은 그 노래를 불렀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복음서를 큰 소리로 읽었다. 이처럼 그 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의사소통 방법을 통해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다.<br /><br /><br />기도. 기도는 매우 익숙한 인간의 표현 방식이다. 무슬림들은 그들이 정기적으로 하는 기도(쌀라)를 매우 강조한다. 또한 좀더 개인적인 기도인 두아(dua)도 강조한다. 위기가 닥치거나, 특별한 경우가 되면 무슬림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도 기도를 부탁할 것이다. 내가 아는 몇 명의 그리스도인 산파들은 무슬림들이 출산의 위험에 매우 예민하며, 그들의 문화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미신과 관습으로 인해 몹시 두려워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산파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곤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 산파는 다음과 같이 말해 줄 수 있다: “당신은 이제 갓난 아기의 엄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이 아기가 안전하게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베푸신 사랑과 선하심에 감사 드리고, 이 가정에 새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영원한 주요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이 아기처럼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처럼 산고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당신처럼 기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의 아기에게 자연스러운 출산을 통해 육체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영적인 태어남을 통해 당신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br /><br />아기가 태어났을 때 해 줄 수 있는 기도는 아래와 같다: “창조자이신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으로 인해 이 아기가 안전하게 태어나고 산모도 고통에서 해방되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제 간구하옵는 것은 당신이 육체의 생명을 주신 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영원한 생명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멘.”<br /><br />핵심어. 그리스도는 이 방법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보여주셨는데, 그 대화에서 핵심어는 물이었다. 한 번은 푼자비 마을에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나에게 몇 채의 집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자신의 일가 친척이 되는 부족들은 이 백 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나의 일가친척들은 그것보다 더 많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내가 그녀에게 집은 매우 안전해서 도둑이 들 염려도 없고 수리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자 그녀는 매우 진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아요.” 나는 요한복음 14장 1-6절을 읽어주었고 그녀는 주의 깊게 들었다. 내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주로 사용하는 핵심어들은 부적, 베일, 비 라는 단어들이다. 접촉 점으로 삼을 수 있는 많은 종교적인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순례, 금식, 신조 같은 것들이 그런 단어들이다. 그런 단어들은 좀 더 지적이고 신학적인 논의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슬림 여성들 중에는 그런 논의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여성들은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남성들은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무슬림 사회지만, 때로는 부부가 다른 부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여러 유형의 무슬림 여성들과 접촉해 보면서, 그리고 여기서 지면상으로 나눈 단 세 가지의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나는 어떤 표준적인 여성이나 딱 집어서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표준적인 방법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살아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만남이 우리의 모든 영적, 지적, 문화적 경험들과 그 이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시켜 주신 모든 것들을 끌어 모아야 하는 최 일선의 상황이 된다. 우리가 부지런히 스스로를 준비시킨 후에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한다. 그분만이 다른 어떤 진리가 아닌 주 예수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91809655592727329562010-06-16T11:30:00.000-07:002010-06-16T11:37:37.846-07:00상황화를 이루기 위한 교회 개척의 경계선원제: MAKING SENSE OF CONTEXTUALIZATION: A GUIDE ON SETTING PARAMETERS FOR CHURCH PLANTERS<br />글쓴이: TIMOTHY HERALD<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 name="_ftnref1">[1]</a><br />원문보기: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10%20TimothyHerald-makingsenseofcontextualization(1).pd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10%20TimothyHerald-makingsenseofcontextualization(1).pdf</a><br /><br />1 서론<br />‘적응주의자 accommodationists’와 ‘거부주의자 rejectionists’<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 name="_ftnref2">[2]</a> 사이의 긴 논쟁은 무슬림 세계의 교회 개척<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 name="_ftnref3">[3]</a> 역사에서 지겨울 정도로 계속된 문제이다. 이것은 학문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내가 만나 본 다양한 이슬람 지역의, 다양한 교파 배경의, 그리고 다양한 파송 단체들의 이슬람 지역 교회 개척 팀들이 초보자나 숙련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이 문제를 계속해서 대화의 주제로 삼고 있었다. 대부분은 각자 이 주제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주제에 대한 뜨거운 열기로 미루어보건대, 그 논쟁에 뛰어들어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나의 생각을 갖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할 수 없이 이 글에 나의 생각을 밝혀놓았다. 이는 내가 정한 경계선들이 선교신학 문서들이나 전 세계에서 실제로 교회개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논의되는 다양한 선교 철학적 발상의 와중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나의 동료들의 강한 주장에 힘입는 것이다.<br /><br />본 논문을 통해 나는 먼저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할 것이다. 즉, 개종자들로 이루어진 모임이 건강한 상태에 있는지를 어떻게 가늠할 것인지 그 영역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영역들 안에 어떤 평가의 기준들이 있어야 하는지를 제시해 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종종 선동적이 되어버리는 문제인, 무슬림 배경의 회중들이 꾸란이나 무함마드에<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 name="_ftnref4">[4]</a> 대해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에게 속했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모임이 이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건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 전체를 요약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적응주의자들과 거부주의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정보들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br /><br />2 문제(들)<br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자 하는 우리의 섬김은 우리를 무슬림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사역을 평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교회 개척 팀에 합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그들이 개척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결과로 기대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면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른 교회 구조들(전통적인 구조, 셀 혹은 가정 구조)과 다양한 지도자의 스타일 (여러 사람이 다스리는 스타일, 몇 명의 장로들, 혹은 한 명의 지도자)이 존재하며, 또한 다양한 교리적 차이 (개혁주의, 은사주의 등)가 있고, 많은 삶의 영역과 예배에 있어서 다양한 정도의 상황화 (옷 입는 방법, 언어, 의식, 정체성 등)가 가능하다.<br />구조나, 지도자, 교리적 차이에 대한 관점들은 결정하기가 쉽다. 개혁주의는 개혁주의를 의미하고, 가정교회 구조는 가정교회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화의 경우에는 사실상 아무도 같은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C5”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다른 문화권의 교회 개척자들을 의미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꾸란을 지니고 있는 채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모두 트래비스가 C5 형태를 이야기 했을 때 그가 의미한 것이 아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 name="_ftnref5">[5]</a> ‘내부자’나 ‘빼내기’ 등의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역 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러한 사역 철학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을 사단으로까지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요인들은 무슬림 세계에서 하는 사역들을 조금씩 앞당기는데 서로 돕는 역할을 해 왔고, 특별한 이름표 없이 사역이 이루어지고,성급하게 전체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 제시되지 않도록 도왔다. 이런 점에서 개척 팀이 상황화라는 문제에 있어서 정확히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하는 것을 어림해 보고자 시도하면서 나는 적지 않은 슬픔을 느꼈다. 그로 인해 나는 몇 가지 원칙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 개척 팀이 건강한 교회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된 혼합주의로 빠져들고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6" name="_ftnref6">[6]</a> 바라기는 현재 논의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방어해야 하는 사람들이건, 아니면 단순히 관찰자의 입장에 있건 간에) 이 방법을 적용하여 보면서 양 편이 모두 자신들이 판단하고 있는 방법론과 다른 교회 개척 팀들의 방법론의 기준을 다시 한 번 재고해 보게 되는 것이다.<br /><br />3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br />먼저, 우리는 교회개척 팀을 평가하면서 그들이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교회가 현재 어느 시점에 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 기준을 삼지 않는 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고 싶다. 현재의 상황을 평가해 보는 것이 어느 영역에 제자화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한 팀이 건강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혼합주의적인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는 그 팀이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그가 첫 편지를 보내기 전의 상황을 가지고 우리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교회 개척 팀(바울 자신을 포함하는) 을 평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교회는 간음과, 분열, 심지어는 배고픈 형제 자매들 앞에서 마구 먹어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오히려 그의 팀은 그들이 고린도 교회를 어디로 이끌고자 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팀이 했던 모든 교회 개척에 대해서 똑같이 적용된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적용하면서 회중이 세례를 받는지 안 받는지를 묻는 것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것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당신의 생각에는 무엇이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보는가?” 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답은 그 교회 개척 팀이 새 신자들을 어디로 이끌고자 하는가를 알자는 것이다.<br /><br />내가 본 글의 초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양 편의 논의들을 읽어 보았을 때 우리는 마치 지역 교회가 현재 보이는 모습이 앞으로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종종 생각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별로 좋은 예측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새 신자들의 신학과 실천이 시간이 변하면서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청년 신자 그룹들의 신학과 습관도 시간과 함께 변화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건강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를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br /><br />4 기준 Criteria<br />4.1 기준의 필요성<br />우리가 평가해야 하는 것은 교회 개척 팀이 기도하는 그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채, 그 다음 질문은 “우리가 평가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압둘 아사드 Abdul Asad 는<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7" name="_ftnref7">[7]</a> 그 목표가 C단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C5 공동체로 시작하는 교회는 장차 C4를 향해서 나갈 것이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게 될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C5 공동체가 개척 팀에 의해 영향을 받는 내용 즉, C5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내용은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다. 나는 압둘 아사드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C단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못 이해되고 있고 무슬림 사역 내에서 몹시 왜곡되어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8" name="_ftnref8">[8]</a> C4와 C5에 대해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9" name="_ftnref9">[9]</a><br />따라서 우리가 목표하는 공동체가 가야 하는 곳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의 영역과, 교리적 신앙의 영역, 행위와 의식의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 이상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팀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좀 더 나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br /><br />평가를 위해 네 가지 영역을 제안하기는 했지만, 이 각 영역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종종 서구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정통은 정통실천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통 실천이 정통을 낳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네 가지 영역(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교리적 신앙, 행위와, 의식)이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나는 삶의 다양한 면을 (그리고 따라서 믿음의 다른 면들을) 구획 짓는 경향이 있는 세속 사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나는 근동에 있는 무슬림들 가운데 살면서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은 교리적 신앙이 행동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 만큼, 의식 역시 신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꽤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내가 전체적인 건강에 대해 생각하면서 단순히 교리적 신앙만이 아니라 네 측면을 모두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br /><br />4.2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br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역사적 사건)은 우리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으며, 누구와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빈 무덤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의미하는 것이고, 인간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전체 믿음에 절대적인 기초가 된다. 이 신앙 고백이 다른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간다. 따라서 부정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부정확하다면 우리의 믿음은 열매 없는 것이 되고 만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0" name="_ftnref10">[10]</a> 이것을 명심한다면 공동체가 그 신앙과 실천, 삶의 기초로 삼고 있는 신앙 고백이 그 공동체를 평가하는데 절대적인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br /><br />복음의 내용에 일관성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이 뿔뿔이 흩어져버리게 되기 때문에, 이 영역이 가장 근원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고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이 영역을 부지런히 평가해 보아야 한다. 다행히도, 복음의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응주의자나 거부주의자나 별 이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사실, 가장 적응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팀의 경우에도, 그들이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슬람의 내용을 사용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면서도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1" name="_ftnref11">[11]</a> <br /><br />교회 개척 팀이 스펙트럼의 어느 끝에 자리를 잡고 있든지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기준을 정해 놓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서구의 자유주의 학파의 영향은 복음의 내용이 뒤틀리고 빗나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가장 좋은 기준은 사도 신경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내용을 가지고 있고, 보편적으로 확증된 것이며, 짧고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 온 것이다. 공동체가 거부주의자이건 적응주의자이건 상관 없이 그들이 사도신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직 가르칠 것이 남아있는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2" name="_ftnref12">[12]</a> 그리고, 만일 어떤 팀이 공동체를 이끌 때 그러한 기본적인 복음의 내용을 고백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자 하지 않는 다면 그들이 어떤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염려가 제기될 수 있다.<br /><br />4.3 행위 Virtue<br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행위의 문제들을 많이 다루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무슬림에서 개종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도전이 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이 행동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의도까지도 모두 정결해지도록 부르신다. 예수님이 보고 들으셨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그렇게 보고 듣는 눈과 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을 열심히 따르는 공동체의 목표이다. 산상수훈이 매우 훌륭한 기중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에게 그것이 매우 이해되는 말씀이고 (문화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회 내에서 문화에 반하여 행동하라는 말씀이 그들의 상황에 잘 맞기 때문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3" name="_ftnref13">[13]</a> 우리는 그들이 개척하고 있는 공동체가 산상수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명령을 행위의 목표로 삼고 그에 순종하도록 가르치지 않는 교회 개척 팀에 대해 심각한 염려를 제기할 수 있다.<br /><br />그러나 우리가 산상수훈을 가지고 교회 개척 팀의 행위 기준을 평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패와 우리를 보낸 교회 공동체가 서구에서 계속 해서 실패하고 있는 것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처제를 택하고, 배우자를 학대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가 갖는 이혼율(단호한 일처제) 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서구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배우자 학대의 통계를 기억하면서 어느 공동체나 그들의 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죄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는 여전히 같다 – 변화된 삶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 예수님의 기준을 따라 살기에 실패했을 때 하는 회개는 변하지 않는 목표이다.<br /><br />4.4 교리 Doctrine<br />거부주의자들이 적응주의자들에 대해서 염려하는 가장 큰 부분이 바로 교리(바른 지적 신앙)에 대한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구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상황화 되었는지에 대한 짧은 설명이 왜 이슬람권에서 일하는 서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 문제가 그렇게도 중요한 논제가 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그리스-로마 유산과, 개혁, 계몽이 서구에서 교리가 형성되는데 가장 중대한 기여를 한 것들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철학적 지적 영향들로 인해, 우리의 문명은 전체적으로 철학과 바른 사고에 매료되었고, 따라서 바른 지적 신앙에 열중하게 되었다.<br />우리 사회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관심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무슨 질문을 던지는가를 지배해 왔다. 본 논의에 초점을 맞추어보자면, 우리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무슨 질문을 던지는가를 지배해 온 것이다. 우리가 하는 질문들은 단순한 행동(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한 이해까지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즉,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 이러한 것들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른 교리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의 상황화가 때로는 행위와, 의식, 내용을 잃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4" name="_ftnref14">[14]</a> 서구 신자나, 공동체, 혹은 교회개척 팀의 경우에, 교리에 초점을 맞추느라 믿음의 다른 영역에 소홀해진다면, 우리는 마음만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할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5" name="_ftnref15">[15]</a> <br /><br />왜 바른 교리의 문제가 이 논의에서 그렇게도 중요한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모든 신념들이 똑같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신념들은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지만, 다른 것들은 기독교의 특별한 표현과는 구분되는 것이고, 또 다른 것들은 단지 추측이거나, 가정이거나, 전통이거나, 의견인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이지를 교회개척팀이 마음 속에 그릴 때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가? 니케아 신조가 그 본질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짧고,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훌륭한 기준이 될 수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6" name="_ftnref16">[16]</a>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 것은, 문제는 공동체가 현재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교리적 목표이고 그러한 방향으로 그들이 인도함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br /><br />이쯤 해서, 거부주의자들은 아마도 ‘그것 봐! 그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예수님을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극도로 상황화된 공동체는 스스로를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라고 본다. – 번역자) 이러한 반응은 실제로 순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렸던 강조가 니케아 신조를 정확하게 모두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새로 신자가 된 형제였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만 동행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초기 공동체를 형성하는 단계에서도 함께 동행해야 한다. 한 명의 무슬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만이 아니라 (즉,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계-번역자),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번역자) 계속해서 바른 교리를 알려주고, 어떤 잘못을 먼저 지적해 줄지, 그리고 어떻게 지적해 줄지에 대해 지혜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7" name="_ftnref17">[17]</a><br />“무슬림 신자들”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 실재로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바로 이슬람 사회 내에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형제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산 증인들이다. 사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덜 익은 푸른 열매를 따려고 하지 않고, 대신에 성령님의 때를 기다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상황 안에서 니케아 신조를 이해하고자 하는데 상당히 열려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공동체는 아마도 “니케아의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우리 마음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려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적으로는 분명하게 니카아 신조를 고백합니다.” 하고 말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즉, 그들이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 (문화, 언어 등)에만 민감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도 생각해 줄 줄 알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8" name="_ftnref18">[18]</a> 그러나 이것은 과정이고,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가 개종의 모든 경우에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심지어 데살로니가 교회도 니케아 신조에 반대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9" name="_ftnref19">[19]</a><br /><br />반면에, 어떤 적응주의자들은 “그거 별로 좋지 않네요. 그 신조는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로 생긴 공동체가 그들의 신조와 신앙의 진술을 결정하도록 그들에게 맡겨야 합니다.”하고 말할 수도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0" name="_ftnref20">[20]</a> 이것 역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새로 생긴 공동체가 새로 믿게 된 형제들이고 자매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신조를 통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영이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고 계시다면, 왜 그들을 수 세기 동안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동일한 최소한의 교리 고백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1" name="_ftnref21">[21]</a>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예배 중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상황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는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팀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는 니케아 신조와 같은 신앙를 가르치는 것을 불편해 한다면 우리는 그 팀이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개척하고자 하는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br /><br />4.5 의식 Rituals<br />세례와 성찬식은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 받아들여지는 두 개의 보편적인 의식들이다. 세례는 시작하는 의식이고, 성찬식은 계속되는 교제와 형제들 사이의 선한 함께함(동거)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이 용어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별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만일 공동체가 정결케 하는 의식에 대해 그들의 상황에 맞는 용어(alghusl al-‘adhiim 처럼)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만일 그들이 우리가 영어로 하듯이 세례를 음역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적응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의식들은 그들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습을 굳이 새로운 공동체에게 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두 사람이 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면 형제들이 세례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제들이 아직 순례 중에 있으며, 믿음 안에서 성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의식이며, 사도행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었고, 내가 알기로는 폐기된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이 두 가지 의식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도록 그들과 함께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잘 훈계하고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개척 팀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즉, 형제들이 첫 발을 내디딜 때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 함께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식은 우리가 함께 나누는 신앙에서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세례와 성찬식이 없는 공동체를 목표로 하는 교회 개척 팀에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해야 한다.<br /><br />이 두 가지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에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새로운 공동체들도 있을 것이다. 즉, 세례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정기적으로 성만찬을 하는 소위 “성숙한” 공동체들 중에는 지옥의 자녀들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미성숙한 사람들 때문에 혹은 스스로의 심판을 위해 먹고 마시는 사람들 때문에 주님이 하라고 하신 두 의식을 오해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공동체가 나아가는 방향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br /><br />5 무함마드와 꾸란<br />첫째로, 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라거나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로,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무함마드를 높이 보고 있고, 그가 그의 백성들이 하나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러한 면에서 보여준 노력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이고,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만난 세 명의 교회 개척자들에 대해서 심각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는 것(그를 깎아 내리는 것)과, 꾸란을 불신하는 태도가 효과적인 증거에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내가 만난 다른 교회 개척자들에 대해서도 나는 동일하게 심각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다.<br /><br />이러한 나의 분명한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고,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며, 삶이 변화 받았지만, 여전히 무함마드를 높게 보는 무슬림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갖는 문제의식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몇 명의 그런 젊은이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참으로 신선한 것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슬람 배경을 가진 한 믿는 젊은 형제에게 (믿은 지가 3년 된) 무함마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무함마드가 예수님을 가리킨 예언자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본다고 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예수님이 신이시고 구원자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답했다. 꾸란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2" name="_ftnref22">[22]</a> 성경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느냐고 했더니, 그는 두 경전이 서로 차이가 없다고 했다. “다른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만든 전통이기 때문에, 그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꾸란을 재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3" name="_ftnref23">[23]</a> 그에게 꾸란을 정기적으로 읽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꾸란을 읽지, 대부분의 시간은 성경을 읽는데 사용한다고 대답했다.<br /><br />이 형제가 한 간증 중에서 또 하나 격려가 되는 부분은 그들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열려 있는 가를 보는 것이다. 위의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 형제는 사실 설명을 시작하면서 “내가 지금 현재 처해 있는 위치에서 볼 때 나는 무함마드가…. 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매우 건강한 것이다. 그는 무함마드의 역할에 대해 씨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무함마드의 가르침(그리스도 없는 법)을 따라 살 때 보다 분명히 더 잘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 그래야 하듯이 말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그가 무함마드를 예언자라고 말하고, 꾸란을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은 것은 교회 개척 팀에게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만일 그가 무함마드를 증오하고 그를 멸시하는 태도를 갖도록 만들었다면 그가 가족들에게 효과적인 증거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역시 교회 개척 팀에게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4" name="_ftnref24">[24]</a> <br /><br />6 정체성<br />상황화된 사역에 관해 근래에 논의되고 있는 것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슬림의 정체성이 그 문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숙하게 될 때 자아와 공동체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방향을 잡아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에 대한 논의는 내가 알기로는 선교신학 문서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에 따라 결정된다. 즉, 이슬람이 종교일 뿐인지<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5" name="_ftnref25">[25]</a> 아니면 사회, 문화, 문명인지 하는 문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만일 이슬람이 종교일 뿐이라면, 우리는 그 자리를 밀어내도록 해야 한다. 만일 종교가 이슬람 문명의 한 요소일 뿐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구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6" name="_ftnref26">[26]</a><br /><br /><br />수 년간 문서들을 연구해보고, 무슬림들과 관계를 하면서 (종교 지도자들과도 만나보고, 일반인들도 보고), 나는 이슬람이 종교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7" name="_ftnref27">[27]</a> 이슬람은 사회이고, 문화고, 그 자체가 문명일 수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8" name="_ftnref28">[28]</a> 나의 생각이 맞는다면, 우리가 너무 심하게 사람들을 그들의 유산에서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그 사회 내에 임하도록 그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예로 사용하곤 한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나는 문화적으로 미국인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미국인이다. 미국에서는 낙태가 합법이고, 옷을 별로 단정하게 입지 않아도 되고, 간통이 받아들여진다. 나는 그러면 어떠해야 할까? 신학적으로 나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나는 미국 문화가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나의 이런 자세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나의 증거를 약하게 할 것이다. 나는 단지 참여하지 않는 것뿐이다. 미국 정부와 사회가 허용하는 것들 그리고 심지어 격려하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와 상반된다면 그것은 나의 영역 밖이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나쁜 미국인으로 만들까? 누군가는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나를 더 좋은 미국인으로 만든다고 반박하고 싶다. 따라서 나는 미국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며,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 더 큰 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더 나은 미국 시민으로 만든다고 설명할 것이다. 내가 미국인의 삶의 어떤 부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부끄럽지 않으며, 여전히 나 자신은 미국인으로 남아 있다.<br /><br />내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정체성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정체성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듣는 것에 매우 열려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네가 가는 길이 내가 가는 길과 같은 곳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포스트 모던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아마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러한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의 또 다른 한 면은 노동자(redneck<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9" name="_ftnref29">[29]</a>)로서의 정체성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바깥 일을 좋아하고, 블루 칼라들이 하는 일을 힘들어 하며, 대형 트럭과 싼 음료를 즐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취하도록 맥주를 마시지 않으며, 인종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노동자들은 내가 한 물 갔다고 말할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웃기지 말라고 해! 누군가가 나의 노동자로서의 유산을 가져가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분명한 모욕으로 간주할 것이다. 나는 거의 확실한 노동자이지만, 구속 받은 사람이다. 이 그룹(구속 받은 사람의 그룹)에 속하기 위한 열쇠는 하나님 나라에 위배되는 공동체 내의 현존하는 어떤 철학이나, 태도, 행동에도 하나님 나라가 우선하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정체성이 모든 다른 것에 우선하는 것이다. 이는 이슬람 문명에도 적용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만들어낸 어떤 종교 이상이다. 움마(공동체)는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정치, 가족, 부족과 사업까지 모두 포함한다. 이슬람에 등을 돌리는 것은 종교적인 면 이외의 영역에 있어서도 공동체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에서 종교적인 부분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떠난” 사람이 사실상 움마의 다른 면에도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0" name="_ftnref30">[30]</a> 이슬람 세계에서 내가 만난 몇몇 교회 개척 자들은 이슬람 내의 교회 개척 운동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를 거절하는 공동체에 대해서 말해 주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형제 자매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떠나지만, 그들의 유산은 굳게 잡아야 한다는 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무슬림 (복종하는 자)으로 여기며,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무슬림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운동 중에 하나가 다르 알-이슬람<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1" name="_ftnref31">[31]</a>의 심장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형제들은 신앙을 위해서 심한 박해를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보다 더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무슬림)로 여기고 있다!<br /><br />여기서 다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도 동시에 이슬람과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와 같아, 내가 미국인이고, 포스트 모던 시대에 살고, 노동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처럼, 사실상 질문은 어느 정체성이 가장 우선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 공동체가 (성경의) 예수님의 왕 되심과 그분의 가르침보다 꾸란에 더 복종한다면 이것은 건강하지 못하고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공동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적응주의자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2" name="_ftnref32">[32]</a> 대부분은 예수님을 왕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그 분의 백성으로 보고 있고, 이것이 그들을 대표하는 가장 우선하는 정체성으로 여기고 있다.<br /><br />7 적용<br />본 글을 통해 적용주의자와 거부주의자 모두에 대해 동일하게 깊은 숙고를 하게 되었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목적은 내가 어느 한 교회 개척 팀과 함께 일할 것을 고려해 볼 때 그 팀이 건강한 교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건강하지 못한 혼합주의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내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하는 것을 나누는 것이다. 다르 알 이슬람에서 섬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팀과 얼마나 많이 상호작용 하는가의 문제와는 상관 없이, 우리는 교회 개척을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방법론이 좀 바뀔 필요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슬람권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계속해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방법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다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좀 다른 말이지만, 나는 어렵지만 매혹적인 무슬림 사역 세계로 첫 발을 디딘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광대한 양의 문서와 의견들 사이를 지나면서 기도 가운데 결정하고 어떤 사역 철학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이끄시는지를 따라 나갈 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는 거부주의자들과 적응주의자들에게 하는 다소 직접적인 제안들과 질문들로 글을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br />첫째로 거부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 공동체가 (적응주의자든, 거부주의자든)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보다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실제 신앙(복음의 내용과 교리)과 실천 (행위와 의식)이 향하고 있는 목표를 바탕으로 평가를 내려야 한다. 또한 다소 불분명한 용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고 평가를 내려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슬람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거부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대개 종교로만 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3" name="_ftnref33">[33]</a> 종교는 단지 이슬람의 한 면을 뿐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br /><br />적응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공동체를 위해 거부주의자들이 개발해 놓은 몇 가지 형태의 기준에서 보이는 교리적 의식적 관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고, 우리가 그들(예수님을 따르는 무슬림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만큼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슬림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 중에 하나가 기독교 역사와 용어에 대한 이해와 학습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방법이 그들의 방법보다 낫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이슬람을 문명으로 보고 그것을 구속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문명에 대한 불만족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그분 자신에게 모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br /><br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양편 모두가, 나 자신을 포함해서, 겸손과, 인내, 그리고 하나됨이라는 건강에 좋은 쓴 약을 삼킬 필요가 있다. 나는 양 편에서 논의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서로에게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맺은 열매들에게도 이러한 우리의 자세를 물려주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슬람을 떠난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이슬람에 남은 사람들은 자라가면서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과연 어떤 본을 보이고 있는가?<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 name="_ftn1">[1]</a> 가명. Timothy는 여러 곳에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개척에 관여하고 있다. 그의 주요 사역은 아랍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다. <a href="mailto:herald.tim@gmail.com">herald.tim@gmail.com</a>를 통해 그와 직접 교류할 수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 name="_ftn2">[2]</a> 이 두 용어는 본 글에서 계속 등장하게 될 것이다. 거부주의자들은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적응주의자들은 이슬람을 하나의 문화, 혹은 문명으로 보면서 어느 정도의 (그 정도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차이가 있지만) 가능성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는 Duane Alexander Miller가 St. Francis Magazine 5:3 (June 2009) 에 발표한 ‘재고: 이슬람적 기독교에 대한 한 적응주의자의 해석 Reappropriation: An Accommodationist Hermeneutic of Islamic Christianity’이라는 글에서 초보적인 형태로 등장했는데, 그는 출판되지 않은 글 ‘이슬람적 기독교에 대한 두 경향의 가설: 적응주의자와 거부주의자 The Two Stream Hypothesis in Islamic Christianity: Accommodationists and Rejectionists’라는 글에서 이를 ‘두 경향의 가설’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나의 의견에는 그가 사용한 이 두 용어가 선교신학적으로 종종 사용되는 그리고 때로 오용되기도 하는 모호한 용어들 (즉, C5나, 빼어냄, 내부, 상황적인 등)보다 훨씬 명확한 것 같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 name="_ftn3">[3]</a> “교회란 무엇인가?” 혹은 “교회개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교회이고 무엇이 교회가 아닌가에 대한 내 의견이 본문에서 부분적으로 종종 등장하기는 하겠지만 논지에 필요한 단순한 정의 정도에 만족해야 할 뿐, 불행히도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전체적인 의견은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 정의를 정리해보자면, 교회란 스스로를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을 따르는데 헌신한 공동체로 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 name="_ftn4">[4]</a> “무함마드는 누구인가?”와 “꾸란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그가 받은 계시(꾸란)가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꾸란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은, 그의 사도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대신하여 말한 사람 (예언자)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 name="_ftn5">[5]</a> Travis, John, ‘The C1 to C6 Spectrum’ in Evangelical Mission Quarterly 34:4 (October 1998) 과 Travis, John, ‘Messianic Muslim Follower of Isa: A Closer Look at C5 Believers and Congregation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17:1 (Spring 2000)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6" name="_ftn6">[6]</a> 거부주의자의 경계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지만, 적어도 빼내기의 사역 철학을 피하는 것에는 나도 동일하게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는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저자는 빼내기의 사역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 – 번역자.)<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7" name="_ftn7">[7]</a> Abdul Asad, ‘Rethinking the Insider Movement Debate: Global Historical Insights’ in St. Francis Magazine 5:4 (August 2009)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8" name="_ftn8">[8]</a> Abdul Asad는 사실 C4와 C5의 신학과 실천에 있어서 그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말할 때 C단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라비스에 의하면 그 두 단계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정체성에 대한 것 뿐이다. 그들은 이상한 그리스도인 혹은 이상한 무슬림들인가? 이것이 내가 C단계(위의 각주 5를 보라)에 대해 읽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이었고 2008년에 트라비스와 대화하고 나서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용어 사용이 상황화 논의에 있어서 주요 이슈들 중 하나이다. 일관성 없이 어디에나 사용되는 용어에 대해서 우리는 용어에 대한 일단의 오해를 없애고 우리가 개척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9" name="_ftn9">[9]</a> 또한 개인이 속한 기구의 정책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에 나는 한 미국인 형제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선교학에 대한 학위 두 개를 가지고 있었고 절대적으로 “C5 형태가 아닌” 기구를 섬기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특별한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그것이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C단계 중 어디에 해당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 C4” 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운동을 2008년에 존 트라비스에게 설명했을 때 그는 그것이 “성경적인 C5 운동의 아주 좋은 예”라고 말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0" name="_ftn10">[10]</a>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1" name="_ftn11">[11]</a> 이는 교회 개척 팀이 거부주의자의 사역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은 일단의 지역 지도자들을 소개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부주의자의 사역 철학을 가지고 있는 교회 개척 팀이 기른 지도자들이었다. 그 팀은 아랍어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하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언어)가 아니라 교회 개척 팀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아랍어로 질문을 하자 대부분의 지역 형제 자매들은 복음의 내용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매우 적응주의자적인 방법을 계발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외국이 교회 개척 팀이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지역 공동체에게는 C4로 보이지만, 교회 개척 팀에게는 스스로를 C3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2" name="_ftn12">[12]</a> 사도신경의 고백은 “구원 받기” 위해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가 고백하도록 해야 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3" name="_ftn13">[13]</a> 어떻게 그리고 왜 산상수훈이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에게 이해가능하고 도전이 되는가를 자세히 다루는 것은 본 연구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산상수훈을 무슬림과 함께 읽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그 내용이 문화적으로 그들과 가깝고, 이슬람 사회에 혁명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4" name="_ftn14">[14]</a> 이것을 동방 정교회(서구 복음주의보다 지형적, 문화적, 의식적으로 이슬람과 훨씬 가까운)와 비교해 보라. 동방정교회는 교리보다 의식을 더 강조한다. 동방 정교회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에 대해서는 Timothy Ware, The Orthodox Church (London: Penguin, 1997)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5" name="_ftn15">[15]</a> 서구 복음주의 전통에서 이 문제로 교제가 깨어진다는 사실이 좋은 증거가 된다. 우리는 행위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공동체, 교파 등을 형성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6" name="_ftn16">[16]</a> 이슬람 세계에 맞게 상황화된 형태의 니케아 기독교에 대해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Abu Daoud, ‘Mission and Sacrament Part III: A Paleo-Orthodox Approach to Contextualization in the Muslim World’, St. Francis Magazine 5:2 (April 2009)를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7" name="_ftn17">[17]</a> 사도 바울은 때로는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처럼 온유했고, 때로는 상당히 담대하게 질책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바울의 본을 잘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의 새로운 형제들과 동행할 때, 강하게 질책해야 하는지 부드럽게 격려해야 하는지를 잘 결정해야 할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8" name="_ftn18">[18]</a> 또한 단순히 니케아에 나오는 특별한 질문들뿐만 아니라, 그 답에 사용되는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 혹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유일하신 분” 이라는 표현은 4세기에 라틴이나 그리스에서는 매우 상이한 차이를 가졌겠지만, 21세기에 아랍어나 우르두어, 혹은 만다린에서는 그렇게 상이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다. 공동체 내에 이런 인식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성숙한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9" name="_ftn19">[19]</a> 살후 2: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0" name="_ftn20">[20]</a>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 Eastern Orthodoxy, 네스토리안주의, 동양 정교회 Oriental Orthodoxy, 서구 개혁주의,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심지어 Branch Davidians도 성경과 일치한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어떤 이들은 꽤 다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1" name="_ftn21">[21]</a> 더 나아가, 서구 복음주의에서 등장하고 있는 어떤 개인주의적인 선교신학 이론들과는 상반되게 신약 모델은 서로 의존적이다. 보편적인 교회내에 있는 지역 공동체는 그들의 배경에 상관없이 서로 배우고 서로 서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2" name="_ftn22">[22]</a> 나의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대답은 좀 예외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적응주의자 형제들은 꾸란이 중요하고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성경과 일치하는 부분에 한해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꾸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3" name="_ftn23">[23]</a>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가 한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구약은 꾸란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꾸란을 사용하는 방법이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과, 정경이 아닌 유대 문서들, 이방의 시들과 심지어는 이방의 “예언자들”까지도 다루면서 사용했던 방법과 전혀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복음주의 안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이지만, 그 방법론이 유사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신약이 영감을 받은 구약의 저자들과, 영감 받지 않은 이방인 저자들의 것들을 사용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우리 형제들이 꾸란의 문서와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 이의도 없는 것 뿐이다. 적응주의자들이 이슬람 문서를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Duane Alexander Miller가 St.Francis Magazine 5:3 (June 2009)에서 발표한 ‘Reappropriation: An Accommodationist Hermeneutic of Islamic Christianity’를 추천하고 싶다. 우리의 형제들이 사용한 방법들을 영역화하는 것에 더하여, 밀러는 또한 이러한 형태의 이슬람 문서의 사용을, 그리스도에 충성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람을 더 나은 로마 시민으로 만들었던 초기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변증에 비교한다. 그가 한 방법론의 영역화나 비교 모두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4" name="_ftn24">[24]</a> 이슬람의 배경을 가진 새로 믿게 된 형제들이 공통으로 갖는 감정은 그들의 공동체와 특히 무함마드를 배신했다는 느낌이다. 만일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대신에 서구의 관점으로만 무함마드를 보는 잘못된 정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동을 받게 된다면, 이 새로운 신자는 공개적으로 무함마드를 깎아 내리는 위험을 감수하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보다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적인 폭발(이것은 죄이다)로 인해 증거의 기회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5" name="_ftn25">[25]</a> 종교라는 말은 참으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이다. 본 논문이 주로 서구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나는 매우 서구적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즉, 신 (혹은 신들)에 관한 일단의 신앙들이라는 의미로 종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6" name="_ftn26">[26]</a> 각주 2를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7" name="_ftn27">[27]</a> 그가 이슬람 문명을 “다루는” 방식이 나와 다르기는 하지만, 유명한 세속 정치 과학자인 사무엘 헌팅턴 역시 그의 책 ‘문명의 충돌과 세계 질서의 재편’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New York, New York: Touchstone, 1996)에서 이슬람을 나와 마찬가지로 문명으로 보고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8" name="_ftn28">[28]</a>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나는 선교신학자들이 조만 간에 이 주제를 다루기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9" name="_ftn29">[29]</a> 이는 미국의 시골 지역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햇볕에 목이 타서 붉게 된 것을 말한다. 이들은 미국의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고 (남부가 북부보다 더 태양이 강하고 더 덥다), 보통 컨트리 뮤직이나, 트럭, 상스러운 말, 담배, 술 취함, 문맹, 인종주의 같은 시골의 유산이나 활동과 관계된 외부인(outsider)을 일컫는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0" name="_ftn30">[30]</a> 움마의 다른 면들을 분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과 함께 우리는 이슬람의 뿌리가 기독교와 유대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섯 기둥은 (무함마드가 사용한 예배의식을 포함하여) 각각 유대교에 혹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J. Dudley Woodberry ‘Contextualization Among Muslims Reusing Common Pillar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13:4 (Oct-Dec 1996)을 보라. 이것이 이교의 영향 및 종족의 영향과 합쳐져서 무함마드는 전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닌 심하게 혼합화된 형태의 기독교인 이슬람을 이끌게 된 것으로 보인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1" name="_ftn31">[31]</a> 보안상의 문제로 정확한 위치는 밝히지 않는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2" name="_ftn32">[32]</a> 적어도 내가 아는 공동체들 중에서는 그렇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3" name="_ftn33">[33]</a> 이것이 바로 우리 가족이 무슬림 사역에 들어섰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관점이다. 삶의 모든 면이 녹아있는 사회 집단에서 그들 가운데 살고 그들로부터 배운 후에야 나의 관점이 변하게 되었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74589565180339037862010-06-03T05:26:00.000-07:002010-06-03T05:50:50.738-07:00영적 세계의 능력대결: 이슬람과 기독교에서의 초자연 세계글쓴이: 비비안 스테이시<br />원제: POWER ENCOUNTER WITH THE SPIRIT WORLD: THE SUPERNATURAL IN ISLAM AND CHRISTIANITY<br /> 원문보기: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owerencounter.pd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owerencounter.pdf</a><br />1. 서론<br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T.C.Hammond는 그의 책 In Understandingbe Men (IVP, 1979 p. 66)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 자연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성경은 그분의 일반적인 섭리와 기적적인 활동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br /><br />1993년 7월 17일에 케스윅에서 ‘오는 것과 가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던 집회에서 도널드 잉글리쉬 박사는 마가복음 3:13-19를 나누었다. 귀신을 내어쫓는 권위를 위임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한 후 그는 ‘우리는 신약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정한 것들에 표적과 기사를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통해 일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의 말은 청중으로부터 “그게 무슨 말이야?” 하는 반응을 불러왔다.<br /><br />1.1 이슬람의 가장 큰 기적<br />이슬람에서 가장 큰 기적은 꾸란이다. 초기 순니 법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본질이시고 일곱 개의 신적 특성을 가지고 계시다. 그 특성 중에 하나가 말하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해야만 한다. 꾸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꾸란은 그분의 본질과 동일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분과 분리될 수도 없다. 꾸란의 원형은 하늘에 있고, ‘보존된 판’에 아랍어로 쓰여져 있다 (수라85:22). 이것이 꾸란의 ‘모체’이다 (수라13:39).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그것을 한 부분씩 계시하였고, 무함마드는 그것을 기록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기록하게 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영원한 책으로 사람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하셨다. 이 계시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가르치시는 것을 알고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 (수라51:56과 11:7).<br /><br />1.2 기독교의 가장 큰 기적<br />기독교에서 가장 큰 기적은 성육신하신, 살아계신 말씀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사람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사람에게 계시하셨는데, 그 분이 바로 살아계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시다 (요1:14). 이 계시의 목적은 예수님이 세상과 믿는 자들에게 계시되어야 하고 (갈1:16),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4:6).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R.V.G. Tasker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바울에게 개종은 기적적인 새로운 탄생이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능력이 반복되어 발휘되는 일이었다. 죄인인 인간의 마음에 있는 어두움을 꿰뚫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빛이 있으라” (창1:3)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깊은 곳에서 원초적으로 마음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어두움이 흩어지는 것 뿐이라고 할 수 있다.’<br /><br />1.3 계시된 종교와 민속 종교<br />어느 시점에서인가 계시된 종교들은,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민속 종교를 생산해 낸다. 놋뱀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예언자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것으로 유대 경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민수기 21:4-9).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놋뱀을 그냥 버리고 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유대인들은 아마 광야에서 뱀으로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에게 여행 내내 그 놋뱀을 보관했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로 아마도 그들은 그것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경배의 대상이 되어 그것에게 향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히스기야 왕의 개혁 동안 그 놋뱀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 즉 쓰레기로 간주되어 처리되었다 (왕하 18:4). 구약의 기록 후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기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레미야는 동시대에 살고 있던 칠 세기의 주민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존재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자동보험장치처럼 여겨지는 것을 꾸짖었다. 그들은 성전이 적으로부터 그 도시를 보호해주는 안전장치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영적인 타락은 그들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을 이끌게 되어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적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고 계셨다 (렘7:1-8).<br />신약에서 의사인 누가는 민속 종교와 관련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 치유를 경험한 여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눅8:43-48). 예수님은 능력이 자신으로부터 나간 것을 아셨다. 후에 그 여인이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바로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라고 밝혔을 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민속 종교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셨다. 그것이 기적적이기는 하지만 마술적인 치유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신중한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어떻게 그들의 병자를 침상 채로 거리에 눕혀놓아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라도 병자들에게 드리워지기를 바랬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행5:14-16). 그 배후에는 미신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역시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온 모든 사람들이 치유되었다는 기록을 읽게 된다. 비슷한 일들이 바울이 가르치고 설교할 때도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19:10-12).<br /><br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베개 밑에 성경을 놓거나, 목에 십자가를 걸어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도 한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비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이나 십자가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성경이나 십자가에 기계적이거나 마술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그것은 사용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다. 민속 기독교는 필리핀과 남아메리카에서 흔하게 나타나지만, 모든 대륙에서 찾아 볼 수 있다.<br /><br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에서 하는 일들 중에는 그들의 경전이 의도하는 것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다른 점에서 각각 다양한 정도로 계시된 것에서 벗어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마술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경전의 숭배나 경전을 마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경전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만든다. 주문이나 성자에 대한 지나친 경의는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서 하나님의 의지하는데 방해가 된다. 문맹이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베나지르 부토는 그의 자서전 ‘동방의 딸’에서 1969년 카라치를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45쪽): 나는 조각된 나무로 된 출입구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나의 머리 위로 나의 새 성 꾸란을 지나가게 하고 있었다. 나는 꾸란에 입맞추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함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br /><br />아버지가 처형당하기 전에 그는 딸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142쪽): Lal Shahbaz Qalander에 가서 기도해라. 지난 축일 이후에 그곳에 가지 못했구나. 그는 가장 유명한 성자 중 한 분이시다. 나의 할머니도 나의 아버지가 아기적 몹시 아파서 거의 죽게 되셨을 때 그 사당에 가서 기도하셨단다. 하나님께서 같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br /><br />빌 머스크는 그의 책 ‘이슬람의 숨겨진 얼굴’에서 일반 무슬림들이 행하는 민속적인 행위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민속 종교의 관습들이 갖는 미신적인 부분이 많은 무슬림들의 주의를 끈다.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중심으로 제시해보고자 한다.<br /><br />2. 이슬람에서 내가 관찰한 미신들에 대한 간단한 서술<br />2.1 사당에서 일어나는 기적들<br />나는 부르스 니콜라스 박사와 한 그룹의 학생들을 데리고 인도의 Pune 근처 마을인 Shivapur에 있는 수피 까마르 알리 다르베쉬의 사당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우리는 돌들이 공중에 뜨는 현상을 지켜 보았다. 두 개의 커다란 둥근 돌이 서로 가깝게 놓여있었다. 우리는 약 70킬로그램쯤 되는 그 큰 돌이 성자의 능력으로 2미터 가까이나 되게 공중에 뜨는 것을 보았다. 열 한 명의 남자들이 오직 집게 손가락만을 사용하여 하나가 되어 그 성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둥근 돌을 몇 분 동안 공중에 떠 있게 하였다. 무슬림들과, 힌두교인들, 그리스도인들이 수 백 명씩 매일 그 사당에 왔는데, 그 이유는 이 기적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근처에 있는 샘의 물을 가져다가 치료에 사용하거나 그 성자에게 기도해서 치유를 받기 위해서였다.<br /><br />내가 보기에 그런 기적들과 치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존 와이트가 쓴 책에서 일부를 옮기고 싶다 (John White, Greater than Riches, IVP 1992, p. 55): ‘사단의 능력은 타락한 신의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심하게 오염된 물도 여전히 물이고 또 물처럼 보일 것이다. 또한 깨끗한 물과 같은 맛을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단이 일으키는 기적이 “심지어 택함 받은 자”까지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지옥의 권세는 점차로 얽매어 오고, 결국에는 죽음과 파멸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구속하고,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깨끗하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회복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고후 11:14)<br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인 것 혹은 그렇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br /><br />2.2 귀신축출 Exorcism<br />오만의 수도인 Muscat에서 나는 무슬림 귀신 축출사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저녁에 몇 시간씩 그 일을 하고, 악한 영을 쫓아내는 일을 하였다. 그 귀신 축출사가 하는 주문과, 그 일을 당하는 사람의 날카로운 말소리를 듣는 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보다는 하나님을 조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님을 조정하기는 것보다도 사단과 악한 영, 혹은 진 jinn 을 받아들이기를 택하기도 한다. 