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1일 일요일

이집트의 수피즘: 카이로의 사당 문화

원제: Sufism in Egypt: The Shrine Culture of Cairo

Sophia Kim

들어가는 말
흔히 이슬람을 율법적인 종교라고 말한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무슬림들에게 남은 것은 거룩한 책 꾸란과, 예언자의 언행록인 하디스이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예언자였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더 이상 예언자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무슬림들은 마지막 예언자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려고 노력한다. 전철에 타면 하디스에 나오는 ‘탈 것에 탈 때 하는 두아에 دعاء الركوب’ 를 암송한다. 모스크 문에는 모스크에 들어갈 때 하는 두아에와 모스크에서 나올 때 하는 두아에(دعاء دخول المسجد & دعاء الخروج من المسجد