꾸란은 하나님이 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한다: ‘나는 진과 인류를 창조하여 그들이 나를 경배하도록 하였다’. (수라 51:56) 선한 영향을 미치는 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진들은 악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존경 받는 파키스탄의 신학자 Kausar Niazi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들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서 인간을 소유하고 조정하여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한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위에 대한 논쟁과는 별도로 경험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수 많은 신학 박사들의 저술들이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진이 인간의 몸에서 도망가도록 만들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요즘에도 한 경건한 학자가 필자에게 와서 그의 아내가 수년 동안 고통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어떤 의학적인 치료도 그녀를 치료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신비로운 학문에 능통한 한 사람을 만나 그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진의 장난으로 그녀가 고통 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후부터는 그녀가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남편이 꾸란을 읽어주었다. 점차로 그녀가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그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경련이 일어나는 동안 진이 그 경건한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다. 그는 Qasida Burda를 암송하고 있었기에 쉬지 않고 그것을 외울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Qasida 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한 번은 그가 진에게 그의 존재를 증명해 보라고 요구했다. 갑자기 신선하고 향기로운 카르다멈 식물 가지가 그의 무릎에 떨어졌다. (Creation of Man, pp.48-49)<br /><br />2.3 부적이나 주문들 Amulets or charms<br />꾸란 구절들을 담고 있는 부적을 목에 걸고 다니면 악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보호해 준다.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무슬림들은 세상 사람들이 행운의 물건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부적들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위에서 말한 Qasida Burda에 있는 구절들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부적으로 사용된다. 유명한 시 평론가인 Al-Bajuri는 105-115의 구절들에 대해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친구와 다투고 나서 이 구절을 사자의 가죽에 적어서 터번 안에 넣고 그 친구에게 아무 말 없이 다가간다면 그 친구가 친근하게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라고 했다. (Ritchie p.18을 보라) <br />하나님의 99가지 이름들 역시 종종 마술적인 주문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Al-Halim이라는 이름 (관대하신 분이라는 뜻)에 대해서는 만일 농부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 그가 뿌려둔 씨와 함께 놓는다면 그 농부의 작물은 어떤 병이나 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악한 눈에 대한 두려움과 사단의 영향을 미리 예방하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민속 종교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Murray T. Titus는 그의 책 ‘인도와 파키스탄의 이슬람’ (Islam in India and Pakistan, 1959에 개정 재판됨) 에서 성자 숭배에 대해 말하면서, 성자가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성자들의 무덤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소송한 사람이 재판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찾아오기도 하고, 말을 잃어버린 농부도 오고, 아이를 갖고 싶은 여인도 찾아 오고, 아들이 병에 걸린 아버지가 치유를 받기 위해 찾기도 하고, 사업에 성공하고 싶은 사업가도 찾아오고, 운 좋은 날이 되게 해 달라고 사냥꾼도 찾아오고, 심지어 도박꾼도 찾아온다.’ (138쪽)<br /><br />1989년에 출판된 빌 머스크 박사의 책 ‘이슬람의 숨겨진 얼굴’ The Unseen Face of Islam 에 의하면 그 때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Fatima Mernissi가 모로코에서 지낸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쓴 자서전적인 책 ‘하렘의 내부’ The Harem Within는 그녀와 그녀의 남자 형제 사미르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학살당했을 때 그 피에 젖은 시체들이 집으로 운반되는 것을 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너를 금요일마다 계속 Moulay Driss 신전에 데리고 가서 거룩한 사람들에게 너를 보고해주는 의식을 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일년 내내 네가 다시 잘 자게 될 때까지 네 베개 아래에다 꾸란 부적을 놓아두어야겠다.” (24쪽)<br /><br />2.4 유품들<br />파키스탄 라호르에 있는 Badshahi 모스크에서 나는 순니와 쉬아 모두가 관심을 갖는 27개의 유품들이 전시된 곳을 방문해 보았다. 유리 칸막이 뒤로 무함마드가 집었던 지팡이와, 그가 신었던 세 개의 샌들, 속옷, 마법의 바둑판 무늬가 그려진 군기, 파티마의 손수건과 기도 매트, 카르발라 전장에서 가져 온 흙. 그 유품들을 보는 사람들 중에는 가능한 유품에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쓰면서 유품들로부터 축복이 그들에게 옮겨오도록 하기 위해 유리에 손과 얼굴을 비벼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특히 쉬아 사람들은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순교한 곳인 카르발라에서 온 흙을 보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br /><br /><br />Kausar Niazi는 그의 책 ‘우리의 인도자 이슬람’ Islam our Guide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p. 185):<br />부카리의 전통에 의하면 우쓰만이 말하기를 믿는 자들의 어머니인 움 살라마가 성스러운 예언자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은으로 된 관에 가지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 악한 눈의 희생물이 되거나, 어떤 다른 병으로 고생할 때면 그녀에게 갔다. 그녀는 그 머리카락을 물에 넣고 아픈 사람에게 그 물을 마시게 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의 병이 낳았다.<br /><br /><br />2.5 위해를 가하는 마술 Harmful magic<br />파키스탄에 있는 한 푼자비 마을에서 나와 나의 두 동료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마술사들의 강한 힘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일을 나의 책 ‘사단을 이기시는 그리스도’ Christ Supreme over Satan 에 기록한 바 있다. 다른 마을에서 사역이 있을 때 우리는 하루의 사역을 마치고 저녁마다 방 한 칸짜리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 집은 빌린 것으로 열흘 동안 우리의 거처가 될 곳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해 저녁 예배를 드렸는데 한 이십 명쯤 되는 사람들이 정원에 와서 앉았다. 정원 밖에서는 어둠에 묻혀 있는 마을 광장에서 이백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조용히 자발적으로 숨어서 모임에 동참하곤 했다. 이것이 아마도 그 악한 마술사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질병과, 악몽, 어둠 속에 보이는 형체들, 침대 머리맡의 전갈, 이상한 노크소리, 그리고 이상한 모양의 핏자국 등이 발생했다. 하나님은 곧 질병을 낫게 하시고, 우리 세 명 중 한 명은 항상 망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빛의 벽이 건물을 둘러싸는 것을 보았다. 후에 우리는 그 집이 사단을 숭배하는 의식을 행하던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 가족이 회개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서게 되도록 도전하고 기도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스가랴 2:5) 그 후 몇 달 동안 그 가족들과 관련된 친척들을 합해 여러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경험했다.<br /><br />2.6 귀신이 나오는 집 Demon infested buildings<br />나는 무슬림들이 악한 영들이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여러 집들에서 살아 보았다. 우리가 살아본 경험으로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어떤 때는 선교사들이 몇 년 전에 그런 집들을 싸게 사기도 했는데, 그 집들은 악한 영들이 살고 있어서 사람들이 살기 두려워하는 집들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런 집들 중 몇 개는 다른 나라에 있었다. 이 초기 선교사들 중에 몇 명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능력과 그의 피의 능력으로 그 집들을 정켤케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는 했지만 먼저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br /><br />2.7 꾸란과 하디스의 민속적 관습에 대한 태도 Note on the attitudes of the Qur’an and Hadith to folk practices.<br />꾸란은 마법이 죄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Surah 113:4). 그러나 신명기 18:10-12 (10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에 나오는 것과 같이 마술적인 영역에 대해 무엇이 죄인지를 분명하게 해 놓지 않았다. 꾸란은 심지어 이슬람 이전 시대에 만연했던 정령숭배의 몇 가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수라 56:75는 점성술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56:75 실로 지는 별들을 두고 맹세하나니 너희가 알고만 있다면 실로 이것은 하나의 위대한 맹세로), 사실 해와 달에 대한 숭배는 꾸란에서 금지되어 있다. (수라 41:37 하나님의 예증 가운데 밤과 낮이 있고 태양과 달이 있노라 그러므로 태양과 달을 숭배하지 말라. 진실로 너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그것들을 창조한 그분만을 경배하라.) <br /><br />무슬림 세계에서 사십 년이 넘도록 사고, 일하고, 여행하면서 나는 꾸란을 바탕으로 하는 이슬람이나 민속 이슬람이 서로 뒤엉켜서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꾸란이 정령숭배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고, 하디스는 심지어 많은 민속 행위들을 승인해주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민속 이슬람에는 사단이 활동하는 증거가 보이는데, 이는 정령숭배를 밑바탕으로 하는 모든 민속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스크와 사당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결박이 끊어지고 갇힌 자들이 풀려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무슬림 사역을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 전쟁의 특별한 영역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br /><br />3. 이슬람의 미신행위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과 능력대결<br /><br />3.1 영적 전쟁<br />먼저, 영적 전쟁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보도록 하자. 영적 전쟁은 사단에 대항하는 것이고, 사단은 그에 상응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기적을 행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분명하게 과시한다. 그러나 사단이 사용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그의 전술의 일부에 불과하다. 신약은 사단이 사용하는 초자연적인 능력보다도 사단이 인간의 연약한 부분을 공격한다는 것을 더 강조한다 (갈5:19-21).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사단과의 영적 전쟁은 악한 초자연적인 현상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에서 일어나는 부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행위들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br /><br />3.2 치유와 기도<br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다. 무슬림들은 아플 때 종종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기도해주는 것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족 단위로 수 백 명의 무슬림들과 함께 기도를 해 보았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미리 말하고 허락을 구한 후 기도한다. 보통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분의 사랑에 감사 드리고, 그 환자의 이름을 부르며 위해서 기도하는데 이사야 53:5와 같은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 53:5<br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만일 그 환자가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예수님의 명예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며, 만일 그 사람의 병이 나면 그 사람은 보통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때로 병이 사단에게서 온 경우가 있는데, 베드로의 장모의 경우가 그랬다. 예수님은 열을 꾸짖으셨고, 그녀는 곧 병이 나았다 (눅 4:38-39).<br /><br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단에게서 온 병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할 권세를 주셨다. 병에 사단적인 요소가 있다면 기도로 가장 쉽게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기도를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한다. 병의 원인은 복잡한 경우가 많다. 때때로 병의 치유는 기도와 치료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경우 역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를 보여 주셨다 (막8:23-25). 치유는 병자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br />(막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br /><br />3.3 축사<br />축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단이다. 축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축사를 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두 명이나 세 명이 함께 팀으로 일하는 것이 좋다. “엠마오로 가는 길의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 Muslims and Christians on the Emmaus Road 에 내가 쓴 글 (17장 축사와 치유 The practice of exorcism and healing)에서 좀 더 자세하게 이 주제를 다루었다.<br /><br />그러나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그 글을 쓰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한 작은 기독교 병원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 병원의 이집트인 의료 책임자가 기독교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나를 며칠간 초대하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악한 영에 사로잡힌 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여성과 관련하고 있는 작은 팀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 팀은 그 여인의 남편인 헌신된 그리스도인과, 정신과 의사, 그리고 그 의료관리자로 이루어져있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 교회에서 그 여인을 만났다. 나는 통역자를 통해 그녀를 인터뷰하여 내가 스스로 진단해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곧 그녀가 아직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녀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보게 되도록 도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br /><br />잠시 후에, 나는 그 통역자에게 내가 그녀를 위해 기도할 것인데 영어로 할 것이기 때문에 통역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영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 십 분 동안 큰 소리로 기도했지만, 내가 기도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사야의 말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는 부분을 인용하자 잠잠하던 그 여인이 자제심을 잃고 발광하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과 그 의사는 그녀를 신도들이 앉는 걸상에서 단상으로 데리고 갔는데 세 사람이 그녀를 붙들어야 했다. 나는 그들이 내린 진단이 맞았으며 그녀가 사단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확신했다. 여러 사단이 그녀를 붙들고 있었는데 사단들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말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그리고 언제 사단들이 그녀에게 들어갔는지를 알아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사당에 간 적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언젠가 특별한 영적인 목적으로 그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사당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녀의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세 시간씩 그녀와 악한 권세와 씨름했다. 그녀는 내가 머무는 동안 악한 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얼마 후에 구원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br /><br />3.4 건물을 정결케 함<br />무슬림들은 때로 건물 임대를 거절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곳에 악한 영이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들은 주로 건물의 특정 부분에 거주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건물을 정켤케 하는 것은 무슬림들에게 확신을 주는 증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때로 건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곳에 들어가 살기 전에 정결하게 하는 과정을 하지 않아서 사역에 피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건물이 지어진 곳에서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건물을 짓는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악한 영들을 달랬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건물의 기초를 놓기 전에 동물 제사를 지냈을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마술이나 신비적인 행위들을 한 경우도 있다. 나는 점치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살았던 집을 정결케 하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곳에 이상한 표시가 되어 있고, 어떤 영역에 가면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살고 난 후에 살았던 한 그리스도인은 그 집의 내력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정결하게 하는 예배를 드리자 그 집이 얼마나 평화와 주님의 임재로 가득 찼는지를 보게 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br /><br />때로 한 장소가 주변 환경이나 그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조용히 진행되는 정결하게 하는 예배는 내어 쫓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최근에, 내 친구 하나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의논했던 이전예배를 이틀 전에 드렸어. 알랜과 우리의 렉터가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초대되어 가셨던 집들을 기억했지.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집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길에 있는 모든 집들에 대해 생각했지. 열 네 명이 모였었는데, 딱 맞게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정도의 숫자였지. 우리 이웃들이 많이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 후에 많은 집들이 마음을 열어주었어.’<br /><br />여기에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장소를 정결케 하는 교회 기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님,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단을 속히 멸하소서. 이 장소(방, 집, 교회)를 모든 악한 영, 모든 헛된 상상과, 투영들과, 악한 속임으로부터 구원하사,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지정된 곳으로 쫓겨가게 하사, 그곳에 영원히 머물게 하소서. 하나님, 평화를 주러 오신 성육하신 하나님이시여 평화를 주소서. 아멘.<br /><br />3.5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과 꿈들<br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을 보거나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Seppo Syrianen은 파키스탄에서 짧게 조사를 하였는데 성경에 대해 듣거나, 읽는 것,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과 꿈이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였다. 우리가 무슬림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비전과 꿈을 보도록 기도할 수 있다. 파키스탄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한 선교사는 1994년 3월 2일자 기도편지에 이렇게 썼다: ‘라마단 27일째 밤은 무슬림들에게 매우 특별합니다. 그들은 그 밤에 특별한 계시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몇 명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br /><br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터키에서 개종한 사람들 중 적어도 35%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꿈이나 비전에 반응한 사람들이었다. 이슬람의 탄생지이자 심장부인 사우디 아라비아를 포함한 다른 많은 중동 나라들에서도 사람들은 꿈을 통해 성경을 읽게 되고 찾게 된다. 그들이 글로 쓰여진 말씀 (성경)을 발견하면 꿈이나 비전은 중단되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비전을 본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와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전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요점은 그 경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다른 것에서 온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예수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실제의 예수님은 성경에서 찾게 될 것이다.<br /><br />3.6 부적과 주문들<br />부적은 주로 하나님의 이름이나 꾸란에 나온 구절들, 혹은 그에 상응하는 숫자를 담고 있다. 부적을 먹을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으며 때로 그 사람과 사단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부지중에 얽매일 수 있다. 나는 때로 부적을 목에 걸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묻는다. 그가 어떤 구절이 들어있다고 대답하면 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실지 우리 마음에 간직하는 것을 더 좋아하실지를 묻는다. 그 대답은 항상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로마서 5장 8절과 같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내가 이 구절을 말해주고 그 뜻을 잘 설명해 준 후에 그 신학적인 것을 염려하는 무슬림 여성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br /><br />3.7 주술, 저주, 악한 눈<br />내 그리스도인 친구 몇 명은 무슬림들이 그들에게 내린 저주나 주문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적이 있다. 한 작은 튀니지 마을에서 있었던 일과,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카라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 타격은 주로 질병이나 몇 달간 심지어는 몇 년간 계속되는 우울로 나타나는데 그 일을 당한 사람이나 그 원인을 발견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 저주나 주문을 끊을 때까지 계속된다. 누군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br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미운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거나, 주문 거는 사람에게 나쁜 주문을 부탁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스 정교회가 주요 종교인 나라에서 지난 4년을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br /><br />Alfred Guillaume은 그의 책 ‘이슬람의 전통’ The Traditions of Islam 에서 하디스 즉, 전통이 이슬람 이전 시대의 정령숭배적인 관습들을 많이 담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는 ‘Auf b.<br />Malik Al Ashja’i의 말을 인용한다 (119쪽): ‘우리는 무지의 시대에 주문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도시여, 그것들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고, 그 분은 “나에게 너의 주문을 보여봐라. 다신교(shirk)의 흔적이 없는 주문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br /><br />여러 나라에 사는 많은 무슬림들이 악한 눈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가 두려움을 다루도록 도우시는지 나눌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눈동자로 인도하시는지 말할 수 있다. (시32: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주문이나 악한 눈의 영향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이겨낼 수 없다. 한 헌신된 그리스도인 친구가 한 무슬림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에게 좋은 차가 있었는데 그 차를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하루는 와서 우리를 열심히 설득했지만 우리는 팔지 않겠다고 했죠.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 몇 시간 후에 심한 사고가 나서 그 차를 폐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악한 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br /><br />또 다른 여인은 이런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내 여동생이 한동안 아팠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누군가 말하기를 악한 눈의 영향이라는 거예요. 그녀는 말하기를 우리가 빨간 고추들을 태우면 악한 눈의 효력이 없어질 거라고 했어요.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엄마는 손해 볼 거야 없지 않느냐며 빨간 고추들을 태웠죠. 그리고 나서 바로 동생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br /><br />사람들은 악한 눈에서 보호 받기 위해 부적을 지니고 다닌다. 또한 아이를 칭찬하거나 예쁘다고 할 때 질투하는 마음이 있어서 누군가가 그 아이를 악한 눈으로 보게 될 것을 염려하여 부적을 지니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질투를 다루고자 하시는지 나눌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통해 우리에게 깨끗한 새로운 마음을 주실 수 있다 (시편 51: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br /><br />선한 목자가 되셔서 주님은 당신의 양들을 주목하여 보시고 보호하신다. 그분은 또한 옥에 갇힌 자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악한 권세를 끊으실 수 있다.<br /><br />3.8 사단의 힘을 결박하기<br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를 사용하는 것은 때로 복음을 전할 길을 열어주고, 해가 되는 마술을 행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막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br /><br />3.9 악한 날에 견디는 법<br />영적 전쟁에서 견디는 길은 이겨내는 길뿐이다. (에베소서 6:10-19).<br /><br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br /><br />4. 결론<br />4.1 사단과 그와 관계된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은 교회에서 초창기에 행했던 세례식의 한 부분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기름을 바르고 축사를 행한 후 세례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사단과의 관계 끊기가 없기 때문에 개종자들이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br /><br />4.2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가르치고, 필요하다면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롬 15:18-19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br /><br />4.3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무슬림과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사역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방법이나 의식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 <br /><br />4.4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전쟁에서 강한 능력이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히 11:3 and 고후4:6). 영원하시고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시자 동시에 말씀 그 자체셨다. (요1:1, 14) 씨앗의 비유에서 ‘씨앗은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 logos 를 말한다. 로고스는 신약에서 330번 나왔다. ‘말씀’을 가리키는 다른 그리스어는 레마 rhema 인데 그것은 70번 사용이 되었다. 레마는 입밖에 내어 말함, 물질, 토픽, 명령 혹은 격언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6:17에서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레마)’이다. 이는 방어도하고 공격도하는 무기이다. 영적인 대립이 있을 특정 경우들에 사용할 수 있는 말씀을 정리해 보았다. <br /><br />A.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씀 (이사야 53:5)<br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br /><br />우리는 단순히 ‘메리를 고쳐주소서’ 하고 기도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녀의 상황과 관계가 있는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이것이 아마 치유사역은 종종 성만찬을 행한 후에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만찬 중에 레마를 말한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 야고보서 5:15도 도움이 된다.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br /><br />B. 두려움과 싸우는 말씀 Scripture in combating fear<br />‘두려워 말라...’. 성경은 ‘두려워 말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왕과 제사장(계1:6)들로서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할 때 그랬던 것처럼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수 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br /><br />C. 영적 모욕에 대항하는 말씀 Scripture in resisting spiritual assault<br />70인역으로 마4: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과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을 보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단과 대항하실 때 어떻게 말씀을 사용하셨는지가 분명하게 나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br /><br />D. 중보와 찬양의 말씀 Scripture intercession and in praise<br />초대 교회는 중보할 때 말씀을 많이 사용하였다. 당시 일어나도 있던 일들과 경험들에 적용하고 그들의 기도에 말씀을 포함했다. (행4:25-26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말씀을 사용하였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시56:4).<br /><br />E. 집을 정결케 하는 말씀 Scripture in house cleansing<br />그리스도인의 집이나 ‘거룩한 땅이어야 하는 곳은 그곳이 아무리 사방이 악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의 대사를 위한 특권을 부여 받은 땅이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대사는 여분의 영역적 권리를 누린다’고 두 명의 유명한 하나님의 일꾼들인 Mildred Cable and Francesca French은 그들의 공동저서 ‘그리스도의 대사들 Ambassadors for Christ’ 에서 쓰고 있다. (152-154쪽 ‘대사의 영광’ The Splendour of the Embassy 장에 나와있다.) <br /><br />F.축사에 관한 말씀 Scripture in exorcism of evil spirits<br />악한 영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예수님의 피와 그 이름의 능력을 당해낼 수 없다.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축사를 할 때 우리의 권위를 세워주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사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우리가 말씀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면 영적 전쟁에서 방해를 받게 된다. <br /><br />5. 그룹 토의를 위한 제언<br /><br />5.1 다양한 배경의 불신자들이 속박에서 풀려야 한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br /><br />5.2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오늘날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의 사역에 적응해야 할까?<br />How do we apply this in our ministry to Muslims today?<br /><br />5.3 왜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무슬림들에게 죄사함의 확신을 주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일까?<br /><br />5.4 왜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꿈과 비전을 통해 예수님 자신을 계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br /><br />5.5 한 무슬림이 당신에게 와서 그가 예수님에 대해 본 비전을 설명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br /><br />5.6 치유나 다른 필요를 가지고 있는 무슬림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까?<br /><br />5.7 어떤 종류의 능력대결에 관여하게 되든지 우리는 미리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br /><br />6. 간략한 참고도서 목록<br />Note: a courtesy visit to your local mosque will be very instructive.<br />Generally, the mosque authorities will receive you well and explain<br />their point of view. They are generally generous in giving literature<br />in the local language and in English. Sometimes they have a bookstall<br />with inexpensive materials. Acquiring such primary material<br />will help us understand our neighbours better.<br />Ali, Muhammad A Manual of Hadith Curzon Press, London and Dublin, 1944, reprinted 1983<br />Atiya, Nayra Khul-Khaal: Five Egyptian Women Tell Their Stories<br />The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1987<br />Bhutto, Benazir Daughter of the East, Mandarin, London, 1988<br />Fernea, Elizabeth A Street in Marrakesh, Anchor Press, Garden City, New York, 1980<br />Green, Michael I believe in Satan’s downfall, Hodder and Stoughton, London, 1980<br />Groothhuis, Douglas R. Unmasking the New Age, IVP, Downers Grove, Illinois, 1986<br />Guillaume, Alfred The Traditions of Islam, Universal Books, Lahore, 1977<br />Jeffery, Patricia Frogs in a Well:Indian Women in Purdah, Zed Press, London, 1981<br />Mawdudi, Abdul A’la The Fundamentals of Islam, Islamic Publications Ltd. Lahore<br />Towards Understanding Islam, Islamic Foundation, Leicester, 1981<br />Mernissi, Fatima The Harem Within. Tales of a Moroccan Girlhood. Bantam Books, London, 1995<br />Musk, Bill The Unseen Face of Islam: Sharing the Gospel with Ordinary Muslims, Marc Europe, 1989<br />Niazi, Kausar Creation of Man. Sh. Muhammad Ashraf, Lahore, 1975<br />To the Prophet. Sh. Muhammad Ashraf, Lahore, 1976<br />Islam our Guide. Sh. Muhammad Ashraf, Lahore, 1976<br />Padwick, Constance Muslim Devotions. A Study of Prayer Manuals in Common Use. SPCK, London, 1961<br />Pickthall, Mohammed The Meaning of the Glorious Koran, Mentor Books, London, n.d. Qasida Burda (The Prophet’s Mantle) Arabic with translation into various languages eg. Urdu, Persian, Turkish, Berber, Swahili, English Qur’an Arabic with Urdu and English parallel translations.<br />Taj Company, Karachi Ritchie, James McL Qasidatu-l-Burda Translations and Presentation.<br />Article in Encounter, No 171-172 Pontificio Istituto di Studi Arabi e d’Islamistica, Rome. 1991<br />Sheikh, Bilquis I Dared to Call Him Father, Kingsway/STL, Eastbourne/ Bromley, 1978<br />Shems, Friedlander with al-Hajj Shaikh Muzaffereddin Ninety-Nine Names of Allah, Wildwood House/<br />Graham Brash, Singapore, 1980<br />Stacey, Vivienne. Christ Supreme over Satan, Masihi Isha’at Khana, Lahore, 1986. 4th English Edition 2001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2158883559915547522010-05-18T04:50:00.000-07:002010-05-19T02:22:27.800-07:00무슬림 개종자들에 관한 연구: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유 (III)<div>글쓴이: Ant Greenham<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 name="_ftnref1">[1]</a><br />원문: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df/2010/116-175SFMFEB2010.pd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df/2010/116-175SFMFEB2010.pdf</a> </div><br /><div>원제: A STUDY OF PALESTINIAN MUSLIM CONVERSIONS TO CHRIST<br /><br />6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개종 요인 분석<br />6.1 이슬람의 역할<br />다량의 연구를 분석할 때나 사용할 수 있는 통계적인 방법론을 본 연구에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정리해 본 개종 요소들은 눈에 띄는 것들을 모아놓은 것뿐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 name="_ftnref2">[2]</a> 결과를 보면 어떤 개종 요소들은 전혀 나타나있지 않거나 혹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어떤 것들은 자주 반복된다. 팔레스타인 응답자들 그룹에 적용된 개종 패턴은 이와 같이 좀 덜 하게나 좀 더 눈에 띄는 영역들로 나타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 name="_ftnref3">[3]</a><br /><br />소수의 응답자들에게 나타난 중요한 개종 요소들을 논의하기 전에, 전체적으로 빠져있는 요소를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응답자들은 개종 전에도 이슬람에 별로 깊은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금식하기는 했지만, 무슬림 성직자였던 사람은 없었다. (이슬람에는 성직자 개념이 없다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맘과 같이 전적으로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 번역자) 오직 한 명, 여자 4만이 메카에 한 번 다녀왔으나 그것도 소순례였다. 따라서 응답자들 중 아무도 개종 전에 강경한 무슬림이었던 사람은 없다. 남자 10은 스스로 자신이 좀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역시 이슬람뿐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이 있었고, 다른 방법으로 두 종교 모두에 끌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만은 분명하게 추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종자들의 약한 이슬람 배경은 강한 이슬람의 영향이 있는 경우 개종이 힘들다는 가정을 어느 정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개종자 개개인을 보았을 때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공동체적으로 보았을 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이슬람을 강하게 신봉하던 사람이 180도 변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우는 없지만, 남자들 중 일곱은 개종 후에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이는 공동체가 개종자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공동체적으로 이미 강한 이슬람의 영향이 미쳐지고 있음에도 개종자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강한 이슬람의 영향이 있는 경우 개종이 힘들다는 말이 반만 맞는 말이 된다는 뜻이다. – 번역자)<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 name="_ftnref4">[4]</a> 이 일곱 명 중에 여섯 명과 다른 여자 두 명(여자 1과 여자 9)은 개종 이후에 공동체로부터 거절을 당했다. 따라서 개종자들 자체에는 강한 이슬람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동체 자체에는 강한 이슬람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개종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영향력은 아니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 name="_ftnref5">[5]</a><br /><br />또한 눈에 띄는 것은 대다수의 남자들이 죽음의 위협을 경험했거나 두려워한 반면,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부분 공동체에서 거절 당하지 않았고, 아래에서 일부 개종자 여성들에게 미친 공동체의 역할을 정리해 보았다. 반면에 일부 남성들은 여러 다른 강도의 죽음의 위협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개종자들 자체는 강한 무슬림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속한 공동체 (혹은 가족)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새로운 삶에 격렬하게 반응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의 위협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사는 남성 무슬림 개종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br /><br />6.2 현저하게 눈에 띄지는 않는 영역들<br />이제부터는 응답자들 중 소수만이 개종의 요소로 꼽았던 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몇 명의 개종자들이 개종에 있어서 독특한 요소를 강조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인터뷰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개종 패턴에 크게 기여하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히 논의되지 않겠지만, 조금만 다르게 표현된다면 아래의 표와 같이 더 눈에 띄는 요소들로 구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 3이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 것과 남자 7이 하나님을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로 만난 것을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남자 7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초점을 맞춘 것도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라는 영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자 9가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도 성경 읽기라는 영역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한 사람(남자 8)만이 특별하게 언급하였다. 다른 분석자 같으면 둘을 제외한 모든 개종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가 영생에 대한 확신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하면서, 이 요소를 좀 더 강하게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대부분의 응답자들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개종 요인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별로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은 개종의 중요한 요소로 보아야 할 것 같아, 아래에서 소제목으로 다루고 있다.<br /><br />다른 개종의 중요한 요인들은 여전히 소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 명의 응답자들이 언급한 것들이다. 그 요인들은 정치적 불안정과, 이슬람에 대한 거절, 기독교 미디어, 개인적 위기, 공동체, 하나님의 영광이다.<br /><br />6.2.1 정치적 불안정<br />나는 정치적 불안정이 무슬림 개종자들이 그리스도께로 오게 되는 주요 원인일 것이라고 기대했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6" name="_ftnref6">[6]</a> 정치적 불안정과 연관된 절대적인 필요는 다소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이 많은 개종자들의 개종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br /><br />세 응답자, 남자 4와, 6, 8은 정치적 불안정을 중요한 요소로 지적했지만, 이 세 남자들도 각각 그것을 다르게 보고 있었다. 남자 4는 고향마을에서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의 긴장이 있는 가운데 자신이 무슬림 갱단에 들어간 것에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 6의 과거와 현재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라는 사실에 그늘져 있다. 그로 인해 그는 이슬람을 거절하고 계속되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인식하게 되었다. 남자 8은 체포된 후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결국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7" name="_ftnref7">[7]</a> 남자 4와 6, 8은 각각 다른 종류의 필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필요가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폭넓은 상황가운데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그들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필요 가운데 만나게 된 예수님이 그 필요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br /><br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경험은 어느 정도 개종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으나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정치적 불안정은 그들의 삶에서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라서 그것 자체를 개종으로 이끈 주요 원인으로 보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br /><br />6.2.2 이슬람에 대한 거절<br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응답자들 중 아무도 개종 이전에 특별히 강경한 무슬림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들 중 여섯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이미 이슬람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들 중 둘(남자 6과 여자 10)은 그들이 이슬람을 거절하게 된 이유를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연관시켰다. 반면에 남자 4는 믿기 전에는 이슬람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최근에 개종하면서 이슬람을 거절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슬람에 대한 거절을 중요한 개종의 요인으로 꼽은 세 명 중에서 오직 남자 4만이 개종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을 거절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즉, 개종이전에 이슬람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종의 과정에서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를 택하게 된 것이다. – 번역자) 또한 그가 바로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나에게 조심스럽게 알려준 사람이다. 그는 그 자신의 경우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슬람에 대한 거절이 무슬림의 개종에서 중심 요인이 된다고 보지 않았다. 남자 4의 경우가 보여준 이슬람에 대한 거절이라는 독특성은 별개로 하더라도(남자 4는 이슬람이 싫어서 기독교를 택했다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한 경우이다 – 번역자), 다른 증거도 이 요인을 신중하게 보고 싶어했던 그의 생각을 지지해 준다. 적어도 반 이상이 꾸란의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이슬람의 경전에 대한 거절이 개종을 일으키는 주요 요소가 아님을 말해준다. 또한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종종 개종의 결과로 이슬람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경우 개종 이전에도 강경한 무슬림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개종하게 된 것은 이슬람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요인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br /><br />6.2.3 기독교 미디어<br />기독교 미디어는 다섯 명(남자 1, 8, 10, 여자 1, 2)의 경우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미디어의 종류는 다양했고, 각자에게 다른 영향을 미쳤다. 남자 1은 비디오로 된 성경 교재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그가 정말 개종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자 8은 그의 친구 남자 7이 가지고 있는 문서들을 읽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까지 읽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남자 10은 어린이 성경과 기독교 텔레비전을 접하게 되었는데 둘 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린이 성경을 통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품게 되었고, 기독교 텔레비전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여자 1과 2는 모두 기독교 테이프의 역할을 강조했다. 테이프가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알고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br /><br />이처럼 한 가지 특별한 기독교 매체가 개종의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예수님이 계신 곳’ 역시 특별한 유형 없이 여자 1부터 8까지 (그리고 남자 1에게 역시) 여러 모양으로 영향을 미쳤다. 오디오 시각 자료가 분명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아마도 대부분의 개종자들이 제한적인 교육을 받았고 따라서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오디오 시각 기독교 매체는 거기에 있는 모든 응답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8" name="_ftnref8">[8]</a> 그러나 여자 1부터 8까지 계속해서 그러한 미디어의 유익을 얻는다고 해서 미디어가 반드시 중요한 개종의 요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미디어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지는 않았다.<br /><br />또한 주목할만한 것은 미디어의 역할을 강조했던 네 명의 개종자들이 미디어만을 독립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9" name="_ftnref9">[9]</a> 그들은 기독교 미디어를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나, 성경 읽기, 혹은 예수님의 존재와 같은 요소들과 연결시키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0" name="_ftnref10">[10]</a> 따라서 다양한 미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소수의 개종자들에게 대체로 보좌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br /><br />6.2.4 개인적 위기<br />개종자들 중에 일곱이 (즉,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 삼분의 일 정도가) 개인적 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자세한 사정은 각각 다양했지만 유사성을 찾아볼 수는 있다. 여자 2와 3은 개인적 위기의 상황에서 기도가 응답 받았다는 것을 강조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1" name="_ftnref11">[11]</a> 여자 2는 심각한 의료적 상황에서 구원 받았고, 여자 3은 그녀가 어렸을 때 신체적으로 쓸 수 없었던 부분이 고침 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가 그 경험을 했던 같은 장소(‘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으면서 그 일을 회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자 3이 어렸을 때 한 경험이 후에 그녀가 개종할 때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자 10의 어렸을 때부터 계속된 어려움은 개종 전부터 있는 일이었지만, 그러한 시련을 통해 그녀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된다.<br /><br />남자 2와 남자 9는 모두 개인적인 절망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남자 2는 마음의 공허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남자 9의 경우에는 첫 인티파다와 함께 온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의 영적인 순례는 이미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2" name="_ftnref12">[12]</a><br />남자 8의 위기 역시 절망과 과 관계되어 있지만, 그의 경우에는 좀 더 신체적인 것에 대한 것이다. 차를 운전하고 가던 중 다른 부주의한 운전자에 의해 그가 길에서 벗어나 죽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남자 11의 경우에는 신체적인 위기가 특징이다. 그는 총에 맞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러한 호된 체험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열한 일곱 개의 위기 경험을 더 이상 분리 분석하려는 시도는 별로 현명하지 못한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위기가 이전에 일어났건, 개종 당시의 상황이었든, 개종자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갔든 그렇지 않든 간에 각각의 위기가 관련된 개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br /><br />6.2.5 공동체<br />여자 2와 7의 경우에 공동체의 역할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는 좀 더 광범위한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계신 곳’ 사역의 영향을 받은 인터뷰한 여덟 명의 여성들 중 일곱 명이 (여자 2부터 8까지) 그들의 가족이나 공동체에 의해 믿도록 격려 받았다고 말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3" name="_ftnref13">[13]</a> 또한, 이 일곱 명은 그들의 개종 후 그들이 속했던 공동체가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자 5의 경우에는 그녀의 무슬림 공동체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 이라는 단체도 배척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자 4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한 대답들이 여자 5부터 8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대답한 것들을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할 지라도, 그러한 영향 자체가 공동체가 그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여덟 번 째 (여자 1부터 세었을 때) 여자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의 사역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공동체의 영향을 받은 하위 그룹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여자 1부터 여자 8까지 모든 이야기들은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에 대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곳’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이 다른 (무슬림) 여성들을 통해서 혹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을 알려준다. 심지어 여자 1까지도 (그녀는 가족이나 공동체의 격려도 받지 못했고, 이후에는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하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이 계신 곳’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그 곳에 갔다. 따라서 여자 1부터 8이 그리스도인과 연결되기까지 공동체는 그들의 개인적인 개종 이야기에서 드러난 것 보다 더 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그러한지 좀 더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연구는 (개종자 개인보다는) 몇 개의 그룹을 조사해서 공동체적 요소의 강점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4" name="_ftnref14">[14]</a> 그런 연후에나 여성 하위 그룹(즉 여자 1부터 여자 8)에 미친 공동체의 중요성을 좀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br /><br />6.2.6 하나님의 영광(명예, honor)<br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주 언급된 부분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5" name="_ftnref15">[15]</a> 그러나 개종자들 중 하나님의 영광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6" name="_ftnref16">[16]</a> 그러면서도 모두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한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영광스럽게 느낀다고 모두 고백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영광(명예)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응답자들의 개종 경험에서 두드러진 부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필자의 이 특별한 질문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질문-번역자)이 그들의 뭔가를 건드린 것이다.<br /><br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인터뷰한 사람들 중 열 명이 그들의 개종에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꼽았다는 사실이다. 아크람 알라(أكرم الله )는 아랍어로 가장 존경할만한, 특별히 고귀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7" name="_ftnref17">[17]</a> 이는 매우 기본적인 신학적 진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아랍 무슬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을 달리 어떻게 보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열 명의 인터뷰한 사람들 중 몇 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개종의 요인으로 보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당연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8" name="_ftnref18">[18]</a> 결론적으로, 내가 모은 모든 정보들에 비추어보았을 때 열 명의 개종자들이 하나님을 영광을 강조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즉, 남자 2와 6, 여자 1과, 2, 3) 그것이 더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9" name="_ftnref19">[19]</a><br /><br />하나님의 영광이 하는 역할에 대해 분명히 알기가 어려운 것은 개종자들이 의미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말이 거의 나오지 않았고, 그들 중 아무도 그들이 포괄적인 질문지에서 답한 영광과 관계된 것들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0" name="_ftnref20">[20]</a> 개종자들 중 아무도 영광에 대한 성경적인 신학 (그것이 명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본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이슬람에서 말하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어느 정도는 성경적인 의미의 영광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그 그룹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개종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개종 전후에 영광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초점을 맞춘 다른 질문지를 만들어서 조사한다면 아마도 좀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1" name="_ftnref21">[21]</a><br /><br />6.3 현저하게 눈에 띄는 영역들<br />이제 응답자들 대다수가 중요하게 여긴 개종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요소들은 성경읽기, 믿는 자들의 역할,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 예수님 그분 자신이다.<br /><br />6.3.1 성경 읽기<br />일곱 명의 사람들이 (남자 1을 포함하면 여덟 명이) 성경 읽기를 중요 개종 요인으로 보았다. 이는 (대부분이 이 요소를 중요하게 본) 남성들과 (대부분이 그렇지 않게 본) 여성들 사이에 차이를 보여준다. 물론 교육 수준이 좀 더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 요소를 가조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즉, 남자 2, 3, 7, 8, 9, 그리고 여자 9) 개종 당시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는 필시 성경읽기를 좀 더 용이하게 하여주었을 것이다. 비록 남자 3의 경우에는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br /><br />Margaret K. Nydell는 이 주제에 대해서 가치 있는 정보를 제시해 준다. 그녀는 아랍어 구어와 문어(즉 문자로 기록되는 아랍어로 전통 아랍어 혹은 표준 아랍어라고 불린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말하면서, 문어를 배우게 되는 사람이 겪게 되는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사람은 표준 아랍어에서 새로운 단어들을 배워야만 한다 … 어미도 다르게 변하고, 새로운 동사 형태 등 전혀 새로운 문법을 배워야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2" name="_ftnref22">[22]</a> 그녀는 또한 덧붙이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5년 내지 6년 정도만 학교를 다녔다면, 그 사람은 읽고 쓸 줄 안다 할지라도 여전히 “기능적으로는 문맹” (자기 이름을 서명하거나, 서명을 읽는 것 같은 초보적인 필요 이상으로는 문어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이다.’ 하고 말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3" name="_ftnref23">[23]</a> 따라서 제한적인 교육을 받은 개종자들이 성경 읽기를 통해 중요한 유익을 얻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br /><br />성경읽기를 중요하게 본 세 사람, 남자 5와, 11 그리고 여자 10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따라서 이는 좀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들의 독특한 상황을 통해 그들이 왜 성경읽기를 강조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남자 5는 그가 어렸을 때 꾸었던 꿈에 나온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해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이 아마도 그에게 계속 성경을 읽게 하고 또 그것을 통해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남자 11은 그가 처음에 성경을 집중적으로 읽었을 때는 많이 이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4" name="_ftnref24">[24]</a>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여자 10은 그녀가 읽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인정했지만, 오랜 기간을 거쳐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5" name="_ftnref25">[25]</a> 그녀 역시 그렇게 하면서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체험하였다. 따라서 이 개종자들에게는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경험이 특별히 성경읽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br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차원의 성경 읽기는 남자 5와 11, 그리고 여자 10에게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더 많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역시 그런 경험을 했다. 남자 2는 성경이 진리일 뿐 아니라 살아있다고 강조하면서 그의 사고 방식이 전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남자 3은 처음에는 성경에서 많은 것을 얻지 못했지만, 성령님의 역할을 통해 성경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남자 7은 신약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것에 매료되었는데, “무엇인가”가 그를 더 공부하도록 만들어서 그는 마침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6" name="_ftnref26">[26]</a> 남자 8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남자 9는 꿈 같은 경험을 한 후에 그 경험을 바르게 세워주는 신약을 집중적으로 읽었고, 그러면서 성경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여자 9는 여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간과할 수 없었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br />요약하자면, 성경읽기에서 누가 유익을 얻는가 하는 문제는 읽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남자 10이나 여자 11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읽을 줄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경의 유익을 얻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7" name="_ftnref27">[27]</a> 따라서 성경읽기를 강조한 아홉 명의 개종자들은 읽는 데 좀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한 경험으로 인해 성경읽기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지적이거나 정보 수집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8" name="_ftnref28">[28]</a> 본질적으로, 각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혹은 다 읽은 후에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경험했다. 이와 같이 성경 읽기는 그룹 전체의 거의 반수가 매우 중요한 개종의 통로로 여기는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br /><br />6.3.2 믿는 자들의 역할<br />믿는 자들의 존재는 대부분의 개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러 개인이 관여되어 있고 경우에 따라 그들의 역할이 다양하다. 어떤 개종자들은 특별히 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반면 다른 이들은 몇 명을 통해 개종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게 쓰임 받는 믿는 자들은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고, 외국인이나, 현지인일 수도 있다. 그들이 다 같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도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개종자를 위해 쓰임 받는다. 그들의 영향은 그들의 삶과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과 갖는 우정에 따라 다양하다.<br /><br />연구의 초점이 개종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믿는 자들이 개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 논의 되었다. 믿는 자들이 어떤 사역 방법을 사용했는가 하는 것보다는 개종자들의 설명을 중심으로 논의 되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9" name="_ftnref29">[29]</a> 또한, 한 사람이 개종하기까지 많은 사람의 영향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만 언급되었다. 따라서, 위에서 알파벳으로 소개된 사람들 중 (믿는 자 A부터 L까지)일부는 아래의 논의에서 빠졌을 수도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0" name="_ftnref30">[30]</a>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개종자의 설명에 필요할 때는 아래에서 언급하였다.<br /><br />믿는 자들의 역할은 여성 그룹과 남성 그룹에서 각각 여섯 명이 이 요소를 강조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즉, 남자 3, 4, 5, 6, 7, 9, 여자 1, 3, 4, 9, 10, 11)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1" name="_ftnref31">[31]</a>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역구분은 남자 7이 관계를 강조한 것은 믿는 자들이 그의 개종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남자 믿는 자들이 남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2" name="_ftnref32">[32]</a>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 개종자들 역시 남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믿는 자 A는 여자 1과 3 그리고 4의 개종 설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공개되지 않은 여자 9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도 남자이다. 심지어 독일 여성인 믿는 자 K에게 특별한 영향을 받은 여자 10 역시 남자 전도자인 믿는 자 J와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3" name="_ftnref33">[33]</a> 이와 같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남자 믿는 자들이 영향을 미치는 경향인 것으로 보인다.<br /><br />남성들이 무슬림 여성들에게 효과적인 사역을 했다는 사실은 다소 놀랍다. 그러나 여성들의 설명 어디에서도 남성 전도자들이 부적절하게 행동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조금도 없다. 이 남성들의 삶은 분명하게 그들을 변화시키신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었고, 여성들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역할을 한 남성 믿는 자들은 그들의 사역이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서 여성들이 제외되지 않도록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4" name="_ftnref34">[34]</a><br /><br />성별에 대한 것은 그렇다 치고, 응답한 개종자들 모두가 그들이 만난 믿는 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면에서) 각각 다른 종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남자 3은 믿는 자 C를 어떤 특별한 것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 남자 4는 믿는 자 E가 어떻게 더 좋게 변화되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남자 5는 믿는 자들의 도덕적인 깨끗함을 좋아했다. 남자 6은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했다. 그들이 무슬림들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남자 7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에 감동을 받았고, 믿는 자 H의 집에서 그것을 경험했다. 남자 9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어떤 다른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온유함, 자비, 헌신과 사랑이었다. 여자 1은 믿는 자들의 사랑과 믿음에 끌렸다. 여자 3은 믿는 자 A의 기도와 가르침, 실제적인 도움에 감동을 받았다. 여자 4는 믿는 자 A의 기도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5" name="_ftnref35">[35]</a> 여자 9는 그녀에게 말했던 진실로 믿는 자와 그녀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간의 차이를 강조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6" name="_ftnref36">[36]</a> 여자 10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 많은 영향 아래로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여자 11은 믿는 자 L의 친구가 되고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것을 강조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는 자들의 삶의 질이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도 믿는 자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다.<br /><br />6.3.3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br />열 여섯 명의 응답자들이 (남자 8을 포함하여, 그의 확신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중요한 개종 요소로 보았다. 여덟 명의 남자들과 여덟 명의 여자들이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되기까지 이 요소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언급했다. 그러나, 각 사람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그 중요성을 다르게 지적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7" name="_ftnref37">[37]</a> 각각의 설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설명해 놓았다. 몇 명의 응답자들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 알기를 원했고, 그것에서 그들이 찾던 것을 찾았다. 남자 2의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충족되었다. 남자 7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기독교인들간의 교제를 통해 성경을 연구하면서 이루어졌다. 여자 1은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여자 7의 예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은 호기심과 욕구 역시 ‘예수님이 계시는 곳’의 가르침을 통해 만족되었다. 한편, 남자 9와 남자 10은 개종 전에 진리를 좀 알았지만,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남자 9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이해했지만, 그가 꿈 같은 체험을 한 후에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자 10은 좋은 무슬림이 되기로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직관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부활절 토요일에 그리스도와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간절함과 호기심에 더하여, 남자 7과 여자 1, 여자 7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 상황을 강조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랬다. 남자 4는 기독 청년회 사역에서 유익을 얻었다 (그곳 사람들의 삶이 달랐기 때문이다.) 남자 6은 믿는 자 G와 만났을 때 그의 ‘자정 후’ 경험 이후에 예수님에 대하여 배웠다. 여자 4는 카톨릭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믿는 자 A에게서 받은 진리와 그가 그녀에게 준 테이프에 대해 말했다. 여자 6 역시 ‘예수님이 계신 곳’의 가르침에서 영향을 받았다. 다른 응답자들은 예수님의 진리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남자 5는 성경에 대한 관심이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성경이 영적 양식이라는 것을 경험했고, 예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남자 8은 성경과 기독교 문서를 읽은 후 그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알았으며 그가 잃었던 것을 찾았다고 느꼈다. 그가 탄 차가 길 밖으로 밀려나가는 경험 후에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여자 2는 예수님에 대해 배웠으며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친척 앞에서도 주장할 정도까지 되었다. 여자 3은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죄의 수치를 가져가신 구원자라는 귀한 진리를 깨닫고 마음이 움직였다. 여자 8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그녀의 개종과 계속된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여자 9는 여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br /><br />요약하자면, 이미 예수님의 진리에 대해 호기심과 갈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그 진리를 찾던 사람이나, 그렇지 않던 사람이나 모두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발견했다. 그러한 발견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법을 통해 (신자들을 통해서나, 기독교 미디어, 혹은 성경을 통해서) 일어났다.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각 개종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발견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8" name="_ftnref38">[38]</a> 오직 몇 명의 개종자들만이 그 진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렇지만, 깊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은 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와 만난 열 여섯 명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그 후 그들의 삶이 변했다.<br /><br />6.3.4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br />열 네 명의 개종자들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을 강조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남자 3의 성령님에 대한 관심과, 남자 7의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발견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포함할 경우는 그 경우는 열 여섯으로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여덟 명의 남성들과, 여덟 명의 여성들은 각각 다르게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을 경험했다. 다음의 내용은 각 개종자들이 한 독특한 경험을 폭 넓게 진술하고 있다. 어떤 틀 안에 집어넣지 않고 여러 모습으로 그려보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9" name="_ftnref39">[39]</a><br /><br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을 강조한 몇 명은 매우 감동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 5는 어린 시절 비전으로 보았던 말씀을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성경에서 찾아내고서는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남자 11은 성경을 읽고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했다. 여자 3은 ‘예수님이 계신 곳’과 관계하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자 6은 새로운 일거리와 새 집, 그리고 딸의 병을 위해 기도하다가 기적적인 응답을 받고 마음이 움직였다. 여자 7은 남편을 위한 기도가 응답 받는 것을 보았고, 삶에 매우 좋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여자 8은 다른 신자의 기도를 통해 치유를 경험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0" name="_ftnref40">[40]</a> 그러나, 각 경우는 모두 개종으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자신들이 인격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남자 2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긍정적으로 변했고, 그의 가족은 그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남자 3의 점차적인 개종은 그가 갈구했던 믿음과 사랑을 성령님께서 주심으로 그 정점에 도달했고, 성령님께서 그가 참 신자임을 확신시켜주셨다. 남자 4는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기적적으로 변화시키심으로 훨씬 덜 호전적이 되었다. 남자 7은 매우 간절하게 하나님을 그의 영적인 아버지로 받아들였고, 그의 성격이 변화되었다. 여자 4는 여섯 명의 자녀들을 잃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통해 그녀의 삶에 일어난 기적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여자 10은 매우 큰 변화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그녀의 힘든 배경에서 구원 받았다.<br /><br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을 강조한 다른 사람들 모두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그들을 변화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 9는 평안과 위로를 느끼게 해 준 꿈 같은 경험을 통해 믿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께로 왔다. 남자 10은 성령님께서 그의 성격을 변화시키시는 폭발적인 경험을 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을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여자 1은 기도의 응답에 감명 받고,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사랑과 믿음을 경험했다. 여자 11은 꿈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지만, 기적적으로 내부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그 분의 신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br /><br />어떤 의미에서, 이 그룹이 경험한 것들은 전형적으로 모든 개종자들의 경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개종은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인 것이다. 그러한 만남은 개종자에게 감명을 주고 삶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요소들, 즉, 신적인 감동과 변화는 그들이 그 경험에 대해 “제대로 표현” 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진실로 개종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이 (즉, 변화를 일으키는 만남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중 열 여섯 명에게 큰 중요한 요소로 나타났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1" name="_ftnref41">[41]</a> 또한 동시에, 각 경험의 독특성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 본질상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은 하나님 자신의 산물이다.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게 계시면서, 그리고 개종의 본질도 그래도 남아 있으면서, 하나님은 각 개인을 모두 다르게 다루신다.<br /><br />눈에 띄는 다른 요소로 넘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과 깊게 연관된 일면이 눈길을 끈다. 많은 응답자들이 개종과 관련하여 꿈이나 꿈 같은 경험을 했다. 몇몇은 그 경험을 개종 이야기의 일부로 다루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마친 후 (포괄적인 질문지를 통해) 질문을 받고서야 그 경험에 대해 말했다. 이러한 현상이 제시해주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남자 3과, 5, 6, 9, 10, 11과 여자 11은 꿈 같은 경험을 그들의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제시하였다. 남자 3은 “영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상태로 그 자신이 위해서 기도했던 믿음과 사랑을 받는 것을 보았다. 남자 5가 어렸을 때 보았던 천사의 비전이 그가 후에 개종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남자 6은 그의 “한 밤중”의 경험에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오셨다고 결론지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2" name="_ftnref42">[42]</a> 남자 9는 평안과 위로의 느낌이 그에게 왔을 때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였다. 남자 10의 개종은 마치 “하나님의 영이 그의 머리에 임하시는 것”과 같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폭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남자 11은 몇 가지 꿈을 꾸었는데, 확신을 주는 꿈을 기점으로 하여 그의 삶을 변화시킨 성경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여자 11은 예수님이 그녀의 가슴을 가리키시는 비전을 본 것이 개종에 큰 역할을 하였다.<br /><br />이러한 대부분의 꿈 같은 경험들은 본인들이 깨어있는 동안에 일어났다. 그렇기에 더욱 그 독특함이 개종자들의 마음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적인 상태와는 별개로, 각 개종자는 그 경험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이었다고 확신했다. 더 나아가, 그 비전들이 모두 응답자들이 개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개종자들이 그들의 이야기에서 그 자세한 내용을 말한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3" name="_ftnref43">[43]</a><br /><br />한 편, 남자 4와 8, 여자 1과, 2, 3, 4, 8, 10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꿈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꿈들이 개종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남자 4가 부모님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 후 예수님을 보게 된 것 분명 격려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비전이 그를 개종으로 이끌었다기 보다는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도 아마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꿈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은 것 같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4" name="_ftnref44">[44]</a>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여자 10의 꿈 역시 그녀의 개종에 있어서 주된 역할을 했다기 보다는 개종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 역시 그 꿈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처음에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녀의 개종에 영향을 미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요소들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집중하느라고 그런 것이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5" name="_ftnref45">[45]</a>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꿈에 더 적은 중요성을 두었다. 개종자들 중 아무도 꿈의 자세한 내용에 관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만 말하였다: 남자 8은 자신이 카펫 위에 앉아 있는 꿈을 꾸었는데 카펫이 자신을 들어올리더니 그의 위에 있는 빛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여자 1은 촛불이 켜져 있는 교회에 있는 꿈을 꾸었다. 여자 2는 꿈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 믿는 자 A가 그 꿈을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다고 말하였다. 여자 3은 뱀과 물에 관한 꿈을 꾸었는데 믿는 자 A가 그것을 예수님에 비추어서 설명해 주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6" name="_ftnref46">[46]</a> 여자 4는 두 눈 사이에 어떤 침을 맞는 꿈을 꾼 후 매우 지쳐 있었는데 믿는 자 A가 그녀를 위해 기도한 후 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7" name="_ftnref47">[47]</a> 마지막으로 여자 8은 그녀가 꾼 꿈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br /><br />후자에 설명한 꿈들은 응답자들에게 꿈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들이 말할 만큼의 중요성은 가지고 있는 꿈들이다. 이는 이슬람에서 꿈에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반영해 준다. 동시에, 이 꿈들은 일상적인 방법으로 (예를 들면, 그들이 자는 동안) 일어났다고, 또 삶을 변화시키는 만남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꽤 평범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꿈을 꾼 시점이 개종자들에게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그 꿈들이 개종자들의 삶에 좀 더 중요한 (개종과 관련된) 발전을 가져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럴 경우, 그 꿈들은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닐지라도) 응답자들의 개종 경험에 이차적인 역할은 충분히 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개종자들이 처음에 이야기할 때에는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이런 저런 질문에 답하면서 그 꿈들을 기억해 낸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br /><br />이제 개종자들이 그들의 꿈들에 둔 다양한 중요성들에 대한 결론을 내리려 한다. 개종과 관련된 꿈의 (혹은 꿈 같은) 경험이 자동적으로 큰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개종자들 중 일곱은 꿈을 꾼 경험을 그들의 이야기에 포함시켰고, 여덟 명은 그러지 않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8" name="_ftnref48">[48]</a> 전자의 사람들에게는 그 꿈의 경험이 확실한 하나님의 개입이었고, 개종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그 꿈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은 알았지만, 꿈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더 큰 하나님의 개입을 경험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꿈이나 꿈 같은 경험들은 그 꿈이 개종자에게 변화를 일으키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때에 만이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다가왔다.<br /><br />6.3.5 예수님<br />가장 중요한 개종의 요인은 예수님 그분이셨다. 모든 응답자들이 한 명도 예외 없이 예수님을 강조했다. 심지어 개종여부가 불확실한 남자 1과 여자 5 조차도 이 요인을 강조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9" name="_ftnref49">[49]</a> 이는 개종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바로 사람들의 순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나게 되는 분이다. 예수님 없이는 개종이란 없다. 개종자들은 이유 없이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각 개종 경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에서는 각 개종자의 설명에 나타난 예수님의 중요한 역할을 다양한 상황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br /><br />어떤 개종자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만나게 된 것과 관련하여 지적인 요소를 이야기했다. 남자 3은 단계적으로 예수님에게 다가가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자 7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 8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자 2는 하나님의 영이 강권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마음과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에 만족하였다. 여자 3은 예수님이 죄의 수치를 없애신 구세주라는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7의 예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갈망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가르침을 통해 채워졌다. 여자 9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게 된 질문들은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자신이 어느새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0" name="_ftnref50">[50]</a><br /><br />다른 개종자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이야기하였다. 남자 5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남자 6은 그의 “자정 이후” 경험과 그 이후에 배우게 된 것들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남자 10은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부활절 전날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여자 1은 사랑과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에게 끌렸다. 여자 4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의 사랑 가득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자 10은 자신을 사랑하신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고 그분이 주시는 평안을 경험했다. 여자 11은 (꿈을 꾼 후) 예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께 스스로 복종하게 되면서 그분의 신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br /><br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과 만남에서 경험한 것들에 좀 더 초점을 맞추었다. 남자 2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이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변화되었다. 남자 4는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그의 삶에 받아들였을 때 눈에 띄는 변화를 경험하였다. 남자 9는 예수님에게 감동 받고, 열렬히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남자 11은 성경을 읽으면서 경험하게 된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 예수님께로 돌아서게 되었다. 여자 6은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에 기적적으로 역사하신 것에 대한 배경으로서 예수님을 강조했다. 여자 8은 예수님을 믿게 된 결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느끼게 되었다.<br /><br />여기서 제시된 지적인 요소와, 사랑, 경험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단지 개종자들이 예수님과 만나게 된 다른 면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각각의 경우에 그 자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예수님이 그 중심에 계시다. 그분이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모든 요인들 중에 가장 중요한 개종의 요인이 되신다.<br /><br /><br />7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개종 패턴<br />7.1 연구 결과<br />위에서 논의된 개종 요인들은 표 1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여기에 제시된 각 요인들은 특별한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눈에 자주 띄는 요인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 표 2는 이와 같이 인터뷰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개종하게 된 핵심 요인들을 가장 눈에 띄는 요인들부터 차례로 제시해주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1" name="_ftnref51">[51]</a><br /><br />7.2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개종하게 되는 핵심 요인들<br />이제 팔레스타인 개종자들의 패턴에 대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모든 개종자에게 적용되는 단 하나의 요인은 있을 수 없다. 각각은 몇 가지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어떤 요인들은 다른 요인들보다 좀 더 자주 등장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2" name="_ftnref52">[52]</a>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그리고 믿는 자들의 역할이었다. 이 각각의 요인들이 많은 개종자들에게 적용된다. 여성과 남성에게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에 있어서 성별상의 특징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성경읽기의 경우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많이 적용되었지만, 이는 교육 수준에 의한 것이지, 성별의 차이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남성들과 여성들 차이에 작은 차이들은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예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개입, 예수님의 진리 및 믿는 자들의 역할의 중요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br /><br />요약하자면, 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을 파노라마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그 중심에 계시다. 개종자들은 다른 방법들을 통해 예수님에게로 이끌린다. 이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 진리의 말씀, 믿는 자들의 역할, 성경읽기 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항상 그 중심에 되신다. 이것이 나의 연구를 통해 가장 광범위하게 드러난 패턴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3" name="_ftnref53">[53]</a><br /><br />8 무슬림들을 향한 선교: 확증, 오해, 발견 </div><img id="BLOGGER_PHOTO_ID_5472908088808477938" style="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10px; WIDTH: 275px; CURSOR: hand; HEIGHT: 359px; TEXT-ALIGN: center" alt="" src="http://4.bp.blogspot.com/_gwa86Yf9950/S_Os6PnKlPI/AAAAAAAAAAM/CcMdncoOxV4/s320/%ED%8C%94%EB%A0%88%EC%8A%A4%ED%83%80%EC%9D%B8+%ED%91%9C2.bmp" border="0" /><br /><div></div><div>표2. 핵심 개종 요인들<br />이 연구 초기에도 언급했듯이, 무슬림 사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순교의 위험을 포함하는 상당한 장벽들을 가지고 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며, 설문에 응한 대부분의 남성 개종자들이 죽음의 위협을 경험했거나, 두려워했다고 답하고 있다. 무슬림 선교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점이 힘든 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개종자들의 생명이 사방에서 위협당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개종하는 무슬림들이 정말 있다. 개종은 변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개인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향해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분을 만나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각 팔레스타인 개종자들의 설명은 이러한 이해를 기반으로 분석되어졌고, 대부분의 경우 진실한 개종으로 보인다. 개종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다른 곳에서 개종했다고 하는 무슬림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br /><br />개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무슬림들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는 데는 다른 요소들이 사용되었다. 각 개종은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방금 말했듯이, 나의 연구는 다른 요소들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어떤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슬림 개종에 대한 문서들에도 등장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낯설지는 않은 것들이다. 다음과 같은 양상을 보여준다: 신적인/인간적인 협력이 동원된다. 개종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개종이 일어나도록 일하신다. 그러나 무슬림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기까지 믿는 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문맹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성경의 증거하는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도 제시될 수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4" name="_ftnref54">[54]</a> 이 과정이 좀 길어질 수도 있지만, 믿는 자들이 일관적이고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5" name="_ftnref55">[55]</a> 동시에 개종자들은 신실하게 예수님에게로 돌아섰을 때 변화가 일어났다. 요약하자면, 그들이 만난 예수님은 개종이 일어나게 하는 최종적인 단계였다. 그 분이 기적적으로 중재에 나서실 때 단연 절대적인 특권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분은 분명 다른 요인들을 활용하셨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예수님과 별개로는, 즉 독립적으로는 돌아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br /><br />각 개종은 변화를 일으키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개종 전에 이슬람에 깊이 헌신되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강한 무슬림들이 후에 믿는 자들이 된다는 사실이 증명된 바가 없다. 일부 열정적인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개종자들이 개종 이전에 이슬람에 별로 헌신적이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무슬림들이 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걸음을 떼어서 이슬람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슬람이 싫어서 그리스도께로 온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한 거절은 기독교와 관계없이 일어나거나 예수님과 만난 다음에 일어났다. 주요 개종 패턴은 사람들이 이슬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선다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종자들을 보고 싶다면 이슬람을 공격하지 말고, 대신 무슬림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여야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6" name="_ftnref56">[56]</a><br /><br />마지막으로, 선교신학자들은 내가 꿈들에서 발견한 것을 유용하다고 볼 것이다. 열 다섯 명의 팔레스타인 응답자들 중에 반 조금 못 되는 사람들이 설명하는 과정에서 꿈 같은 경험을 언급했다. 그들은 그 경험이 그들의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한다. 꿈과 개종을 연결시켜 말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만남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꿈이나 꿈 같은 경험들은 그것이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여는 주요 수단이 되었을 때에만 중요하게 취급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꿈에 대한 통찰은 다른 곳에서도 똑같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연구자들은 개종자들의 꿈 (그리고 다른 현상들)을 다르게 기록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 같은 경험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개종의 본질적인 요인은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있기 때문이다.<br /><br />참고.<br />Greenham, Anthony Bryan, ‘Muslim Conversions to Christ: An Investigation<br />of Palestinian Converts Living in the Holy Land’ (Ph.D.<br />diss. South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04)<br />Monette, Duane R., Thomas J. Sullivan, and Cornell R. DeJong, Applied<br />Social Research: Tool for the Human Services (New York:<br />Holt, Rinehart & Winston, 1986)<br />Musk, Bill A., ‘Dreams and the Ordinary Muslim’, in Missiology: An<br />International Review 16 (1988)<br />Nydell, Margaret K., Understanding Arabs: A Guide for Westerners<br />(Yarmouth, ME: Intercultural Press, 1987)<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 name="_ftn1">[1]</a> Ant Greenham은 남아프리카에 있는 Durban 출신이다. 그는 Dallas에 있는 Criswell College에서 Biblical Studies로 MA를 했고, 미국 North Carolina Wake Forest에 있는 South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으로 PhD를 했는데, 논문은 이슬람에 대해 썼다. 그와 아내 사이에는 성장한 두 명의 자녀가 있고, 여러 명의 손주들이 있다. 현재는 그가 박사학위를 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 name="_ftn2">[2]</a> 눈에 띄는 몇 가지 요소들은 내가 분석한 결과이다. 분명한 중요성을 띤 요소들을 빼 놓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다른 사람이 분석했다면 내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을 포함했을 수도 있고, 또한 내가 포함한 것을 한 두 개 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 그룹에 대한 패턴은 대략에 따른 것이지, 정확하게 세세한 것들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또한 개종과 관계되지 않은 세세한 것들은 포함되지 않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 name="_ftn3">[3]</a> 눈에 띄는 영역들은 전체적인 그룹에 적용되지만, 또한 그 그룹을 나누었을 때 그 나누어진 부분(하위 그룹)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하위 그룹들은 미리 임의로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어떤 개종 요소들이 분명하게 적용될 때 하위 그룹으로 명명되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 name="_ftn4">[4]</a> 죽음의 위협을 당한 일곱 명 (남자2와, 남자3, 남자4, 남자5, 남자7, 남자8, 남자10)에 더하여, 남자 6은 그의 가까운 친척 중 한 명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했다. 비록 그가 비밀 신자였기 때문에 아직 위협은 당하지 않았지만 그의 개종 사실이 알려질 경우 그렇게 될 거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 name="_ftn5">[5]</a> 죽음의 위협을 당했거나 그것을 두려워 하는 여덟 명의 남자들 중 네 명(남자 2와, 6, 7, 8)은 믿는 자의 순교와 박해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당한 고난을 알고 있는 것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에게 꽤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6" name="_ftn6">[6]</a> 포괄적인 질문지에는 정치적 불안정과 두 다른 요소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세가지는 내가 개종의 주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넣은 것들이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7" name="_ftn7">[7]</a> 다른 두 명인 남자 2와 7은 체포되었을 때 했던 영적인 고심을 정치적 불안정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남자 2와 7의 경우에는 정치적 불안이 개종의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하게, 여자 1과 3의 개종의 경우, 그들이 정치적 불안정을 개종의 이유로 표시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개종 이야기에서는 전혀 그러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적 불안정을 그들의 주요 개종 이유 중 하나로 보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8" name="_ftn8">[8]</a> 여자 3은 미디어를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개종 이후에 그녀는 예수님 영화의 가치를 중요하게 보았다. 여자 4부터 8까지는 미디어의 중요성을 중간 정도로 보았다. 여자 4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따라 한 것으로 보인다. 여자 1부터 8까지 각 가정 모임은 그들의 정기 모임에서 테이프를 사용하고 있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9" name="_ftn9">[9]</a> 남자 1을 포함시킨다면 다섯 명의 개종자가 미디어에 대해 말한 것이 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0" name="_ftn10">[10]</a>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등과 같이 현저하게 눈에 띄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6.3에서 다루고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1" name="_ftn11">[11]</a> 응답된 기도에 대해서는 6.3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다루면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2" name="_ftn12">[12]</a> 남자 9가 이 상황에서 정치적 불안정보다는 개인적 위기를 더 강조했다는 것이 흥미롭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3" name="_ftn13">[13]</a>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자들 중에는 아무도 (정말 개종했는지 의심스러운 남자 1을 제외하고는) 공동체의 격려를 받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여자 9의 경험은 여자 2부터 8까지의 경험들과는 다르다. 여자 9는 다른 지역에서 왔고, 무슬림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4" name="_ftn14">[14]</a> 방문을 하면서 (여성) 운동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는 나의 연구 범위를 벗어난 영역이었다. 그 지역에 있어서 좀 더 자세히 그 문제에 대한 양질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추후의 조사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과 개종자의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그룹 모임을 방문하는 것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지는 인터뷰도 실시해야 한다. 그러한 인터뷰는 이미 인터뷰한 여성들의 예들과, 그들의 남성 친척들, 다른 여성 개종자들, 남성 개종자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좀 더 넓은 영역의 개종하지 않은 무슬림 공동체의 남녀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그룹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지역 그리스도인 운동에 대한 반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연구는 매우 조심성 있게 이루어져야 하며, 개종자들의 삶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면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5" name="_ftn15">[15]</a> 이는 아랍 무슬림 사회에서 영광(명예, honor)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6" name="_ftn16">[16]</a> 여자 3만이 예수님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죄의 “수치”를 가져가셨다고 고백했다. 수치는 분명 영광(명예)와 반대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녀를 개종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하지는 않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7" name="_ftn17">[17]</a> 이 용어에 관련된 답을 한 그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아랍어로 인터뷰를 한 사람들이다. 다른 다 사람은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었고 주저함 없이 그것이 영어로 “하나님의 영광” 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영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God”과 아랍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알라”가 의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아랍어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 사이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 모두 하나님이 매우 영광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8" name="_ftn18">[18]</a> 개종에 대한 설명에서 영광과 관계된 언급이 별로 없다는 것도 이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부분은 개종자들이 나의 포괄적인 질문지에 답한 것이지 그들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포괄적인 질문지를 통해 얻는 정보는 개종 이야기를 보충하고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에서 별로 언급되지 않는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9" name="_ftn19">[19]</a>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다섯 명 (남자 4와 5, 8, 9와 여자 10) 에게도 중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것을 중간 정도의 중요한 것으로 본 다른 일곱 명의 응답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중요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0" name="_ftn20">[20]</a>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의 죄의 수치를 모두 담당하셨다는 것에 미미한 반대를 표한 후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겠노라고 기꺼이 말했던 남자 11만이 예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기본적인 기독교 신학을 알고 있지만, 영광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1" name="_ftn21">[21]</a> 내가 2003년에 한 연구는 적용 가능한 개종 요인들을 발견하기 위한 개종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포괄적인 질문지에는 등장했지만, 개종 설명에서는 나오지 않은 영광과 같은 요소들에 대한 자세한 탐구까지 할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2003년의 연구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중요성을 둔 개종자들을 대상으로 그 다음 연구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인 연구 제안서를 기대하지 않고, 개방적인 질문지를 바탕으로 가능한 정보들을 모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지를 통해 그들의 개종 이야기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즉, 개종 전과 그 이후에) 개종자들이 영광과 수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2" name="_ftn22">[22]</a> Margaret K. Nydell, Understanding Arabs: A Guide for Westerners (Yarmouth, ME:<br />Intercultural Press, 1987), p. 102.<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3" name="_ftn23">[23]</a> Margaret K. Nydell, Understanding Arabs, p. 102.<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4" name="_ftn24">[24]</a> 그가 반드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5" name="_ftn25">[25]</a> 여자 10은 남자 11과 마찬가지로 좀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꾸란도 좀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읽는 방식은 (본문의 이해 없는) 암송 혹은 낭송이다. 이것이 무슬림 어린이들이 꾸란을 배우는 일반적인 방식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6" name="_ftn26">[26]</a> 교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계속 성경을 읽게 하였던 그 ‘무엇인가’는 신적인 어떤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7" name="_ftn27">[27]</a> 이 두 사람은 모두 개종 당시 성경을 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남자 10은 영어로, 여자 11은 아랍어로) 충분한 교육을 받았지만, 둘 다 성경읽기를 강조하고 있지 않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8" name="_ftn28">[28]</a> 남자 1은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성경과 꾸란 사이에 찾아볼 수 있는 논리적인 차이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의 경우에 그가 진실로 개종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9" name="_ftn29">[29]</a>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들의 사역 방법에 대해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본 연구에 대한 후속 연구로 개종 패턴에 비추어 사역 방법을 평가해 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연구 프로젝트도 가능할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0" name="_ftn30">[30]</a> 이 연구는 개종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그 중에서도 특히 믿는 자 A부터 L에 의해 개종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A부터 L에 이르는 믿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1" name="_ftn31">[31]</a> 만일 남자 1과 여자 5가 포함된다면, 그 수는 남자 일곱, 여자 일곱이 될 것이다. 남자 1과 여자 5는 분명 믿는 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 영향이 그 남자를 진정한 개종으로 인도하지는 않았고, 그 여자를 완전한 개종으로 인도하지 않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2" name="_ftn32">[32]</a> 남자 3은 여기서 분명히 예외인데, 그는 두 명의 독일 여성인 믿는 자 C와 D에게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3" name="_ftn33">[33]</a> 이와 대조적으로 여자 11은 그녀의 여자 친구인 믿는 자 L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교묘한 방법을 사용한 기독교 컨퍼런스에서 만난 남자 설교자에게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4" name="_ftn34">[34]</a>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있는 무슬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남성 믿는 자들이 여성 믿는 자들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 개종 이야기들에서 남성 믿는 자들이 미치는 영향이 더 많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된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5" name="_ftn35">[35]</a> 여자 1 역시 믿는 자 A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가 여러 번 언급되는 것이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은 인터뷰한 스물 두 명 중에 아홉 명이 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별로 부각되지 않았다. 외국인과 지역 신자들의 역할이 대체로 균형 있게 잘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남자 5와 여자 1, 3, 그리고 여자 4는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남자 3과 여자 10은 독일인들에게, 남자 4와 6, 여자 9와 여자 11은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남자 7과 9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6" name="_ftn36">[36]</a> 이것은 여자 9의 밝히지 않은 이야기에서 나온 내용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7" name="_ftn37">[37]</a> 위에서 언급한대로,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같은 중요한 개종 요소들은 포괄적인 질문지에서 만이 아니라, 개종자들이 직접 한 이야기에서 이끌어 낸 것들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8" name="_ftn38">[38]</a> 대부분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개종자들의 발견은 그 진리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 이슬람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저울질 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들이 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진리들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광범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을 거절하는 것이 중요한 개종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의 진리에 끌렸다는 것과 그들이 이슬람의 신조에서 돌아섰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9" name="_ftn39">[39]</a> 각 개종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논의하였다. 그러나 내가 주관적으로 그들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개종자의 관점을 그대로 전달하기로 하겠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0" name="_ftn40">[40]</a> 거의 모든 응답자들이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 여자 9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기도의 응답이 자신을 개종으로 이끌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소개되지 않은 여자 9의 이야기는 그녀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상황에서 개종하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누군가가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더 연구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도의 응답을 개종자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예 가운데 하나로 보고 싶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1" name="_ftn41">[41]</a> 이 요소가 강조되는 것은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것에 매우 끌린다는 사실과도 잘 들어맞는다. 나는 응답자들이 그들의 삶에 일어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종자들의 경험이 그 지역에 전래되어 오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에서 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끌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번역자)<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2" name="_ftn42">[42]</a> 남자 6은 자신을 예수님께로 이끈 꿈을 꾸었다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그가 그 “한 밤중”의 경험을 할 때 깨어있었으며 실제로 일어난 일로 그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남자 3, 9, 10과 여자 11 같은)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꿈 같은” 경험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3" name="_ftn43">[43]</a> 남자 6이 한 “한 밤중”의 경험은 좀 독특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을 강조했다. 이 요소가 분명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남자 6은 하나님이 그의 삶에 기적적으로 역사하신 것이 그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데 중간 정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남자 6이 이 영역에 포함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하심이 이 그룹 전체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4" name="_ftn44">[44]</a> 남자 4는 자신이 한 구멍에서 끌려 나오는 또 다른 꿈도 꾸었다. 이 꿈 역시 그의 개종을 확신시켜주고 격려해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5" name="_ftn45">[45]</a> 남자 4와 여자 10, 여자 11만이 예수님의 비전을 보았다고 말했다. (남자 6과 남자 10은 경험이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남자 6은 그 당시 “어떤 것”이 그의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나중에 그것이 예수님이었음을 알았다고 말하였고, 남자 10은 “마치” 예수님이 방 안에 들어 오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의 신체적인 모습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 10만이 하얀 옷을 입고 계셨다 (그리고 두 명의 아이들과 동반하고 계셨다)고 말했다. 대신에 그들은 그분이 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수님은 남자 4를 감싸셨고, 그를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자 10에게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고, 여자 11에게는 그녀의 가슴을 가리키셨다. 이러한 경험들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들은 예수님의 외모보다는 하신 일에 집중되어 있는 신약적인 접근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6" name="_ftn46">[46]</a> 이 꿈은 그녀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당도했을 때 다른 사람이 꾼 꿈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녀는 그 꿈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7" name="_ftn47">[47]</a> 이 경우 그 꿈 자체보다는 기도해 준 사람이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8" name="_ftn48">[48]</a> 지나가면서 밝히고 싶은 것은 꿈을 이야기에 포함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포함시키지 않은 사람들은 주로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별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이 꾼 꿈에 대하여 내린,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영향에 대한 개종자들의 평가는 그들이 그 꿈을 이야기에 포함시켰는가 그렇지 않은 가로 결정하였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9" name="_ftn49">[49]</a> 이 두 사람 모두 삶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 1은 분명히 예수님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 반면에, 여자 5는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0" name="_ftn50">[50]</a> 이 내용은 여자 9의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1" name="_ftn51">[51]</a> 공동체와 하나님의 영광은 표 3과 4의 가장 마지막에 제시되어있다. 그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 요인들을 강조한 개종자들의 수는 제시되지 않았다. 좀 더 연구가 이루어지면 가능할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2" name="_ftn52">[52]</a> 순서를 정하는데 있어서 요인들의 정확한 위치보다는 일반적으로 눈에 띄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다르게 분석할 경우 좀 더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예수님에 대한 요인을 그 선두로 하여, 어떤 요인들이 좀 더 눈에 띄는 요소들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3" name="_ftn53">[53]</a> 나의 논문에서 내가 발견한 것들을 이미 출판된 자료들과, 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에 대한 선교사들의 평가, 또한 방글라데시에서 이슬람에서 개종한 열 명을 연구한 것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내가 발견한 것들이 다른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4" name="_ftn54">[54]</a> (성경적인) 다른 미디어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매우 유용하다. 기본적으로 읽고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읽고 바르게 그 뜻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5" name="_ftn55">[55]</a> 선교신학자들은 개종이 과정이라는 엥겔 수치와 다른 학자들의 모델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6" name="_ftn56">[56]</a> 변증학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이나 개종한 무슬림들, 또한 다른 사람들 역시 기독교와 이슬람을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나 반 이슬람적인 논쟁은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div>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23485773088509658222010-03-26T11:57:00.001-07:002010-03-26T12:20:37.268-07:00임마누엘 – 임마누-알라(Immanuel – Immanu-Allah)창조신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The Name of the Creator Deity and the Name for God)<br /><br />글쓴이: 마르틴 골드스미스(Martin Goldsmith)<br />원문보기: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001Immanuel%20%E2%80%93%20Immanu-Allah(1).pd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001Immanuel%20–%20Immanu-Allah(1).pdf</a><br /><br />1. 들어가는 말<br />전직 선교사인 마르틴 골드스미스(Martin Goldsmith)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 ‘열방그리스도대학’(All Nations Christian College)에서 세계종교학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이 분야에 정평이 난 필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1960년대 OMF와의 초기 사역 이래로, 24년 동안 ‘열방그리스도대학’에서의 강의 그리고 은퇴에 다다르기까지, 마르틴은 지치는 줄 모르고, 온 세상이 복음을 알게 하는 일에 매진해 왔다. 그는 마태복음이 어떻게 교회로 하여금 선교케 하였는지에 대해 다룬 소중한 책을 저술한 바 있다(Martin Goldsmith, Matthew and Mission: The Gospel Through Jewish Eyes (Carlisle: Paternoster, 2001). 이 책에서, 마르틴은 성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또 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라’(Allah)로 칭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br /><br />골드스미스는 이와 동일한 주제에 대해 2006년 12월 28일 있었던 인터서브 아랍지역 모임에서 언급한 바 있었다. 다음은 요약사본이다; 다만 골드스미스의 대화적 문체를 최대한 살리려 했음을 명기하고자 한다.<br /><br />2. 성서에서의 하나님의 이름들(The Names of God in the Bible)<br /><br />2.1 ‘엘’(El), 창조신의 이름<br />마태복음 1:21-25절의 예수탄생과 관한 복음서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임마누엘’(Immanuel)이라는 놀라운 칭호를 받는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엘’(El)이 신명으로서 들어가는 가장 전형적인 칭호이다. 하나님의 이름 ‘엘’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가? ‘엘’은 누구였는가?<br />우리가 창세기 13장을 살펴보면, 거기에서 ‘엘’은 찾을 수 없다. 복수형태인 ‘엘로힘’(Elohim)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의 단수는 ‘엘로하’(Eloah) 혹은 YHWH(거룩한 신성문자로 ‘아도나이’(adonai)로 바꾸어 읽는다 – 역자주)이다. ‘엘’은 창세기 14장 이전까지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 말은 히브리인이 아닌, 멜기세덱(Melchizedek)이라는 흥미로운 인물에 의해 소개된다. 사실 ‘엘’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가나안과 모압 그리고 전 구약성서 시대에 걸쳐, 중동지역 사람들에 의해 숭배되던 최고의 창조신이었다.<br />멜기세덱이 자신의 이름을 아브람에게 소개한 후, ‘엘’은 성서안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구약성서에서, 바로 이 말이 ‘엘로힘’(Elohim)이나 ‘엘로하’(Eloah)와 교환가능하게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은 창조주를 이제 ‘엘로힘’ 혹은 ‘엘’로 부르게 되었다.<br /><br />‘엘’을 성서적 계시에 적합하게 하기 위해, ‘엘로힘’의 성서적 계시와 전혀 다른, 이신교적 배경의 ‘엘’의 성격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단어, 칭호, 이름은 취하였지만, 그 내용은 변경되고 고쳐진 것이다.<br /><br />2.2 ‘엘라’(Elah), 창조신의 다른 이름<br />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사람들이 ‘엘라’(Elah)라는 높은 창조주를 숭배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라서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또한 ‘엘로힘’(Elohim)을 부른다. 그 때부터 구약성서의 창조주인 YHWH는 ‘엘로아’(Eloah), ‘엘로힘’(Elohim), ‘엘’(El), 그리고 ‘엘라’(Elah)로 불리운다. 앞의 ‘엘’과 마찬가지로, ‘엘라’의 성격은, 앞선 YHWH에 대한 성서적 계시에 적합하기 위해, 다소간 수정되어 수용되어야만 했다.<br /><br />2.3 ‘테오스’(Theos), 창조신의 이름<br />신약성서시대로 접어들어, 창조주의 그리스어 칭호는 ‘테오스’였다. 그리스어를 공부해 보면, ‘테오스’는 보통 ‘신’(神)으로 번역하게 된다. 그리스 만신전(Greek pantheon)의 신(god)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이를 뛰어 넘었다. 즉 이들은 구약성서의 ‘엘로힘’을 ‘테오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테오스’는 그리스 종교적이고 정령숭배적 상황과 어울려 사용되었다. ‘YHWH’의 칭호가 이 단어로 바뀐 것이다. 이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 않는가? ‘테오스’라는 말은, 다양하고 복잡한 그리스적 사상들에 휩싸인 채로, 채택되고 변경되어 ‘JHWH’가 된다.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테오스’로 또한 불린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된다.<br /><br />2.4 인격화된 신이 아닌 창조신 이름을 택하다<br />우리는 다른 면을 또한 보아야 한다: ‘엘’, ‘엘라’ 그리고 ‘테오스’가, YHWH나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으로 취사선택된 반면, 산당들에서 우상으로 숭배되던 바알이나 유사하게 인격화된 신들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들을 철저히 금지하였고, 분쇄하였다. ‘엘로힘 바알’(Elohim Baal)이라고 부르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상숭배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원리가 신약성서에도 적용 되었다. ‘테오스’는 사용되었지만, ‘비너스 신’(God Venus-사랑과 미의 여신(역자주)나 ‘머큐리 신(God Mercury-신들의 사자; 상인,도둑,웅변의 신(역자주)는 어불성설이었다.<br /><br />3. 어떻게 초대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이름들을 받아드렸나?<br /><br />유럽에서의 1세기 그리스도교 역시 유사한 과정을 밟았다. 예전과 성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교의 창조신이 차용되었다. ‘God’, ‘Gott’, ‘Dieu’, ‘Bog’ 등등이 그것이다. 당시 이교도의 나라 영국은 이교의 창조신인 ‘God’을 그리스도교 도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God’이라는 말은 완전히 이교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이 차용되었다; lesser deity and 성전숭배는 유럽 그리스도교에서 금지되었다.<br />이상한 것은, 몇몇 낮은 수준의 신들은, 달력 속의 평일의 이름으로 상존하고 있다. 우리들은 태양의 날, 달의 날, Tiu신의 날, Ouden이나 Wodan신의 날, Thor신의 날, Freya여신의 날, 토성의 날 그리고 다시 태양의 날로 돌아오는 일련의 순서를 알고 있다. 웬일인지 때론 그리스도인들 조차 Thor의 날이나 Freya의 날에 상존하는 신을 숭배하는 일을 꺼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br /><br />4. 이슬람에서의 창조신<br /><br />4.1. 무함마드와 낮은 신들(the lower deities)<br /><br />이슬람세계로의 선교라는 입장에서 보면, 무함마드는 이미 우리들에게 낮은 수준의 신이다. 할렐루야! 무함마드 사후 직전, 그가 메카로 돌아와 정복했을 때, 그는 카바(the Ka’aba)의 모든 우상들과 그곳에서 숭배되던 ‘알라’(Allah)의 딸들을 모신 모든 사당을 제거했다 : Uzza, al Manat, al Arusa, ‘알라’의 딸 혹은 배우자로 추정되는 신비스런 al Lat 등이다. (여러분들은 왜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상에 대해 민감히 반응치 못하였는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딸들을 제거한 후, 하나님이 아들이 있다라는 사실은 그의 세계관으로는 퇴보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br /><br />4.2 알라는 ‘엘’과 같은가?<br />알라는 엘로힘과 같은 분인가? 알라는 창조주를 뜻하는 셈어로 엘로아나, 엘로힘, 엘, 엘라와 어원적으로 매우 가깝다. 그러나 El이나 Elah, Theos, God, Gott, Deui, Bog와 마찬가지로 그 성격이나, 알라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그가 일하는 방식이나, 그가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 혹은 관계하지 않는 방식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일부 그리스도인 저자들이 말하듯이 알라가 사단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영국 사람이나, 미국 혹은 호주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은 사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분이 될 수 없다. 알라는 알라다. 알라가 알라 이외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br /><br />4.3 부적절한 이해들 그러나 같은 사람<br /><br />만약 내가 여러분들께 나에 대한 인상 즉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에 대해 써 달라고 한다면, 내 생각에, 여러분들 가운데 몇 사람은 몇몇 좋은 점을 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몇몇 사람들은 불쾌한 이야기를 쓰리라. 하지만 여러분들은 나의 인상에 대한 여러분들 각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들의 설명은 틀릴 수도 있고 실제와 다른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나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에게 가서, ‘내가 생각하기에 마르틴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나의 아내는 여러분들에게 ‘사실 제가 당신들 보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잘 알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마르틴은 이러저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간파하지 못한 그의 성격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여러분들의 견해를 수정해 줄 것이다.<br /><br />물론 만약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써 달라고 한다해도, 그것은 내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또 다를 것이다. 우리가 결혼하여 산지도 40년이 넘었을찌라도 말이다.<br /><br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가서, 골드스미스는 어떤 사람인가를 묘사해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에 대한 인상은, 여러분들의 나에 대한 인상은 물론이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나 엘리자베스가 생각하는 나와 또 다를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나에 대한 것이지만, 아마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것이리라. 물론 나 역시도 조지 부시(George Bush)나 다른 어떤 사람들에 대해 위와 똑같이 할 수 있다. 여러분 역시 정치인들에 대한 여러분 각자의 견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치인들의 배우자들은 실제로 우리들의 생각과 같지 않을 것이다.<br /><br />알라(Allah)나 하나님(God)에 대한 이해는 부적절하거나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 모두 부적절하거나 틀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어두운 안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로 그 계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들이 구원받아 우리 앞에 성경이 있을찌라도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점진적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충만할찌라도, 여전히 가야할 길이 있는 것이다.<br /><br />개인적인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가 직전에 돌아가셨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께서 얼마나 뛰어나신 분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최고로 뛰어난 아버지셨다. 내가 아이였을 때, 나는 아버지의 사진을 내 침대 옆에 늘 두곤 했다. 아이일 때부터 아니 청소년기 때까지 밤에 나는 아버지께, 아니 아버지의 사진를 향해, 내게 아버지는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등에 대해 되내이곤 했다.<br />그 때, 나는 아버지께 내 마음과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 했다. 그 날 그 날 내가 골을 넣은 것이나 수학에서 백점 받은 일 등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모든 일을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었다. 사실 그것은 한 조각 사진에 지나지 않았고, 그가 없기에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나는 성장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나는 하늘의 아버지에게 그렇게 똑같이 했다. 내 아버지는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분이신지 이야기 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예배 혹은 찬양이라 부른다. 나는 그 분과 골을 넣거나 더 좋은 성적을 받는 일 보다는 좀더 성숙한 것들에 대해 나누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답을 하지 않는다; 그는 멀리 계시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성령께서는 내가 가까이 이야기해 주신다.<br />그러나 아버지는 멀리 계시고, 거기 계시지 않는다. 스스로나 그 뜻을 모두 알리지 않으신다. 이것이 성서적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선교사가 되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열방그리스도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비로서 내 유년시절이 일정부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나의 이해를 결정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의 배경에 기인하였기에,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나의 이해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일은 여러분 모두에게도 적용될 것이다.<br />아마도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성격, 심리형성과정, 혹은 여러분들의 교단배경이나 특정한 영성형성과정 등으로 인해, 여러분들의 하나님 이해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여러분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확하다고 나는 확신하다. 여러분의 하나님 이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생각,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방법 등에 대해 나열해 보는 것은 상당히 유익한 시도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진실이되 모두다가 진실은 아니며, 오류되 진실과 오류가 공존하는, 아주 재미있는 왜곡된 견해들의 목록을 볼 수 있을 것이다.<br /><br />5. 임마누엘과 선교<br />인간으로서, 구원받았든지 받지 못하였든지,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다. 이제서야 나는 영어 단어 ‘좋은/선한’(goog)이라는 말은 다소 뭔가 모자라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좋은/선한’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하나님 스스로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성품을 묘사하는 아주 분명한 말이다. 하나님은 좋으신/선한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고, 보기에 좋다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창세기 3장은 인간의 본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여, 진리는 오류와 섞이고, 선함은 죄와 혼합되었다고 말한다. 비슷하게도,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진리와 비진리가, 선함과 죄가 함께 뒤섞였다. 이 말로 인해 여러분이 걱정할 듯하여, 존 칼빈이 기독교강요(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한 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칼빈은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로 인하여 이것이 완화되고, 누그러지며 약화된다. 최고의 창조주, 임마누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br /><br />나는 ‘엘’(El)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여러분들은 이를 창조주의 계약 이름인 YHWH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바로 이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YHWH이다. 왜냐하면 이 분은 위대한 ‘나’(I Am)이자 위대한 YHWH이다. 나는 바로 나이다(I am who I am). 그러나 이 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YHWH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창조신이시다. 이 신은 숨겨진 신이고 성서 밖의 종교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신이다; 이는 모압, 가나안 그리고 바빌론 그리고 그리스 종교 등에서, 예배가 종종 최고의 창조신을 향해서가 아니라, 알려지고 접근 가능한 낮은 수준의 신들을 위해서 드려진 이유이다.<br /><br />우리들의 선교에 바로 이러한 것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랍세계에서 우리 메시지의 최고봉은 예수님이다. 여러분은 그의 이름을 ‘예수아’(Yeshua), ‘이사’(Isa)로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분이 그의 백성을 죄로 부터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임마누엘이다. 이 분은 멀리서, 숨겨진채로 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바로 여기에 계신 최고의 창조주이다. 여러분이 ‘알라’를 알기 원하는가? ‘알라’와 관계하고자 하는가? 좋다! ‘알라’는 주도적으로 메시야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사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깨끗케 하시고,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서 ‘임마누-엘’로 그의 사역을 이루신다. 또한 인류의 창조주인 ‘임마누-알라’로 우리 주변에 계신다.<br /><br />6. 결론<br />기억컨데 우리 열방그리스도대학의 이슬람과정에서 무슬림 지도자를 초대하여 강연을 부탁하고 학생들과 질의하였던 적이 있다. 질문도 기억이 나지 않고, 대답 또한 대부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 무슬림 지도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신약성서를 여러번 읽었습니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항상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에 대해 논쟁도 하지요. 나는 정말 그리스도교를 잘 알고 있습니다.’<br />그가 계속 말을 했다: ‘내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계속해서 내게 말하는 것인데, 내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계속 질문을 해 보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br /><br />내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내게, 그들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안다고 계속 말하는 거예요. 그런 일은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알라’는 위에 계시고, 전혀 다른 분이며, 저 멀리 계신 분입니다. 알라는 영광스러운 최고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지요.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킵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섭리가운데 나와 우리가족 그리고 우리백성과 우리 인간을 지켜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알라’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십니다.<br /><br />영광스럽게도 ‘알라’는 실제로 영화롭고 영광스러운 모습의 메시야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영어의 ‘God’로 번역된 ‘엘’(El)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교도 종족인 영국의 알려지지 않은 신 God는 영화롭고, 알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한다. 그 분을 따를 가치가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이 예수가 바로 ‘엘’이며, 이 예수가 우리와 함께 하는 ‘알라’이기 때문이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62420174411690373372010-03-14T09:50:00.000-07:002010-03-14T10:47:51.102-07:00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자들에 관한 연구: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유 (II)글쓴이: Ant Greenham<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 name="_ftnref1">[1]</a><br />원문: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df/2010/116-175SFMFEB2010.pdf<br /><br />4.12 여자 1<br />이야기<br />여자1은 어린 자녀가 있는 기혼 여성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쳤지만 정치적 불안정의 여파로 졸업시험을 볼 수 없었다. 무슬림으로서 지킬 것을 지키고 살기는 했지만,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지는 않았다.<br /><br />그녀가 속한 공동체의 많은 여성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는 그녀의 이웃에 있는 새로 생긴 가정 사역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녀는 이미 꾸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가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고, 믿는 자 A의 긍정적인 삶과 기도 응답에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이처럼 그녀는 호기심으로 인해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되었지만, 사랑과 믿음 때문에 예수님에게 끌리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꿈을 경험했고, 개종에 있어서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 테이프 같은 미디어의 역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 name="_ftnref2">[2]</a><br /><br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그녀의 삶을 바꾸셨고, 그녀는 마음에 사랑과 믿음을 경험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느꼈고, 박해를 경험해 보지는 않았다.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도 좀 있지만, 그녀의 가족과 친척들도 그녀의 믿음을 잘 알고 있고, 한 일 년 동안 그녀의 집에서 예수님을 찾는 20여 명의 여성들과 함께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br /><br />분석<br />“사랑”과 “믿음”은 여성 1의 이야기에서 핵심이 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하고 그녀의 개종이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이야기가 극적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녀의 삶에 일어난 기적적인 변화를 강조한다. 이러한 변화는 몇 몇 공동체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을 다른 무슬림 여성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혹은 그 분을 향한 믿음을 갖도록 해 주는 곳으로 기꺼이 사용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성 1이 삶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 name="_ftnref3">[3]</a><br /><br />4.13 여자 2<br />이야기<br />여자 2는 많이 교육받지 못한 과부 (그리고 할머니)이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고, 일찍 결혼했으며, 1967년에 난민이 되었지만, 자신의 경험의 잘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일반적인 무슬림이었다고 말하는데 얼마나 성실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좀 이상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이나, 모세, 무함마드가 다 선지자들이기 때문에 다 마찬가지이고, 무슬림들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예배하는 것에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꾸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후부터 그녀는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것은 그가 선지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더욱 그렇게 하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마을에서 여자 1이 말했던 “예수님이 계신 곳”을 발견하고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을 더 많이 얻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한 번은 중풍 (혹은 그와 유사한 의학적 상태)이 왔는데 이 개인적인 위기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병 자체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그 상황과 관련하여 기도가 응답된 것이 개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꿈도 꾸었는데 그 내용은 지금 기억할 수가 없다.<br />그녀는 예수님도 강조했고 그 분의 진리의 말씀과, 테이프와 같은 미디어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도 그녀의 개종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스스로 ‘예수님이 계신 곳’에 찾아갔지만, 그녀가 속한 공동체의 다른 여성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간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또한 어떤 한 신자의 삶 (아마도 믿는 자 A일 것이다.)이 그녀의 개종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녀는 삶이 편안해졌고, 더 안전함을 느끼고, 마음에 평안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삶을 기적적으로 바꾸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녀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녀의 아들이 그녀의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박해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병약했지만, 집에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과 연계된 여성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고 있었다.<br /><br />분석<br />그녀의 이야기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여성 2는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다 같다고 그녀가 말한 이유는 아마도 인터뷰 하는 동안 믿지 않는 그녀의 아들이 옆에 앉아있으면서 종종 자기 의견을 내 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녀가 개방된 질문지에 답한 것을 보면서 그녀가 정말 개종한 것인지 잠시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답한 것을 보면 기독교의 구원 역사와 신학에 필요한 주요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녀가 받은 제한적인 교육과 아들의 반대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부활 같은 것에 대하여)가 그런 염려를 낳게 한 이유인 것 같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믿지 않는 친척이 동석한 자리에서 그녀가 두 질문지에 답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 받았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br /><br />4.14 여자 3<br />이야기<br />여자 3은 제한적인 교육을 받은 할머니이다. 무슬림이었을 때 그녀는 기도하고 금식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열심은 아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그녀는 개인적인 위기를 경험하게 되면서 개종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한 다리를 쓸 수 없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한 (팔레스타인) 기독교인 가정에 그녀를 맡겼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은 그녀를 위해 기도했고, 그녀의 다리가 다 나았다. 수 십 년이 지난 후 그녀는 그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곳 주변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녀의 다리가 나았던 그 집은 당시 ‘예수님의 계시는 곳’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곳에 믿는 자 A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가서 자신을 소개하려는 마음이 들어서 한 친척을 데리고 그 곳에 갔다. 그들은 그 때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이 도착하자 믿는 자 A는 자신이 꿈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집에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꿈이 이루어졌다고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그의 요청대로 그녀는 다른 여성들도 그 곳으로 데리고 갔다.<br /><br />믿는 자들의 삶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믿는 자 A는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위해서 기도했을 때 소소한 질병을 가진 여성들이 치유 받았고, 그는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주었다. 그는 또한 여자 3에게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수치스러운 죄에서 구원해 주신 구원자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것이 그녀가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는데,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의 메시지 역시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또한 응답된 기도와,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에 기적적을 역사하신 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도 강조했다. 그녀는 꿈도 꾸었는데 (믿는 자 A가 그 꿈을 설명해 주었다.) 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br />개종 이후, (정치적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그녀가 겪어야 했던 경제적인 사정이 좀 좋아졌는데, 그것은 그녀가 딸의 직업을 위해 한 기도가 응답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그녀의 가정에서 30명 가량의 여성들이 모이는 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박해를 경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녀의 아들과 딸들은 텔레비전에서 예수 영화를 하는 동안 그녀가 돌봐야 할 손주들을 대신 돌봐주어서 그녀가 방해 받지 않고 그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했다.<br /><br />분석<br />여성 3의 개종 이야기에는 긴 기간에 걸쳐서 일어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난 장소 (‘예수님이 계시는 곳’)와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믿는 자 A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초점은 예수님 그 분과 그 분의 사역에 맞추어져 있다. 실제로 그녀는 질문지에 답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그 중심에 있고, 그녀의 삶에 나타난 변화는 적어도 개종한 지 3년이 지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영적인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숙함은 재정적 어려움에 있어서 그녀가 믿는 자 A를 의지하기 보다는 주님을 더 의지하는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또한 (예수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방해 받지 말아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다른 여성들을 인도하는 모습에서도 물론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녀의 이야기는 초월적인 만남으로 인한 진정한 변화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br /><br />4.15 여자 4<br />이야기<br />여자 4는 결혼한 여성으로 아이들이 영아 때 모두 죽었다. 그녀는 요르단에서 성장했지만, 결혼 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처럼 그녀도 기도도 하고 금식도 했다. 심지어 메카에 소(小)순례(이슬람에는 메카에 순례를 가는 정해진 때가 있는데 그 때에 가지 않고 다른 때에 다녀온 것으로, 순례하면서 하는 의식들도 정해진 때 하는 순례보다 약소하다. – 역자 주)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요르단에서 그녀 이웃에 살던 사람은 그녀를 종종 카톨릭 교회에 데리고 갔다. 그녀 남편의 친구들 대부분도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평화롭게 함께 살았다. 어느 날 (무슬림) 가정의 친구들이 믿는 자 A를 그녀의 집에 데리고 와서 그녀는 그 때부터 “예수님이 계신 곳”에 다니기 시작했다. 믿는 자 A는 그녀가 꾼 꿈을 설명해 주었고, 그녀는 그가 그녀를 위해서 기도해 준 후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그는 그녀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그에 관한 테이프를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개종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진리의 말씀이라고 보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모두 짊어지신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녀의 삶을 바꾸셨다는 인정했는데, 그러한 그녀의 확신은 그녀가 여섯 자녀들을 모두 비극적으로 잃은 일을 말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었다. 개종 후에 다른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을 잃은 현실을 인정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갖고 있었다.<br /><br />개종 이후 그녀의 삶에 나타난 변화 역시 분명해서 그녀는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그녀의 사랑에 보답하고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 에서 받아들여진 것을 느꼈고, 그녀도 그녀의 집에서 여성 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 name="_ftnref4">[4]</a> 덧붙여 말하자면, 그녀의 남편과 조카도 기도의 응답으로 질병이 나았다. 그러나 그녀는 박해를 좀 경험했는데, 무슬림들에게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로 인해 인터뷰한 그 날 가정 모임에서 사용하려고 했던 테이프를 압수당했다.<br /><br />분석<br />신학적인 이해가 좀 부족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여자 4의 이야기에서는 개인적인 변화가 가장 핵심이 된다. 그녀가 계속해서 카톨릭을 접했던 것이 개종하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는 그녀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을 만나면서 (그리고 믿는 자 A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여성을 가치는 아이를 낳는 것에서 찾는 문화에서 그녀가 여섯이나 되는 자녀를 잃고 보인 반응에서도 잘 드러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 name="_ftnref5">[5]</a> 이와 함께 그녀는 믿는 자로서 사랑과 용납을 경험했고, 모임을 인도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한번 박해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녀의 집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집에서 계속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타다 만 집 옆에 붙어있는 검은 비닐 텐트였다. 그녀의 삶에 나타난 (기적적인) 변화에 더하여, 그녀는 예수님과 그 분의 진리의 말씀이 자신의 개종에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그녀가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모두 가져가셨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이해가 부족하지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진정으로 개종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br /><br />4.16 여자 5<br />이야기<br />여자 5는 제한적인 교육을 받은 기혼 여성이다. 그녀는 대가족 출신이고 지금의 그녀 역시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녀는 매우 열심 있는 무슬림이었는데 스스로 99% 종교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한 (무슬림) 이웃과 함께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느낀 사랑과 다정함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하게 되었고, 그 분이 누구신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기도가 응답 받는 경험을 하였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가르쳐주는 것에서 유익을 얻었으며, 그리스도인 이웃의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 그 분과 그 분의 진리의 말씀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녀는 예수님이 그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삶을 기적적으로 바꾸셨다는 것을 확신했다.<br /><br />그녀의 삶이 좀 더 편해졌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그녀를 환영했고, 인터뷰 당시 여자 4를 만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속한 공동체의 몇 사람들이 그녀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과 관계 맺는 것을 나쁘게 말했지만, 그녀를 박해하지는 않았고,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그 곳에 가는 것을 좋게 보고 있다.<br /><br />분석<br />여자 5를 만났을 때, 그녀는 솔직하고 간단하게 개종을 증거했다. 불행히도, 포괄적인 질문지에 그녀가 한 답변은 그녀를 인터뷰할 때 옆에 있었던 여자 4의 것과 모두 같다. 여자 5에게 좀 다른 것은 순례나, 성경 읽기, 꿈 중 그 어느 것도 그녀에게 영향을 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답을 할 때 그녀가 존경해 마지 않는 모임 리더와 같은 식으로 답변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그녀의 답변에 큰 비중을 두기는 어려운 것이 된다. 그녀가 죄의 문제를 동의하지 않은 것이나, 예수님이 자신의 삶을 기적적으로 바꾸셨다고 한 것들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신뢰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열린 질문지에 답변한 것으로만 미루어 보면,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서 답한 응답된 기도나, 기적적인 변화 같은 것에 있어서) 그녀는 삶의 변화에 대해 특별하다 할만한 것이 없다.<br /><br />그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제한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인도자의 예를 따르는 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녀가 삶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예수님과의 특별한 만남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여자 5는 여전히 무슬림 여성이며 그러나 믿는 자들과 교제를 즐기고, 예수님에 대해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개종의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br /><br />4.17 여자 6<br />이야기<br />여자 6은 이혼한 여성으로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녀는 열심 있는 무슬림이었지만,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몇 년 후, 두 번째 인티파다와 함께 그녀는 호텔에서의 일자리를 잃었다. 수입이 없어서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도 없었다. 그녀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그녀는 강조했다.<br /><br />여자 4가 그녀에게 믿는 자 A를 소개해 주어서 그가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그 응답으로 하나님은 그녀에게 새로운 직장을 연결시켜 주었고, 새로 살게 될 곳도 생겼으며, 그녀의 아픈 딸도 고침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그녀의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이 그녀의 삶에서 행하신 기적적인 역사를 강조했다. 그녀는 예수님의 그녀의 죄를 십자가에서 모두 담당하셨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가르치는 것에 큰 영향을 받았고, 예수님 그 분과,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자신의 개종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br /><br />그녀가 개종하면서 그녀의 아이들에게 살 길이 생긴 것에 더하여, 그녀는 믿는 자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인터뷰 당시 여자 4의 집에서 모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곳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람들도 그녀를 돌봐주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녀의 집 주변에 옹기 종기 모여 있는 집들에 사는 사람들이 그녀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과 관련된 모임을 한다고 그녀를 경찰에 고발했기 때문에, 조만간 그녀는 집을 잃게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기도한 후에 그 집들을 담당하고 있는 매니저를 찾아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했고, 매니저는 그녀의 설명을 받아들였다.<br /><br />분석<br />여자 6은 여자 4가 (그리고 그녀 그룹의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한 답은 그녀의 리더가 한 것과 다르고,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삶에 개입하신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다. 여자 6은 여자 4의 집에서 만나고 있는 여성들과의 교제에 매우 감사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는 다른 여성들과 갖는 관계와는 달리 좀 더 독립적인 것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답한 것들을 그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으로 보이며, 위에서 설명한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그녀가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 만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죄를 모두 가져가셨다는 것에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여자 4의 경우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즉, 이해의 부족으로 보이며), 그렇게 볼 때, 여자 4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br /><br />4.18 여자 7<br />이야기<br />여자 7은 제한적인 교육을 받은 결혼한 젊은 여성이다. 열 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종교적으로는 다른 무슬림들처럼 기도하고 금식했다. 그녀가 성장해서 결혼을 한 후에 그녀의 어머니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어머니를 따라서 그렇게 했지만,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가기 보다는) 여자 4의 집에서 만나는 여성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br /><br />그녀가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호기심과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접하고 난 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녀는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중요한 개종 요소로 보았다. 그녀는 예수님이 그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기적적으로 바꾸셨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의 남편이 어깨와 다리가 아파서 고생할 때 기도해서 많이 나았기 때문에 그녀는 기도가 응답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br /><br />예수님을 믿게 된 후로 마음에 평화가 생겼고, 삶도 더 나아졌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더 잘하고 있고, 그녀는 직업도 갖게 되었으며, 믿는 자들도 그녀를 받아들여 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박해나 어떤 어려움도 당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가족 중 몇 명은 그녀와 함께 여자 4의 집에서 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br /><br />분석<br />여자 7 역시 그 모임의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한 답변은 여자 5의 것과 같다. (따라서 여자 4의 것과 같은 것이다.) 즉, 그 모임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은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인터뷰 내내 상당히 강한 성격을 보여주었고, 열린 질문지에 답하면서 가치 있는 답변들을 제시해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로 인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게 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스스로 선택해서 참석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을 그 모임에 데려오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었던 열망이 바로 그녀를 개종으로 이끈 중요한 요소였다고 강조했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했으며 (또한 삶도 더 나아졌고), 그녀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마음의 평안에 대해 말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와 진실로 만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그룹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한 신학이 좀 약하기는 하지만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br /><br />4.19 여자 8<br />이야기<br />여자 8은 제한적인 교육을 받았고, 최근에 과부가 되었다. 무슬림이었을 때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무슬림으로서의 종교를 지켰다. 요르단에서 남편과 오랫동안 살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남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br /><br />그녀는 믿는 자 A가 사람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해 준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의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믿는 자 A가 병원에 가서 남편을 위해 기도해주도록 하기도 했다. 얼마 후 남편은 죽었지만, 그는 믿는 자 A가 기도해서 좀 나아지기도 했었다. 그녀는 이후로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정기적으로 나갔고, 그곳에서의 교육을 통해 유익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스도께로 오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다른 믿는 자의 기도로 그녀 자신이 고침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또한 예수님과, 그 분의 진리의 말씀을 개종하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 그녀는 꿈도 꾸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6" name="_ftnref6">[6]</a> 요약해서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녀의 삶을 기적적으로 바꾸셨다.<br /><br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녀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느꼈다. 그녀는 아직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고 있고, 여자 4의 그룹으로부터 감정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녀는 덧붙여 말하기를, 그녀가 신자들과 연계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그녀를 이길 힘이 없다고 했다. 사실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br /><br />분석<br />여자 8은 여자 4와 함께 인터뷰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한 답변들은 그 그룹의 다른 사람들과 매우 유사했지만 (그리고 같은 신학적 약점을 보였지만) 그녀는 분명하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전에 남편을 위해 기도 했을 때 남편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편이 죽음에 이른 것이 그녀의 개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그녀 개인을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 특히 그녀가 고침 받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녀가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기적적으로) 고침 받은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 또한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는 분명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그러한 변화로 인해 그녀는 남편을 사별한 것도 잘 견디고 있고, 사람들은 그녀를 이길 힘이 없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br /><br />4.20 여자 9<br />이야기<br />여자 9는 자신의 개종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개종에 영향을 미친 주요 요소들이 한 신실한 신자가 한 역할과, 성경의 중요성, 특히 이슬람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여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갈망이었다는 것 정도를 밝히는 것은 그녀가 한 요청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다.<br /><br />분석<br />여자 9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한 답변에서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삶을 기적적으로 바꾸셨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녀는 어떤 특별한 꿈이나, 치유를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는 그리스도가 그녀를 구원하신다는 강한 경외의 감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개인적인 관찰에 의하면 그녀가 진정으로 개종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br /><br />4.21 여자 10<br />이야기<br />여자 10은 혼자 사는 독신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심한 학대를 받아서 수년을 한 기관에서 지냈다. 그 결과, 그녀는 신체적, 정신적, 교육적으로 고통 당했다. 그녀는 이슬람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었고, 신중하게 기도나 금식을 하지도 않았고, 꾸란을 읽는 것은 오직 그녀의 삶을 더 힘들게만 했을 뿐이었다.<br /><br />어린아이로서 그녀가 한참 고통을 당하고 있던 중에, 한 무슬림 친척이 그녀에게 성경을 주었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이 성경을 가지고 있기 싫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 누군가 그녀가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어린이 전도자, 믿는 자 J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잘 몰랐었지만, 꼭 그를 만나보아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고, 결국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일로 그녀가 바로 개종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한 독일 여성인 믿는 자 K가 그녀에게 만일 그녀가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면 그분이 도와 주실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에게 기도를 드렸고, 그 분에게 자신을 내어드렸으며, 평안을 느꼈다. 후에 그녀는 믿는 자 K가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믿는 자 K가 그렇게 한 것은 여자 10이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하셨고, 현재 그녀와 믿는 자 K는 일반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br /><br />(믿는 자 J나 K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치는 사랑의 영향력 이외에 성경을 읽은 것이 그녀의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가 글을 읽는데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었고, 거짓말하는 것과 같은 나쁜 습관들을 고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그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시켜주는 꿈을 꾸었는데 이는 그녀가 어린 시절에 했던 부정적인 경험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개종에 영향을 미친 다른 요소들은 이슬람에 대한 거절, 하나님에 대한 경외,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의 말씀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7" name="_ftnref7">[7]</a><br /><br />그녀가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된 후, 삶이 점차 나아졌다. 건강도 더 나아졌고, 정신과 약을 먹지 않기 때문에 체중도 많이 줄었다. 처음에는 다른 신자들과 관계 맺는 것에 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문제는 해결되었고, 신자들이 그녀를 환영하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그녀의 혼자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녀가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친척 아주머니 한 분이 그녀가 교회 나가는 것을 비난했지만, 여자 10은 그렇다면 자신이 무슬림이었을 때는 왜 가족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결코 주님에게서 돌아서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아직도 가족을 사랑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간증을 듣고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br /><br />분석<br />여자 10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학대와 과체중, 약물에 의지하던 십대에서 혼자서 성공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젊은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읽는데 겪었던 어려움도 극복했다. 거짓말을 그쳤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으며, 자신을 학대한 가족들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모든 변화의 유일한 이유는 그녀를 사랑하셔서 사랑 많은 신자들과 성경 그리고 꿈을 보내주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br /><br />4.22 여자 11<br />이야기<br />여자 11은 잘 교육받은 독신녀였다. 그녀의 무슬림 가족들이 별로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정기적으로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금식을 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기 오 년 전에 친구인 믿는 자 L이 그녀에게 학문적인 도움을 좀 주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여자 11은 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믿는 자 L과 일하면서 만난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예수님에 대해 끌리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 듣게 된 모든 것을 믿었지만,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br /><br />얼마 후에, 그녀는 가족의 허락으로 믿는 자 L과 함께 기독교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회의 내내 접하게 된 예수님의 신성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그녀는 설교자에게 그것에 대해 질문했다. 오랜 토론 끝에 그녀는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녀와 함께 기도하면서 그녀가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 다음날 아침 깨어났을 때 그녀는 비전을 보았는데, 주 예수님이 그녀의 가슴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 자신은 공중으로 날아올라서 빛의 구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일 직후에 그녀는 믿는 자 L에게 달려가서 이 기적적인 꿈에 대해 말했다. 믿는 자 L은 그녀에게 예수님을 본 것은 그녀의 영적 삶의 첫 날이 밝아왔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해주었다. 여자 11은 그렇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한편,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다음 한 해 동안 그녀는 몇 가지 질문을 가지고 고심했다. 혼란 가운데 점차로 그녀는 그 분이 누구시든지 그녀의 삶에 하나님을 원한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셨다는 것이 느껴졌고, 그녀는 예수님이 그녀를 떠나시지 말고 그녀를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그 때부터 그녀의 삶에서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다. 후에 그녀는 설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녀 안에 들어오셔서 예수님의 신성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그녀의 꿈과, 그녀의 삶에 기적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이 그녀의 개종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br /><br />그녀는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그녀의 가족이 그녀가 예수님이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절 당하거나 박해를 당한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 그녀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다고 말했다. 그녀의 가정에 기독교의 영향이 좀 있어서 그녀의 아버지는 신약 성경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다른 점은 그 가족들은 기독교에 대해 지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만, 여자 11은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경험했다는 것이다.<br /><br />분석<br />하나님의 개입과 그 결과로 그녀의 삶에 일어난 변화가 여자 11의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한 것이 그녀의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녀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질문에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는 아직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그녀의 확신은 그녀의 방식대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그녀가 겸손히 하나님께 굴복하면서 지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루어졌다. 믿는 자들도 돕는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믿는 자 L의 우정이 (그리고 초대가) 그녀를 꿈을 꾸게 되는 환경으로 인도하였고, 그녀의 개종을 이루어내려고 했던 그 설교자의 시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자 11의 경우 핵심은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였고 그 변화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br /><br />5 동일한 개종 요소들<br />각 개종의 이야기들이 독특하고 개인마다 개종으로 이끈 요소들이 다양하다. 동시에, 동일하게 중요한 점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두 이야기를 제외한 모든 이야기들이 개종의 본질적인 내용, 즉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떤 개종의 요소들은 계속 반복되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개종의 요소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Duane R. Monette와, Thomas J. Sullivan, Cornell R. DeJong은 인터뷰한 내용을 분석하여 적용하는 것에 대해 알려주는데, 그들은 “문서 분석에 사용될 수 있는 코드 체계”를 제안하면서<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8" name="_ftnref8">[8]</a> 그러한 코드 체계는 대체로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첫째, 어떤 요소의 존재 혹은 부재, 둘째, 어떤 요소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 하는 것, 셋째, 어떤 요소에 할애된 공간의 양, 넷째, 표현의 강도.<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9" name="_ftnref9">[9]</a><br /><br />내가 한 본 연구의 경우에는 특정한 개종 요소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 하는 것과, 그것에 할애된 공간의 양이 내가 만든 질문지에 크게 영향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네 가지 영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본 연구를 통해 발견한 것들 자체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연구 방법을 코드 체계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첫째와 넷째 영역을 합친다면 (즉, 어떤 요소의 존재 혹은 부재에 관한 첫째 영역과, 표현의 강도에 대한 넷째 영역), 본 연구를 통해 알게 된 것들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각 이야기에서 표현의 강조를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각 응답자들이 자신의 개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혔기 때문에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요인들의 내용을 목록으로 나타낸다면 각 응답자에 대한 주요 개종 요소들을 효과적이고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코드 체계를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br /><br />표 1 팔레스타인 남성과 여성의 주요 개종 요인들<br /><br />주요 개종 요인들은 포괄적인 질문지에 응답자들이 답한 것을 바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요약과 분석을 통해 유출한 것이므로 각 응답자들의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진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0" name="_ftnref10">[10]</a> 표 1은 응답자 남, 녀 각각에 대한 주요 개종 요인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표는 응답자 그룹 전체의 특징들을 보여주는 이어지는 다음의 분석들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된다.<br /><br />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자들에 관한 연구: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유 (III)에서 계속됩니다.<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 name="_ftn1">[1]</a> Ant Greenham은 남아프리카에 있는 Durban 출신이다. 그는 Dallas에 있는 Criswell College에서 Biblical Studies로 MA를 했고, 미국 North Carolina Wake Forest에 있는 South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으로 PhD를 했는데, 논문은 이슬람에 대해 썼다. 그와 아내 사이에는 성장한 두 명의 자녀가 있고, 여러 명의 손주들이 있다. 현재는 그가 박사학위를 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 name="_ftn2">[2]</a> 이 요소들은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대답한 내용이다. 그녀는 자신이 꾼 꿈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네 가지 요소들은 그녀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에 잘 들어맞기 때문에 그녀의 개종에 영향을 미친 주요 요소들로 간주되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 name="_ftn3">[3]</a> 포괄적인 질문지에서 그녀가 세례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와 아내를 여자 1의 집에 데리고 갔고, 또 통역도 해 준 남자 1은 세례는 예민한 문제이니 질문지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그래서 여자 2부터 여자 8까지는 그 문제를 묻지 않았다.(Ray Register와 믿는 자 A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이들 중 대부분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세례를 예민한 문제로 보는 것은 여성 1부터 8까지라기 보다는 남자 1인 것으로 보인다. 개종 자체에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세례가 개종의 중요한 지표인 것은 사실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 name="_ftn4">[4]</a> 여자 4는 내가 그녀를 인터뷰한 날 여자5와, 6, 7 그리고 여자 8을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나의 포괄적인 질문지에 답하기 전에 여자 4가 인터뷰할 때 돌아가면서 참여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 name="_ftn5">[5]</a>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떠나지 않은 것 (혹은 둘째 부인을 얻지 않은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아이를 잃은 여인이라는 것과 후손 (반드시 아들이 아닐지라도)이 없는 남자라는 수치가 그들을 짓눌렀을 것이고, 아이를 낳아 줄 다른 아내를 얻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된다. 나는 그 남편을 잠깐 동안만 만나 보았을 뿐인데, 그도 역시 믿는 자임이 확실한 것 같았다. 그가 믿는 자이기 때문에 아내를 떠나지도 않고, 다른 아내를 얻지도 않았을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6" name="_ftn6">[6]</a> 그녀는 포괄적인 질문지에 답하면서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개종 이야기에 비추어볼 때, 꿈 꾼 것이 그다지 중요한 요소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녀도 꿈을 설명하는데 아무 흥미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에게 굳이 꿈을 설명하도록 요청하지 않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7" name="_ftn7">[7]</a> 이 네 가지 요소들은 그녀가 포괄적인 질문지에 한 답변들이다. 그녀가 한 모든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이슬람에 대한 거절과 예수님의 존재가 더 중요한 요소인 것으로 드러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8" name="_ftn8">[8]</a> Duane R. Monette, Thomas J. Sullivan, and Cornell R. DeJong, Applied Social Research:Tool for the Human Services (New York: Holt, Rinehart & Winston, 1986), p.175.<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9" name="_ftn9">[9]</a> 위의 책, p. 181.<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0" name="_ftn10">[10]</a> 내용 분석과 코드화의 과정은 각 이야기들을 위에서와 같이 요약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두 개의 질문지들을 함께 통합하면서 요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또한 그 요약들은 각 개종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정확히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50452659733571733002010-02-23T05:13:00.000-08:002010-02-23T05:16:19.881-08:00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자들에 관한 연구: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유 (I)글쓴이: Ant Greenham<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 name="_ftnref1">[1]</a><br />원문: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df/2010/116-175SFMFEB2010.pdf<br /><br />1. 서론<br />이슬람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무슬림들이 생겨나고 있다. 무슬림들의 개종에 관한 문서를 보면 여러 흥미로운 개종의 이유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개종자들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11명의 남성들과 11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2003년 1월에 그들의 개종 이유에 대한 연구를 해 보았다.<br /><br />이 주제를 다루면서, 나는 성경에 근거한 개종의 개념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즉, 한 개인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리스도께 겸손히 엎드리면서 그에게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개종으로 보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 name="_ftnref2">[2]</a>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점령지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이 개념을 적용하였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이 지역에 대해 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한다.<br /><br />2 응답자들을 선택한 방법<br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역 자료를 모두 검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않았다. 그 지역에 있는 개종자들의 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살았던 Ray Register는 내가 도움 받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 주었고, 또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스라엘에 살았던 나의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 name="_ftnref3">[3]</a>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나를 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자들에게 소개해 주었고, 필요할 때는 통역도 해 주었다. 개종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누구를 만나게 될 지 미리 알지 못하고 있었다(아마도 보안상의 이유였을 것이다-역자 주). 내가 인터뷰한 개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터뷰가 이루어진 곳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겠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 name="_ftnref4">[4]</a> <br /><br />3 질문지의 사용<br />나는 자유 해답식 질문지를 사용하여 응답자들이 그들의 개종 이야기를 제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 이야기에서 얻은 통찰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좀 더 포괄적인 내용의 질문지를 사용하여 내용을 보충하였다. 즉, 다섯 개의 자유 해답식 질문들로 시작하여 응답자들의 개종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였다.<br /><br />인터뷰를 할 때는 처음에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어린 시절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서 응답자들이 가능한 한 많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익숙해 지도록 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이 무슬림이었을 때는 어떠했는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 개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개종 후에는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를 물었다.<br /><br />각 인터뷰의 목적은 개종자 자신으로부터 자신이 왜 믿게 되었는지를 듣는 것이었다. 일단 인터뷰 대상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끝낸 후에는, 그들에게 포괄적인 질문지에 답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한 포괄적인 질문지를 사용한 것은 개종자들이 해 준 이야기들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나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에 자료를 보충하고 들은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br /><br />4 개종자들의 이야기<br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있고, 모두 나의 두 가지 질문지에 응답한 것들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 name="_ftnref5">[5]</a> 동일한 질문을 했기 때문에 각 경우에 유사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종자들의 이야기이지 내 이야기가 아니다. 개종에 대한 이해에 맞추기 위해 내가 그 이야기들을 재단해 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개종의 개념을 가지고 그 이야기들을 분석했고, 나는 눈에 띄는 강조점들과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점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개종의 이야기들을 전한 후에 각 개종자가 개종을 하게 된 주요 원인을 알아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br />관계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내가 인터뷰한 11명의 사람들을 ‘남자 1’부터 ‘남자 11’까지로 부르겠다. 또한 여자 11명은 ‘여자 1’부터 ‘여자 11’로 부를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가 크게 작게 기존의 믿는 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나는 그들은 ‘믿는 자 A’부터 ‘믿는 자 L’까지로 구분하기로 하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익명성을 유지하는 데도 좋고, 여러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동일한 사람을 알아보는데도 유익하다. 동일한 사람은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동일한 믿는 자 A가 여러 개종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면 그는 다른 개종자들의 이야기에서도 모두 믿는 자 A로 등장할 것이다. 다른 믿는 자들도 개종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지난 가는 영향인 경우가 많고, 기독교인 선생들처럼 한 그룹으로써 영향을 미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별히 구분하여 지칭하지는 않겠다. <br />4.1 남자 1<br />이야기<br />남자 1은 독신으로 20대 후반이었다. 그는 열심 있는 무슬림이 아니었고, 꾸란을 잘 알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항상 예수님을 믿었고 (동정녀 탄생), 꾸란에 예수님에 대한 다른 사실들도 나와 있지만, 그런 것들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꾸란과 성경 사이의 차이점을 논리적으로 살펴 볼 수 있었고, 이 두 권의 책이 모두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br /><br />그가 그의 동네에 살고 있는 두 명의 미국인들(특히 그 둘 중 하나인 믿는자 A)을 만나면서 중요한 진보가 있었다. 그들은 그를 위해 기도해 주겠다고 했고, 자신들은 예수님을 전하고, 어떻게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지를 전하기 위해 그 곳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남자 1에게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주었다. 남자 1은 비디오로 된 영어와 아랍어 성경 공부 교재를 가지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 미국인들이 한 역할과 그들이 남자 1에게 제시해 준 그리스도에 대한 자료들은 그가 예수님을 믿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br /><br />그의 이야기에는 몇 가지 맞지 않는 점들도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종교를 바꾸는 문제(즉, 개종)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가 세례를 받았는지 밝히기를 거절했다. 그의 가까운 가족들은 그가 공식적으로 무슬림으로 남는 한 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무슬림들 역시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데 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성경이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수께서 주신 영생에 대한 확신과 응답된 기도는 그의 신앙에 역할을 하였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분이었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기적적으로 그의 삶을 바꾸셨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라는 그의 수치를 (죄는 수치스러운 것이므로 – 역자 주) 가져가셨다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했다. 단지 오래 전에 자신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강조했다.<br /><br />분석<br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남자 1의 경우 개종에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그 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경험은 성경과 꾸란 모두에 근거하여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 그는 (지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오랫동안 말해 왔다. 그는 믿는 자 A를 만나기 전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자신을 이슬람으로부터 멀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세례 받은 것과 이슬람을 떠난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진정한 개종의 표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공개적이지 않은 많은 숨은 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 1은 그의 삶에서 이슬람을 대신 할만큼 그렇게 중요한 어떤 것도 보이고 있지 않다. 더구나, 그가 말하는 응답된 기도의 경험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그런 기적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온 그런 종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겸손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어떤 표시도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가져가셨다는 사실에 대한 답을 거부한 것도 그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정말 믿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남자 1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나면서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상당히 많아진 무슬림이지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6" name="_ftnref6">[6]</a><br /> <br />4.2 남자 2<br />이야기<br />남자 2는 독신이며 지적인 젊은이였고, 장남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58년 동안 종교 지도자로 있었지만 그런 사실이 남자 2에게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는 꾸준하게 기도하거나 금식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무슬림 공동체가 그를 믿지 않는 자로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종교적인 행위들을 믿지도 않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부터 이슬람을 멀리 하였다. 하지만 이슬람을 거절했기 때문에 개종한 것은 아니다. 그는 꾸란에 나오는 예수님을 보면서 기독교에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는 더 읽고 싶었고, 지역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에서 문서들을 보내주었다. 개인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공허한 마음은 그를 주님에게로 이끌었다. 그는 성경이 그를 그리스도께로 이끈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성경의 진리가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분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 구원의 확신이 특별히 중요했다. 그는 또한 그가 구원 받았을 때 경험한 영광(honor)의 느낌을 강조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의 수치스러운 죄를 가져가심으로 인해 느낀 것이었다. 그 결과로 그의 모든 사고방식이 변했다. 근처에 있던 한 대학의 신자가 그가 방송국에서 받은 자료를 보고는 한 성숙한 아랍 그리스도인인 믿는 자 B를 소개시켜 주었다. 남자 2는 그때쯤 이미 믿는 자였고, 믿는 자 B와의 만남은 그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켜주었다. 믿는 자 B와 격려가 되는 모임을 가진 후에 그는 일주일에 두 세 번씩 한 큰 센터에서 하는 믿는 자들의 그룹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성경을 공부하였고, 그것이 진리이며 살아있다는 확신가운데 성장하였다.<br /><br />그의 개종으로 그의 삶에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문제에는 답이 있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단순히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키셨다. 그의 가족들도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단번에 알아보았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방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을 태워버렸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계속되던 문제들은 별로 종교적이지 않은 그의 삼촌이 끼어들면서 중단되었다. 그는 집을 떠나 대학에 가서 그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지내는 것에 매우 감사하고 있다. 그는 구속적인 환경과 마을 사람들의 거절로부터 떠나있는 것이다. 그가 박해 받는 한 신자의 영향을 받아 개종하게 되긴 했지만,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하마스의 즉각적인 영향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였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7" name="_ftnref7">[7]</a> 그는 세례를 받았고, 기독교 사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지만 기존의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깊이 받아들여졌다고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행하는 것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br /><br />분석<br />남자 2는 이슬람의 제한에서 벗어난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가 성경에서 본 진리와 생명이 그의 개종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 진리와 생명이 성경에만 제한되지 않고 그의 삶도 바꾸었다. 그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일어난 온갖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사회적인 영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의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해 줄 것이다. 예수님이 그에게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고, 그 결과로 그가 경험한 새로움이 믿지 않는 그의 가족들에게 분명하게 보였으며, 그에게 계속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br /><br />4.3남자 3<br />이야기<br />남자 3은 독신으로 매우 힘든 가족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여덟 명의 여자 형제들과 한 명의 남자 형제가 있었다. 그는 열 세 살 때부터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없었고, 어머니는 늘 동생들을 돌보느라 바쁘셨기 때문에 그는 늘 혼자라고 느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그의 마을에 있는 안 좋은 지역에서 야채 가게를 운영하면서 마약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무슬림으로서 이슬람의 종교적 실천들을 따라 하기는 했지만 그는 알라를 두려워했다.<br /><br />어느 날 한 젊은 독일 여성 믿는 자 C가 그의 가게에 왔다. 그는 그녀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어떤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에, 그들은 토론을 위해 만나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그녀를 초대하여 가족들을 소개해 주었다. 가족들도 그녀를 좋아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말은 그만해야 한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가 그녀에게 그 말을 전달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그녀에게 가족들 모르게 자신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고 알려왔다. 그녀는 그에게 아랍어로 된 성경을 읽으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또한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점차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고, 믿는 자 C는 그의 많은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그녀는 그가 무슬림이기 때문에 그와 결혼하기를 거절했지만, 그에게 예수님께 맡기면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그를 결혼한 독일 여성인 믿는 자 D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그녀가 그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다고 느꼈고, 눈을 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 말씀에 응했다.<br /><br />그 다음 두 해 동안 그는 다른 신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기도했지만, 그가 무슬림들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잘못하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세례를 받았지만 그 이유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성령님을 느끼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이미 독일로 돌아간 믿는 자 C 때문이 아니라 바른 이유에서 그런 관계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크리스마스때 그가 독일로 가서 믿는 자 C와 그녀의 가족과 2주 동안 시간을 보냈고, 돌아와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의 영적 삶에는 파동이 있었고, 그는 2년 후에 다시 독일을 방문하였다. 그 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갔고, 그 곳에 있는 기독교 기관에서 훈련을 받았다. 독일에서 (더 많은 훈련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로 떠나기 직전에 그는 자신이 ‘영적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는 그것이 초자연적인 꿈이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깨어있었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끊어져 버렸다고 말했다 (비록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자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기도했던 믿음과 사랑을 받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에서 모든 일이 함께 일어났는데, 그가 거기서 본 기적들은 그가 스스로를 전에는 무슬림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로 보도록 도와주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8" name="_ftnref8">[8]</a> 그는 베네수엘라에 머물렀던 마지막 기간에 (다시) 세례를 받았다. <br /><br />자신의 개종을 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이 한 발짝 한 발짝씩 예수님께로 왔다고 말했다. 각 발걸음이 중요한 것이었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걸음이었다. 사실 성령님이 그가 그리스도께로 오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또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성경 읽기,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본을 보였던 몇 명의 신자들의 삶이 그의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강조하였다. 그 때 이후로, 그의 삶은 비록 불완전했지만, 훨씬 나아졌다. 그의 가족은 이 인터뷰가 있기 몇 달 전까지 그의 삶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사촌 몇 명이 위협을 가해 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분명히 신자들의 그룹에 속하겠지만, 그의 가족 이외의 무슬림 공동체에게는 자신의 개종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가족들과 의견 일치를 보았다. <br /><br />분석<br />‘과정’이라는 말이 남자 3의 개종의 경우에는 너무나 잘 맞는 말이다.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그는 성령님으로 인해 그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은 그가 초자연적인 꿈을 꾸기 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되기 전의 경험들이(저자는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져야만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역자 주)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빼놓고 그의 개종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 3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리우스와 같이 개종의 과정에서 몇 가지 영적 경험들을 한 경우이다. 그러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남자 3의 경우에도 자신의 경험들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믿는 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분명한 때가 있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9" name="_ftnref9">[9]</a> <br /><br />4.4 남자 4<br />이야기<br />남자 4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십대였고, 인터뷰를 하기 2년 전에 개종하였다. 그의 가까운 가족들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았다. 비록 가족 들 중 네 명의 삼촌들과 그는 겉으로는 종교적인 것들을 잘 지켰지만 말이다. 그는 무슬림이었지만 그는 1학년부터 로마 카톨릭 학교에 다녔다. 처음부터 그와 카톨릭 사이에는 상호간에 어떤 애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기독교 예배에 참석한 적도 있었지만, 4학년부터는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하는 호전적인 무슬림들로 이루어진 학교 폭력배들을 두둔하면서 파괴적인 행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br /><br />그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카톨릭이었던 그의 반 친구와 이웃에 살던 믿는 자 E로 인해 그의 삶이 바뀌게 되었다. 그는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폭력배 두 그룹이 모두 그의 변화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믿는 자 E는 남자 4를 기독교 청년 모임에 초대했다. 남자 4가 갔을 때 그는 무슬림들과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차이를 보았고, 용납 받는 느낌을 받았다. 믿는 E 또한 그에게 카톨릭 신자가 되는 것과 중생(다시 태어남)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남자 4는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그의 삶에 받아들였다.<br /><br />남자 4는 성경 읽기와, 기독교 서적 읽기, 예수님의 진리의 메시지, 하나님의 영광, 이슬람의 거절 같은 자신의 개종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다른 요인들도 지적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0" name="_ftnref10">[10]</a>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이슬람과 무함마드를 공격하는 것은 무슬림들을 그리스도께도 인도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의 경우에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를 개종하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br /><br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그의 삶을 바꾸셨고, 그는 개종 후 훨씬 덜 호전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된 후 그의 부모님과 삼촌들은 한 무슬림 종교 지도자에게 그의 결심을 돌이키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번은 소리 소리 지르며 말이 오고 갔지만, 그는 상대방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싶은 유혹을 절제할 수 있었다. 한번은 그의 부모님이 그를 집에서 쫓아냈다. 그가 밖에서 떨고 있는 동안, 그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예수님은 판초(한 장의 천으로 된 외투- 역자 주) 같은 것으로 그를 감싸고 계시면서,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또한 몇 번의 기도가 응답 받는 경험을 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절대로 그가 교회에 참석하도록 놓아두실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고, 지금은 부모님이 대부분의 경우 그가 교회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학교에서 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선생이 그를 매질 했을 때도 그는 그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 선생은 좀 나아지게 되었고, 그는 그 선생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남자 4는 또한 정치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기도가 그 상황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에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공동체 사이에 적대감이 있을 때 기도를 통해 상황이 해결된 것이다.<br /><br />분석<br />아직 젊기는 하지만, 남자 4의 삶에 나타난 변화가 그의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영향이 처음부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변화된 삶에 강하게 이끌렸다. 그는 개종 후에 그의 삶에 나타난 여러 변화들을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나타난 인격적인 변화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신비한 경험들 (기도응답과 같은)이 모두 그의 개종 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게서 그런 말을 이끌어내기 전에는 예수님 꿈을 꾼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러한 경험들은 그의 개종에 대한 확인이었을 뿐, 그의 개종을 이끌어 낸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br /><br />4.5남자 5<br />이야기<br />남자 5는 나이 많은 결혼한 사람으로 교육은 많이 받지 못하였다. 그는 무슬림으로서도 별로 종교적이지 않았는데, 4학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천사의 비전을 보았다. 그는 그 비전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났을 때, 결혼하고 그의 첫 아들이 태어난 후에, 병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누군가가 그에게 성경을 주었다. 그는 그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가 비전으로 보았던 그 말씀을 (누가복음 2:13-14 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어린 시절에 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흥미로웠고,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점점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또한 (미국인) 믿는 자 F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신자들과 함께 남자 5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1" name="_ftnref11">[11]</a> <br />비록 그가 개종한 후에도 몇 년간 특이한 경험들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가 어렸을 때 본 비전이 그가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가 한 여러 특이한 경험들은, 뱀에 물렸는데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영적인 인도함을 받는 꿈들, 기도 응답들, 2001년 9월 11일에 있었던 일을 미리 예감 한 것 등이다. 그러나 그의 개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들은 성경(과 기독교 서적)에 나오는 예수님이 전하신 진리와 예수님의 존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이 자신의 삶에서 하신 기적적인 일들, 그리고 신자들의 긍정적인 삶이다. 그는 꾸란과 성경에서 모두 말하는 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지만, 꾸란에서 예수님에 대해 하는 말들이 개종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대신에, 성경이 그의 영적 양식이 되었고, 그는 더 많이 듣기를 원했다. 그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웠다 (마 4:4) <br /><br />남자 5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많이 경험하지는 못했다. 한 번은 병원에 갇히기까지 했다. 그는 종종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는 자신이 꾸란에 나오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믿는 자로서 도덕적으로 순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하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느낀다. 불행히도, 그가 이 인터뷰를 할 당시에는 어느 신자들의 그룹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br /><br />분석<br />남자 5는 그의 믿지 않는 가족과, 기독교 공동체와의 교제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크게 불리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그가 삶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경험했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그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가졌는데,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놀라운 비전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고, 수 년간 영적인 양분을 제공해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존재와 진리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개종 이후에 하게 된 특별한 경험들로 인해 격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 경험들은 믿는 자들과 정기적인 교제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잘 보완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믿는 자 F와 계속 연락을 갖고 있고, 나의 방문을 매우 기뻐하였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그를 받아들여 준 신자들과의 연합과 그들의 도덕적 가치관을 높이 보는 그의 태도는 그의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br /><br />4.6 남자 6<br />이야기<br />남자 6은 결혼한 젊은이로 교육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7세대 째 계속 고향에 살면서 좀 지위가 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장남이 아니라고 강조했으며, 가족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자라는 내내 매우 반항적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모스크에 갔지만, 이슬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자신의 무슬림 이름을 싫어했으며, 다른 무슬림들과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 지도자였지만, 6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남자 6은 이렇게 개종하기 전에 이미 이슬람을 거절했고, 그것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br /><br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했고, 왜 무슬림들보다 그들이 더 나은 것인지 의아해 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주 원인은 무슬림 개종자인 믿는 자 G로 인한 것이었다. 믿는 자 G는 남자 6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해주었지만, 남자 6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은 믿는 자 G가 턱수염을 기른 것을 보고 그가 강경한 이슬람주의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는 자 G가 주는 신약성경을 받았는데 그 안에는 믿는 자 G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는 성경을 읽어 보았고, 때때로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중 7개월 후에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 번은 그가 ‘한 밤중’에 창 밖을 보며 깨어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것이 그의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그를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믿는 자 G를 불러서 ‘당신이 나에게 말해 주었던 그 분(예수님)이 자신에게로 오셨다.’고 말했다. 믿는 자 G는 남자 6의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남자 6은 믿는 자 G를 만나기 시작했고,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 배웠다. 그의 삶이 달라졌다. 그는 죄에서 돌이켜 새로운 법에 매인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개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예수님 바로 그 분과, 그분의 진리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정치적인 불안정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2" name="_ftnref12">[12]</a><br />정치적 상황이 그를 몹시 짓눌렀다. 그의 외부 환경은 (두 번째 인티파다로 인해,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의 점령지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들의 봉기이다-역자 주) 점점 더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었고, 그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br /><br />그는 또한 하나님의 그의 삶에 개입하신 몇 가지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런 일들은 구원 받은 초기에 좀 더 자주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일들에는 꿈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을을 수색할 때 보호해 주신 것, 기도의 응답 (그 자신과 아버지의 일자리를 위해 기도했을 때) 등이 있었다. 그는 보안 조치로 인해 다른 지역에 있는 신자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숨어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박해는 아직 당해보지 않았다. 만일 그의 개종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의 매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br /><br />분석<br />남자 6은 분명 어려운 상황에서 개종을 하였다. 그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몹시 어려움을 당했다. 그가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가 투옥되셨고, 현재도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동체와 하나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확실하게 이슬람을 거절했다. 삶을 바꾼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반항과 거절의 상황에서 일어났다. 그가 (한 밤중의 경험의 결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과,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이게 된 것은 그의 삶에 순수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 준다. 그의 변화는 그가 호의적으로 다른 신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인터뷰를 위해 나와 함께 간 사람들에게도 그는 호의적이었다. 비밀 신자이기에 그는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긍정적인 모습은 그가 인터뷰 하는 동안 그의 믿지 않는 아내 앞에서 기꺼이 신앙을 고배하려 했다는 것과, 그가 최근에 그의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를 위한 기도는 아버지의 일자리를 위한 것과 관계된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br /><br />4.7 남자 7<br />이야기<br />남자 7는 잘 교육받은 결혼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이슬람 가정 출신이고, 이슬람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이 이슬람에서 배운 것과 같지 않은, 죽이는 것을 즐겨 하지 않는 신을 찾기 시작했다. 이 탐색은 그가 아버지와 나눈 사랑 깊은 관계에 영향 받은 것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가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해 주었다. 몇 년이 흐른 후, 유대인 정착촌에 살고 있는 믿는 자 H가 그에게 몇 권의 기독교 문서를 주었는데, 그는 폭력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신약에 매혹되었다. <br /><br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무엇인가가 그에게 더 공부하고 배우도록 채근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는 믿는 자 H를 그의 집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일년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주님께 삶을 드리도록 창조된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한 소년이 갑자기 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삶과 성품에서 큰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는 자신의 개종에서 특히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 밖에 영생의 확신과,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중요하게 보았다. <br /><br />그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졌지만, 강한 거절과 박해도 경험해야 했다. 그가 그의 문화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끊으려 할 때마다 항상 문제가 있었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그가 더욱 주님을 신뢰하도록 해 주었고, 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정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숨어있어서 그렇지, 분명히 훨씬 더 많은 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분명히 자신처럼 진리를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는 신자들은 숫자적으로 충분치 않다고 보고 있었다. <br /><br />분석<br />남자 7의 개종에서는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간의 교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러한 관계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육신의 아버지와 가진 관계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3" name="_ftnref13">[13]</a>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이슬람에서 떠나 신약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하였다. 현재, 핍박을 받고 있음에도 그는 다른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강한 바람을 나타냄으로써 그의 삶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br /><br />4.8 남자 8<br />이야기<br />남자 8은 잘 교육받은 결혼한 사람이다. 그의 부모님은 무슬림이셨고, 그는 학교에서 다른 과목들과 함께 이슬람을 공부하였지만, 그렇게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 목적 없이 사는 잃은 자 된 사람이었다. 십대시절 그는 믿는 자 H가 그의 친구 남자 7에게 준 몇 권의 문서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들을 열심히 읽고 그의 마음과 삶이 변하고 깨끗해 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그는 믿는 자 H가 그에게 준 성경을 읽고 그가 잃은 무엇인가를 발견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매우 강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삶은 더욱 변화되었다.<br /><br />한번은 그가 믿는 자 H와 함께 차를 운전하고 가고 있었는데 한 부주의한 운전자에 의해 차선을 이탈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그런데 매우 충격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차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사고가 있은 후 남자 8에게 모든 것이 변하였다. 그는 이제 주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경을 계속해서 공부하면서 그를 위해 대신 돌아가신 분을 위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개종에 영향을 미친 다른 요소는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의 말씀, 영생에 대한 확신, 꿈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4" name="_ftnref14">[14]</a> 그는 또한 체포된 후에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힘든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개종 후에 그의 삶은 더욱 발전하여 어머니의 죽음마저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맛보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졌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만끽했다. 그러나 인터뷰 당시 그는 (죽음의 위협을 포함하는) 심각한 박해를 경험하고 있었고, 과거에도 이미 그런 박해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br /><br />분석<br />남자 8은 남자 7과 가까운 친구였고 서로가 있는 자리에서 각각 인터뷰를 하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남자 8의 개종 경험은 개인의 위기가 그 정점을 이룬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진정한, 그리고 매우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였지만, 차선을 벗어나게 된 사고에서 살아남게 된 후에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그가 성경을 읽으면서 더욱 깊어졌고, 그의 전 삶을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요약하자면, 이 과정은 분명하게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의 변화된 삶은 개인적인 슬픔과 박해에도 사라지지 않는 그의 기쁨의 경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br /><br />4.9 남자9<br />이야기<br />남자 9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 유대인 신자와 결혼했다. 성장과정에서 그는 라마단 동안 금식하였고, 금요일에는 아버지와 함께 기도하였지만 종교를 강하게 느끼지는 못했다. 그는 17세 때부터 이슬람을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종교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1948년에 난민이 된 그의 부모님은 그와 그의 열 형제들을 사립 카톨릭 학교에 보낼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그는 점차로 죄와 구원의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라크나 러시아에서 학위를 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카톨릭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가 카톨릭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 대학에 계신 그의 (외국인) 선생님들이 그에게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잘 알려주셨다. 그는 학교에서 이슬람이 말하는 예수님에 대해 배웠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어떤 다른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관대함과, 자비, 헌신 그리고 사랑이었다. <br /><br />그는 구약을 읽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구약의 말씀들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배운 사랑과 기쁨, 평안과 연결시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시온주의자들의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신약을 읽으면서 그 본질적인 메시지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는 교회 예배에 참석했지만, 계속해서 뭔가가 가로 막혀있는 듯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신앙이라는 것이 인종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 인티파다가 이 때 일어났다. 그는 거의 3년간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더욱 악화될수록 그는 더욱 성경을 갈망했다. 어느 날 그는 꿈을 꾸는 것 같은 어떤 경험을 했다: 그는 평화와 안정을 느꼈고, 그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어떤 말할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예수님에게 감동을 받은 그는 그 분께 열정적으로 신앙을 고백했다. 그의 삶에 이러한 위기를 겪으면서 그는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br />그 바로 직후에 그에게 영국에서 기독교를 공부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생겼다. 그는 영국에서 안수를 받고,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후에는 유대인 신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그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그 결혼으로 그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았지만, 결혼한 부부로 인정 받는 데는 아직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하는 모임에서 예배드릴 수 있었다. 비록 미래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냉혹해 보였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족했다. 그의 가족은 그의 개종에 대해 처음에는 자연스러운 반응, 즉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지금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가 시민권을 받음으로써 갖게 된 자유로운 이동의 권리를 사용하여 가족들을 최대한 돕고 있다. <br /><br />분석<br />남자 9는 카톨릭 교육과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본, 그리고 신약을 읽는 것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기보다는 마음의 변화(즉, 거듭남)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던 저항감을 포함하는) 어떤 장벽으로 인해 그가 꿈 같은 어떤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 경험이 그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가 그 전에 이미 집중하여 성경을 읽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후에 따라온 순수한 변화는 구약에 대한 인정과 정치적인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신뢰하는 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5" name="_ftnref15">[15]</a><br /><br />4.10남자 10<br />이야기<br />남자 10은 미국 시민권을 가진 독신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역에 헌신적이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매우 독선적인 무슬림 팔레스타인인 아버지와 카톨릭을 믿는 브라질인 엄마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와 그의 누나가 집에서 종교적인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이슬람식 문화와 전통가운데 성장했다. 남자 10은 아버지쪽 삼촌들(그들 역시 브라질 여성들과 결혼했다)의 집을 방문해서 예수님 사진을 보고는 궁금하게 여겼다. 그가 일곱 살이었을 때 어머니는 그가 도서실에서 어린이 성경 빌리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그 이야기들을 읽었고, 그림들에 매혹되었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성경을 아버지가 보지 않도록 숨기라고 그에게 말했다. <br />어머니는 그가 아홉 살이었을 때 집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와 그의 누나를 그의 고향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 데리고 가서 삼 년 동안 그곳에 있게 했다. 그는 그 때쯤 아버지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물었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무슬림들은 예수님을 존경하지만 그 분보다 더 크신 분이 계시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 후에 남자 10은 열렬한 무슬림이 되었다. 모든 종교적 실천들을 날마다 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모세와 예수님은 믿지만 무함마드는 알지 못하는 그의 어릴 적 친구들에게 이슬람을 전하고 싶어했다. 어느 저녁, 그는 두 가지 상반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 젊은 영어권 신자가 예수님이 당하신 배신에 대해 말해 주었는데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서 한 무슬림 소녀가 십자가를 조롱하면서 무슬림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즉시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갔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이슬람이 옳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알라께 간절히 빌었지만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다. 어느 때는 알라께 그렇다면 자신은 예수님께로 가서 그 분께 응답을 구하겠다고 알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 있는 무슬림으로서 그의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것을 비난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내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다. <br />그가 열 다섯에 접어들었을 때, 부활절 전야에 그는 아버지의 집에 혼자서 있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에 그가 성경을 읽었던 바로 그 소파 옆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영이 그의 위에 임하셨다.” 그는 내부가 폭발하는 것처럼 느꼈는데 마치 예수님이 방으로 걸어 들어 오시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즉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는 치약으로 자신의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고 어머니를 불러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어머니를 미워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머니를 향해 사랑을 느꼈다.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는 자신의 개종을 회상하면서 성경보다는 기독교 방송과 문서가 한 중요한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존재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여전히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키셨다.<br />그는 개종 후 가끔 교회에 나갔는데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죄인의 기도를 하도록 시켰다. 그러나 그의 개종사실을 알아차린 아버지가 그를 모욕하고, 때리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간혹 그 교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교회 문을 닫게 하겠다고 교회를 협박했다. 다른 두 교회는 교회 문을 닫도록 그의 아버지가 고소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무런 교제도 갖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도 하지 못했다. 그는 반항하고, 마약을 하고,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그 자신 역시 아버지와 누나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슬람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그를 영원히 집에서 쫓아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로 갔고,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 받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성경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마침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기회를 갖게 되었다.<br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의 그의 사역은 매우 극적이었다. 돌아온 후에 그는 두 마을에서 쫓아냄을 당했고, 매를 맞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사실, 몇 달 전에 그 곳들 중 한 곳에서 한 신자가 순교했다. 그 역시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 그는 하마스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건드릴 수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이 끊어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br /><br />분석<br />남자 10은 어려서부터 강한 종교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를 오갔다. 주로 이슬람에 머물렀지만, 계속해서 좋은 무슬림으로 남고자 했던 그의 결심은 그의 기도에 침묵하는 알라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약해졌다. 그 후에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기는 했지만, 부활절 토요일에 그가 하게 된 예수님의 경험은 그의 삶에 분수령이 되었다. 그 강력한 만남이 (성경적인 바탕이 아직 확고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으로 이끌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각적이고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를 용서한 것이다. 초신자로서 그가 보인 연약함은 상처 받기 쉬운 십대에 지독하고 지배적인 아버지로 인해 나타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개종이 진심이었는지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영적으로 성장했고, 후에 그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한 사역을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br /><br />4.11 남자 11<br />이야기<br />남자 11은 이제 개종한지 몇 달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그는 두 살부터 15살까지 경건한 무슬림으로 살았고 매일 꾸란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슬람은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고, 그의 마음에 공허감만을 주었기에 그는 이슬람을 떠났다. 그의 어린 시절 역시 심리적이고 의학적인 문제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악몽을 꾸거나, 머리에서 소리가 들린다거나, 잠을 편안하게 잘 수 없다거나, 식습관, 두통, 이명(귀에서 소리가 나는 것-역자 주), 발과 눈의 문제, 신경성 등. 이 중 많은 문제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끔, 그는 벨 소리를 듣는 꿈을 꾸었는데 그런 날이면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지만,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지 못했다. <br /><br />인터뷰를 하기 십 개월 전에 그는 한 이스라엘인이 쏜 총에 맞아서 심하게 다쳐서 다시는 걷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6" name="_ftnref16">[16]</a> 그러나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가 꿈에서 들었던 벨 소리가 다시 들리고 난 후 11일 이내에 그는 걸을 수 있게 되었고 퇴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그는 머리 속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 라는 이름을 들었고 꿈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그가 죄인이고, 거짓말쟁이고, 그의 일에 헌신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는 회개할 수 밖에 없었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이 꿈이 그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성경을 구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고향에 있는 기독교 기관에서 만나게 된 믿는 자 I로부터 그것을 구할 수 있었다. <br /><br />그는 이틀 동안 집중하여 성경을 읽었다. 성경 읽기를 마친 날 아침에 그는 두통 없이 깨어날 수 있었고 이명도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식사도 잘 할 수 있었고, 마음에도 평강이 있었다. 그가 믿는 자 I 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믿는 자 I가 그에게 마리아가 예수님을 어떻게 잉태하게 되었는지 하는 것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알려주었다. 믿는 자 I는 또한 그에게 하나님께 감사 드릴 것과 죄를 고백하고, 성경을 읽고, 매일 기도하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그렇게 했고, 그가 기도 드리자 계속해서 육체적 심리적인 것들이 호전되는 것을 경험했다. 지금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께로 왔다. 누가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그가 성경을 읽었을 때 경험한 기적적인 치유 때문이다. <br /><br />아직 몇 가지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치스러운 그의 죄를 가져가셨다는 것 등), 그의 삶은 개종 이후 영적, 감정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증진되었다. 그는 다른 신자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을 느꼈고, 그의 대 가족들에게서도 소외되지 않도록 잘 대처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슬림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성경을 읽는 것을 통해 고침 받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성경을 읽고 있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었다. 그가 경험한 변화가 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믿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br /><br />분석<br />남자 11의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기적적인 변화의 이야기이다. 그는 아직 미성숙한 신자이지만, 하나님이 그의 삶에서 이루신 변화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한 기적들에 대해 예수님께 감사 드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또한 그가 성경을 읽고 있으며, 죄로부터 돌아선 것을 비롯하여 그의 삶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무슬림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가 아직 개종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을 알려준다.<br /><br />팔레스타인 무슬림 개종자들에 관한 연구: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유 (II)에서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 name="_ftn1">[1]</a> Ant Greenham은 남아프리카에 있는 Durban 출신이다. 그는 Dallas에 있는 Criswell College에서 Biblical Studies로 MA를 했고, 미국 North Carolina Wake Forest에 있는 South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으로 PhD를 했는데, 논문은 이슬람에 대해 썼다. 그와 아내 사이에는 성장한 두 명의 자녀가 있고, 여러 명의 손주들이 있다. 현재는 그가 박사학위를 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 name="_ftn2">[2]</a> 여기 서 ‘과정’이라는 말은 어떤 개종이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 Transformation’는 개종자가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삶을 말한다. ‘겸손한 엎드림’은 자기 자신의 엎드림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죄와 어두움, 우상, 사단에게 매어있던 부분에 대한 포기를 뜻 한다. 이 과정은 개종자가 그리스도께로 향하면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능력을 행사하시면서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위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 name="_ftn3">[3]</a> 내가 개종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고마움을 표하겠지만, 그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사역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과격한 무슬림들이 이미 개종자들뿐 아니라, 선교사들도 공격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 name="_ftn4">[4]</a>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의 보안이 너무나 불안하기 때문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개종자를 공격할 수 있고, 또한 이 글을 읽고 나서 악한 의도를 가지고 특정인을 찾아볼 수도 있다. 연구에 사용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나의 박사 논문 “Muslim Conversions to Christ: An Investigation of Palestinian Converts Living in the Holy Land” (Ph.D. diss., South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04)을 참조하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 name="_ftn5">[5]</a> 대부분의 경우, 개종자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 인터뷰 전에 알게 된 사실과, 인터뷰 후에 알게 된 사실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분석할 때는 그것을 구분하여 생각했는데, 특히 개종자의 이야기가 외부 영향을 받는 경향이 보일 때 더욱 그러했다. (여기서 외부 영향에는 포괄적인 질문들을 다루는 질문지에서 나온 제안들을 포함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6" name="_ftn6">[6]</a> 남자 1의 경우가 더욱 복잡한 것은 그가 인터뷰를 할 당시 믿는 자 A에게 고용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더욱 남자 1로 하여금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와의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자라는 인상을 주고 싶게 하였을 것이다. 인터뷰 후에 응답자들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연구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도 없다.) 남자 1의 경우에는 한 1년쯤 후에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따라서 인터뷰를 하면서 생겼던 남자 1이 정말 개종한 것인가 하는 염려가 근거 있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7" name="_ftn7">[7]</a> 그를 해치려고 한 사람들이 그에게 손을 뻗치려고 했다면 그들은 아마 체포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과격한 사람들이 이미 이스라엘에 한 번 붙잡힌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만일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거주지들 사이에 있는 검문소를 통과하려고 한다면 체포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남자 2는 현재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8" name="_ftn8">[8]</a> 그는 기적들이라고 말했지만, 그 기적들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에서 남자 3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진실로 믿는 자였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러한 깨달음이 있게 된 방법보다는 그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9" name="_ftn9">[9]</a> 그 독일 여성이 한 역할도 집고 넘어가야 한다. 각 과정을 주님이 주관하셨고, 그들도 그렇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음이 틀림 없다. 따라서 남자 3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은 믿는 자 C와 로맨틱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거나 (처음에 일이 그렇게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혹은 믿는 자 D와 함께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당시 믿는 자 D는 그가 완전히 개종했다고 보았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그가 긴 여정을 거쳐 진정한 개종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0" name="_ftn10">[10]</a> 이 다섯 가지 요인들은 주로 그가 포괄적인 질문서에 답변한 것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그는 다섯 가지를 각각 강조해서 말했지만, 여기서는 그냥 간단하게 나열하기만 했다. 그러나 남자 4는 내가 순서를 매기도록 제시한 개종 요인들 대부분에 대해 그것들이 모두 자신의 개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 4가 나에게 말해 준 것에 비추어서 이 다섯 가지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평가하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남자 4에게 정말 중요했던 요인들을 추려낼 수 있었다. 그 결과, 여기서 언급한 다섯 가지 중에 두 가지, 즉, 이슬람의 거절과, 예수님의 진리의 메시지가 남자 4의 개종에 주요 영향을 미친 요소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1" name="_ftn11">[11]</a> 믿는 자 5의 개종은 Bill A. Musk가 책에 기록하고 있는 그 이야기인 것 같다. 빌 머스크는 “1960년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자기 마을에 있던 기독교 병원을 몇 번 방문하던 한 무슬림이 선교사를 자기 마을로 초대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하늘의 천사 꿈을 보게 되었는지 설명하면서 천사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 고 노래했다고 말했다. 후에 그가 청년이 되어 성경을 샀을 때 그는 그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선교사의 초대는 그에게 촉진제가 되었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또 다른 중요한 꿈을 꾸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며칠 되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그 선교사가 전한 길을 따르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계속해서 그 선교사와 만남을 가졌고, 마침내 숨은 신자가 되었다.” Bill A. Musk, “Dreams and the Ordinary Muslim,” Missiology: An International Review 16 (1988), p. 168. 머스크가 기록하고 있는 것과 나의 설명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머스크가 기록하고 있는 그 마을 사람이 내가 인터뷰한 남자 5와 절대적으로 일치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므로, 남자 5의 개종에 대한 것은 그냥 내가 연구한 자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한 명으로 보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2" name="_ftn12">[12]</a> 이 네 가지는 포괄적인 질문지에 그가 답한 내용이다. 각각이 그가 자신의 개종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와 잘 들어맞고, 따라서 이 네 가지가 모두 아래에 설명해 놓은 대로 그의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3" name="_ftn13">[13]</a> 이는 매우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무슬림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개념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육체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남자 7이 하나님을 그의 영적인 아버지로 받아들인 것은 그의 개종에서 초월적인 요소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4" name="_ftn14">[14]</a> 남자 8은 포괄적인 질문지에 답하면서 이 다섯 가지 요소들에 각각 다른 강조점을 두었다. 그의 경우에는 예수님과 구원의 확신만이 정말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분석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5" name="_ftn15">[15]</a> 그가 유대인 신자와 결혼했다는 것 역시 그의 삶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슬림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대인 신자 부부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 살면서 겪게 되는 힘든 상황들에 대한 분석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본 연구의 범위에서는 벗어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6" name="_ftn16">[16]</a> 그가 이스라엘 거주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한 한 이스라엘 군인이 총을 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일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54141759346050774452010-01-31T12:21:00.000-08:002010-01-31T12:24:24.418-08:00신학적 도전: 이스라엘(the State of Israel),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다!글쓴이: 살림 무나야(Salim J. Munayer, 무살라하 책임자 <a href="http://www.musalaha.org/">http://www.musalaha.org/</a>)<br />원본: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df/2008/The%20Theological%20Challenge.pd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df/2008/The%20Theological%20Challenge.pdf</a><br /><br />1.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운명<br />1948년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은 팔레스타인 사회에 크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항상 논쟁이 되어 왔고, 심지어 국제적 모임에서도 늘상 있는 일이다. 1948년 전쟁의 결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단 기억에 엄청난 상흔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유대국가의 성립에 따른 일반적인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논설되어 온 바 있지만, 이 가운데 존재하는 소수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러 면에서 있어,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동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경험-즉 중동 전 지역으로의 분산, 난민으로서의 삶, 영토소실 그리고 연구기관들의 손실 등- 을 해오고 있다. 인구변화상으로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럽과 남,북미로 이주를 해 버린 팔레스타인 무슬림들 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버나드 사벨라(Dr. Bernard Sabell)의 연구에 잘 나타나 있는 바, 이러한 현상과 그 결과들은 대부분 국가 이스라엘의 태생에 기인한다.<br /><br />2.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학적 의문<br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분산될 때,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 또한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에 관한 수 많은 신학적 문제들과 당면하였다. 이 한정된 글 내에서, 이러한 모든 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필자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br />베들레헴신학교(the Bethlehem Bible College)의 교학처장으로서, 필자는 성서를 팔레스타인 학생들에게 가르치곤 하는데, 종종 지금 학생들이 당면한 정치적 환경에 대한 신학적 의미에 대해 자문하곤 한다. 선생이라는 입장 때문에, 학생들은 상당히 기대하며 필자가 올바른 대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나 복잡하여 대부분의 경우, 명확한 답은 알 수 없다.<br />예컨대, 학생들은 가끔 매일 당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부당한 처사들에 대해 어떻게 대항하여야 할지를 묻고 한다. 검문소들(checkpoints)를 통과하면서 당하는 모욕과 차별은 커다란 상처로 남아 분노하고 심지어 경멸하게 한다. 살고 있는 동네를 떠날 수 없는(베들레험 사람들의 상황이지만) 신세는, 새장 안에 갇힌 신세이고, 어디로, 언제 가야할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몹시 두려운 경험일 것이다. 서안지구(the West Bank)를 감싸는 장벽은 그 안에 사는 이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어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독한 부정의를 허락하시는가? 이에 더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에 어찌 반응하여야 하는가? “예수님이라면 어찌 하셨을까?”라는 자문을 시작점으로 해 보지만 이로써 족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며 말씀하신, 자비한 은혜의 수여자인 동시에, 악에 저항하고 친히 몸으로 성전의 환전상들을 몰아내신, 분노하는 의로운 선생을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은 세계 모든 압박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인 것이지만,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몇 가지 독특한 문제들이 상존한다.<br />언젠가 한 학생이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신학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어느날 유대인 정착촌 사람들이 트렉터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에 건물을 짓고자 했다. 이 땅은 이 학생의 집안이 수백년 동안 소유하던 곳이다. 이 학생은 이스라엘 경찰에 도움을 청하였지만, 경찰들은 보호를 거절하였다. 학생 집안에서 자신들이 이 땅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이며 유대인 정착촌 사람들에게 저항을 하자, 이들은 성서를 들면서 이 땅은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 청년에게 큰 문제의식을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땅을 빼앗고자 하는 이들이 그들의 정당성을 위하여 이용한 성서는 바로 이 학생이 신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성서이기 때문이다. 이 학생은 물론 모든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적 정체성과 부르심 그리고 선교에의 사명 그리고 영적인 유산 등을 공급하는 것이 바로 이 성서였다. 이 경험은 바로 이 학생의 성서와 그 의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땅에 대한 안정성을 흔들었다. 주께서는 이곳에서 태어나시고, 사셨고, 가르치시며 병을 고치셨고, 또한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셨다. 바로 여기는 옛 예언자들의 땅이며, 수 백년 동안 이어져 온 신앙의 전통과 유산이 태동한 곳이다.<br /><br />3. ‘진정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우리들의 적들에게 약속하셨는가?’<br />어떻게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가 자신들의 땅을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셨다는 딜레마를 다루어야 하는가? 그냥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자신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이들에게 말이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인 조상들이자, 성서이야기의 주인공들인 유대인들은 바로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싸우고 투쟁하여야 하는 바로 그 “적”인 것이다. 이 난처한 방정식에 반응하고자 했던 수없이 많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왔다.<br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적, 종교적 정체성을 억제하거나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의 종족적, 민족적 정체와 큰 충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또는 자유를 향한 정치투쟁 운동을 하는 세속적인 팔레스타인사람들과 함께 했다.<br />다른 이들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회피하고자, 구약성서의 중요성을 가치절하하여, 신약성서에만 집중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또 다른 반응은 구약성서를 간직하지만, 유대인과 관계된 계약이나 약속을 다루는 모든 구절 등은 생략한 채, 선택적인 읽기만을 하는 경우이다.<br />이러한 반응들 가운데 하나인 팔레스타인 해방신학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왜냐하면 주변인요, 피억압자요, 왜곡된 이들의 관점에서 정의에 관한 성서의 시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유대인들(이스라엘시민권자들인 이들은 대부분 군인들이나 유대인정착촌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은 어쩔 수 없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신학적 관점을 채색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독히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여야만 하는 도전이다.<br /><br />4.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복잡하게 한다.<br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국가로서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 관한 인식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과는 판이하다. 이는 몇몇 역사적, 신학적 요인들에 의해 크게 영향 받은 바 있다. 유대인학살(the Holocaust)에 대한 엄중한 영향력과, 바로 이러한 일이 현대의 교육받아, 문명화된 그리스도교적 유럽사회에서 발생하였다는 죄의식은, 서구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에 대한 온정적 시선을 갖게 하였다.<br />특히 서구 그리스도교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 역사가 유대인학살을 가능케한 유럽의 시대정신(Zeitgeist)으로 기능하였다는 사실을 염두할 때, 유대인들을 잘 대접하고자 하는 뜻은 이해할만하다. 신학적으로, 이는 중대한 변화였다. 또한 대체로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Evangelical Christians) 가운데, 유대인들에 대한 신학적,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예컨대,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있었다.<br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예컨대 성서고고학에 대한 열정 등으로 나타난다)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국가 이스라엘에 관한 정치적, 신학적 성원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아주 당연하고 더할 나위없는 태도였을 것이다. 이는 수백년 동안의 박해에 대한 보상적 차원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성서예언의 성취로서 환영하였다.<br />유대인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1948년(혹은 1967년) 이래, 미국과 유럽사회에 풍미한 바 있는,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 이해는 이스라엘을 향한 정치적 후원과 순전한 사랑으로 지속적으로 견지되어 오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평화정착 노력이나 이 땅에 관한 협상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사람들과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반대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과 약속을 불경하게 거절하는 것요, 예수님 재림의 장애물로 이해한다.<br /><br />5. 새로운 신학적 시각의 요청<br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신학적 논제는 심각한 반향을 불러 온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상실에 대한 정의로운 분배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된다든가 혹은 팔레스타인사람들과 이들의 공동체는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로막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는 또한 수백년 동안의 소수자로서, 성지(the Holy Land)에서의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한 오랜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충격적인 메시지는, 일부 그리스도교 시온주의자(Christian Zionists)의 냉담한 태도에 의해 형성된다.<br />많은 그리스도교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인내심이 거의 없다. 하여 국가 이스라엘에서의 정치적 열의에 순복하든지, 떠나 버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재는 그저 시간을 지연시키는 일이기에, 이들이 떠나는 것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더 많은 유대인들을 위해 양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두말 할 것 없이, 이러한 주장은 당신의 가족이나 집 그리고 땅이 그 결과로 고통를 겪지 않을 때, 더욱 쉽게 진전된다. 이러한 측면은 서구사회의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소소한 신학적 문제일찌는 몰라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와 관계된 중심적인 문제이다.<br />만약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의 거부하는 태도와 그리스도교 시온주의자의 냉담한 태도, 모두가 잘못이라면, 질문이 생기는데: 무엇이 올바른 태도인가? 우선, 감정적으로 휩쓸릴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유대인(the Jewish people)과 정치국가 이스라엘(the political State of Israel)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에서 유대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우리들은 국가는 정치적 실체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유대인(the Jews)에 관해 언급할 때, 그는 유대인에 대해 말하고 있지, 오늘날의 정치국가 이스라엘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 둘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정치국가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목적으로 태동하였다. 그래서 유대인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유대인들은 성서적, 역사적 이해를 기반으로, 국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신실하심을 성취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아무리 복잡해도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기에, 반드시 다루어져야 한다.<br />둘째로,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이해를 위한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이스라엘의 부정의와 모든 이스라엘을 등치시켰던 반유대주의의 사냥감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서도, 예언자들도, 무엇보다 메시야가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60년 동안의 정치적 사건들이 유대인에 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일을 거부한다.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이 땅(the Land)에 관해 갖고 있는 성서적 주장을 용인해야만 한다. 뿐 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인할 수 없고, 서구교회(the Western Church)에 의해 무시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존재는, 땅의 신학(theology of the Land)이나 하나님의 계약(God’s covenant)의 실현 등과 같은 주제에 관한 논쟁을 유도하고, 이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역할에 관한 단순한 가정에 관해 도전하기 때문이다.<br />많은 작업들이 여전히 요청된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 하나님의 유대인과의 계약 그리고 땅의 신학 등에 결코 과거에도 지금도 몰입된 적이 없다. 그러나 1948년의 사건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주제에 관한 연구와 질문들을 하게 했다. 어떤 이들은 성서로 돌아가, 위의 복잡한 신학적 주제들과 이에 따른 정치적 의미들에 관한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스라엘 문제에 관해 세계 그리스도교계는 큰 갈등을 맛 보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진영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세대주의자들로 알려진,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시온주의 진영(Evangelical Christian Zionist)은 친 이스라엘 그리고 반 팔레스타인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정의와 사회복음을 옹호하는 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대해 보다 비판적 입장을,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대해 우호적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특정한 이들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 어떤 형태의 신학도 우리의 근본적 신앙원리와 상충함을 천명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믿는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이 함정을 거부하여야 한다. 우리는 비록 이 문제에 관한 최종적이고 올바른 해결과는 아직 멀리 있지만, 바로 여기가 훌륭한 시작점이다.<br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무살라하’(‘화해’를 뜻하는 아랍어-번역자 주)가 지지하는 화해의 장 내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야닉 유대인들(Israeli Messianic Jews)과 교제가 필요하다. ‘무살라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투영된 것처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화해를 증진하려는 비영리기구이다. 우리는 우선,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과, 메시야닉 이스라엘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공동체 안에서, 화해의 격려자와 촉매제가 되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앉아서 대화하고, 함께 이 모든 주제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모든 견해를 개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은 두 공동체의 부족한 신학적 안정망을 발전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소홀히 다룰다면 그 어떤 신학도 궁극적으로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주제들을 특정한 바 있고, 서로 만나야만 하는 이유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해의 신학을 모색하는 도상에 있다. 이 신학은 팔레스타인에게는 정의를, 이스라엘에게는 희망과 안녕이라는 각기 공동체가 공히 바라는 필요를 전달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함께 이 도전에 응전하여만 한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81201354018961300372009-11-08T01:26:00.000-08:002010-01-31T12:27:30.535-08:00레이먼드 룰: 중세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무슬림들을 향해 간 선교사원 제: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content/view/252/38/">Raymond Lull: Medieval Theologian, Philosopher, and Missionary to Muslims</a><br />글쓴이: J. Scott Bridger1<br /><br />1. 서론<br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윌리엄 캐리(1761-1834) 가 18, 19세기에 인도에 가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때는 보통 선교의 시작으로 본다. 그 외에는 기독교 역사 첫 3 세기 이후에는 복음 전파에 그다지 큰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5세기의 성 패드릭 St. Patrick 이나, 13, 14세기의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St. Francis of Assisi, 그리고 레이먼드 룰(미주 2), 그리고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선교사가 된 후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에게 나아갔던 19세기의 죠셉 월프 Joseph Wolff 같은 사람들의 노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br />무슬림들에게 이루어진 선교의 역사만을 생각한다면 복음 전파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과 대면한 것은 대부분 습격하고 다니는 지하드주의자들(성스러운 전쟁을 외치며 종교의 이름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역자 주)을 피해 다니거나, 아니면 십자군으로 이들과 맞서거나, 그도 아니면 딤미(미주 3) 정책이나 개종으로 인해 가족과 삶에 엄청난 압력을 받는 경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리스도는 항상 순교자들(즉, 증인들)을 보냈고, 따라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삼으려고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생명과 신체적인 위험을 감수한 개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끔찍한 결과를 눈 앞에 두고서도 대단한 용기와 희생 정신을 발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br /><br />이 글은 레이먼드 룰의 삶과 사상에 관해 나눔으로써 복음 전파가 소홀했었다고 여겨지는 기간에 대한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지금의 이시기가 전투적인 이슬람이 만연하고 무슬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교적인 노력이 지극히 도전 받고 있으며, 때로 선교사들의 극단적인 희생까지도 요구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룰의 삶과 본보기는 그가 살았던 시기를 생각해 볼 때 실로 놀랍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즈웨머 Zwemer 는 이렇게 적고 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찾아볼 수 있는 선교 정신은 십자군의 정신이 전부였다. 그들은 칼을 들었고, 칼로 망했다. 그러나 레이먼드 룰은 진정으로 놀랄만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십자군이 진정한 그 분의 무기인 용서와 평화를 가지고 십자가를 위해 싸웠다면 십자군은 세상에 어떤 존재가 되었으며, 어떤 일을 하게 되었을까?’(미주 4) 룰 자신은 이렇게 적고 있다: ‘많은 기사들이 바다를 건너 거룩한 땅으로 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무기로 무장하여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얻어내기 전에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다. 하지만 내게는 거룩한 땅의 정복은 사도들이 이루어낸 것처럼 사랑과 기도, 그리고 눈물과 피를 쏟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정복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미주 5)<br />룰의 삶과 사상을 나누려면 두 부분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첫 부분은 룰의 배경과, 교육, 개종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부분은 신학자와 철학자로서의 룰의 사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특히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그가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 설명한 것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룰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 여기에 제시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은 때로 적대적이기까지 한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나누기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한 그의 열정이다. 그것이 그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것이었고, 그의 사상과 철학도 오직 그 빛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피어스 Peers는 룰의 저술들 가운데 하나에서 다양한 주제에 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묵상서의 이차적인 주제들 가운데 특별히 부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개종에 대한 것이다. 이 책 한 권에서만도 룰이 그렇게 자주 이 주제로 되돌아가곤 한다는 것은 그 주제가 그의 삶을 지배하는 열정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미주 6) 그의 그러한 열정이 이 글의 요점이 될 것이다.<br /><br />2 룰의 생애<br />레이먼드 룰은 스페인 동쪽 해안에서 좀 떨어져 있는 한 섬인 마조르카 Majorca 의 팔마 Palma 에서 1232/35년에 태어났다.(미주 7) 그는 레이먼드 룰과 엘리자베스 데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1232년에 아라곤의 왕 제임스 1세가 마조르카를 무슬림들의 손에서 재탈환한 후에 그 곳에 정착했다.(미주 8) 레이먼드의 아버지는 제임스 왕이 무슬림들에 대항하여 캠페인을 벌이던 시기에 십자군으로 제임스의 군대에 있었다. 전쟁 후 제임스는 그를 따르던 자들에게 넓은 지역의 땅을 상으로 하사했다.<br />룰의 아버지도 그렇게 땅을 하사 받은 사람으로 아들 역시 왕실에서 좋은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했다.(미주 9) 룰은 제임스 왕의 자녀들, 특히 제임스 2세의 교사가 되었다가 후에는 행정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한 삶의 방식은 그에게 덫이 되었다. 그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이 타락한 시기에 극도로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 술, 여자, 노래가 왕과 왕자들이 가장 즐기는 것들이었다.(미주 10)<br />룰은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노래와 궁전시도 잘 지었다. 하지만 그 주제는 주로 ‘불법적인 사랑의 기쁨’이었다.(미주 11) 그러한 생활은 그에게 두 자녀 도메네크와 막달레나를 낳아 준 블랑카 피카니와 결혼한 후에도 계속되었다.(미주 12) 방탕과 부도덕으로 얼룩진 그의 생활은 그가 32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br /><br />그가 어떻게 개종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피어스는 그 중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두 개 다 그의 전기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고, 어디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충분한 것들이라고 말한다.(미주 13) 여기에 소개되는 것은 가장 믿을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비슷한 사건이 룰의 저서인 휄릭스 Felix 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미주 14) 또한 여기 소개되는 이야기는 그의 개종에 대한 다른 설명들과도 잘 맞는 요소들이 많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룰은 결혼한 여인인 시그노라 암브로시아 집의 창문 옆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상아빛 목과 가슴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부인은 그를 불러서 그가 그렇게도 아름답게 여기는 그녀의 가슴을 보여주었는데 그 가슴은 끔찍한 암(cancer)에게 먹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생각을 바꾸도록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레이먼드, 나는 따르라.’ 그는 그의 궁정 직위를 버리고, 그의 모든 자산을 판 후 로다 혹은 라다라고 하는 산에 있는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이것은 1266년의 일이었다.(미주 15)<br /><br />개종 후 룰은 몇 달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내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슬림 선교를 위해 부르셨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미주 16) 그러나 그는 성직자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라틴어와 아랍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에서 일했던 그의 경력이 왕과 왕자들, 그리고 교황까지도 설득하여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서 선교사들을 준비시켜 ‘영적인 십자군’이 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룰은 자기 자신이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미 고난 당하신 주님처럼 자신도 고난 당하기를 바랬다.’(미주 17)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9년 동안을 신학과, 철학, 논리, 의학, 그리고 특별히 아랍어를 공부하면서 보냈다. 아랍어를 공부하기 위해 그는 무슬림 노예를 사서 그가 아랍어와 이슬람에 관해 자신을 가르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팔마에 사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과 논쟁도 하게 되었다. 그는 제임스 2세의 보호 아래서 이런 일들을 해 나갔는데, 제임스 2세는 왕자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룰은 또한 이 시기에 꾸란과 알-가잘리의 Al-Ghazzali 글들도 연구하고 싶어했다.(미주 18) 그 결과로 그는 논리와, 철학, 그리고 몇 가지 다른 분야들에 대한 저술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주요 저술은 묵상서 the Book of Contemplation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그것을 아랍어로 저술하였다.(미주 19) 그는 또한 라틴어와 자국어인 카탈란어 Catalan 로도 저술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서구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정교한 철학 논문을 작성한 첫 그리스도인 저술가가 되었다.(미주 20)<br />그가 자신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게 하려고 사들인 노예는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주인을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룰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고 9년 전에 했던 것처럼 한동안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반박할 수 없는 기술 Art (즉, 방법)을 만들어 내서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사람들 위에 서게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미주 21) 이 책의 제목은, 시리즈로 볼 수도 있는데, Ars Magna 혹은 Ars Generalis 이다.(미주 22) 보너 Bonner 는 그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 (노예의 자살) 후에 라몬은 집에서 그리 멀리 않은 어떤 산에 올라갔다. 평온함 가운데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기 위해서였다. 거의 일 주일 가량을 머물렀을 때, 어느 날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주님께서 앞에서 말한 그 책의 저술에 대해 어떻게 믿지 않는 자들의 오류를 보여줄 것인지 그 형태와 방법을 그의 마음에 떠올려주셨다.(미주 23) 그 책은 원래 묵상서가 될 것이었지만, 그리고 묵상서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한 룰의 모든 사상이 그 책에 드러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 책의 형태를 구성하고, 어떻게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에 있었다.(미주 24) 이것이 새롭게 영감을 받은 그 기술에 대한 주요 과제가 될 것이었다. 이제 42세가 된 룰은 그의 역작이 될 저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시작하고 있었다.(미주 25)<br /><br />룰의 사상과,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변증법을 살펴 보기 전에, 룰이 개종을 하고 9년을 배우는 것에 사용한 후, 그 생의 나머지 40년이 어떠했는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룰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 볼 때, ‘영적 십자군’을 시도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여 그 가치를 깨닫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여행하고, 가르치고, 왕과 교황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수 일, 수 개월을 보냈다. 그 모든 것이 그가 갖게 된 비전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의 열망이 외면당한 적도 많이 있었지만, 그가 무언가를 이루어낸 것도 있다. 룰이 80세가 되었을 때 그는 비엔나에서 열린 협의회(1311-1312) 에 참석하여 동양어(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 Chaldean )를 가르치는 언어 학교를 설립할 것을 교황에게 직접 건의 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Paris, Oxford, Bologna, Salamanca, 그리고 교황청 Papal Court 에서 학생들이 이 언어들을 배우고 선교사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br /><br />그러나 룰의 가장 큰 업적은 그의 선교 여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북아프리카로 세 번 그런 여행을 떠났다. 처음에는 튜니지아의 수도 투니스로 가서 무슬림 학자(울레마)를 만나 그들 종교를 자신에게 확신시킬 수 있으면 자신이 무슬림이 되겠노라고 제안했다. 며칠 동안의 논쟁 후 그 도시의 이맘들과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 중 몇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술탄에게 가서 룰을 감옥에 가두고 처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좀 더 유순한 리더의 중재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항구로 보내져서 몇 명 안 되는 믿는 자들과의 몇 번의 은밀한 접촉 시도 후에 강제로 유럽으로 보내졌다. 이 때가 1291년 혹은 1292년이었을 것이다. 룰은 평생에 두 번 더 그런 여행을 했는데, 마지막 여행은 1315/16년에 있었다. 그 여행은 알제리아에 있는 Bougie시에서 83세의 룰이 성난 무리들의 손에 순교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의 몸은 마침내 팔마로 다시 보내져서 샌프란시스코의 교회에 아직도 묻혀 있다.<br /><br />어떻게 해서 무슬림들의 신 개념에 대한 룰의 접근이 무슬림들에게 그렇게도 위협적이었으며,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진리를 잘 드러낸 것으로 보이는가?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룰의 변증적, 복음주의적 방법과 관련된 그의 신학적 철학적 개념들을 좀 살펴볼 것이다. 특히, 룰의 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와, 그가 사용한 기술의 성격, 그리고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인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그의 접근 방법을 살펴볼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룰의 변증법의 기초가 되고 있는데, 이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이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제시되는 이 두 교리에 대한 설명은 룰의 책인 “이방인과 세 현자의 책 Book of the Gentile and the Three Wise Men”에서 가져온 것이다.(미주 28)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비록 룰이 학자이고 학자적인 방법으로 논증하고 있지만, 그가 한 개종의 경험이 그의 철학과 선교사로서의 방법론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즈웨머가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룰의 내적 생활의 열쇠가 되는 것은 그의 개종의 경험이다. 성육신적 사랑이 육적인 사랑을 극복했고, 룰의 모든 열정과 천재적인 시성 poetry 이 십자가를 향한 복종에 쏟아졌다. 그가 젊어서 본 비전이 그가 나이를 먹은 후에 내세운 모토를 설명해 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있지 않은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He who loves not lives not; he who lives by the Life can not die.’ 고난 당하시는 구세주 이미지는 그가 산 50년간 줄곧 그를 살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스도 그 분을 향한 사랑이 그의 가슴을 채웠고, 그의 정신을 빚었고, 그의 펜 pen 에 영감을 불어 넣었으며, 그의 영혼이 순교의 관 crown 을 간절히 소망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계시에 대한 그 큰 신비에 대해,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합당한 증거를 찾아내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비전을 회상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 증거였던 것이다.(미주 29)<br /><br />3 룰의 사상<br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의 개종에 대한 룰의 관심이 그의 사상과 저술들에 나타나는 주요 동기요 중심이 된다. 그는 철학이 신학에 보조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강조했는데, 개종에 대한 룰의 관심만이 그가 철학에 대해 취했던 이러한 태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 줄 수 있다.(미주 30) 룰이 살았던 시대는 유럽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사상가들의 개념들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중에 있었다. 이 사상들은 중동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정교회 수도승들과 이븐 시나(아비시나) Ibn Sina (Avicenna)와 이븐 라쉬드(아베로스) Ibn Rushd (Averroes) 같은 무슬림 철학자들과 주석가들이 지니고 있었던 것들이 새롭게 소개된 것들이었다. 이 시기는 아랍 이슬람 세계가 가지고 있던 것들에 철학과 학문이 동요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룰은 그런 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 받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도하려면 그 자신이 그런 사상들을 섭렵하고 반박해서 기독교 신앙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br />사도적 관심에 붙들려, 룰은 철학과 신학 사이에 분리의 벽을 세우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는 그의 전 생애 동안 매우 뜨거운 논쟁거리였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베로스의 주석들과 기독교 세계에 속해 있는 그의 추종자들, 즉 ‘의심스러운 진리 double truth’라고 알려진 것을 지지했던 라틴 아베로스들 Latin Averroists(즉, 기독교 세계에 살면서 아베로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역자 주)로부터 시작했다. 의심스러운 진리 이론은 철학적으로는 진리일 수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아직 진리라고 볼 수 없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이론이다.(미주 31) 룰은 그런 개점이 지식인 무슬림들 사이에 기독교 메시지가 살아날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보았다. 그는 이성이 가장 깊은 신앙의 신비를 믿을 수 있는 이성적인 바탕을 제시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St. Ramon de Penyafort 과 Ramon Marti 같은 그보다 앞선 도미니크 수도사들을 비판했다. 이들은 발렌시아에서 룰처럼 비폭력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여 무슬림들을 기독교로 이끌었지만, 룰은 마티가 기독교의 합리성을 보여주는 이성의 역할을 무시했기 때문에 튀니지의 술탄 al-Mustansir를 개종시키는데는 실패했다고 보았다.(미주 32) 마티는 술탄이 이슬람의 진리를 포기하도록 설득했지만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시키는 데는 실패함으로써, 그 술탄이 이슬람의 진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오히려 못한 상태를 만들었다.(미주 33) 룰은 이것을 큰 비극으로 보았으며, 그가 생각해낸 방법 Art 을 적절히 사용하면 이러한 비극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필연적인 이유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코플레스톤 Copleston 은 철학에 대한 룰의 태도와,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 목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준다:<br />무슬림들의 개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철학이 신학에 종속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주장뿐 아니라, 이성의 능력으로 신앙의 교리들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게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바탕으로 ‘필연적인 이유들 necessary reasons’로 신앙에 대한 문제들을 ‘증명’하려 하는 그의 제안을 이해해야 한다. 그가 기독교의 신비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합리화하려고 할 때 그것은 St. Anselm 나 Richard of St. Victor가 삼위일체에 대해 ‘필연적인 이유들’을 말한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룰은 신앙이 이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다룬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그는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에서 믿는 것들이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것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더 나아가, 아베로스들이 받은 비난, 즉 그들이 ‘이중 진리’를 붙잡고 있다는 비난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믿으면서, 룰은 신학과 철학이 갈라서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신학적 교리들이 이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성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미주 34)<br /><br />이러한 ‘필연적인 이유들’을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룰은 알고 있었다. 무슬림들과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충돌을 피하면서, 어느 정도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타당성을 보여야 했을 것이다. 룰은 자신이 이성주의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섬세한 조화를 강조하고, 그의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그런 노력에 따르기 마련인 위험을 피하기 위해 룰은 종종 세 종교 모두에 존재하는 기초적인 전제(신학적, 철학적)부터 출발하는 것을 선택했다.(미주 35) 보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룰은 신에 대한 일련의 전제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은 존재하시고, 한 분이시며, 모든 것의 근원(first cause)이 되시고, 등등. 그리고 나서 그는 세 종교 모두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의 속성으로 들어간다 (비록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룰은 이러한 속성들을 특성 properties, 미덕 virtues, 이성 reasons (rationes), 혹은 종종 위엄 dignities 이라고 칭한다.(미주 36)<br /><br />룰은 그의 사상의 하위 구조가 되는 신과 세계에 대한 다섯 가지 원칙을 나열한다.(미주 37)<br />1. 신은 그 자신의 본질적인 함과, 위대함, 영원성, 능력, 지혜, 의지, 미덕, 진리, 영광을 가지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9가지 이상 되는 신의 속성들을 나열한다. 따라서 여기에 나열된 것들이 모든 속성을 다 나열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br />2. 이 속성들 혹은 위엄들은 서로 대치됨 없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본질이 합쳐져서 그 속성들이 서로 융통성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 속성들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한 분 이라는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단순함의 개념이다.)<br />3. 이 위엄들은 실재하는 것이다.<br />4. 실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룰의 사실주의적 존재론을 보여준다.)<br />5. 각 위엄들은 이 세상에 있는 각 창조물의 역량에 맞도록 영향력을 발휘하여, 각 창조물들이 그들의 제 1 원인이 되는 것 (즉, 신)을 닮도록 한다. 각 창조물의 역량은 그 창조물이 얼마나 그 위엄과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br /><br />이 설명을 하면서 룰은 창조물이 하나님의 속성에 맞는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매우 일반적인 중세 사상을 반영한다. 룰은 사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구조를 갖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그의 방법(Art)의 목적은 ‘진리를 알고 그에 동의하는 방법이 가능한 한 실재하는 방법에 가장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The aim of his Art was ‘to make the modus intelligendi [the mode or manner of knowing or assenting to truth] conform as closely as possible to the modus essendi [the mode or manner of existing or imbibing/exuding essence].’) (미주39)<br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신비를 우주 구조의 한 부분으로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설명’ 혹은 증거가 ‘필요한 이성’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미주40) 보너는 룰의 방법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가 그 방법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룰 자신도 조심스럽게 지적했듯이 논리도 아니고 형이상학도 아닌 오히려 그 둘 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본질에 대한 가장 확실한 설명은 룰이 사용한 ‘방법(Art)’ 이라는 말에 있다. 그리스어 tevcnh를 학문적으로 해석한 이 말은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리가 아니라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룰은 전체 우주 구조 the modus essendi 를 가지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다른 구조를 올려놓고 있는데 그것은 그 최초 the first 와 관련되었고 또 그것에서부터 나온 the modus intelligendi의 구조이다.(미주41)<br /><br />이와 같은 룰의 사상의 대체적인 윤곽을 가지고 우리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타당성에 대한 그의 주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서 우리는 그의 주장을 소개할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과 룰에게 미친 중세 철학자들의 다양한 영향에 대해서는 미주와 참고서적 목록에 소개되어 있는 저술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룰의 작품인 ‘이방인과 세 현자의 책’ (Book of the Gentile and the Three Wise Men)은 룰의 일반적인 변증학적 접근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그가 란다 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쓰여진 비유적인 allegorical 책이다.(미주 42)<br /><br />네 인물이 있다: 이방인, 유대인 현자, 기독교인 현자, 그리고 무슬림 현자.<br />이 가운데 세 대표자들은 유일신 종교를 믿고 있고 종교적 문제와 관련해 종종 모이게 되는 친구들이다. 이방인은 먼 땅에서 온 사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는 동안 그 세 친구들은 한 훌륭한 목초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그 곳에는 다섯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에 물을 대는 한 샘이 있다. 그 샘 옆에는 지성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을 만나서 그들은 그 다섯 그루의 나무들이 무엇인지 그 각각의 꽃들에 쓰여져 있는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미주 43) 그녀는 그 나무들과 꽃들이 하나님의 본질, 창조되지 아니한 미덕 virtues, 창조된 미덕, 죽음에 이르는 죄,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 이외의 많은 사항들 conditions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라고 설명한다.(미주 44) 더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고, 알고,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 모든 사항들이 꽃들을 다스리는데, 그 꽃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고, 심지어는 그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교정하는 원리요 교리가 됩니다.(미주 45) 그 여인이 그들 셋을 떠나간 후에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여러분 하나의 분파에 속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해 harm 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종교에 속할 때 오는 좋은 점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이 나무들 아래에 앉아서 꽃들과 이 나무들이 나타내는 사항들에 따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권위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으니, 논증적이고 필요한 이성 demonstrative and necessary<br />reasons 에 의해 어떤 동의점에 도달하도록 해 봅시다.”(미주46) 그들이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그 이방인이 그 장소에 도착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자 그가 누구든지 자신에게 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달라고 요청했다.<br /><br />이렇게 ‘이방인의 책 the Book of the Gentile’은 시작이 된다. 결국, 각각의 세 현자는 그 이방인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고, 그 와중에 그 이방인은 교리의 성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각 현자들이 대답을 한다. 룰은 유대인과 무슬림의 신앙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그의 이 두 신앙에 대한 설명은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바르게 보여주는 것은 룰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이것이 바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부 한다고 보는 것이다.-역자 주) (미주47)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시대에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미주48)<br />- 계속됩니다.<br />원본바로가기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content/view/252/38/">Raymond Lull: Medieval Theologian, Philosopher, and Missionary to Muslims</a>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1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82957743660459899102009-11-02T04:04:00.000-08:002010-02-01T05:38:49.161-08:00내부자 운동, 무엇의 내부인가, 교회, 문화, 종교?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가?내부자 운동, 무엇의 내부인가, 교회, 문화, 종교?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가?<br />원제: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content/view/315/38/">Inside What? Church, Culture, Religion and Insider Movements in Biblical Perspective </a><br />글쓴이: KEVIN HIGGINS<br /><br />1. 서론<br />소위 ‘내부자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선교학자들과 선교 현장에 있는 사람들 내에서 점점 더 많은 논의가 일어나고 있으며 많은 논쟁점들이 대두되고 있다. 본 글은 이 계속되는 논의 가운데 교회와, 문화, 종교의 세 주요 요소에 대해 간단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이 주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 다섯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부자 운동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종교와 문화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선교 실재에 있어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br /><br />2. 내부자 운동이란 무엇인가?<br />2004년과 2007년 사이에 내부자 운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문제의 양면에 대한 글들이 내부자 운동이라는 주제로 발표되었는데 그 중 몇 개의 중요한 글들은 국제 저널 프론티어 선교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logy) 에서도 발표되었다.국제 단체 프론티어 선교의 관련자들이 모두 모여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가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심사 숙고하였고, 그 결과 역시 출판되어 나왔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 name="_ftnref1">[1]</a><br /><br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내부자 운동에 대한 생각을 다듬기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두 개의 결과물을 내 놓았다. 나는 좀 더 길게 내부자 운동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점점 더 많은 수의 가족들과, 개인들, 부족들, 친구들 그룹이 종교를 포함하는 그들의 인종 문화권내에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이 신실한 제자들은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문화권 안에 머물면서, 그리고 성경이 인정하는 한 그 문화의 종교적 삶을 살면서 문화적으로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자신들을 표현할 것이다. 성령님 또한 성경 말씀과 그 분의 사람들을 통해 그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적 삶과 세계관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실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 name="_ftnref2">[2]</a><br /><br />레베카 루이스(Rebecca Lewis)가 최근에 좀 더 짧은 정의를 내렸다: 내부자 운동은 그들이 원래 속해 있는 공동체내에 그 공동체와 함께 머물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여느 다른 운동과 같다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들은 아래의 두 가지 구별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1 복음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공동체에 또는 사회 구조 내에 뿌리를 내리고, 그 공동체 혹은 사회 구조가 ‘교회’가 이루어지는 주요 장소가 된다.<br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사회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계속 유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살아간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 name="_ftnref3">[3]</a><br /><br />위의 두 정의 모두에서 공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자 운동은 사람들의 운동 혹은 대중운동의 특징을 겸비하고 있으며, 종종 C5라고 일컬어지는 관점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4" name="_ftnref4">[4]</a><br /><br />위의 두 가지 정의에서, 종교를 어떻게 가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br /><br />3. 교회란 무엇인가?<br />루이스가 제안한 내부자 정의는 교회가 이미 존재하는 사회 구조 안에 세워질 수 있다,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기존의 사회 구조가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이 개념이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는 하였지만,<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5" name="_ftnref5">[5]</a> 선교학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선교 문헌에서 대중 운동은 이와 유사하게 기존의 구조 (가족, 마을, 부족)가 단체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6" name="_ftnref6">[6]</a> 성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신약의 단체 개종의 예는 고넬료, 루디아, 빌립보 감옥의 간수, if Sychar?? 마을이 있다.<br /><br />그러나 내부자운동의 교회학은 적어도 두 가지 방향에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논쟁으로, 내부자 운동으로 세워진 교회에 내부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포함하는 사회 정체성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이제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방향에서 제기되는 의문은 내부자 운동의 신자들과 좀 더 폭 넓은 교회와의 관계를 염려하는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됨을 염려하는 소리이다.<br /><br />나는 먼저 그리스도의 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이전의 종교 상황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나는 여기서 종교에 관한 논의보다는 다중 정체성의 가능성에 관해 몇 가지 코멘트를 제시하고 싶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7" name="_ftnref7">[7]</a><br /><br />먼저, 교회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다(에베소서 2:8-10). 어떤 의미에서 아무도 교회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교회의 일원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서 삶의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요청 받는다.<br /><br />따라서,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삶의 다른 면에서의 그의 정체성과 겹쳐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에베소서에서 종들과 주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님께 하는 것처럼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br /><br />둘째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변화 되는 첫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교회의 첫째가는 전략은 사도행전 14:21-28에서 열거되어 있는 것들(잃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을 제자 훈련하고, 제자들을 격려하고 강화하고, 각 교회의 지명된 장로들을 택하여 훈련하고, 복음의 지속적인 확장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서로 연결되고 참여하는 것)과 같은 기능들을 통해 스스로 증식하는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전통적인 말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 동일한 성경적 기능들이 내부자 운동 안에서 변형된 형태와 용어로 일어날 수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8" name="_ftnref8">[8]</a><br /><br />셋째로, 비록 교회가 우리가 방금 사도행전 14장에서 지적한 그런 구조로 발전한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성전과 회당에 여전히 참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종교적 표현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9" name="_ftnref9">[9]</a> 그들은 또한 가정과 성전 마당 같은 공공 장소에서도 만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의 모임을 가졌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0" name="_ftnref10">[10]</a> 믿는 자들은 성전 예배에서 교회의 일원이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가정 모임에서 유대교의 일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1" name="_ftnref11">[11]</a> 그들은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2" name="_ftnref12">[12]</a>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메시야를 따르는 유대교 신자들의 성전과 회당으로부터의 분리가 박해와 파문, 그리고 회당의 의식(liturgy)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겨냥하는 저주가 포함되면서 촉진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3" name="_ftnref13">[13]</a> 이 분리는 신자들 편에서가 아니라, 이전 종교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더욱 선동되었다. 분리가 일어날 때 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고 심지어 분리가 발생했을 때도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4" name="_ftnref14">[14]</a><br /><br />넷째로, 제자들은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전의 구조에 남아있었다. 내부적 접근은 사람을 정직하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는 구조 안에 남는다는 것은 그 구조의 신학과 종교에 동의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5" name="_ftnref15">[15]</a>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들과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분명히 나타났고, 점점 더 커졌다. 그 차이는 이미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부터 존재했고, 그 결과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초기 설교들에서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50년 이상 동안 완전한 결별은 일어나지 않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6" name="_ftnref16">[16]</a><br /><br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닫힌 모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다른 사회 혹은 심지어 다른 종교 구조나 종교적 표현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7"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7" name="_ftnref17">[17]</a> 아래의 종교적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br /><br />질문의 두 번째 단계는 좀 더 폭넓은 몸의 하나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5장은 ‘운동들’ 사이에서 하나됨과 교제에 대해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을 적용하려고 하면 하나됨에 대한 두 가지 ‘간단한’ 대답을 찾게 된다. 그 한가지는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시며, 따라서 우리가 내부자들 가운데서 구별된 운동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본문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과 갈라디아서 3장을 보라.)<br /><br />반면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운동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고린도 전서 9:19 하반절에서 바울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21장 17절 하반절의 메시야를 따르는 토라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 예가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15장은 두 가지 경우 모두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새로운 운동을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각각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살도록 자유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분리된 운동들이 서로 상대편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로 인정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br />그러나, 이방인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인들이 분명히 가끔만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제그룹으로 만난 것이 분명하다. 로마서 14장과 15장은 이러한 현실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한 것이다.<br /><br />이와 같이, 적어도,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서신서, 특히 바울의 서신서에 나와 있는 적지 않은 분량의 자료들이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 문제들은 두 운동의 분리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이 아니라, 어떻게 서로 상호 반응해야 하는 가에 대한 것들이다.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종종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자체는 성경적으로 분명해 보인다.<br /><br />내부자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여러 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안전의 문제를 염두에 둔 채,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된 모임이 되기 위한 상황에 대해 주의 깊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오는 내부자들과, 다양한 교파 배경을 가진 바깥 사람들이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씩은 모여서 일주일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br /><br />또 다른 상황에서는, 내부자 운동이 의도적으로 잠잠하면서 자세를 낮추고, 그러나 국제 기독교 교파와 공식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연결은 서로 각자의 사역과 정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부자들은 내부자들이 되는 것을 그만두도록 요구 되지 않을 것이다. 교파 지도자들은 내부자들의 사역과 ‘안수’를 인정해준다. 이 연결에는 재정적인 차원은 관련되어 있지 않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8"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8" name="_ftnref18">[18]</a> 이것은 좀 더 신실한 종말론적 ‘전 세계적인’ 교회 즉, 본질적으로 지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교회<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9"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19" name="_ftnref19">[19]</a> 차원의 매우 유익하고,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br /><br />나는 교회에 대한 정체성과 하나됨의 관점에 대한 문제들을 개괄해 보았다. 결론을 내려 보자면, 내부자 운동은 그리스도의 몸에 있어서 그리고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그들의 삶의 상황에 있어서 지역적 성육신적 정체성의 복잡한 혼합으로 표현되는 교회의 파라다임을 나타낸다. 동시에, 우리는 성격이 말하는 하나됨의 문제를 더욱 자세히 그리고 실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종교적인 질문으로 돌아서야 할 때이다.<br /><br />4. 우리는 종교와 문화를 분리할 수 있는가?<br />일반적으로, 새로운 신자들이 그들의 문화에 남아 있으면서, 성경적 진리를 비판적으로 잘 적용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건전하고 좋은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0"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0" name="_ftnref20">[20]</a>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해서는 적응(accommodation)과, 토착화(indigenization), 문화화(enculturation), 그리고 상황화에 대한 계속된 논의의 역사와 그 전제들에 대한 특별한 이론들을 깊이 있게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1" name="_ftnref21">[21]</a><br /><br />일반적으로 자신의 문화에 남아 있는 것이 항상 종교적인 면에서도 그 문화에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또한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br /><br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문화인류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것으로 보인다. (즉, 문화인류학자들마다 각각 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는 뜻이다 –역자 주) 어떤 단순한 정의는 문화를 ‘특정 인간 집단의 전통, 그 집단의 구성원들로부터 배웠고, 서로 공유하고 있는 삶의 방식’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2" name="_ftnref22">[22]</a> 이 정의는 주로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좀 더 인식력이 있는 문화에 대한 이해는 Spradley의 다음과 같은 정의이다: ‘문화는 사람들이 경험을 해석하고, 행동을 유발하는데 사용하는 습득된 지식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3" name="_ftnref23">[23]</a> 이러한 폭 넓은 설명은 종종 그보다 좀 더 좁은 영역으로 이루어진 하위 구조를 갖게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졌는데, 주로 문화, 경제, 사회 구조, 가치들, 세계관 등의 영역으로 이루어졌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4" name="_ftnref24">[24]</a> 이 두 관점은 서로 완전히 다르지 않은데, 그것은 분명하게 서로 관계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행동과 그것을 생산하고, 해석하는 인식적인 구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br /><br />이러한 문화에 대한 논의에서 종교가 끼어들 자리가 어디인가? 모든 언어가 종교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와 일반적인 유럽언어들에서 종교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누군가를 신들과 묶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많은 언어들에서 종교를 나타내는 구별된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언어란 ‘문화에 대한 친밀하고 정확한 표현’<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5" name="_ftnref25">[25]</a>이라는 라민 싸네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종교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어떤 세계관에서는 종교와 문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6"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6" name="_ftnref26">[26]</a><br /><br />비록 일부 세계관에서 문화와 종교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로서의 종교’라는 제목이 붙은 섹션에서 Malefijt 는 종교를 ‘그가 소속된 사회에서 사람이 습득하게 되는 조직화된 믿음과, 가치, 그리고 행동 양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7"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7" name="_ftnref27">[27]</a>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종교는 분명 문화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Malefijt가 책 제목을 ‘종교의 인류학’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저자는 단순히 ‘인류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의 한 장으로 종교를 다루기 보다는, 종교라는 제목을 따로 붙일 만큼 충분히 종교가 구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br /><br />Danial Shaw는 문화의 하위구조를 몇 가지로 제시하는데, 경제와, 이데올로기, 친족관계, 사회구조, 그리고 정치 구조가 이에 해당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원인과 현재 상태, 그리고 미래와 연관된 믿음과 관찰의 체계’라고 정의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8"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8" name="_ftnref28">[28]</a>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종교적 믿음과, 실천들, 구조에 대한 표현을 포함하는데 반하여,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특별한 종교 형태들은 근원적인 문화적 실재의 연장이 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9"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29" name="_ftnref29">[29]</a>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문화의 하위 구조(이데올로기)의 하위구조(종교)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자세하게 문화의 하위 구조로서의 종교를 살펴 보도록 하자.<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0"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0" name="_ftnref30">[30]</a><br /><br />Malefijt와 Shaw는 모두 종교를 인식적이고 행동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Shaw는 또 다른 요소를 첨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 구조이다. 논의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나는 믿음과, 행동과 소속으로서의 종교의 세가지 면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제자가 된 사람이 그가 속했던 종교에 계속해서 머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종교에 대한 이 세가지 관점 모두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즉, ‘남는다’는 의미가 믿음의 차원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행동이나 소속의 차원에서 혹은 이 세 요소들 중에 두 개가 서로 연합된 차원에서 그런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어느 정도나 그 사람이 남아있는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1" name="_ftnref31">[31]</a> 이제 문화와 종교에 대한 질문에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br /><br />5. 종교란 무엇인가<br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 논할 때 세 가지 차원의 유형을 사용한다: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가 그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2" name="_ftnref32">[32]</a> 다른 종교들에 대한 그 각각의 접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정의를 살펴보고자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3" name="_ftnref33">[33]</a><br /><br />배타주의: 기독교가 아닌 모든 다른 종교들을 인간 스스로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한 반역적인 시도로 보거나 혹은 사단의 활동을 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4" name="_ftnref34">[34]</a><br /><br />포용주의: 그리스도가 모두의 주님이시고, 모두에게 빛을 주시는 참 빛이라는 사실에 기인하여, 비록 사람들이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종교와 문화에서도 예수님이 활동하고 계시다고 본다. 종종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통찰을 가장 잘 완성시킨 것으로 여겨진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5" name="_ftnref35">[35]</a><br /><br />다원주의: 모든 종교가 다 동일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일부 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길이지,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6"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6" name="_ftnref36">[36]</a><br /><br />단순히 ‘이 세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성경적 입장인가?’ 하고 묻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그렇게 질문한다는 것은 이 세가지 입장 중에서 하나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br /><br />먼저, 우리는 ‘종교’라는 형태의 가면을 쓴 반역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것으로 성경에 종교가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서 1:18ff에서 말하는 것도 그 일부이다. 예언자들은 우상들이 사람이 만든 조형물이고,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들만이 그런 우상에 경배한다고 증거한다. (이사야 40장의 예를 보라)<br /><br />둘째로, 어떤 본문에서는 종교가 사단의 활동과 연관되어, 사단과 맺어진 것으로 그려진다. 고전 8-10은 우상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 숭배는 사단을 숭배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라. 갈 4장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 아닌 자들’에 매여 있었다고 말한다(8절).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율법아래에 있는 것은 초등한 영에 매여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2절). 엡 2장은 모든 사람들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있었고, 그것은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세력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전에는 우리(유대인들)도 다 그 가운데서 지냈다고 말한다.<br /><br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이 타종교들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도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방 제사장)의 만남은 창세기의 저자가 엘과 야훼를 같은 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7"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7" name="_ftnref37">[37]</a>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다는 사실은 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이 인정 받았다는 것과, 따라서 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은 신약의 멜기세덱에 대한 관점에서도 더욱 확고해 지는데, 신약은 멜기세덱을 메시아의 가장 결정적인 선임자중에 하나로 보고 있다. 이는 다른 종교 전통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이 된다.<br /><br />아모스는 비유대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출애굽기 사건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것과 동일한 관계로 기술한다 (아모스 9:7) 하나님은 이 다른 민족들과도 먼저 관계를 맺기 시작하신 것이다.<br /><br />이방 선지자 발람은 선견자로서 징조와 점치는 것을 사용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과는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들었다 (민 22-24). 그는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관계는 그가 점을 치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민 23:1ff).<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8"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8" name="_ftnref38">[38]</a> 요나서에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순종하는 것이 히브리인인 요나가 아니다. 야훼께서 들어주신 기도는 다름 아닌 이방 뱃사람들이 드린 기도였다. 그들이 제비를 뽑았을 때, 그 대답으로 이끄신 것도 바로 야훼 하나님이셨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br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서 갔고, 성경의 예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인도함을 받아서 그들이 어디로 가야 그리스도가 나신 곳으로 갈 수 있는지 정확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사도행전 17장은 사람이 태어나는 때와 장소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획하신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신 것은 모든 남녀가 그분을 찾고 마침내 그 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17:27을 보라). 이는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br /><br />이와 같은 성경의 내용들을 통해 내가 내리는 결론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종교를 논할 때 고려하는 세 가지 유형들 모두 정확하게 성경적인 관점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9"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39" name="_ftnref39">[39]</a><br /><br />먼저 내가 이해하는 성경의 입장을 요약하고 나서, 각각의 세 입장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인간들은 반역과, 왜곡을 저지르고, 그것이 일반 계시든, 특별 계시든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한다. 이방 종교들의 경우 이것이 사실이고, 바울에 의하면,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종교들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이를 논지로 삼고 있다).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잠정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일부 사람들이 그런 관계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br /><br />둘째로, 살아있으면서 우리를 속이는 악한 영이 존재한다. 그 속이고, 타락시키는 영향은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고, 종교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가지 점은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비록 잠정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는 있어도, 그리고 실제로 몇 명을 그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모들 사람들이 그런 관계 가운데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br /><br />셋째로, 위에서 언급한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거기에는 이 세상의 종교들도 포함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가 보통 ‘그분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제한되지 않고 그 경계와 범주를 넘어 사람들을 그분께서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br /><br />넷째로, 몇 몇의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이스라엘이나 교회라는 범주를 넘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그러한 관계가 구원으로 연결되는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들은 정확하게 별의 인도함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성경을 통해 더 먼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했다. 고넬리우스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보내 복음을 설명해 주도록 하셨던 것이다.<br />이러한 성경 자료들을 요약하면서 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종교 생활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포함하지만, 교회보다 더 크다. 그 나라는 우주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의 모든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종교도 포함된다.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또 다른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람들의 충성과 마음과 생각에 대한 전투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타종교를 다루는 모범이 되어 버린 세 가지 차원(배탖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의 모델과 이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을 어떻게 비교해야 할까? 세 가지 차원의 모델이 어떤 면에서 성경적으로 맞고 또 그렇지 않을까?<br /><br />배타주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향한 유일한 길이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라는 사실을 바르게 지적해 준다. 그러나 이 모델은 내가 위에서 세 번째로 제시한 성경적 관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소위 ‘진정한 종교’로 불리는 것 내에 존재하는 잠정적인 인간의 반역과 사단의 속박을 보지 못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된다.)<br /><br />포용주의 모델은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약속의 백성의 범주를 넘어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바르게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동방박사들이나 사도행전 17장과 같은 일들은 종종 복음과 예수님 그 분에 대한 좀 더 확실한 만남으로 결론지어진다는 사실이다.<br /><br />포용주의자들은 멜기세덱의 예를 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는데, 그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인들의 ‘엘’과 유대인들의 ‘야훼’를 같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용주의자들이 그러한 멜기세덱의 예를 들면서 따라서 모든 종교는 같은 방향으로 인도된다는 결론에 이를 때 그것은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 반대되는 이유로 제시했던 많은 성경적 자료들을 무시해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포용주의자들의 입장은 인간의 죄와 영적인 악함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0"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40" name="_ftnref40">[40]</a><br /><br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선교하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종교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이 세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든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하는 반응을 요구할 것이다. 각각의 특정 종교 상황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모든 경우에 똑같이 들어맞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br /><br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그가 이전에 속했던 종교에 머무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이제까지 한 논의에 따르면, 이 질문의 대답은 특정 종교 상황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머무른다’는 표현이 적어도 세가지 믿음, 행동, 소속의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잇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br /><br />6. 우리가 실제로 선교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br />우리가 한 논의들이 선교 실제에서 의미하게 되는 것들을 몇 가지 제시하면서 적용해 보고자 한다.<br />6.1복음의 중심성 유지<br />우리가 위에서 한 어떤 논의도 선교실제에서 전도를 중심에 놓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한 모든 논의들은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더욱 확증해 준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기 위해 많은 것을 사용하신다. 심지어 다른 종교도 사용하시지만 여전히 복음만이 유일한 길이다.<br />6.2 실제적인 비판적 숙고 Engage in Concrete Critical Reflection<br />하나님이 만일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다른 종교에서도 활동하고 계시다면,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이 여전히 이전의 종교 안에 머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맞는 말일 수도 있게 된다. 그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정말로 맞는 말인지, 또 어느 정도나 맞는 말인지는 그 독특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고, 또한 어느 만큼이나 그 상황이 반역적이고, 사단에 매어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 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서도 역사하신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진리가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될 수 있고, 또 그에 대한 반응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성경적인 내용을 계속해서 알려주고, 적당한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제자들이 그들의 이전 종교 상황 내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41" name="_ftnref41">[41]</a> 이러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실제 상황 안에서 계속해서 비판적인 숙고를 해 보아야 할 것이다.<br />6.3 관점에 있어서의 지속적인 개종 Keep Conversion in Perspective<br />앞에서 한 논의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개종’의 의미를 굳게 붙들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개종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는 소속적인 의미 보다는 마음과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로마서 12:1ff).<br />6.4 ‘보편적이면서도 지역적’인 교회 되기 Encourage ‘Glocal’ Expressions of Church<br />내부자 운동의 지도자들이 실제적이고 의미 있는 방법으로 서로 축복이 되는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은 성경적 의미의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안전한 방법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 그러한 관계를 맺을 내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찾아 내는 것, 존중과 형제 된 겸손함으로 그러한 만남을 이루어 나갈 사람을 찾아 내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도전이 될 것이다.<br />6.5 상황에 맞는 성경적 신학 개발 Develop Biblical Theology in Context<br />본 논문에서 제시한 내가 내린 내부자 운동의 정의에 의하면, 우리는 선교 실제에 있어서 ‘내부자’들이 그들의 재능을 개발하여 자신의 문화적 상황에 맞는 성경적 신학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42" name="_ftnref42">[42]</a> 그러한 노력에는 상황에 맞는 성경 번역과, 비판적 숙고를 위해 계획된 과정, 그리고 내부자 자신들의 능력 향상이 포함된다. 상황에 맞는 성경 신학은 하나님의 영이 계속해서 역사하시면서 당신의 사람들의 만들어가시고, 고쳐 가시는 방법이 될 것이며, 혼합주의를 막는 안정장치가 될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43" name="_ftnref43">[43]</a><br />6.6종교를 신앙과, 행동, 소속의 기반으로 보는 관점 View Religion as a Matrix of Belief, Behavior and Belonging<br />나는 이처럼 세 부분으로 된 분류법을 이미 몇 번 언급하였다. 이제 어떻게 그것이 적용될 것인가 하는 전체적인 틀을 제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성경의 예를 들면서,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종종 인용하는 왕하 5:44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예로 택하고자 한다.<br />신앙: 나아만 장군의 경우 적어도 그의 신앙의 어떤 부분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15절).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옛 사고 방식이 일부 남아있다: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기 때문에, 그는 아람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스라엘의 흙을 좀 달라고 청한다 (17절). 예언자는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흙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을 묵인한다. 내부자의 신앙 체계가 변하는 과정은 역동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는 분명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br />행동: 내부자 옹호자들은 나아만이 림몬 신당에 계속해서 들어갈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8, 19절). 분명 이것은 행동에 대한 것이고, 옛 종교에 남아 있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아만의 행동에도 역시 변화가 있었다. 나아만은 이제부터는 다른 신에게는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17절). 이것 역시 행동이고, 과거의 모든 행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44" name="_ftnref44">[44]</a><br />소속: 나아만은 아람 사람으로 남는다. 그는 유대교 개종자가 되어 율법을 지키는 외국인이 되지 않았다. 그는 아람으로 돌아갔다 (19절). 그는 이스라엘의 적인 아람 군대의 장관 자리로 돌아갔다 (18절에 분명하게 그렇게 암시되어 있다). 그의 종교적인 소속은 어디라고 해야 할까? 아람으로, 그리고 림몬 신전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아람 사람들은 그를 림몬에 속한 사람들에게 ‘속해 있는’ 사람으로 볼 것이 분명하다.<br /><br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서 우리는 복합적인 상황을 본다. 그의 신앙과 행동의 일부는 변했지만, 다른 부분은 이전과 동일하게 남아있다. 소속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는 이전과 다름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점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경우에 우리의 지혜로운 반응은 왕하 5:19절과 같이 ‘평안히 가라’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br /><br />7. 결론<br />Charles Kraft는 새로 오게 될 서구 선교사들에 대해 한 나이지리아 그리스도인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그 나이지리아 인은 전통적인 부족 종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선교사들이 와서는 성경의 하나님과 나이지리아 인들이 믿는 하나님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이 그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 선교사들을 보내서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을 이해하고 헌신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45" name="_ftnref45">[45]</a> 그는 새로 올 선교사들이 그것을 좀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br /><br />내부자 운동 패러다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민족들 사이에서 (여기에는 종교도 포함된다) 직접적으로 일하고 계시면서, 각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그분의 운동이며, 그분이 진정한 내부자이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 name="_ftn1">[1]</a> 특히 Tennent, Timothy의 글을 주목하여 보라. ‘Followers of Jesus (Isa) in Islamic Mosques: A Closer Examination of C-5 “high spectrum” contextualization’, in IJFM (24:1, Spring 2007); Gary Corwin, ‘A Humble Appeal to C-5/InsiderMovement Muslim Ministry Advocates to Consider Ten Questions’, in IJFM (24:1, Spring 2007). Kevin Higgins,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 Movements: A brief Paper Inspired by Timothy C. Tennent’s Critique of C-5 Thinking’, in IJFM (23:6, Fall 2006).<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 name="_ftn2">[2]</a> Higgins, Kevin,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The Devoteds’ of Acts’, in IJFM 21:4; Winter 2004, pp. 155 ff.<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 name="_ftn3">[3]</a> 이는 출판되지 않은 자료로써 저자에게 한 논평 자료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4" name="_ftn4">[4]</a> John Travis의 C-단계들은 ‘The C1 to C6 Spectrum: A Practical Guide for Defining Six Types of ‘Christ-Centered Communities’ (‘C’) Formed in Muslim Contexts’ in Evangelical Missions Quarterly 34(4): 1998, pp. 407-408에 기록되어 있다. 트래비스 자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선교 실천가들이 C-단계들로부터 떠나고 있고, 적어도 C-5와 ‘내부자 운동’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C5라고 부르고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5" name="_ftn5">[5]</a> 특별히 이에 반대하는 비평에 대해서는 Bill Nikides, ‘Evaluating Insider Movements’, St. Francis Magazine Number 4, (March 2006). Nikides addresses Lewis’ viewpoints directly on p. 11.ff을 보라. 다른 비평들에 대해서는 John Piper in discussion with John Travis and others in Mission Frontiers가 있다. John Piper, ‘An Extended Conversation About Insider Movements: Responses to the September-October 2005 Mission Frontiers’, in Mission Frontiers (January-February 2006)을 보라.<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6" name="_ftn6">[6]</a> 예를 들어 McGavran, Donald A., The Bridges of God (New York, Friendship Press, 1955); Pickett, J. Waskom, Christian Mass Movements in India (New York, Abingdon Press, 1933)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7" name="_ftn7">[7]</a> 나는 교회가 내부자 운동에 갖는 관계의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좀 다른 관점에서 다루어보려고 한다 Kevin Higgins,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br />Movements: A brief Paper Inspired by Timothy C. Tennent’s Critique of C5 Thinking’.<br />Kevin Higgins, ‘Acts 15 and Insider Movements Among Muslims: Questions, Process,<br />and Conclusions’, in IJFM (24:1, Spring 2007).<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8" name="_ftn8">[8]</a> 나의 관점으로는 내부자 운동이 교회의 형태가 없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문제를 Tennent의 글 에 대한 나의 답에서 설명해 놓았다. Higgins, IJFM (Fall 2006)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9" name="_ftn9">[9]</a> Tennent은 그들이 한동안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와 내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주로 무엇이 혹은 누가 결국 발생한 분열을 시작되게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교회가 분열의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Tennent의 견해), 아니면 여전히 유대교 내에 머물고 있을 때에 이미 교회가 탄생되어 있었는지(나의 견해) 하는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0" name="_ftn10">[10]</a> 사도행전 3:1과 9:2를 보라. 바울은 다마스커스에 있는 회당에서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자신을 회당 지도자들에게 추천해 줄 공문을 구하고 있었다. 후에 사도행전 21:17 후반부에서 (예수를 메시야로 따르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이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들은 많은 유대인 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염려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공적으로 바울이 유대인적이라는 것(즉,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라고 강권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1" name="_ftn11">[11]</a> Luzbetak은 문화권내에 있는 그룹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사회 내에 기능하면서도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더 설명될 필요가 있다. Louis J. Luzbetak, S.V.D., The Church and Cultures (New York, Orbis, 1988)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2" name="_ftn12">[12]</a> 여기서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예수를 따르는 유대교 신자들’이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예수를 따르는 이슬람 종교인들’과 같은 관계가 되는 지가 중요해 진다. 이 글에서 이것을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각주 15와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룬 나의 이전의 글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The Devoteds’ of Acts, IJFM (21:4; Winter 2004)을 추천하고 싶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3" name="_ftn13">[13]</a> 요한복음에 관한 Whitacre의 주석(IVP 시리즈)에서 이 과정에 대한 논의를 보라. 244쪽에서 Whitacre는 회당으로부터의 분리가 1세기 후반에 일어났다고 결론짓는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여러 사건들 이후 약 한 세대에 일어난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4" name="_ftn14">[14]</a> Whitacre는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이 이미 회당에서 축출된 신자들과 아직 회당에 속해 있는 두 부류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두 그룹 모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Rodney Whitacre, Johannine Polemic (SBL Dissertation Series 67, 1982), p. 19. 또한 Raymond 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Paulist Press, 1979)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5" name="_ftn15">[15]</a> 예를 들어 Nikides, 2006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6" name="_ftn16">[16]</a> 여러 가지 면에서 유대교가 이슬람과는 다르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매우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예수를 따르던 초기 유대인들 역시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당면 했던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내부적 접근을 좋게 보지 않는 일부 사람들은, 개종자들이 여전히 모스크에 가는 한 진정한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들은 복음과 반대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1세기 성전의 경우에도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초기 운동은 그런 이유 때문에 성전에 참석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마치 계속해서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행위를 한 것처럼 말한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전 8:10). 바울이 그런 행동을 바로 잡은 것은 다른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잠재적인 영향 때문이지, 그들이 정말로 이방 신전의 식탁에 참여했기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7"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7" name="_ftn17">[17]</a> 나의 말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도 교회가 닫힌 구조를 갖는 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연합한 자들만이 교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회나 종교 구조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의 누룩과 같이 그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8"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8" name="_ftn18">[18]</a> 여기에 덧붙이기에는 좀 이상하지만, 중요한 사실이라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부자 운동의 지도자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어떤 공식적이고 인정 받는 방식으로 역사적인 전 세계의 하나님의 사람들과 연결을 갖는 것이라는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9"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19" name="_ftn19">[19]</a> 이 용어는 Leonard Sweet 가 처음으로 교회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Leonard<br />Sweet, Soul Tsumani: Sink or Swim in the New Millennium Culture (Grand Rapids, Zondervan, 1999).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보편적인 것으로 유지할 필요에 대한 유익한 논의는 데이빗 보쉬의 삶을 개괄한 짧은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Timothy Yates, ‘David Bosch: South African Context, Universal Missiology – Ecclesiology in the Emerging Missionary Paradigm’, in IBMR (Vol. 33, Nr. 2, April 2009), pp. 72ff.<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0"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0" name="_ftn20">[20]</a> 히버트의 비판적인 상황화 모델이 표준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br />Paul Hiebert, ‘Critical Contextualization’, in IBM (11(3): 1987), pp. 104-111을 참조하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1" name="_ftn21">[21]</a> 로마 카톨릭의 관점에서 보는 유용한 논의에 대해서는 Robert J.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New York, Orbis, 2007)을 보라. 또한, 개신교의 관점에 대해서는 Andrew J. Kirk, What is Mission?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0)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2" name="_ftn22">[22]</a> Annemarie de Waal Malefijt, Religion and Culture (New York, Macmillan, 1968),p.3.<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3" name="_ftn23">[23]</a> James P. Spradley, Participant Observation (New York, Hol, Rinehart, and Winston,<br />1980), p. 6, quoted in Daniel, R. Shaw, Transculturation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88), p. 25.<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4" name="_ftn24">[24]</a> 그 한 예로는 Shaw, 1988를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5" name="_ftn25">[25]</a> Lamin Sanneh, Translating the Message (New York, Orbis Books, revised edition, 2009), p. 3.<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6"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6" name="_ftn26">[26]</a> Kirk, What is Mission?, 122ff.<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7"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7" name="_ftn27">[27]</a> Malefijt, Religion and Culture, p. 6.<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8"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8" name="_ftn28">[28]</a> Shaw, Transculturation, p. 24.<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9"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29" name="_ftn29">[29]</a> Ibid., p. 57.<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0"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0" name="_ftn30">[30]</a> Kraft는 종교와 세계관에 대해 다루면서 종교와 문화가 서로 겹치면서도,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Kraft에게 있어서, 종교는 세계관 이상이고 또한 그 이하이기도 하다. 종교가 세계관 이상인 이유는 종교는 세계관이 포함하고 있지 않은 행동들과 의식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세계관 이하인 이유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모든 믿음과 가정들을 종교가 다 포함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Charles Kraft, Anthropology for Christian Witness (New York, Orbis, 1996), p. 199. Hiebert는 종교와 문화를 좀 더 덜 구분적인 것을 보고 있다. Paul Hiebert, Cultural Anthropology (Grand Rapids, Baker, 1983), pp. 371ff.).<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1" name="_ftn31">[31]</a> Van Engen은 종교와 문화에 대한 논의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종교와 문화가 아니라) 믿음과 문화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를 통해 Van Engen는 문화와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복음과 믿음을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문화에서나 복음과 믿음이 상황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Charles Kraft와 노선을 같이 하여, Van Engen은 하나님이 문화를 운송 수단과 같이 사용하여, 운동수단이 승객을 나르듯이 믿음을 나를 수 있다고 본다. (1995, p. 192ff.)<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2" name="_ftn32">[32]</a> Van Engen는 이 유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나서, 이 세 영역에 네 번째 영역을 첨부한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각각의 영역이 주는 통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데, 그는 이 네 번째 영역을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Kirk는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바꾸어서 좀 더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기본적인 유형을 사용한다. Bosch는 두 개의 주요 패러다임을 보는데, 그것은 배타주의가 한 편에 있고, (비록 그가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포용주의와 다원주의가 합해져서 다른 한 편에 있는 것이다. 보쉬는 그 둘의 균형을 잡을 세 번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Hans Kung은 네 번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이 패러다임은 무신론자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가 제시하는 유형에서 (그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배타주의와 다원주의 패러다임은 분명한 반면에 포용주의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그는 모든 종교는 하나의 종교의 진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참고. Van Engen, The Uniqueness of Christ in Mission Theology, in Edward Rommen and Harold Netland, eds., Christianity and the Religions (Pasadena, CA, William Carey publishers, 1995); Kirk, What is Mission?, pp. 118ff.; David Bosch, Witness to the World (Eugene, Oregon, Wipf and Stock, 1980). Hans Ku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nium (New York, Doubleday, 1988), esp. pages 230 and 235.<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3" name="_ftn33">[33]</a> 이와는 대조적인 것이지만, 또한 동일하게 중요하고, 이와 연관된 신학적 관점으로서 기독론과, soteriology와, 그 각각의 위치가 내포하고 있는 계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Van Engen의 논의가 이 다른 토픽들에 대해 좋은 개관을 제시해 준다 (1995: 183ff.). 또한 Kirk, What is Mission? pp. 118ff.), and Smith, (1995: 9ff.)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4" name="_ftn34">[34]</a> Van Engen를 제외하면, 이것은 기독교와 종교들에 기여한 사람들이 주로 취하는 입장인 것 같다. 위에서 인용.<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5" name="_ftn35">[35]</a> Van Engen의 논의를 보라. 특히 Kirk의 것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6"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6" name="_ftn36">[36]</a> 이 입장에 대한 뛰어난 예를 Ku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nium, p. 254 에서 찾아볼 수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7"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7" name="_ftn37">[37]</a> See the discussion in Ed Mathews가 그의 소논문 Yahweh and the Gods, p. 33. 에서 기독교와 종교들에 대해 다루면서 한 논의를 보라. Mathews는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지만, 엘과 멜기세덱 사건의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8"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8" name="_ftn38">[38]</a> 나는 모든 점치는 행위가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발람의 경우에 그러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9"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39" name="_ftn39">[39]</a> Gordon Smith는 또한 이 세가지 유형의 범주가 그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바른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가에 의문을 제시한다. 기독교와 종교에 대한 그의 개시장(the opening chapter)을 보라. (The Christianity and the Religions volume, 특히 p. 16).<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0"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40" name="_ftn40">[40]</a> Van Engen은 각 패러다임의 장점만을 함께 모을 다른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것은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믿음에 있어서는 특정주의, 교회에 있어서는 포용주의, 문화 접근에 있어서는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말한다. Van Engen, 1995, 197ff.<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1"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41" name="_ftn41">[41]</a> 심지어 이런 경우에도, 나는 그들이 이전에 믿었던 종교적 세계관과 신앙에 대해 많은 방향 조정과 재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나는 이를 이전에 쓴 나의 글에서 설명하려고 해 보았다. 앞에서 인용된 나의 글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and,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 Movements를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2"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42" name="_ftn42">[42]</a> 여기에는 몇 가지 가능한 모델이 있다. Hiebert의 비판적 상황화 모델이 아마 가장 잘 알려진 것일 것이다. 좀 더 복잡하고, 확장된 모델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haw and Van Engen. See Paul Hiebert, ‘Critical Contextualization’, in IBMR (11(3): 1987), pp. 104-111, and Daniel Shaw and Charles Van Engen, Communicating God’s Word in a Complex World (Boulder, CO, Rowan and Littlefield, 2003).<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3"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43" name="_ftn43">[43]</a> Nikides는 삼위일체 같은 교리들에 대한 연역적 가르침이 없다면 믿는 자들이 성경만 연구해 가지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교회의 지도 없이 성경 공부 교재나 다른 연역적인 도구들을 사용해서는 이런 것들을 배울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2006, p. 8). 귀납적, 연역적 방법을 통한 제자훈련이 적당하게 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Nikides의 주장은 좀 과장되어 있다. 교부들 역시 성경을 수 세기 동안 연구하여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교리들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리는 문화를 반영하고 있고, 이단이 마치 새로운 가르침인양 떠들어대던 시기에 이단을 구별해 내기 위해 그러한 작업들이 이루어졌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4"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44" name="_ftn44">[44]</a> 나아만 장군의 예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Stuart Caldwell, ‘Jesus in Samaria: A Paradigm for Church Planting Among Muslims’, in IJFM, (17:1, Spring 2000)을 보라. 나아만에 대한 더 많은 자료는 위에서 인용된 Higgins, The Key to Insider Movements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5" href="http://www.blogger.com/post-edit.g?blogID=4878590448716248977&postID=8295774366045989910#_ftnref45" name="_ftn45">[45]</a> Charles Kraft, Christianity in Culture (New York, Orbis, 2005), p. 16. Emphasis in original.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29981696875838213162009-07-28T04:31:00.000-07:002009-07-28T04:35:00.502-07:00이븐 알-아라비 : 창조에 대해서원제: REFLECTIONS ON THE CONCEPT OF CREATION IN MUHYI’AD-DĪN IBN AL- <br /> ‛ARABĪ1<br />글쓴이: Phil Bourne<br />번역자: 소피아 김<br /><br />1. 서론<br />소위 ‘범신론’이라고 불리는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 신학자들 모두에게 많은 비판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 name="_ftnref1">[1]</a> 따라서 이 주제를 다시 살펴본다는 것은 오래된 논란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필자가 의도하는 것은,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에 대한 찬반론을 검토하는 것보다는, 오늘날 수피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븐 알-아라비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실재 reality 에 대한 근본적인 가정들을 함께 재검토해 봄으로써 오늘날 수피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싶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작업은 성경이 제시하는 실재에 대한 견해가 신비주의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러한 차이가 창조에 대한 의미와 목적에 대한 다른 관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br /><br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은 오늘날의 수피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사상 전부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신비주의의 탐색은 그가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창조의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br /><br />좀 더 이븐 아라비에게 동정적인 저술가들은 그가 신비주의가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 종교간의 이해를 돕는데 기여하였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이븐 알-아라비는 살아 생전에 수피즘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시하였고, 이는 동서양 간에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방법으로 친밀감을 가져다 주었다. 이 바탕위에 무언가를 세워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탕이 반석같이 견고한 것인지 아니면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인지를 먼저 질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br /><br />2 창조<br />그렇다면 이븐 알-아라비가 말한 창조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매우 방대한 주제이고 따라서 이 짧은 글에 모든 것을 다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글들은 그 본질적인 부분들을 설명할 것이며, 이븐 알-아라비가 어떻게 창조를 이해했고,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였는지 알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br /><br />이븐 알-아라비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 1165년 (1165AD/560AH)에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광범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젊을 때에 이미 수피즘을 향한 길에 들어섰다. 그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면서 지식을 추구하고, 경건과 지식에 명성을 얻었다. 1201년(598AH)에 비전을 보고 그는 서구를 떠나 동양으로 여행하기로 결심한 후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첫 목표는 메카였다. 거기에서 그는 몇 번의 매우 중요한 영적인 만남을 가지고, 그의 영적 탐색에 한 층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 카바를 순회하면서 신비주의적 경험을 한 결과로 그는 광범위한 지식을 담은 al-Futū}hāt al-Makkiyyah<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2" name="_ftnref2">[2]</a>를 저술하기 시작하는데 그가 주장하기는 그것이 어떤 변증론이나 당대 학문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계시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님이 나의 증언자이시며, 나는 다음과 같이 맹세한다. 나는 신이 명하신 것 이외에는 단 한 글자도 적지 않았으며, 깊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숭고한 영감만을 기록하였다. 내 심중에 있는 신의 영으로부터 온 영감에서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3" name="_ftnref3">[3]</a><br /><br />메카를 떠난 후에 그는 중동의 여러곳을 방문하면서 종종 1207/604년과, 1210/607년, 1214/611년에 다시 메카로 돌아오곳 했다. 결국 그는 1223/620년에 다마스커스에 자리를 잡고 1240/638년에 생을 마감했다.<br /><br />이븐 아라비가 이해한 실재, 즉 창조는 전통있는 하디스 H}adīth al-Qudsī 인 ‘나는 숨겨진 보물이다. 나는 알려지기를 갈망한다. 나는 알려지기 위해 창조를 했다. I was a hidden Treasure and I yearned to be known. Then I created creatures in order to be known by them’에서 시작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4" name="_ftnref4">[4]</a> 하나님의 슬픔(pathos)과 스스로를 계시하고자 하는 원함이 창조의 동기가 되며 그 중요성을 가늠하게 한다. 하나님의 한숨이 구름을 만들어냈으며 그로부터 다른 창조물들이 생겨났다. 이븐 알-아라비의 작품은 당시의 지배적인 과학적 파라다임에 있어서 플라톤주의와 꾸란의 유산에 각각 동등한 무게를 둔다. 10세기 지중해 세계의 과학과 대부분의 다른 지식들은 플라톤주의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이븐 러쉬드 Ibn Rushd 의 영양으로 인해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d. 1274)의 작품에서 유럽의 기독교세계에 반영된 운동이다. 유럽의 기독교세계는 라틴어로 번역된 아랍어 작품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br /><br />이븐 알-아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수피즘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을것을 곧바로 인식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영적인 만남이 실제로 초자연적인 것들과의 실재 만남이 되는 신비주의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영혼 soul’의 개념을 지성의 근본적인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반면에 플라톤주의는 어떤 자연적 과정으로 인해 우주가 발산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창조해내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이븐 알-아라비의 궁극적 의지 ultimate will 와 하나님의 원함에 대한 이해는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는 하나님의 원함 즉, 그의 창조물과 함께 느끼는 공감 sympathy이 표현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함께 하는 감정은 창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되도록 하며, 그 사랑은 그의 창조물들이 그의 신적 존재를 반영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표현된다.<br /><br />그러나 이는 그 그림의 일부일 뿐이다. 이븐 알-아라비 역시 하나님 즉, 신의 본질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다. 아무도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보고 있다. 정통 이슬람이 지적하듯이, 그의 창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그를 기술할 수도 없다. 그는 그의 창조물 어느 것과도 다른 분이시다. 그러나 이슬람 학자들이 ‘하나님은 어떤 어떤 분이 아니시다’라는 진술을 넘어서는 더 나아갈 수 없도록 스스로 제한한 한편, 이븐 알-아라비의 플라톤주의는 그가 그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창조는 저편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즉, 신적 존재<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5" name="_ftnref5">[5]</a>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신과 창조된 세계 사이에는 일련의 신의 자기 계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계시는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듯 일련의 발산<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6" name="_ftnref6">[6]</a>, 즉 존재의 확장이라기 보다는 일련의 신의 현현이다. 즉, 신의 본질의 어떤 부분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신으로써 숭배하는 것은 신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이미지대로 창조된 것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적 존재의 일면이다. 그것이 바로 신의 이름들이다. 이런 식으로 이븐 알-아라비는 정통 이슬람내에 머물면서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우리가 하나님을 알수는 없지만 그의 이름들을 통해서 그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역설적으로 보는 것의 바탕위에 신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험이 실재가 되는 수피즘의 이론이 서 있는 것이다.<br /><br />이븐 알-아라비는 실재를 일반적인 사물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로 그리고 있으며, 신과 그의 창조물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가 이 구조를 그리고 있는 방법이 모든 자세한 사항들에 있어서 항상 일관적이지는 않으며,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의 원함은 ‘이름들’을 발산해 냈고, 각 이름은 서로 다른 독특한 신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름들’ 역시 알려지기를 원하고 있고, 이 원함은 더 나아가 일련의 사물들 즉, 존재하는 단계에 있는 것들에 신의 현현으로 나타난다. 이 이름들에 더하여, 이 사물들은 영들의 천사와도 같은 세계, 각 영혼의 세계, 아이디어와, 이미지와,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물질 세계에 속한 세계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7" name="_ftnref7">[7]</a> <br /><br />이러한 접근은 신의 본질과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 사이에 여전히 거리가 존재하는 이점이 있다.(수피즘은 범신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확실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역자주) 또한 플라톤주의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구별 즉, 영과 혼은 물질 세계보다 월등하다는 구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꿈과 정신 이미지의 심리 세계를 설명해 준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들은 아이디어의 세계에서 실재로 존재한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의 비전은 실재이고 단순한 공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비전을 추구하는 것은 신의 본질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기원origin으로 가까이가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br /><br />여기에서 우리는 신비주의의 핵심을 보게 된다. 신비주의자의 목적은 창조의 깊이와 높이를 헤아려보는 것이고, 그 모든 것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과 목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있는 하디스 (H}adīth al-Qudsī)로 돌아가서 시작했다. 신이 알려지기를 원한다면, 신은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좀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긴 했지만, 신은 그의 제자들이 신에 대해 알고있는 지식만큼 스스로를 안다. 제자들은 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 없다: 신의 본질은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 사실 그런 지식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은 그가 창조된 신의 이름에 계시된 신의 측면에 대해서만큼은 알고 있다.<br /><br />이는 모든 것이 신이라는 범신론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븐 알-아라비는 신비주의 경험을 서술할 때 창조자와 창조물, 즉 주인 the Lord 과 그의 종 his vassal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일반적인 친교, 즉 신과 그의 제자 disciple 사이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창조물에 합당한 역할이 있고, 신에 합당한 역할이 있다. 제자는 신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 신을 알고, 신은 제자가 신의 그 자기 계시에 반응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안다. 이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과 그의 종 사이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게 된다.<br /><br />이는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Corbin이 ‘신이 현현하는 기도의 방법 Method of Theophanic Prayer’<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8" name="_ftnref8">[8]</a>이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신비주의적 헌신/기도(devotion)의 정점에 이를 때 더욱 그러하다. 이 기도를 수라 화타하 장에 기초하여 반응하는 하나의 기도문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자는 기도하고 신은 반응한다; 각각은 상대방의 기도에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각각은 리더와 응답자의 역할을 취한다. 창조 질서와 반대되는 방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기도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 이라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알-무쌀리’라는 단어의 뜻을 깊이 음미하고서 이 놀라운 결과에 이른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9" name="_ftnref9">[9]</a><br /><br />이는 우리의 존재가 신과 합체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과 우리의 존재는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신의 역할과 제자의 역할이 혼동될 수는 있다. 즉, 제자가 신의 역할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만큼이나, 신도 제자의 역할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Corbi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em>이처럼 신이 무살리 ‘기도하는 사람’ 과 ‘마지막에 오는’ 자가 될 때, 신은 ‘마지막’ 즉 ‘계시된 분’ 이라는 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인다. 신의 현현은 그가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그 신실한 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신실한 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신이 자신을 나타내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역자주) ‘우리를 향해 기도하는 신’이란 다시 말해 우리 앞에 현현한 신이다… 그 신은 그 신실한 자가 묵상이나 깊은 숙고를 통해서든지, 그가 확신하고 굳게 붙드는 특별한 신앙에 의해서 자기 마음에 만들어낸</em> <em>신이다. 따라서 그 신은 ‘신자의 마음에 만들어내진 신’ 즉, 결정하고, 수용자의 역량에 따라 개별화된 신이며, 그의 혼은 신이 현현한 것이고, 그는 이런 저런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비, 공의, 능력 등등의 99가지로 정하고 있다 – 역자주).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향해 기도하는 신’은 ‘우리의 존재’ 이후의 것이다. 즉, 우리의 존재 다음에 오는 것이고, 우리의 존재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 신은 우리의 신의 현현이 신으로 확립한 신이다. 왜냐하면 숭배받는 자는 숭배하는 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숭배받는 자는 숭배하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마지막’이고, ‘계시된 분’이다. 이렇게 볼 때 ‘처음’ 이라는 신의 이름과, ‘숨겨진 자’라는 신의 이름은 신실하게 신을 좇는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이름이 된다.<br /></em><br /><em>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자’가 될 때, ‘마지막’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도 어울리는 이름이다. 우리는 신의 다음에 온 자들이고, 신 이후의 사람들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신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이 된다. (왜냐하면 ‘숨겨진 보물’인 신은 알려지기를 원하고, 사물 안에 그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신은 우리보다 속행하는 신이고, ‘처음’ 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숨겨진 보물’(즉, 신 – 역자주)이 신비의 세계로부터 무한한 신의 이름들의 다양성 안에서 여러 믿음의 형태로 실재하는 존재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그것들이다. 그 분은 숨겨진 분이고, 계시된 분이고, 처음이고, 마지막이다.</em><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0" name="_ftnref10"><em>[</em>10]</a><br /><br />이런 의미에서 각각은 창조자가 되고, 창조물이 된다. 각각은 창조하고, 신의 현현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종은 그 자신의 이미지 안에 주님 즉, 신앙의 신, 그 자신의 개인적인 주를 창조하고, 이는 바꾸어 말하면, 신이 그를 창조했던 바로 그 형태이다. 이는 신의 형태를 실재화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은 제자 안에서 그리고 제가가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 안에서 신 스스로를 알 수 있다.<br /><br />위에서 인용한 이븐 알-아라비의 글은 그가 ‘신의 현현으로서의 창조’에서 그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중요한 것은 창조된 형태가 아니라, 창조는 신의 본질의 계시이고, 그 계시 안에서 신의 본질은 스스로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신은 그의 목적을 이루어 낸다. 즉, 제자를 통해서 그 자신을 알고, 창조의 싸이클을 완성시킨다. 즉, 신은 그가 제자 안에서 그리고 제자를 통해서 그 자신을 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이것이 모든 신비주의 경험의 목적이고 목표가 된다. 즉, 유일한 신적 존재에 대한 진정한 숭배로 표현되는 그의 창조물을 향한 신의 목적(objective)을 이해하는 것이 목표(goal)요 목적(purpose)이 되는 것이다.<br /><br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수피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나는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들어 Tom Wright의 책 ‘희망에 놀라다’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창조의 물질적인 상태를 다시 강조하고 부활후에 유사하지만 변형된 물질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많은 부분에서 그는 서구 기독교가 플라톤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는 것에 비판을 가한다. 서구 기독교는 미래에 우리는 육체를 가지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고, 우리의 존재의 본질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혼’이라고 말했던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직 우리의 혼만이 죽음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br /><br />Wright는 신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신약의 많은 부분에서 구속의 의미와 중요성이 ‘육체의 구속’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고(로마서 8:23), 또한, 육체의 부활을 새로운 삶으로 보고 있다고 본다(에베소서 4:30). 여기서 부활은 물론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다름아닌 육체인 것이다. 계시의 마지막 드라마에서 우리는 하늘로 들려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하늘이 내려와서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계시록21장을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에서 그들의 주님과 만나는 장면은 단지 환영 인사일 뿐이다. 예수는 이 땅으로 다시 오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신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여기서 Wrights의 주장을 다시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그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br /><br />하나님은 4차원의 시공연속체인 이 세상과,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언제가 없애버리려고 그러신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 분의 목적은 더욱 풍성한 결실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목적의 일부는 땅에 사람이 살게 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들은 창조의 과정에서 그와 함께 할 사람들이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알려지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또한 동시에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창조물과 맺으시는 관계는 스스로가 알려지기 원해서 생겨난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창조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br /><br />이는 이븐 알-아라비가 ‘목표’로 세워놓은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븐 알-아라비에게 있어서 종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 중에 하나가 아니다. 그에게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신이 미리 짜 놓은 구조이고 상황이며, ‘이 낮은 세상’에서 인간의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고 궁극적인 영적 운명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삶을 인식해 본다면 그것은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그 자신의 원초적인 실재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1" name="_ftnref11">[11]</a> <br /><br />다시 말해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돌아감에 대한 신화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주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로 되돌아 간다.”(꾸란11) 그것을 안다면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분에게 돌아가라. 이를 피할 길이 없으며 반드시 그 분에게로 돌아가야만 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2" name="_ftnref12">[12]</a> 이 돌아감은 존재론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헌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우리의 목적을 완성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우리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br /><br />이븐 알-아라비에 의하면 영적 단계에 높이 올라간 수피들에게는 죽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들은 이미 영원에서 궁극적으로 이루게 될 신과의 합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꾸란이 부활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오직 이 삶에서 아직 신의 역량에 미치지 못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무함마드와 연계되거나 혹은 그들이 무슨 신을 섬겼던 그 신과 연계되는 것을 통해 보상을 받게 된다. 이는 낙원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육체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자들에게 얼마만큼 그것이 끌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든다. 이븐 알-아라비는 이 문제를 하킴 알-티르미디의 일흔 한번째 질문인 ‘모든 개인이 그의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은 그가 어느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고, 신앙의 계열과, 그 차이, 그 적고 많음 가운데에서 그가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있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3" name="_ftnref13">[13]</a>에 대한 응답에서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일 뿐이고, 또 그렇게 남을 것이다.<br /><br /> <br />3 아름다움과 불완전함 beauty and brokenness<br />이븐 알-아라비가 보는 하나님은 아름다운신 분이고, 아름다움 가운데 계시된다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중요한 영적 일면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al-futūh}āt al-makkīyah 에서 Corbin이 철학적 시라고 표현했던 그 부분일 것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4" name="_ftnref14">[14]</a> 열렬한 소망의 설명자 the Interpreter of Ardent Desires 라고 제목이 붙은 이 시는 이븐 알-아라비가 메카에 머무는 동안 환영을 받았던 집 주인 자히르 이븐 루스탐의 딸인 니잠에게 느꼈던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는 단순한 사랑의 시인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당시의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본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이븐 알-아라비가 이 시의 구절들에 대해 쓴 주석에서 그는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소망의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그 소녀에 대해 느꼈던 자연스러운 감정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녀는 그가 영적 탐색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되었다. 코빈은 신비주의에서 사랑이란 일반적으로 느끼는 자연적인 사랑과 영적 사랑의 합일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소녀의 역할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에 비교한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5" name="_ftnref15">[15]</a> 육체적인 갈망의 대상이 신을 향한 문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Fas}ūs} al-H}ikam의 마지막 장에서 이를 확실히 하고 있다: “신비주의자는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가장 고차원적인 신의 비전을 얻게 된다. 창조된 여성‘Creative Feminine’ 은 창조물로서 신의 가장 고차원적인 표현 즉, 창조적인 신성 creative divinity 을 숙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6" name="_ftnref16">[16]</a><br /><br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 수도자들을 분개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깜짝 놀라서 외떨어진 사막의 암자로 달려가는 수도자들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영적인 사랑과 일반적인 사랑 사이의 조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br /><br />The Fas}ūs} al-H}ikam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모든 것에서 선한 것, 본질적으로 오직 선한 것만을 사랑하도록 통찰력을 주신다.’<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7" name="_ftnref17">[17]</a>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적 시각에서도 이것이 맞는 말일까? 창조가 오직 선하고 오직 아름다운 것이기만 할까? 이 문제는 우리가 악과 불완전한 것의 기원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br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가 창조하신 물질적인 것들이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것의 기원은 영적인 것, 사단의 반항에서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선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악한 영이 패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이슬람이 성경이 의미하는 창조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 과거의 어떤 때에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 이슬람은 ‘타락’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설명할 수가 없다. 보통 이슬람은 이러한 불완전함을 부주의함 혹은 무지의 탓으로 돌린다. 이븐 알-아라비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에 기인하여 그러한 불완전함을 신적 존재에서 멀어졌기에 생기는 일로 보았다. 비록 이븐 알-아라비가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고, 특히 이슬람 법학자들인 울라마 ulamā’와 관련하여 사탄의 계략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는 하지만,<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8" name="_ftnref18">[18]</a> 단순한 천사의 활동들이 신의 목적에 어떤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에는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불완전함의 근원이 물질적 세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천국’을 다시 얻기 위해서 궂이 창조된 상태를 없애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곳은 현실에서 유리된 채 ‘천국’이라고 불리는 어떤 곳, 신이 사실 우리에게 뜻했던 어떤 영적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현재 세계를 다시 정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Tom Wright 의 의견이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땅으로 내려온 하늘, 사람이 있는 곳(땅)에 하나님도 계시게(하늘) 되는 그런 식으로 땅으로 내려온 하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매우 물질적인 것이다. 이 경우에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그러한 현실적인 새로와짐이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어떤 영적인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속을 위한 우리의 활동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것을 바로 잡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많은 수피 신비주의자들이 그러한 개념을 놓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증거는 Tom Wright 가 여러번 강조하듯이, 우리 미래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에 있다. <br /><br />어떤 면에서 이 글은 밑그림에 불과하다. 이븐 알-아라비의 저술과 같이 너무나 방대한 글을 평하고,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단지 그가 다룬 주제들을 더 늘려놓았을 뿐, 영어로 된 그의 작품의 적은 양도 다 소화해내지 못했다. 다만 그의 저술이 제시하는 논의점들을 다루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븐 알-아라비의 창조에 대한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술의 아름다움이나 그의 사고의 깊이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아름다움과 깊이가 진정한 지식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br /><br />참고서적 <br />Titus Burckhardt, The Wisdom of the Prophets (Beshara Publications,<br />1975). An English translation, by Angela Culme-Seymour, of Burkhardt’s<br />French translation of some sections of Ibn al-Arabī’s fas}ūs} alh}<br />ikam.<br />Henry Corbin, Alone with the Alone: Creative Imagination of the Sūfism<br />of Ibn ‛Arabī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1997). This is based on<br />lectures originally given in French in 1955 and 1956.<br />Michael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Two volumes originally<br />published by Rothko Chapel, 1988 and reprinted by Pir Press in 2002 and<br />2004. These are translations by William Chittick, James Morris, Cyrille<br />Chodkiewicz and Denis Gil of selected passages. The second volume<br />contains a translation of Michael Chodkiewicz’s introduction to the<br />French translation of al-Futūh,āt al-Makkiyya.<br />Michael Chodkiewicz, Seal of the Saints: Prophethood and Sainthood in<br />the Doctrine of Ibn ‛Arabī, English translation of the French Original by<br />the Islamic Texts Society (Cambridge, 1993).<br />Tom Wright, Surprised by Hope (SPCK, 2007).<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 name="_ftn1">[1]</a> 예를 들어 Ah}mad Sirhindi는 분명하게 이븐 알-아라비의 ‘존재 Being’ 개념을 거부한다. 참고. Muhammad Abdul Haq Ansari, Sufism and Shari‛ah (Leicester: Islamic Foundation, 1986). Sirhindi는 wah}dah al-wajūd 라는 용어를 문제 삼은 것 같다. 하지만 이븐 알-아라비 자신은 그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Ibn Taymīya (d 728/1328) 는 대대적으로 성자 숭배를 배척하였는데 이는 이븐 알-아라비의 성자 개념 sainthood에 대한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개혁운동이라고 할만한 많은 운동들의 특징이 되고 있다. 참조. Michael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Pir Press, 1988, 2002 and 2004), pp. 8ff.<br />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2" name="_ftn2">[2]</a> al-Futū}hāt al-Makkiyyah는 보통 ‘메카에서 받은 계시 The Meccan Revelations’로 번역되는데 종종 다른 번역이 제시되기도 한다. Corbin은 Jāmī의 영향을 받아 ‘메카에서 영적으로 얻게 된 것 The Spiritual Conquests of Mecca’이라고 번역한다. 참고. Henry Corbin, Alone with the Alone: Creative Imagination of the Sūfism of Ibn ‛Arabī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199), p. 357<br />footnote 1.<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3" name="_ftn3">[3]</a>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 III:101 cited Meccan Revelations II:6, 또한 이는 이러한 종류의 유일한 진술이 아니다. 사실 이븐 알-아라비는 그 자신의 저술의 무질서한 순서를 꾸란에 비유한다. 꾸란의 내용은 계시될 때마다 그 의미가 통하든 통하지 않든 지정된 장소에 끼워 넣도록 되어 있었다. 순서적으로는 좀 맞지 않을 수 있지만, 더 깊은 세계로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자료는 1329AH/1911AD에 발간된 네 권의 아랍어로된 카이로 텍스트에서 따온 것이고, 두 번째 자료는 Chodkiewicz의 두 권의 번역 및 주석서에서 따온 것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4" name="_ftn4">[4]</a>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114. H}adīth Qudsī는 무함마드에게서 온 전통으로,<br />무함마드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학자들은 이 하디스가 믿을 만한 것인지를 놓고 논쟁의 벌이기도 하는데, 이는 다른 일반 하디스 모음에서는 나오지 않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피들은 이 구절을 매우 자주 인용하기 때문에 그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5" name="_ftn5">[5]</a> 여기서 논의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븐 알-아라비가 신의 존재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를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븐 알-아라비는 신의 존재를 필연적인 존재와, 잠재적인 존재, 그리고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로 나누었다. 유일하게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존재는 신 그 자신으로서 신의 본질이며,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잠재적인 존재는 바로 창조된 세계로써, 이는 하나님의 한 분의 원함과 활동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이븐 알-아라비는 계속되는 창조를 믿었다는 것이다. 전 우주는 계속해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의지와 원함에 의해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에 연속성이 없으며, 잠재적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혹은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이로 순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꿈과, 비전과,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게 하였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6" name="_ftn6">[6]</a> 이븐 알-아라비는 아랍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전문 용어인, 발산 emanate 이라는 의미의 Fayyad 혹은 sadar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계시라는 의미인 tajallī 를 더 선호한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7" name="_ftn7">[7]</a>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224를 보라. 메카에서 받은 계시에서 이븐 알-아라비는 신의 단계를 포함하는 다섯가지 존재의 단계를 말한다.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I, p. 128ff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8" name="_ftn8">[8]</a>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246.<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9" name="_ftn9">[9]</a> 모호성은 신비주의에서 늘 있기 마련인 것 같다. 친구 라는 뜻의 왈리 walī 라는 용어 차제가 모호하다. 꾸란 45:19에서는 신의 이름을 뜻하기도 하고, 신비주의자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사 용어를 찾아보려면 Michael Chodkiewicz, Seal of the Saints: Prophethood and Sainthood in the Doctrine of Ibn ‛Arabī (Cambridge, 1993), pp. 21ff을 보라.<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0" name="_ftn10">[10]</a>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p. 265ff.<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1" name="_ftn11">[11]</a> James Morris in Meccan Revelations I, p. 94.<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2" name="_ftn12">[12]</a>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h: II, p. 86 lines 19-21, translation in Meccan Revelations I, p. 124.<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3" name="_ftn13">[13]</a>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h: III:223 from lines 8-10, translation in Meccan Revelations I, p. 105.<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4" name="_ftn14">[14]</a>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p. 136ff.<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5" name="_ftn15">[15]</a> 위의 책, p. 52. Chodkiewicz는 Miguel Asin Palacios가 그의 논문에서 단테가 이븐 알-아라비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부분을 미심쩍게 생각한다. 코빈은 그 논문에 동의하지만, 그 관계는 현상학적일 뿐 ‘실제적’으로 빌려온 것은 없다고 본다. 코빈의 아름다운 문구를 읽을 때는 좀 조심하는 것이 좋다. 무엇이 이븐 알-아라비가 하는 말인지, 아니면 코빈이 이븐 알-아라비에 근거한 추론을 말하는 것인지가 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수피들에 대해 Fedeli d’amore 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할 때 좀 혼란스럽다. 그 용어는 단테와 그의 친구들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6" name="_ftn16">[16]</a>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159 Fas}ūs} al-H}ikma I, p. 217 에서 인용. Titus Burckhardt 에 있는 마지막 장의 번역의 일부인 ‘선지자들의 지혜’를 보라. (Beshara Publications, 1975), pp. 116ff, 거기에서 이븐 알-아라비는 무함마드의 향수와, 여자, 기도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코빈이 말하는 창조된 여성 Creative Feminine’ 은 창조에 대한 또 다른 면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 면에 있어서 코빈은 칼 융 Carl Jung 의 저술에서 지나치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칼 융의 정신 Psyche 에 대한 개념은 요즘에는 다소 구시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7" name="_ftn17">[17]</a> Burkhardt, Wisdom of the Prophets, p. 126.<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8" name="_ftn18">[18]</a>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 III:67-71, in Meccan Revelations II:77ff.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25004539219837637002009-06-11T11:16:00.001-07:002009-06-14T06:31:24.739-07:00중동 여성 제자삼기원 제: Discipling Arab Women<br />글쓴이: 김 사랑<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1" name="_ftnref1">[1]</a><br />번역자: 양다영, 조주옥<br /><br />1 서문<br /><br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근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가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br /><br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슬람 배경에서 신앙을 갖게된 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어내려간 저의 일기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슬람 관련 주제를 다룬 전문 논문이나 여러가지 원리의 개발을 찾기위해 쓰여진 글은 아닙니다. 중동에서 6년의 사역기간동안, 출신을 불문하고 제자훈련의 핵심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서로를 또 어떻게 사랑하는 지에 대한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 없이는 저의 힘으로 다른 민족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을수 없습니다.<br /><br />비록 제가 거주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저의 신앙의 체험을 공개적으로 나누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최근 이슬람권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찾아가는 공동체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공동체 스스로가 본국가의 타지역에서 일 할 수 있는 일꾼을 파송하여, 재정적으로 돕고 있는것을 볼 때 큰 격려가 됩니다. 이슬람권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되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숙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슬람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되는데, 여기서 몇 가지를 경우를 살펴보면서, 제자훈련사역과 새신자 양육을 하는데 그들이 미치는 영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br /><br />예수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한 이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도울수 있으며, 동시에 신앙의 자유가 제한된 곳에서 어떻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제자화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해답을 찾기위해 제자훈련에서 제가 했던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br /><br />먼저, 제자훈련를 위한 스스로의 준비라고 일컫는, 내 자신에 대해서 깨달은 부분을 나눌려고 합니다. 그 후에 새신자 제자사역 중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에 대해 살펴보겠으며, 제자훈련과정에서 배웠던 부분을 나눔으로 마치겠습니다.<br /><br />2 스스로의 준비<br /><br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br />로마서 1:16<br /><br />제자훈련에 지속적으로 연관되는 두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과 복음의 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 과정 속에서 진전이 없어보이던지 혹은,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느끼게되어 낙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새롭게 신앙을 갖게된 이들을 양육할 때 하나님앞에 신실한 모습으로 남아 있기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br /><br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깨달았을때, 그리고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을 체험하였을때, 새신자들과 함께 나의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연약함에서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이럴때에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이해하며, 생명을 변화시키는 그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삶속에서 그 변화의 힘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자신과 다른 바탕과 경험을 가진 이들의 삶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복음과 복음의 메세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와같은 개인적인 경험과 이해 없이는 종교적인 문화만을 흉내내는것이지, 복음의 힘으로 전파하는 것이 아니기 떄문입니다.<br /><br />그 밖에도 저의 여정과 준비과정에 연관된 중요한 두가지가 있는데, 둘 다 지역교회에 관한것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은 제자훈련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현지 지역교회에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현지의 환경과 교인들이 속해있는 지역 단체나 그들의 성향 또는 현지인들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이해 증진에 도움이 됩니다. 대부분의 이슬람권에 있는 많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 교회는 그들의 환경에 맞는 교리와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타종교의 지배 아래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소수 공동체로써 갖는 그들만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역 교회들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지역 형제, 자매들을 격려하고 약함을 강하게하는 역활을 할 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함께 나눌수 있게 합니다. 개인적인 배경과 하나님과 그리고 그분의 지체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지체들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자원들을(재정 자원이 아니라) 충당할수 있기 때문입니다.<br /><br />두번째는 공동체와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지역교회의 리더 여성들을 섬기기위해 소그룹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하였습니다. 기도 사역에 관심이 있는 여러사람들과 함께 중보기도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우리의 기도는 우선 지역교회의 이해와 나눔에 대한 것으로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 그룹은 신뢰와 정직으로 함께 성장해갔으며, 일년 후에는 기도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역교회나 가정의 여성리더 중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여성들과 기도에 대해 배우기를 희망하는 여성들을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모임을 시작하였을때는 우선 세계를 향해 특히 중동을 향한 중보자가 되기위해서 모였지만, 지금은 이 여성들이 본인이 속해있는 지역사회의 선교와 제자훈련을 감당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 모임은 제자훈련자들을 멘토링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자리잡았습니다.<br /><br />이 공동체들은 초신자들을 제자훈련하는 과정에 있는 제가 성장하는데 큰 부분을차지 하였습니다. 지역교회는 저에게 많은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지역사회의 문화를 이해 할 수 있게 도왔고, 제가 양육하는 이들을 소개할 수 있는 안전한 돌봄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지역교회는 제가 제자양육과정에서 어려움에 직면하였을때 조언을 주고 기도를 통한 통찰력을 제시해 주는 곳입니다. 제자훈련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고, 신앙의 기초적인 훈련에 헌신하는 본을 보이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지역 상황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 것은 모두 저의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br /><br />3 새신자들과 관계의 어려움<br /><br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7<br /><br />가부장제도 안에서 이슬람 가족이 갖는 특성은 여성들이 제자훈련에 임할때 많은 어려움을 갖게 합니다. 이로 인해 많은 여성들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그것을 매우 개인적인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비밀로 해야하며, 교제에 대해서도 극히 제한적이 되거나, 고립되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것들로인해 제자훈련의 상호작용이 제한되게 됩니다. 각각의 여성들의 상황을 이해하는것이 중요하며, 양육과 가르침, 사랑과 격려와 같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도울수 있는 길을 찾아야합니다.<br /><br />신앙의 가정 안의 있는 여성과, 과부나 이혼의 상황에 있는 여성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새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종교적인 교육과 함께 양육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2007년도 세미나에서 20년 가까운 경험을 가진 MBB에 따르면 새신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것이 가장 중대한 사안이며, 새신자들 양육시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성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더 고심해야 하며, 이로써 그들의 자녀들을 영적으로 양육할수 있도록 해야합니다.<br /><br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실시하는 신앙관을 방해하는 종교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어느때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지 혹은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교육을 하지 않으면, 그들과 그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논점을 다루는 것은 건강하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되기 위해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새신자들을 믿음의 삶으로 양육하는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숙제로 저에게 남아있습니다.<br /><br />새신자들을 믿음의 삶으로 양육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보다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때때로 낙심될 때가 있지만, 한 명이 나무를 심고, 다른이가 물을 주지만, 결국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로 돌아갈 때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새신자를 양육하는 과정에 있기 전에는, 그들에게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양육하는 과정에서는 막상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온 것은, 내 스스로가 약함을 통해 그들에게 믿음의 성장과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신자들은 제가 나누는 말보다 내 삶에서 관찰되어지는 모습을 통해 믿음에 삶에 대해 더 많이 이해했습니다. 저에게 큰 도전은 그들에게 모델이 되는 믿음의 삶을 꾸준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에도 그것이 도전이 되었습니다.<br /><br />그들의 신앙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경우는 가족과 개인적인 어려움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이에게 통용될 수는 없겠지만 새신자들의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어머니의 죽음이나, 자매들의 죽음, 암, 교통사고, 심한 요통 같은 어려움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새신자의 믿음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어떤이는 제자양육에서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도전은 저에게 깊은 기도의 생활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새신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 그리고 고난에 대한 성장을 돕는 도구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인 삶에 좀 더 일찍 이러한 가르침을 구했어야 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새신자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과정에 있지만, 이러한 영적 싸움에 대면하지 않았으며, 고난이 인내의 모델이 될수 있기에 아픔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먼저 우리가 깨닫고 그 깨달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br /><br />또 다른 어려움으로 제게 다가온 것은 그들의 필요와 요구에 상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습니다. 새신자들 중에는 때로 저를 통해서 그들의 생활적, 정서적, 영적인 필요가 전부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필요가 정말 절실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들의 필요를 모두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해 나누는 친구의 관계임을 강조합니다. 부족한 대답인것처럼 들리지라도 의존관계를 만들기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br /><br />또한, 새신자의 양육을 돕기위해서 새신자들에게 좋은 기초를 다져주면서, 실질적인 많은 어려움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는 교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교제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제는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지만 이슬람권의 새신자들을 위해 삶을 양육할 교제는 극히 제한적인 것이 사실입니다.<br /><br />4.새신자 제자훈련을 통하여 배운 교훈<br />새신자들을 양육하는동안 항상 염두해야 할 점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이며, 우리들 관계안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은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과 관계 안에서의 평안의 감각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지체간의 관계의 성장 또한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말씀의 진리 가운데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큰 도전일 것 입니다.<br /><br />저는 제가 양육하고 있는 새신자들이 제가 속해있는 공동체와 만남을 갖도록 노력합니다. 한 새신자의 경우 아랍 지역 여성들과 함께 하는 중보기도회에 참석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스도 공동체로써 갖는 교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던 너무나 많은 것들을, 짧은시간 동안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른 이들과 교제함으로써 깨닫게 되었고, 그분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 나눴던 부분들, 특히 성경공부만을 통해서는 가르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신앙적 선배와의 교제를 통해 삶으로 나타나는 모델을 보고나서 비로서 살아있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br /><br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정직과 진실함과 사랑으로 함께 성장함으로써, 저는 현재 새신자들과 각 지역의 성숙한 신앙인들을 연결해줄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는 이슬랍권 여성을 양육할 때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새신자들과 성숙한 신앙인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지체가 무엇인지 깨닫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br /><br />주안점은 언제 새신자들에게 이러한 그룹을 소개하는가 입니다. 새신자의 상황을 이해해야 하며, 그 새신자와 새신자를 받게 될 그룹에게 그 만남이 의미하게 될 것을 잘 이해해야 하며, 또한 새신자 믿음의 성장 단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또한 새신자가 예수그리스도의 지체의 한 부분으로써 사랑과 교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며, 저 혼자서는 모든 것을 공급해 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 분이 저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기를 간구하게 됩니다.<br /><br />하나님만이 삶의 방식의 모든것을 변화시키신 분이심을 인식하도록 해야하며, 새신자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되거나 전파자의 문화만을 흉내도록 하지 말고, 언제나 성경의 진리로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믿음과 가식적인 기독교적 행동을 차별화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희망하는 것은 새신자들에게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므로써,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을 삶과 상황속에서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지, 제가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br /><br />새신자를 믿음의 삶으로 양육하는 방법에 대해 유용한 몇 가지 단계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복음 전파보다는 믿음의 양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받은 지침이 되는 여러 방침들은 다음과 같습니다.<br /><br />1. 서로의 집에서 시간 보내기. 새신자들을 우리집에 초대하거나, 집에 초대받았을때도 흥쾌히 승낙하기<br />2. 성경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와 성경 읽은 것을 확인해주는 것도 포함<br />3. 회계와 고백의 중요성을 포함하여 영적 훈련에 대해 모델이 되어주며, 가르쳐주기. 인간관계와 문제에 대한 해결, 기도생활, 십일조 대한 성경적인 모델이 되어주기<br />4. 가족과의 관계가 개선되도록 격려해주며, 응원해주기. 이는 가정 안에서 행하는 이슬람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먼저 그리스도 인의 삶의 본이 되어주며, 가족를 위한 중보자가 되는 것을 포함.<br />5.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을 훈련시켜주어,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어도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임을 부정하였다고 느끼지 않게하기<br /><br />요한복음 4장에 예수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하며, 교리적이고 성경적인 질문의 해답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이론적인 설명이나 요구를 덧붙히지 않으셨습니다. 새신자의 양육에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 그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것들과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써 인내와 온유함으로 그들을 도와야 하며, 지체의 한 부분이 되는 기회를 가로막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진정한 제자양육입니다.<br />(쓰여진 성경말씀은 NIV판입니다.)<br /><br /><a title="" style="mso-footnote-id: ft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ftnref1" name="_ftn1">[1]</a> 아랍세계에서 일하고 있는 인터서브 선교사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9647173454396847812009-02-22T00:03:00.000-08:002009-02-22T00:17:18.777-08:00<서평> 중동의 개신교 선교사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가, 아니면 문화의 전파자들인가?원제> Book Review: Peter Pikkert's Protestant Missionaries to the Middle East<br /><br />서평 글쓴이: Duane Alexander Miller<br />책제목: Protestant Missions in the Middle East: Ambassadors to<br />Christ or Culture (WEC Canada, 2008), 226 pages.<br />책의 저자: Peter Pikkert<br /><br />Pikkert는 중동이나 터키에서 사역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중요한 책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재정을 쏟아부으면서도 중동과 터키에 개종자들이 드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한다. 먼저 그는 Samuel Huntington과 David Bosch의 이론에 근거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br /><br />Huntington은 그 유명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the World Order (Simon & Schuster 1998)의 저자이다. 그는 냉전시대 이후에 세계 분쟁의 주요 원인은 문명이 될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특별히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을 예상했다.<br /><br />필자는 파라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s)에 대한 Bosch의 의견을 빌어 선교 역사를 해석하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보쉬의 의견에 대한 주요 출처는 “변화하는 선교: 선교 이론에서 찾는 파라다임의 변화”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Orbis Books 1991.) 이다. 이 책은 중동과 소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카톨릭 선교 이외의 서구 선교 역사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카톨릭 선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br /><br />이 책의 1장부터 4장까지는 각 시대를 다루는 본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제 5장은 역사적 분석과 비판에서 다소 급격하게 방향을 돌려 신학과 현대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필자는 이 장이 이 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br /><br />지역를 중심으로 하는 Pikkert의 현대 역사 구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00-1918년까지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분해되는 시점이다. 혹은 데이빗 프롬킨 David Fromkin 이 말했듯이 모든 평화를 끝내는 평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미주1) 두 번째 시기는 1946년까지로, 시리아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서기 직전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79년까지로, 아랍 민족주의와 석유의 강세로 몇 나라들이 급부상하는 시점이다.(미주2) 이 시기는 또한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형성되고, 교파와 구분된 운동이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시기는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정치적 이슬람이 약진하는 시기로써, 정치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자 폭력까지 동원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Pikkert는 그의 저술 당시 (2005년)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br /><br />이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연합군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패한 6일 전쟁이 일어난 1967년이 아니라 1979년인지를 묻고 싶을 것이다. 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많은 무슬림들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패배를 겪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와 같이 승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싼 반나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 같은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저자의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br /><br />시기 구분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1967년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싶어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자면, 60년대와 70년대는 범아랍주의와 공산주의 및 세속주의의 환상에서 점차 깨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1년이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한 서구의 개신교 선교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br /><br />Pikkert는 주로 The Moslem World(미주3) and the annual report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로부터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와 일지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몇 인용들은 상당히 긴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좀 길긴 하지만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br />그렇다. 저자는 부정적이다. 그가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소위 대 실험 Great Experiment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1800년대 초에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지역 무슬림들에게 직접 바로 전도하는 것을 너무나 위험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대 실험으로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죽어가는 현지 교회의 (그것이 매로니안 교회든, 아르메니안이든, 그리스 정교회든, 콥틱이든 그 무엇이든지) 부흥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교회들은 서구 개신교 전도의 이미지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인 성상파괴와 개인주의라는 덫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 고아원, 진료소, 출판사, 병원들이 소위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Pikkert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지역 지도자들에게 미심쩍게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행동이 그들의 공동체를 너무 눈에 띠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후원이나 행운 없이도 수 세기 동안 스스로 잘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교사들의 그런 잘못된 대 실험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난 중동과 소아시아의 인종 말살이나 대규모 이민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br /><br />그뿐 아니라, 대 실험은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이 결국 대부분 정교회 배경의 신자들로 구성된 개신교 교회를 세워놓았지만, 이 서구화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갑자기 터키와 아랍 무슬림들 개종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무슬림들에게 불신과 고립을 당해왔기 때문이다.<br /><br />위의 내용이 본서의 본론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 시기를 되돌아 보면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네 시기를 다루는 각 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잘못된 것뿐 아니라, 올바르게 진행된 것들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저자는 이곳 저곳에 매우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사회를 섬겼던 인물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 Temple Gairdner(1873-1928)로, 그는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관한 문법서를 저술했다. 그러한 접근이 죠지 켈시 George Kelsey 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암만에 있는 켈시 언어 연구소 of Kelsey Language Institute 와 같은 것들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가드너는 또한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한 아랍어 대본을 써서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꾸란에서 훌륭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 교회의 가치 조차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가드너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1923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미주4) “이집트에서 영국 국교회의 주요 목표는 비기독교 대중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콥틱 그리스도인들이나, 개신교 교회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br /><br />Pikkert가 제시하는 대 실험에 관여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또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예는 루터 선교회 Lutheran Orient Mission Society’s (LOMS)가 쿠르드인들에게 했던 선교이다. 그 선교를 이끌었던 포썸 L. O. Fossum은 가드너처럼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무슬림 사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쿠르디스탄(터키, 이란, 이라크에 걸친 산악, 고원지대-역자 주) 선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41세에 죽음을 맞은 의사요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포썸이 이루어놓은 것은 놀라웠다. 큰 실패로 끝난 대 실험과는 사뭇 대조적이다.<br /><br />저자의 역사적 관찰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지적 받아야 할 점들도 있다. 편집에 신경을 좀 쓸 필요가 있다. 한 페이지에서 기본적인 사항인 문법 실수와 글자 오류를 둘 다 발견하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예를 들어 12쪽에서 Church Mission Society가 잘못된 약자인 CSM으로 표기되어 있고, Moslem World는 Moslim World 라고 잘못 쓰고 있다. 저자가 the “importance of intermission cooperation,”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어느 시대의 intermission(중간의 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교 단체들이나 그룹들 간의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br /><br />논리적인 면에서도 이슬람공포증(147-149쪽)에 대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1979년에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구에서 이슬람을 악마화하고 미국 출판사들이 어떻게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비방물들을 내 놓았는지에 대해 말한다(147쪽). 저자가 헌팅턴의 문명 충돌에 관한 이론이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br /><br />테러가 이슬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헌팅톤의 견해와 Pikkert가 제시하는 것이 매우 동일하다. 즉, 소위 충돌이라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적의를 조장하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대해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 두 사실을 함께 묶어놓을 수는 없다. 문명의 충돌이 있거나 아니면, 인공적으로 혹은 악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본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마지막 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결론 장에서 Pikkert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오늘날 근동 무슬림 선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넘어간다 (189쪽). 그의 권면은 그 장의 제목과 같이 교회 중심적인 신약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선교 사역은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저서 전체에서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가 비판했던 실패로 끝난 대 실험은 대부분 의료와 교육 연구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무슬림 배경의 모임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데 중동을 생각할 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br /><br />저자가 “신약의 영성이 New Testament spiritualit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중동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두 극단적인 견해를 피해왔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종교심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만 치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인 군자인 것처럼 그려놓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신약의 영성” 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세상에 신약의 위대한 선교사들처럼 되고 싶지 선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은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신약의 영성” 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행해야 하고 (행 2:46) 여자들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전 11:10)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기 나사렛에 있는 그리스 카톨릭 지역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Pikkert는 신약의 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중 하나로 “기독교 메시지를 분명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201쪽) 또한 “제자화와, 훈련, 책임 이양”(206쪽)에 대해서도 말한다. 분명히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쉬가 말하는 파라다임의 변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장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Pikkert의 저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선교지에 나가기 위해 훈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선교사 지망생이 많은 한국과 중국, 남아메리카에 이 책을 읽어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br /><br />이 책은 세속 역사의 관점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어 있는 고전 이슬람식 사고의 측면에서 역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이슬람 학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동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무슬림들이 흔히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단순히 선전하기 위해서나, 신화, 혹은 이단으로써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br /><br /><미주><br />1 이 말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역을 맡은 현대 중동의 형성에 대한 Fromkin’s 유명한 역사서 (Holt 2001)에 등장한다.<br />2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Daniel Yergin’s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Free Press 1993).<br />3 지금은 The Muslim World 로 불린다.<br />4 이 인용은 가드너의 경력에 관한 Matthew Rhodes 의 글 ‘Anglican Mission: A Case Study’ available online from the Henry Marty Center at www.martynmission.cam.ac.uk. 에서 가져온 것이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61790125220713561592009-02-21T23:57:00.000-08:002010-01-31T12:29:14.704-08:00중동의 개신교 선교사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가, 아니면 문화의 전파자들인가?서평 글쓴이: Duane Alexander Miller<br />책제목: Protestant Missions in the Middle East: Ambassadors to<br />Christ or Culture (WEC Canada, 2008), 226 pages.<br />책의 저자: Peter Pikkert<br /><br /><br /><br />Pikkert는 중동이나 터키에서 사역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중요한 책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재정을 쏟아부으면서도 중동과 터키에 개종자들이 드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한다. 먼저 그는 Samuel Huntington과 David Bosch의 이론에 근거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br /><br />Huntington은 그 유명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the World Order (Simon & Schuster 1998)의 저자이다. 그는 냉전시대 이후에 세계 분쟁의 주요 원인은 문명이 될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특별히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을 예상했다.<br /><br />필자는 파라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s)에 대한 Bosch의 의견을 빌어 선교 역사를 해석하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보쉬의 의견에 대한 주요 출처는 “변화하는 선교: 선교 이론에서 찾는 파라다임의 변화”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Orbis Books 1991.) 이다. 이 책은 중동과 소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카톨릭 선교 이외의 서구 선교 역사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카톨릭 선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br /><br />이 책의 1장부터 4장까지는 각 시대를 다루는 본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제 5장은 역사적 분석과 비판에서 다소 급격하게 방향을 돌려 신학과 현대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필자는 이 장이 이 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br /><br />지역를 중심으로 하는 Pikkert의 현대 역사 구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00-1918년까지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분해되는 시점이다. 혹은 데이빗 프롬킨 David Fromkin 이 말했듯이 모든 평화를 끝내는 평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1 두 번째 시기는 1946년까지로, 시리아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서기 직전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79년까지로, 아랍 민족주의와 석유의 강세로 몇 나라들이 급부상하는 시점이다.2 이 시기는 또한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형성되고, 교파와 구분된 운동이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시기는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정치적 이슬람이 약진하는 시기로써, 정치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자 폭력까지 동원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Pikkert는 그의 저술 당시 (2005년)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br /><br />이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연합군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패한 6일 전쟁이 일어난 1967년이 아니라 1979년인지를 묻고 싶을 것이다. 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많은 무슬림들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패배를 겪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와 같이 승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싼 반나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 같은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저자의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br /><br />시기 구분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1967년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싶어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자면, 60년대와 70년대는 범아랍주의와 공산주의 및 세속주의의 환상에서 점차 깨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1년이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한 서구의 개신교 선교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br /><br />Pikkert는 주로 The Moslem World3 and the annual report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로부터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와 일지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몇 인용들은 상당히 긴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좀 길긴 하지만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br />그렇다. 저자는 부정적이다. 그가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소위 대 실험 Great Experiment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1800년대 초에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지역 무슬림들에게 직접 바로 전도하는 것을 너무나 위험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대 실험으로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죽어가는 현지 교회의 (그것이 매로니안 교회든, 아르메니안이든, 그리스 정교회든, 콥틱이든 그 무엇이든지) 부흥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교회들은 서구 개신교 전도의 이미지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인 성상파괴와 개인주의라는 덫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 고아원, 진료소, 출판사, 병원들이 소위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Pikkert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지역 지도자들에게 미심쩍게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행동이 그들의 공동체를 너무 눈에 띠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후원이나 행운 없이도 수 세기 동안 스스로 잘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교사들의 그런 잘못된 대 실험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난 중동과 소아시아의 인종 말살이나 대규모 이민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br /><br />그뿐 아니라, 대 실험은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이 결국 대부분 정교회 배경의 신자들로 구성된 개신교 교회를 세워놓았지만, 이 서구화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갑자기 터키와 아랍 무슬림들 개종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무슬림들에게 불신과 고립을 당해왔기 때문이다.<br /><br />위의 내용이 본서의 본론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 시기를 되돌아 보면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네 시기를 다루는 각 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잘못된 것뿐 아니라, 올바르게 진행된 것들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저자는 이곳 저곳에 매우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사회를 섬겼던 인물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 Temple Gairdner(1873-1928)로, 그는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관한 문법서를 저술했다. 그러한 접근이 죠지 켈시 George Kelsey 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암만에 있는 켈시 언어 연구소 of Kelsey Language Institute 와 같은 것들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가드너는 또한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한 아랍어 대본을 써서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꾸란에서 훌륭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 교회의 가치 조차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가드너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1923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4 “이집트에서 영국 국교회의 주요 목표는 비기독교 대중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콥틱 그리스도인들이나, 개신교 교회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br /><br />Pikkert가 제시하는 대 실험에 관여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또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예는 루터 선교회 Lutheran Orient Mission Society’s (LOMS)가 쿠르드인들에게 했던 선교이다. 그 선교를 이끌었던 포썸 L. O. Fossum은 가드너처럼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무슬림 사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쿠르디스탄(터키, 이란, 이라크에 걸친 산악, 고원지대-역자 주) 선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41세에 죽음을 맞은 의사요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포썸이 이루어놓은 것은 놀라웠다. 큰 실패로 끝난 대 실험과는 사뭇 대조적이다.<br /><br />저자의 역사적 관찰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지적 받아야 할 점들도 있다. 편집에 신경을 좀 쓸 필요가 있다. 한 페이지에서 기본적인 사항인 문법 실수와 글자 오류를 둘 다 발견하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예를 들어 12쪽에서 Church Mission Society가 잘못된 약자인 CSM으로 표기되어 있고, Moslem World는 Moslim World 라고 잘못 쓰고 있다. 저자가 the “importance of intermission cooperation,”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어느 시대의 intermission(중간의 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교 단체들이나 그룹들 간의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br /><br />논리적인 면에서도 이슬람공포증(147-149쪽)에 대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1979년에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구에서 이슬람을 악마화하고 미국 출판사들이 어떻게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비방물들을 내 놓았는지에 대해 말한다(147쪽). 저자가 헌팅턴의 문명 충돌에 관한 이론이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br /><br />테러가 이슬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헌팅톤의 견해와 Pikkert가 제시하는 것이 매우 동일하다. 즉, 소위 충돌이라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적의를 조장하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대해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 두 사실을 함께 묶어놓을 수는 없다. 문명의 충돌이 있거나 아니면, 인공적으로 혹은 악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본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마지막 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결론 장에서 Pikkert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오늘날 근동 무슬림 선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넘어간다 (189쪽). 그의 권면은 그 장의 제목과 같이 교회 중심적인 신약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선교 사역은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저서 전체에서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가 비판했던 실패로 끝난 대 실험은 대부분 의료와 교육 연구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무슬림 배경의 모임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데 중동을 생각할 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br /><br />저자가 “신약의 영성이 New Testament spiritualit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중동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두 극단적인 견해를 피해왔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종교심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만 치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인 군자인 것처럼 그려놓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신약의 영성” 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세상에 신약의 위대한 선교사들처럼 되고 싶지 선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은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신약의 영성” 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행해야 하고 (행 2:46) 여자들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전 11:10)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기 나사렛에 있는 그리스 카톨릭 지역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Pikkert는 신약의 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중 하나로 “기독교 메시지를 분명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201쪽) 또한 “제자화와, 훈련, 책임 이양”(206쪽)에 대해서도 말한다. 분명히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쉬가 말하는 파라다임의 변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장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Pikkert의 저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선교지에 나가기 위해 훈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선교사 지망생이 많은 한국과 중국, 남아메리카에 이 책을 읽어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br /><br />이 책은 세속 역사의 관점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어 있는 고전 이슬람식 사고의 측면에서 역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이슬람 학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동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무슬림들이 흔히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단순히 선전하기 위해서나, 신화, 혹은 이단으로써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br /><br /><미주><br />1 이 말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역을 맡은 현대 중동의 형성에 대한 Fromkin’s 유명한 역사서 (Holt 2001)에 등장한다.<br />2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Daniel Yergin’s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Free Press 1993).<br />3 지금은 The Muslim World 로 불린다.<br />4 이 인용은 가드너의 경력에 관한 Matthew Rhodes 의 글 ‘Anglican Mission: A Case Study’ available online from the Henry Marty Center at www.martynmission.cam.ac.uk. 에서 가져온 것이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88851613205311450302009-02-08T01:17:00.000-08:002009-02-24T22:37:26.622-08:00베두윈의 화해 (중재) 방법원제: Reconciliation among the Bedouin<br /><br />글쓴이: Sarang Kim<br /><br />1. 베두윈 사회,역사 그리고 전통<br /><br />1.1 베두윈 문화의 중요성<br /><br />베두윈 족은 사막에 거주하는 아랍 민족이다. 그들의 조상은 선사 시대부터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구약의 창세기에 언급된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인 셈족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 name="_ednref1">[i]</a> 베두윈들의 기원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욕단 (셈의 아들: 아랍인들은 예맨 의 신화적 영웅인 카흐탄 Kahtan으로 부른다)과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그 수가 늘어 부족을 형성하고 부족간 연맹체의 구조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 name="_ednref2">[ii]</a> 비록 그들이 사막에서 이곳 저곳을 떠도는 유목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아랍어를 쓰는 귀족 출신의 배경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이슬람교가 아랍에 확립(7th century) 되기 이전부터 베두윈들의 언어는 아랍어였고, 그들은 움마야드 왕조 당시의 귀족 이였다 (the Umayyad, 661-750). 그러므로 당시 일부 움마야드 왕가의 상류층 자제들은 아랍어를 배우기 위하여 사막에 찾아와서 그들과 함께 살기도 했으며 또한 중기 시대에도 문법학자들과 이슬람 법학자들이 베두윈 들을 찾아와 그들의 선례를 중시하여 법적 판결을 행하고 그들의 어법에 맞춰 문법규칙을 정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 name="_ednref3">[iii]</a> 그러므로 베두윈 들의 전통과 가치관들은 여전히 아랍인들 가운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베두윈들 역시도 그 자신들의 귀족 출생과 아랍 문화의 뿌리가 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br /><br />실제 베두윈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화해(중재)의 방법들을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늘날 베두윈들은 아라비아, 걸프, 네게브와 북 아프리카 시나이 반도 등에 널리 퍼져서 살고 있으며 대부분 사막뿐만이 아니라 도시 등에도 정착해서 살고 있고 문명화된 현대 도시 베두윈들도 많은 수를 차지한다. 게다가 연대감이 강한 부족의 구조하에서, 지역들마다 각각의 부족과 씨족들에 따라 다양한 화해의 규율과 방법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다양한 규율과 방법들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가 사람들을 중재하는 제 3자라는 공통적인 필요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br /><br />본 고는 베두윈 부족간에 행해지고 있는 화해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그들 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베두윈 뿐만 아니라 다른 아랍인들과의 관계에서도 한층 더 다가가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br /><br /><br />1.2 사회 구조와 전통의 영향들<br /><br />베두윈들 간에 행해지는 화해의 방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부족간의 구조와 그 연대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랍 국가들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아랍 반도 전역을 거쳐 아랍인들은 수 많은 지역부족과 씨족들로 나눠져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정치적 조직이나 이념이 아닌, 같은 전통적 정서를 나누는, 혈연 공동체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4" name="_ednref4">[iv]</a> 일반적으로, 부족은 수 많은 단위의 씨족들로 형성되어 있으며, 씨족은 더 나아가 많은 가문(가족)들로 나뉘어져 있다. 영어의 개념으로 흔히 혈통, 혹은 가계 (lineages)들을 일컬으며 보통 5대로 형성되어 있는 부계 사회이다 (great-great-grand father). 같은 혈통을 갖는 가계는 베두윈 삶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단위이다. 이 단위는 적어도 1년 중 한 때는 함께 무리 지어 텐트를 치며 사는 목축 경제의 기본 단위가 되기도 한다. 이 다양한 가계 혹은 가문의 리더들은 씨족 의회를 구성한다. 이렇게 강하게 연결된 각각의 가문 그룹들이 베두윈 친족들인 것이다. 한 사람의 베두윈의 삶은 그의 친족들을, 또한 그의 친족들은 그를 의지하며 서로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5" name="_ednref5">[v]</a><br /><br />베두윈들의 부족이나 씨족 심지어 친족에 대한 가치는 일반적으로 비 아랍 세계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며 강력하다. 그러므로 눈에 보여지는 많은 베두윈들의 성격이나 특징들은 이 부족 구조와 그 유대감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베두윈 사회에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인 명예는 그룹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부족과 씨족에 대한 전적인 충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br /><br />비록 이슬람교가 아랍인들의 공식적인 종교이기는 하지만, 베두윈들 에게는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내려오는, 그들만의 전통과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사막에는 모스크들도 많지 않았었고 공식적으로 학교 교육( 요르단에서는 베두윈들에 대한 공교육이 약 3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을 받기 이전까지는 이슬람의 교리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베두윈들의 전통은 코란의 가르침보다도 강력할 수 있었으며 아직도 베두윈들 사이에는 민속 신앙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br /><br />베두윈들의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여전히 어느 정도의 제한된 주 정부 통치권 밖에서의 삶의 방식 때문에, 그들은 그들 부족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자치적인 사회적 기구(부족에서 추방한다든지 혹은 피 값의 징수라든지 범죄에 대한 복수 집행 등을 할 수 있는 기능)를 가지고 있다. 아랍인들에게는 권리(정의)보다는 관습(전통)이 더 강력하며 실제로 관습(전통)은 도덕과 종교 면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정의인 것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6" name="_ednref6">[vi]</a><br /><br />베두윈 들에게는 세가지 법이 있다: 베두윈 법, 이슬람 법(샤리아) 그리고 일반 법(국가 법). 부족과 씨족의 쉐이크(장로)들은 분쟁의 경우에서 재판관으로서 행사한다. 분쟁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할 경우 부족 안에서 세습적으로 내려오는 재판관들도 또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좋은 평판을 가진 두 사람의 증인들이 죄를 인정하는데 요구 된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7" name="_ednref7">[vii]</a> 비록 베두윈 법이 공식적인 법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다스리는 가장 강력한 법으로 행사되고 있다.<br /><br /><br />1.3 베두윈 삶의 특성<br /><br />베두윈들의 화해 과정은 공식적인 절차라기 보다는 오히려 가치관의 관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그들의 문화적 가치와 도덕관들이 이 화해 과정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 깊게 작용하기 때문이다.<br /><br />사막에서의 거친 삶 때문에 베두윈들은 독특하고 다양한 특성과 삶의 양식들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호전성과 충성도가 뛰어난 민족으로 유명하다. 사막으로부터 삶에 필요한 충분한 자원을 얻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다른 부족을 습격하여 재물을 얻는 것이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허용되었다. 상인들과 경작자(개발자)들은 그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카와스(khawas) 라는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8" name="_ednref8">[viii]</a> 그러나 베두윈들의 습격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그들이 다른 유목 부족으로부터 여자들을 잡아 왔을 때 그들은 여자들에게 어떤 폭력이나 성적 희롱을 행하지 않고 단지 노예로만 삼았을 뿐 이였다. 그들에게 타 부족을 습격한다는 것은 사막의 지루하고도 단순한 삶에 있어서, 생명의 손실 없이 노예와 음식과 교통 수단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수단 이였으며 일종의 삶에 활력소를 주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랍 선교의 선구자인 즈베머(Samuel Zewemer)는 이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br /><br />“습격이란 유목민들 사이에 정교한 예술이다; 도덕성이 놓은 아랍의 습격자들은 정직하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규율적이다. 그는 그의 희생자들을 밤에 습격하지 않으며 갑작스런 침략에 의한 피 흘림을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 또한 만약 그의 습격이 실패한다면 그는 가능한 첫 번째 텐트에 들어가 그 텐트 주인의 명예에 호소하여 보호를 요청할 수 있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9" name="_ednref9">[ix]</a><br /><br />그러나 피 흘림에 관해서 만큼은 그들은 매우 엄격했다. 과거 한 사람의 생명은 씨족의 힘 이였다. 씨족의 세력은 재산으로서가 아닌 얼마나 많은 전사를 가졌는가에 의해 평가되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두 눈을 잃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과 동등하게 여겨졌다. 두 눈을 잃은 사람은 전사로서 전투에 나서거나 낙타를 몰거나 경작자로서 소용이 없기에 부족의 관점에서는 먹여 살려야 하는 쓸모 없는 골치거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한 생명에 해당하는 피 값이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요구 되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0" name="_ednref10">[x]</a><br /><br />손님에 대한 환대 역시 가장 기본적이며 규례<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1" name="_ednref11">[xi]</a>이며 또한 사막의 고초와 위험에 의하여 배어난 베두윈 특성중의 하나이다. 커피는 오늘날도 여전히 손님에 대한 주인의 환대의 표시이며 동시에 친구인지 적인지를 분간하는 방법 중 하나로서 제공된다. 명예의 관례 역시 베두윈들의 화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개인 뿐 만이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유지하는 명예(Sharaf)에 대한 관례는 아주 엄격하다. 가족 혹은 부족의 전체 명성의 유지와 손실은 세대와 세대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명예는 가족이나 씨족의 유착 (아사비야Asabiyyah)과 관련이 있다.‘아사비야’란 씨족이나 부족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끝이 없는 충성을 의미한다. 아랍 역사가인 이븐 칼둔(14세기) 은‘아사비야’란 역사를 움직이는 에너지이며 인류 사회의 기장 기본적인 결속이라고 말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2" name="_ednref12">[xii]</a><br /><br />부족간 습격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자연적 상황에 의하여, 가족의 부와 운명이 불확실 했던 그 이전 때부터, 베두윈들은 모든 것이 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숙명론을 발전시켰다. 오직 유일하게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품위와 명예를 지키는 것 이였다. 유목생활의 환경으로 말미암아 궁핍하게 될지라도 베두윈들은 부를 가진 다른 어떤 자들보다도 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가진 물질적 소유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성과 행동에 의해 평가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3" name="_ednref13">[xiii]</a><br /><br />물질적 부나 소유보다 명예에 대한 높은 평가는 베두윈들로 하여금 자신의 명예를 화해 조정의 과정 속에서도 소중하게 지키게 한다. 만약 누군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면 설령 그의 마음속에서는 상대방을 용서했다 할지라도 그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야만 한다. 실제로 베두윈들의 화해 조정 과정을 보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빨리 화해를 맺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과정들을 통하여 올바로 그들의 명예를 되찾는 일없이, 신속한 화해를 맺는 것은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화해를 맺는 것 그 자체 보다 화해의 과정가운데 그들의 명예를 바르게 되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br /><br /><br />2. 분쟁의 종류들과 화해(조정)의 방법들<br /><br />확대 가족은 아랍사회의 매우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아랍 사회는 개인주의가 아닌 전체 씨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베두윈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의 부족과 강한 결속력이 있으며, 같은 부족의 사람들은 그에게 있어서 더 큰 가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확대 가족은 위기의 때나 특별한 때에 함께한다. 만약 부족이나 가족의 구성원 중 누군가가 곤란에 처한다면 전체 가족들은 그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동원할 것이다.<br /><br /><br />2.1 부족들 간의 분쟁<br /><br />만약 어떤 사람이 타 부족의 누군가와 분쟁이 생긴다면 이것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두 부족간의 문제로 확대 된다. 각 부족은 각각의 서열 체계와 문제들을 판결할 수 있는 조직체를 가진 수많은 씨족들로 구성 되어 있다. 만약 씨족이나 부족 내부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각 부족의 쉐이크나 판결자들이 이것을 다루게 된다. 그러나 부족간의 분쟁이 생긴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좋은 평판을 가진 제 3 부족에서의 쉐이크나 판결자 (al-Qadir)가 중재자로 요구 되어지고 그가 두 부족간의 화해 조정 과정을 이끌게 된다.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각 부족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가 없다. 조정을 이루는 쉐이크가 두 부족을 방문하며 각 부족을 대표하는 쉐이크나 어른들과 오랜 협상을 거치며 그 후 손실(피해)에 대한 대가를 결정하게 된다. 두 부족간에 제 3의 중재자가 필요한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유명한 일화가 있다.<br /><br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 부족들간에 습격이 일어났고, 한 사람이 살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 후 두 부족간에는 피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원칙아래 반드시 한 사람의 동일한 피 흘림이 요구되었다. 살인을 행한 부족의 쉐이크는 자원하여 화해를 맺기 위해 상대 부족을 방문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여 입을 열기도 전 길 한가운데서 상대 부족에 의하여 총격을 당하여 죽고 말았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4" name="_ednref14">[xiv]</a><br /><br />쉐이크는 다양하게 적용되는 호칭으로 학교 선생님이나 모스크의 관료들 혹은 영어의 “sir”에 해당하는, 나이들은 낯선 이를 부를 때도 사용된다. 그러나 사막에서는 일반적으로 공통체를 대표하는 부족 혹은 가족의 수장 등을 의미한다. 이상적인 쉐이크란 모든 법 집행자나 행정관 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들 부족의 번영은 그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5" name="_ednref15">[xv]</a> 오늘날 쉐이크의 중요성은 부족들의 구성원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자치 지구의 정부 관료들과의 협상을 잘 이루어내는 능력에 달려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6" name="_ednref16">[xvi]</a><br /><br /><br />2.2 직계 혹은 확대 가족간의 분쟁<br /><br />씨족이나 친족간에 분쟁이 있을 때는, 일반적으로 그 씨족의 쉐이크나 노인들이 중재자가 된다. 분쟁의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가족 그룹들을 기본단위로 하는 연속된 공의회들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결정이 내려지며 때로는 씨족들의 공의회를 거쳐 또한 부족의 자체 공의회까지 가기도 한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7" name="_ednref17">[xvii]</a> 가족간의 분쟁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손 위 남자 형제가 중재를 이끄며, 연장자를 공경하는 문화적 영향으로, 여성 역시도 나이가 들게 되면 그 위치가 부상하여,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한다.<br /><br />상속 같은 가족 구성원내의 남자와 여자 형제들간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베두윈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큰 오빠(남자 동생)가 여성의 후견인이 된다. 과거에 여성은 법적인 위치가 없었기에 오직 아버지나 남자 형제의 그늘 속에서만 존재하였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8" name="_ednref18">[xviii]</a> 그러나 비단 과거뿐만이 아닌 오늘날에도 여성들은 전통 관습 속에서 자신의 법적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는 여전히 어려움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야르묵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인 무함마드 슈나크는 베두윈 여성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아랍여성들까지 동일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상속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br /><br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상속권리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아버지의 재산에 대하여, 마을에서 받아들여지는 일반적인 관습처럼, 자신들에게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 권리는 전적으로 남자 형제들이나 혹은 부계 쪽의 남자 친척들에게만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 여성들 중 하나가 그녀의 권리를 요구하고 그녀의 남자형제들과 상속권에 대하여 논쟁한다면 그녀는‘여자는 그녀의 부모의 집에서 결혼할 때까지 머무는 손님이다.’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즉 딸은 아버지의 상속에 대한 권리는 없으며 단지 손님과도 같은 환대를 받을 자격만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19" name="_ednref19">[xix]</a><br /><br /><br />2.3 배우자들 간의 분쟁<br /><br />베두윈들은 일처다부제의 결혼제도를 갖고 있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날 베두윈들 가운데는 두 명의 부인이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부 부족에서는 주간 중에는 시내에서 일을 하며 주말에는 사막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보통 이런 경우 각각의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0" name="_ednref20">[xx]</a> 여자들은 보통 사촌과 결혼하며 여성이 결혼 할 연령에 도달하면 양가의 부모들에 의하여 적합한 신랑감이 결정된다. 이러한 친족간의 결혼과 엄격한 관례들은 그들 가문의 명예를 지키며 더욱 안정된 부족간 결속을 원하는 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베두윈들 사이에서 이혼은 일반적인 일상사이며 당사자들에게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양쪽 모두 그들의 평판에 손실 없이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다. 이혼을 원하는 남성은 다른 증인들 앞에서 단지 그의 의지만을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여성은 결혼 당시 받았던 지참금을 지킬 수 가 있다. 반면 아내가 남편과 이혼을 원한다면 남편이 했던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단지 남편을 떠나서 아버지의 텐트로 돌아오면 된다. 만약 여성이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원한다면 남편은 곧 이혼에 응하게 되고 지참금의 반환이 협상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1" name="_ednref21">[xxi]</a><br /><br />전통적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연대감보다도 아버지와 딸 혹은 형제 자매간의연대감이 더 강한 사회가 베두인 사회이다. 윌리엄 랭체스터( William Lancaster)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br /><br />“베두윈 여성은 누구 누구의 딸 누구로 알려지며 그 것이 그녀의 진정한<br />정체성이다. 그녀는 누구의 아내로서나 누구의 엄마로서 그녀의 정체성을<br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와 그녀의 남편 혹은 아들은 법률적으로는<br />전적으로 다른 그룹에 속하며 심지어 부족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br />법적 책임은 아버지나 남자 형제들 혹은 부족의 남성 친척에게 있는<br />것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2" name="_ednref22">[xxii]</a><br /><br />아내와 남편간의 문제가 있는 경우 흔히 부인의 큰 오빠 혹은 동생이 중재자가 된다. 문제가 클 경우에는 베두윈의 법과 전통을 잘 아는 쉐이크 혹은 종교적인 법률을 잘 아는 부족은 판단관 (qaadi) 혹은 정부의 관료들 (muktar)이 회의를 소집하여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여자는 그 모임에 참여할 수 없고 그녀의 오빠(남동생)나 아버지가 참석한다. 때로 법정까지 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에도 그녀는 아버지나 오빠(남 동생)를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br /><br /><br />3. 화해 언약들 (계약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3" name="_ednref23">[xxiii]</a><br /><br /><br />3.1 커피 언약<br /><br />베두윈들은 어떤 손님이라도 신이 보낸 손님으로 여기고 따뜻하게 맞이한다. 커피는 이러한 환대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베두윈들은 언제나 그의 고귀한 손님을 환대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4" name="_ednref24">[xxiv]</a> 방문을 하자마자 접대 받는 커피는 평화의 언약을 맺는 것을 의미한다. 세 잔의 커피가 접대되는데 각 잔마다 의미를 갖고 있다: 환대 (Daif), 번영(Keif) 그리고 어떠한 문제나 사고에서의 보호 (Sayf).<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5" name="_ednref25">[xxv]</a> 그러나 양쪽 당사자들 간에 문제가 있는 경우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손님은 보통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커피를 접대하고 마시는 것은 손님과 주인간에 평화를 주고 받는 표시인 것이다.<br /><br /><br />3.2 소금과 만사프( mansaf- 아랍 전통 양고기 정식)언약<br /><br />비록 화해가 성사되었다 할지라도 만약 주인이 소금이 들어 있지 않는 빵이나 음식을 대접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화해 후에 그들은 소금이 들어간 빵과 만사프를 먹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실상 만사프라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보다 동물을 죽여 피를 흘린다는 것에 더욱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러한 동물을 죽이는 절차는 일종의 속죄를 의미하며 피의 복수에 대한 보상으로 또 다른 피가 흘려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언약을 잘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6" name="_ednref26">[xxvi]</a> 1929년경 마프락의 베니 핫산 과 제라쉬의 파우리라는 요르단 두 부족 간에 피 흘림의 분쟁이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싸움이 계속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화해를 위한 여러 모임들이 있었으나 언제나 소금없는 빵과 만사프만이 접대될 뿐이었다. 즉 화해가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죽고 죽이는 것만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핫산 왕자(훗날 후세인왕의 동생)는 이것을 알게 되고 중재자로 나설 것을 결심하게 된다. 화해를 주선하는 모임에서 그는 그녀의 어린 딸을 데리고 화해를 요청하게 된다. 그는 양쪽 장로들에게 자신의 딸을 피를 취할 것을 제안한다. 두 부족의 장로들은 중재자로서의 왕자의 결단에 깊게 감동을 받고 결국 화해를 맺게 된다.그 딸의 피 흘림 없이 그들은 소금이 들어간 빵을 함께 나누어 먹은 것이다.<br /><br />사막 지역에서 음식은 매우 귀한 것으로 대부분의 베두윈들은 그들은 삶에서 때로 배고픔을 경험한다. 고기는 오직 결혼 향연이나 기념적인 행사 혹은 손님들이 있는 경우에만 먹을 수 있으며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7" name="_ednref27">[xxvii]</a>, 빵은 아주 귀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소금이 들어간 빵과 만사프를 함께 나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들이 마음을 열고 화해가 맺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br /><br /><br />3.3 피의 언약- 피 값(blood money)<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8" name="_ednref28">[xxviii]</a><br /><br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암몬 족속의 후손들로서 베두윈들은 생명을 그 어느 것보다도 귀하게 여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29" name="_ednref29">[xxix]</a>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죽은 자의 가족에게 생명을 빚졌다는 것이 고대 아랍사회의 법률이었다. 피의 복수에 대한 법은 코란에서도 인정되어있고 아라비아의 어느 지역에서도 신성한 권리로 여겨진다. 아랍인에게 있어서는 피 흘림에 대하여 어떤 마땅한 댓가나 복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법은 계속 되는 분쟁이나 피 흘림을 막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아랍의 타운이나 사막에서는 그 어떤 큰 몸 싸움 없이 몇 시간 동안 계속 말다툼만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맞부딪쳐 싸우기를 겁내기 때문이 아니라, 피 흘림과 또 그에 따라 야기되는 피의 복수를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0" name="_ednref30">[xxx]</a><br /><br />피 흘림의 복수에 대한 법은 누구든지 피를 흘린 사람은 그 죽은 자의 가족에게 피에 대한 대가로 피 값이나 혹은 생명을 빚졌다는 것이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1" name="_ednref31">[xxxi]</a> 그 가족들은 살인자의 생명을 요청하거나<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2" name="_ednref32">[xxxii]</a>,혹은 그와 관련된 5대를 포함하는 가족에 대한 생명 값을 주장할 수 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3" name="_ednref33">[xxxiii]</a> 이 “ 5대의 그룹”은 그의 부계 쪽의 5대를 모두 포함한다. 분노에 가득 찬 처음 5일 동안 생명이 취해지지 않았다면 일반적으로 피 값의 거래가 받아들여진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4" name="_ednref34">[xxxiv]</a> 때때로 공식적인 언약 문서가 오고 가거나 (sulha)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5" name="_ednref35">[xxxv]</a> 혹은 화해 후의 특별한 예식등이 거해지기도 한다. 게투르드 벨은 그 화해 예식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br /><br />“아랍인들이 그들의 피의 분쟁을 끝내려고 할 때 두 원수들은 상해자의<br />텐트 앞에 함께 선다. 그 텐트의 주인은 그의 칼집에서 칼을 빼어 들고<br />남쪽으로 돌아선 후 마당에 원을 그리며 신을 부른다. 그 후 그는 텐트의<br />자락을 베어내어 화로에서 한 줌의 재로 만든 후 원안으로 던지고<br />일곱 번 그의 칼로 선을 내려친다. 그 후 가해자가 그 원안에 들어가고<br />그의 적의 친척 중 한 명이 크게 외친다.‘나는 나에게 죄를 범한 살인자를 취합니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6" name="_ednref36">[xxxvi]</a><br /><br />그러나 오늘날 베두윈들은 현대 문명에 많이 노출되었고 또한 도시에 거주하는 베두윈들도 많다. 그러므로 중대한 범죄가 아닌 이상은 흔히들 사과의 표시로 선물을 주기도 한다. 남자들은 낙타나 칼 혹은 새 옷들을 여자들은 보석이나 옷 혹은 음식 등을 요리해 준다.<br /><br /><br />4. 제 삼자의 필요<br /><br />베두윈들의 화해 과정에는, 어떤 수준의 화해(조정)에서도 일반적으로 제 3자의 개입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족간의 분쟁뿐만이 아닌 개인의 분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제 3자가 필요한지에 대한 그 배경을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랜 기간 동안 전통을 통하여 형성 된 것 이기 때문이다.<br /><br />성공적인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조건들이 있는데 제 3자는 반드시 양쪽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자여야만 한다.<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37" name="_ednref37">[xxxvii]</a> 중재자는 또한 높은 도덕적 명성을 가져야 하며 양쪽 부족만이 아닌 그 지역에서도 존경 받는 자여야 한다. 그는 공정한 자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자여야 하고 또한 양쪽 부족으로부터 어떤 원망이나 원성이 없는 자여야 한다. 그러므로 중재자는 그저 제 3 부족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이다.<br /><br />베두윈들은 명예를 높이 평가한다. 그들이 직접 조정 과정에 참여한다면, 적들과 직접 대화한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 3자를 가졌을 때 그들은 어떤 명예의 손실이나 또 다른 분쟁 없이 정확히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형태로든 그들이 명예를 손실했다면 그들은 다른 부족들(제 3 자들)앞에서 그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 3자라는 증인을 가졌을 때 이것은 더욱 유익하게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제 3자는 중재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명예를 회복한 것에 대한 증인도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제 3자는 또한 두 부족간의 또 다른 분쟁을 막을 수 있으며 그 어떤 손실 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br /><br />5. 전도적 제안<br /><br />다른 무슬림들과 같이 베두윈들은 죄를 행위적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과 종교적 의무를 행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선행이나 악행을 헤아리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과 우리간의 관계라는 면을 더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지 죄를 저지른 것뿐 만이 아니라 죄인이 된 것이다. 우리의 속 사람은 이미 더럽혀 졌으며 온전하지 않다.<br /><br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피의 복수에 대한 전통으로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되며 제 3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단 피가 흘려졌다면 이것은 반드시 또 다른 피로만 배상 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피 값(돈)으로 지불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는 그 어떤 다른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죄에 대한 대가로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망 (롬 6:23, 히 9:27)<br /><br />베두윈들에게는 두 부족간의 관계에서 아무런 죄책이 없는 제 3 부족의 쉐이크만이 평화 협정을 이룰 수 있다. 아무 죄책이 없는 자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전통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제 3 자 쉐이크로서 베두윈들에게 강조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 하나의 죄도 없이 완전한 삶을 사신 분이다.(고후 5:21).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재자로 나서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재자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한다면 베두윈들에게 있어 이해하기에 쉬운 접촉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br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 name="_edn1">[i]</a> Alan Keohane, Bedouin, (London, kyle Cathie limt, 1994), p.9.<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 name="_edn2">[ii]</a> Ibid.p.16<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 name="_edn3">[iii]</a> 공일주, 아랍문화의 이해, (서울: 대한 출판사, 1996), pp.247-250.<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4" name="_edn4">[iv]</a> S.M. Zwemer. Arabia: The Cradle of Islam, (USA: The caxton press, 1900), p.159.<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5" name="_edn5">[v]</a> Shirley Kay, The Bedouin, (USA: Crane, Russak & company, 1978), p.78.<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6" name="_edn6">[vi]</a> Samuel Ives Curtiss, Primitive Semitic Religion Today,(UK:London, 1902), p.65<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7" name="_edn7">[vii]</a> Shirley Kay, p.80.<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8" name="_edn8">[viii]</a> Alan Keohane, p.10.<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9" name="_edn9">[ix]</a> S. M. Zwemer, p.264.<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0" name="_edn10">[x]</a> Ibid.<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1" name="_edn11">[xi]</a> Shirley Kay, p.19.<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2" name="_edn12">[xii]</a> 공일주, p.265.<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3" name="_edn13">[xiii]</a> Alan Keohane, p.70.<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4" name="_edn14">[xiv]</a> S. M. Zwemer, p.265.<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5" name="_edn15">[xv]</a> Austine Kennett, Bedouin Justic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5), p.145.<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6" name="_edn16">[xvi]</a> Shirley Kay, p.80.<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7" name="_edn17">[xvii]</a> Ibid., p.79.<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8" name="_edn18">[xviii]</a> William Lancaster, The Rawala Bedouin Today, (USA: Waveland, 1997), p.45.<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1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19" name="_edn19">[xix]</a> Mohammed Shunnaq, Women and the Social Reality behind the process of inheritance: An Anthropological Study of a Society in Northern Jordan, (Jordan; Department of Anthropology Institute of Archeology and Anthropology, 1995), p.6.<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0" name="_edn20">[xx]</a> 사막의 텐트를 방문하다 보면 나이들은 베두윈 여성 혼자 거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남편은 시내에서 젊은 부인과 살고 있고 그녀의 자녀들 역시 시내에서 또 다른 어머니의 집에 거하면서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기 때문이다.<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1" name="_edn21">[xxi]</a> Mohammed Shunnaq, p.108.<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2" name="_edn22">[xxii]</a> William Lancaster, p.58.<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3" name="_edn23">[xxiii]</a> 요르단의 선교 병원 창설자와 행정 담당자와의 인터뷰(저자가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음) 07.07.2008<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4" name="_edn24">[xxiv]</a> Gerturde Bell, Syria:The Desert and the Sown,(UK: London, 1908),p.33.<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5" name="_edn25">[xxv]</a> 공일주, 아랍문명의 이해, (서울: 예영, 2006), p.189.<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6" name="_edn26">[xxvi]</a> A.C와의 인터뷰(저자가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음)<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7" name="_edn27">[xxvii]</a> <a href="http://kcm.co.kr/">http://kcm.co.kr/</a> 11.2008<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8"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8" name="_edn28">[xxviii]</a> 피 값으로서의 시나이 반도에서 한 사람의 생명 값은 낙타 41마리에 해당되며 여성의 경우에는 남자에 의해 죽었는가 여자에 의해 죽었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만약 여자가 죽인 것이라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동등한 힘이 있었던 결로 추정되어 일반적인 피 값의 낙타 41마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남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면 일반적 피 값의 4배가 요구된다. - Austine Kennett, pp.131-133.<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29"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29" name="_edn29">[xxix]</a> 생명을 중시하는 영향으로 흔히 사막에서의 자살의 경우는 도시보다도 훨씬 적은 편이다.- E. H. Palmer, Desert of the Exodus, (UK: Cambridge university, 1871), p.80.<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0"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0" name="_edn30">[xxx]</a> S. M. Zwemer, p.265.<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1"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1" name="_edn31">[xxxi]</a> Claude Reignier Conder, Heth and Moab, (UK:London, 1883), p.318.<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2"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2" name="_edn32">[xxxii]</a> William Charles Maughan, Alps of Arabia, (UK:London, 1875, reprint 2005), p.185.<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3"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3" name="_edn33">[xxxiii]</a> Numbers 1<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4"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4" name="_edn34">[xxxiv]</a> Shirley Kay, p.79.<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5"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5" name="_edn35">[xxxv]</a> Joseph Ginat, Blood Disputes among Bedouin and rural Arabs in Israel,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1987), p.34.<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6"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6" name="_edn36">[xxxvi]</a> Gertude Bell, p.42.<br /><a title="" style="mso-endnote-id: edn37" href="http://www.blogger.com/post-create.g?blogID=4878590448716248977#_ednref37" name="_edn37">[xxxvii]</a> Joseph Ginat, p.31.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0tag:blogger.com,1999:blog-4878590448716248977.post-43809947363654138552009-01-11T11:49:00.000-08:002009-01-14T12:12:11.158-08:00이집트의 수피즘: 카이로의 사당 문화원제: <a href="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content/view/121/38/">Sufism in Egypt: The Shrine Culture of Cairo </a><br /><br />Sophia Kim<br /><br /><strong>들어가는 말<br /></strong>흔히 이슬람을 율법적인 종교라고 말한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무슬림들에게 남은 것은 거룩한 책 꾸란과, 예언자의 언행록인 하디스이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예언자였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더 이상 예언자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무슬림들은 마지막 예언자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려고 노력한다. 전철에 타면 하디스에 나오는 ‘탈 것에 탈 때 하는 두아에 دعاء الركوب’ 를 암송한다. 모스크 문에는 모스크에 들어갈 때 하는 두아에와 모스크에서 나올 때 하는 두아에(دعاء دخول المسجد & دعاء الخروج من المسجد)가 붙어있다. 라마단 동안 모스크 주변을 걷다보면 작은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쌓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언자가 음식을 먹은 후 이를 쑤셨다고 하는데서 기원한 것이다. 또한 라마단에 해가 진 후 예언자가 대추야자를 먹는 것으로 금식을 깨었다고 해서 라마단 달 저녁 무슬림들이 금식을 깰 시간이 되면 대추야자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예언자의 말과 행동에서 유래한 풍습들은 많이 있다.<br />풍습뿐 아니라 건물, 모스크의 문양 등에서도 예언자의 언행에서 유래한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무함마드가 가장 칭송할 만한 자비로운 행동으로 꼽은 두 가지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것과 무지한 자에게 종교를 알려주는 것이었다는 점에 기인하여 이집트에는 싸빌(سبيل, 길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식수를 모아놓은 건물) 쿠탑(كتاب, 꾸란 학교)이 유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br /><br />하지만 아무리 예언자의 언행을 따라 해도 예언자는 죽은 사람이고, 남아있는 것은 문자들뿐이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창조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깨닫는다거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잘 깨닫고 있지 못하지만 문자만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는 커다란 빈 공간이 있다. 영적인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br /><br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기도를 듣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느냐고 물으면 인간을 만드시고 귀를 만드신 분이 왜 기도를 듣지 못하시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그들의 기도는 올라가는 한쪽 방향만 열려 있는 기도이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기도보다는 어떤 일을 해결받기 위한 기도일 수밖에 없다. 일이 잘 해결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이다. 함두릴래 الحمد لله<br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의 이 말은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다.<br /><br />영적인 공백을 채워주지 못하는 종교는 오래 가기 힘들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갈급함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이슬람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은 후 천국에 가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무슬림이기만 하면 천국에 가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나쁜 무슬림이라도 정해진 기간 동안 지옥에서 벌을 받고 나면 결국은 천국에 가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슬람을 떠나기 힘들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갈급함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br /><br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수피즘이다.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은 이슬람의 영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수피즘을 이슬람의 영성이라고 말한다. 이 글에서는 수피즘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자 개념, 사람들이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는 실제적인 공간이 되는 사당(마깜 مقام)이 하는 역할과 그 곳을 찾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수피즘은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수피즘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이집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실제적인 공간과 사람들을 언급하기 위해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br /><br /><strong>1) 수피즘(앗타사우프, التصوف)이란?<br /></strong>수피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움마이야드 왕조가 세계 정복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 이러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세속화 되어가는 세상을 경계하며 지옥의 공포를 외치고 다녔던 경건한 신자들에게서 수피즘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수피<br />صوفى라는 이름도 이들이 입고 다녔던 어두운 색깔의 양모 옷 수프 صوف에서 그 유래를 찾는 학자들이 많다.<br /><br />이에 반해 이슬람의 영성은 예언자 무함마드시기부터 존재해 왔으며, 드러나지 않은 채 무함마드 사후에도 계속해서 지속되고 풍성해져 가다가 나중에 수피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파즐루 라흐만은 예언자 무함마드는 알라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신비적인 알라의 임재를 이미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한 그의 영성은 강력한 종교적, 윤리적 사회의 건설을 통해 역사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마틴 링은 수피즘이 곧 이슬람이며, 이슬람의 참 영성은 선택받은 수피들을 통해 이어져 왔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첫 수피 스승 (쉐이크 شيخ)이었으며 모든 영성을 지닌 자로서 이후의 다양한 영성을 지닌 모든 수피들의 영적 스승이요 기원이 된다.<br /><br />이와 같이 수피즘의 기원이 예언자 무함마드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수피즘의 정통성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다. 그 중 가장 크고 분명한 이유는 수피즘이 추구하는 바가 정통 이슬람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수피들이 추구하는 것은 알라로부터 직접적으로 얻게 되는 지식과 알라와의 하나됨이다. 이는 화나 فناء(소멸)와 바까 بقاء (머무름)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화나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남’, 바까는 자신 안에서 또는 신과 함께 머묾으로써 진실한 ‘나’ 곧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바까의 상태는 수피의 기본적인 가르침인 ‘세상의 본질은 신’이라는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은 그 본질이 신의 현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까의 상태에서 신은 수피에게 존재하고 그를 통해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수피는 신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신의 대리자로서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화나와 바까의 상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육신(훌룰 حلول)과는 현저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화나의 상태는 성육신이라기보다는 신의 임재 앞에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알라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정통 이슬람은 수피즘의 이러한 이론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으며, 이는 꾸란과 하디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외부의 영향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br /><br />더 나아가 9세기 후반에 주요 논쟁점으로 등장했던 성자 개념은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성자라는 특별한 계층을 대두시킴으로써 알라와 인간 사이에 중재자 개념을 용납하지 않는 울라마(علماء이슬람법학자들)와 더욱 첨예한 대립을 가져왔다. 수피즘은 무함마드 사후 더 이상 예언자를 기대할 수 없는 이슬람에서, 예언자의 영성을 잇는 특별한 사람들인 성자들이 예언자를 계승하여 신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이어나간다고 말한다. 수피즘에서 예언자 무함마드는 신에게 가까이 가기를 추구하는 모든 성자들의 모델이며, 또한 신의 현현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완전한 인간이다.<br /><br />수피즘이 꾸란에서 기원한 것인지, 즉 원래부터 이슬람에 존재하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이슬람 역사 내내 수피즘은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수피즘은 9세기에 이르러서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13세기에 절정을 이루면서 사람들 사이에 깊이 파고들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br /><br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유명한 이슬람법학자였다가 11세기 후반 수피가 되어 이슬람 법학자들로 하여금 수피즘을 다시 생각하도록 도전한 가잘리의 의견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이슬람에서 수피즘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신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식의 한계를 수피즘이 채워준다는 것이었다. 가잘리는 이슬람에 빠져있는 영성을 채워주는 수피즘의 역할을 인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br /><br /><strong>2) 성자(왈리, ولى)들은 누구인가?<br /></strong>성자들은 수피들 중에서 수피의 길(타리까, طريقة)의 마지막 단계, 즉 화나와 바까의 단계에 도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 자들이다. 수피즘에는 모든 수피들이 걷게 되는 수피의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걷는 수피들 중 일부만이, 극소수만이 성자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수피들의 최대의 목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얻는 단계인 성자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br /><br />성자들은 예언자의 영적인 계보를 잇는 존재들로서 일반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은 성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하는 자들인 성자들은 예언자들이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듯이, 신에게 근접한 자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만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자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예언자 무함마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적 계보이다. 혈연적인 가족 계보와는 구분되는 영적인 계보(이스나드, اسناد)는 성자가 예언자에게서 축복 (바라카, بركة)을 유전적으로 계승받았다는 증거이며, 또한 영적 능력이 이어져 내려오는 통로로 인정되었다.<br /><br />성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으로 인해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고, 또한 하나님에게 근접한 자들로서, 또한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자들로서 그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언자를 계승하는 자들로서 계시된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움마(أمة,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실제적인 힘이라고 수피들은 주장한다.<br /><br /><strong>3) 이슬람 사회 속의 성자들: 수피 사당 문화<br /></strong>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성자들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슬람 사회에서 수피즘의 영향과 성자 개념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곳은 수피 사당이다. 수피 사당은 성자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성자가 죽은 후 그 무덤을 중심으로 세운 건물로, 보통 돔으로 덮여 있는 작은 건물이며, 그 건물 안에 관이 놓여 있고, 관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유명한 성자들의 경우에는 관 주위에 아름다운 문양의 울타리가 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관을 보호하고 있다. 관에 가까이 할수록 더 좋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br /><br />많은 사람들이 죽은 성자로부터 축복을 축적하고, 사업이나, 질병 등의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방문자들이 성자에게 요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것은 병으로부터 치유 받는 것이다. 이 경우 무덤 주위의 물품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며, 때로 병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생명을 상징하는 물의 경우, 무덤 근처에 있는 샘에서 물을 떠서 사용하기도 하고, 무덤 근처에 있는 나뭇잎이나 나무 열매도 특별한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병이 잘 낫기로 유명한 한 사당을 방문한 남성은 그 곳에서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다리가 아픈 사람, 머리가 아픈 사람이 많이 치유 받는 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아팠다가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실제로 들은 적은 없다고 했다. 실제로 본 적이 없는데도 그토록 확신하는 모습이 순박하고 정겨워 보이면서도, 있지도 않은 사실에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br /><br />필자가 루까이야 수피 사당(السيدة رقية , 1133)을 방문 했을 때 마침 그 곳을 찾았던 한 부부가 있었다. 아내가 며칠 후 수술을 할 예정이라서 이곳을 방문했다는 아저씨는 마당에 떨어져 있는 나무 열매를 주어서 아내에게도 주고 자신도 먹었다. 함께 방문한 친구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 아저씨는 이 열매를 먹으면 곧 결혼하게 될 것이라며 친구에게도 열매를 주었다. 그 부부는 이 사당 뿐 아니라 다른 큰 사당들을 모두 돌고 있었다. 바라카는 많이 축적할수록 좋은 것이고, 어느 사당에서 기도한 것이 효험을 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부부들처럼 유명한 여러 사당들을 모두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다.<br /><br />사람들이 사당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에게 근접한 존재인 성자들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사정을 아뢰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당을 찾는 사람들은 성자들이 방문자들의 요청을 언제든 기쁘게 받아 주며, 하나님과 방문자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 준다고 믿고 있다. 무슬림들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 힘든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성자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특별한 존재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무슬림들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는 존재로 여겨진다. 무슬림들은 성자를 찾아가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토로하고 위로와 응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br /><br /><strong>4) 이집트의 수피즘<br /></strong>오늘날은 과거보다 수피들의 수가 줄어들었다고들 한다. 영성을 추구하고, 세속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수피즘의 성향이 이슬람 세계 전반에 불고 있는 현대화의 과정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시골이나 변두리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수피즘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이집트이다. 이집트에는 리화이, 샤딜리야, 티자니야, 아흐마디야, 바다위야, 부르하니야, 루화이야, 나끄쉬반디야, 알 바지야 등 여러 종단들이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또한 이집트의 하산 알-반나가 창설하였고, 아랍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무슬림 형제단은 티자니야 종단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br />이집트의 수피 인구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서마다 수치의 차이도 크다. 이집트 인구의 3분의 1정도로 보는 자료에서부터 90퍼센트까지 보는 자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남자만 수피로 가입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집트 인구의 1/3이라는 숫자가 적은 숫자는 아니다.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이집트 곳곳에서 여러 수피 종단들과 많은 사당들, 지크르 홍보문, 지크르 ذكر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집트에서 수피즘의 강세를 느낄 수 있다. ⌜이집트의 신비주의자들⌟이라는 책은 수피즘이 원래 이집트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 중에 하나로 이집트에 수피의 수가 가장 많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br /><br />이집트에서 신실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혹시 수피세요?’ 하고 물어보면,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재차 물으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집트에 수피즘이 왕성하기는 하지만 수피즘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피가 아닌 사람들의 수피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은 수피들도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약간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수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좀 난감해 하면서 그들도 분명 무슬림들이라는 사실을 먼저 강조한다. 그런 후에 그들은 정도를 걷는 다기 보다는 좀 옆길을 걷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준다. 카이로의 모스크에서 만난 한 아저씨는 ‘함두릴래, 나는 수피가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왜 그것이 ‘함두릴래’냐고 물으니, 수피들은 나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수피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신도 호세인 모스크에 가고 그 곳의 사당을 방문하지만 수피들과는 다른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의 경우에는 자신이 수피임을 적극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별로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수피들이 자신이 수피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수피즘이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수피들의 경우에는 숨기고자 하는 기색이 많이 보였다. 한 아저씨는 수피냐는 질문에 나는 순니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순니인 것은 알고 있는데 혹시 수피시냐고 재차 물으니 말없이 그렇다는 표시를 했다.<br /><br />필자가 만나 수피들은 대부분 신실하고, 친절하며,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슬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기 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나누며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방에게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슬람이 참 종교임을 강조하다가 결국에는 무슬림이 되기 위한 신앙고백(샤하다, شهادة)을 고백하라고 강요하다시피 말하기도 한다.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지 않느냐며, 어서 신앙고백을 하고 무슬림이 되라고 조르다시피 한다. 다른 것은 아예 보지도 듣지도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수피가 아니었다. 이러한 차이가 율법에 매어 있는 것과 영성을 추구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좀 지나친 것일까?<br /><br /><strong>5) 카이로의 사당 문화<br />① 카이로의 사당들<br /></strong>카이로에는 호세인 모스크나, 사이에다 자이납, 아이샤 모스크, 싸이에다 나피사 등 사당을 포함하고 있는 크고 유명한 모스크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구석 구석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규모의 사당들이 여기 저기에 많이 있다.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 생겨난 마을이나, 옛 거리들을 걷다보면 이런 작은 사당들을 자주 보게 된다. 어떤 것들은 버려져서 쓰레기가 쌓여 있어서 이곳은 이제 사당이 아닌가 하고 물으면 그래도 여전히 사당은 사당이라고 사람들이 말해 준다. 크고 화려한 사당들은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사당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많은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 주변이 아름다운 울타리로 둘려 있다. 반면에 작은 사당들은 대부분 수놓은 깨끗한 천으로 덮여 있고,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거나 어떤 특별한 장식들이 되어 있지는 않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 고양이가 들어가서 앉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 옛 거리에서 발견한 사당에는 여자들이 서 너 명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있을 곳이 없어서 그곳에 살림을 차리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데 오가며 자주 들른다고 말했다. 다른 곳에 있는 한 사당은 지역 성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성자인지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수리 중이라서 들어가 확인해 볼 수는 없었지만 그 곳에 그 성자와 일곱 아들이 함께 묻혀 있다는 것, 이집트의 다른 성자들처럼 그 성자도 이집트인들을 품은 사람이라는 설명을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유명한 사람이냐고 물으니까 그렇지는 않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성자라고 말했다.<br /><br />작은 사당들이 모여 있는 곳은 복잡한 시내 거리 보다는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나, 옛 거리들이다. 언젠가 방문한 적이 있는 한 무덤 마을은 사람들에게서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곳이었다. 길 가면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던 아이를 안고 있던 한 아주머니는 마치 돈을 맡겨 놓은 듯이 ‘우리 가난하고 불쌍하니까 돈을 달라’고 말했다. 외국인에게 돈을 바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길가에 있는 무너져 가는 싸빌-쿠탑의 사진을 찍으려 하자 지나가던 한 아저씨가 그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다. 왜 안 되느냐고 묻자 이유도 말하지 않으면서 절대 안 된다고 소리 지르듯이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물어보니 그 마을에 있는 모스크에 있는 사람(아마 이맘이 아닐까 싶다)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보다 조금 전에 모스크에서 만났던 불친절하던 한 사람이 생각났다. 나중에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그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며 외국인이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말해 주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별로 위협까지는 느끼지 못했지만, 외부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지고, 이집트 사람들은 친절하다는 통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곳이었다.<br /><br /><strong>② 사당을 찾는 사람들<br /></strong>사당을 찾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라마단이나 성자의 축일 때에는 더욱 많아지지만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도 사람들은 사당을 자주 찾는다. 지역 성자로 알려진 루까이야 사당의 경우 하루 평균 50명 정도 방문을 하고 금요일에 하는 지크르 때에는 200명 정도 모인다고 한다. 그 곳에서 조금 더 가면 있는 싸이에다 나피사 모스크는 사당을 포함하고 있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모스크인데 그 곳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한 무덤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사당은 평소에는 잠가 두었다가 방문객이 와서 요청을 하면 열어주곤 하는데, 그 작은 모스크에도 하루 평균 8명 정도의 방문객이 있다고 했다. 필자가 참석했던 한 지크르에는 남자들만 250-300명 가량의 수피들이 참석했었다. 그 사당의 경우 지크르가 일주일에 2번 있었는데 그렇게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지크르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셈이다.<br /><br />사당을 찾는 사람들이 모두 다 수피는 아니다. 성자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은 메카 순례를 의미하는 하즈 حج와는 구분하여 지야라 زيارة(방문이라는 뜻)라고 하는데, 전통에 의하면 지야라는 원래 이슬람 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죽음과 내세를 상기한다는 의미로 행해진다. 수피가 아니라고 밝힌 한 사람 역시 호세인 모스크에 가고 사당을 방문하지만 그곳에 대고 기도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그 곳에 대고 기도하는 것은 이슬람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알라에게 개인적으로 아뢰고 싶은 것들은 하루 5번 행하는 기도시간에 두아에를 통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무슬림들에게 지야라는 단순한 상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매일의 고달픈 문제들을 가지고 사당을 찾으며, 그 곳에서 응답과 위로를 구한다. 반드시 수피 종단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해도 성자의 무덤을 찾는 것이다.<br /><br />호세인 모스크나, 싸이에다 나피사, 사이에다 자이납, 아이샤 모스크 같이 크고 유명한 사당의 경우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에서도 찾아온다. 어렵게 여행 경비를 모아 1년에 한 번 정도 방문하면서 주변의 큰 모스크들을 모두 돌아보고 가기도 하고, 몸이 안 좋거나,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루 날을 잡아 좋아하는 사당을 방문하기도 한다. 남편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멀리서 오는 경우도 있고, 다른 여자 친척들과 함께 오기도 한다. 멀리서 온 한 여성을 만나 굳이 이렇게 멀리까지 올 이유가 있느냐고 물으니, 동네에도 사당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크고 훌륭한 것은 없다고 답했다. 머리가 아파서 왔다는 그 여성의 말을 참고로 할 때 크고 좋은 사당이 더 효험이 좋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br /><br />사당이 딸린 한 모스크에서 만난 여성은 사당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가슴 아프고 문제가 있어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사당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아프거나, 수술을 앞두고 있거나, 시험을 준비하고 있거나 등의 실제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직업이 없어서 오랫동안 고통 받고 있는 사람, 도저히 나눌 수 없는 사연이어서 눈물로 대신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유명한 사당에서 관 주변의 울타리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여성을 본 적이 있다. 오랫동안 어찌나 서럽게 흐느끼는지 보고 있는 사람도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여성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며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 내가 그 중 한 사람에게 왜 우는지 아느냐고 묻자, ‘하나님은 아신다 (الله هو عارف 알라, 후와 아에리프)’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도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함께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나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기에 남의 슬픔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많이 힘들어 보였다.<br /><br /><strong>③ 사당 문화<br /></strong>사람들은 사당에 가서 무엇을 할까? 사당을 찾는 가장 큰 목적은 성자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것이다. 사당을 찾은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관 주위를 돌면서 입을 맞추고 꾸란 구절을 외우고, 죽은 성자의 사방에 대고 기도하기 위해 관 주변을 돌면서 소원을 아뢴다. 관의 머리 있는 부분에 특별한 장식을 해 놓아서 머리 부분이 어디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관의 사방에 대고 기도를 한다. 인격체라면 어느 방향에서 기도를 하든지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데, 그들은 성자의 사방에 대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간절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간절한 마음이 역력히 보이는 표정으로 관을 향해 고개를 든다.<br />관 앞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를 넣기도 하고 돈을 넣기도 하는 함이 따로 있지만, 사람들은 가능하면 관이 있는 곳 주변에 종이나 물건을 놓기를 원한다. 유리로 막혀 있고 울타리가 둘려 있는 관 주변에 성자에게 주는 선물들, 소원을 적은 종이들, 돈, 스카프 등의 물건들이 들어가 있다. 몸이 아파서 직접 오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그 사람에게 속한 물건을 관 옆에 놓아둠으로써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도 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결혼을 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경우에는 자기 옷을 넣어 놓기도 한다. 사당을 찾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보이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br /><br />사당은 문제 해결을 위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위로를 얻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쉬는 날 사당을 방문한다. 2년째 남편이 직업을 찾지 못해 하루 하루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는 한 여성은 쉬는 날마다 사당을 방문한다고 했다. 그 여성에게 사당은 힘든 삶을 지탱할 힘을 얻는 곳으로 보였다. 어려운 살림에 조금씩 돈을 모아 멀리서 큰 사당을 찾아오는 여성들에게도 사당은 단순한 문제 해결 장소가 아니라, 삶의 고통을 하소연 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위로를 얻는 곳일 것이다. 사람들은 사당에 앉아서 도란 도란 이야기도 하고, 한 구석에 앉아 꾸란을 읽기도 한다. 그냥 조용히 앉아 쉬기도 하고, 학교 간 딸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수술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는 곳이고, 시험을 앞두고 기도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의 눈에 사당은 힘든 삶에서 잠시 벗어나 사랑하는 성자 옆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비쳤다.<br /><br />사람들은 성자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크고 화려한 사당으로 향하는 골목길 내내 꽃을 파는 사람들, 향수를 파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꽃들은 사당에 있는 성자에게 주는 꽃이라고 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보니 정말로 관 주변의 울타리에 아까 밖에서 보았던 꽃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꽂혀 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꽃은 왜 꽂아 놓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더니 누군가를 사랑하면 선물을 주기 마련이라며 성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사람들 사이에 거하는 성자들을 향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내재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기에 기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알라에게 대신 아뢰어 주는 성자들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br /><br /><strong>나가는 말<br /></strong>이슬람의 성자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흡사하다. 사당 옆에 살고 있던 한 가난한 여성은 성자들이 자신들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성자들은 초월하시는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고, 기꺼이 인간들의 소원을 대신 말해주는 존재들이다. 그들도 이 땅에 살다가 죽었기에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고 기꺼이 들어준다. 그런 성자들에게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하고 위로를 구한다.<br /><br />성자들은 우리들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여성에게 왜 그러냐고, 죄 때문에 그런 것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자신들은 하루에 5번 기도하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펄쩍 뛰었다. 그런데 왜 성자가 필요하냐고 재차 물었더니 답변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곳에 살면서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사람, 죽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교제하면 할수록 두려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br />한 사당의 관 주변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를 잡고 하염없이 울던 여인이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았다. 어떤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을까? 이혼당한 여인은 아니었을까? 성경은 한 여성과만 결혼할 것을 말하고 있고 이혼을 금하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 여성들이 성경이 말하는 결혼관을 동경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많은 무슬림 여성들에게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일 뿐이다.hkleehttp://www.blogger.com/profile/15789725178315981924noreply@blogger.com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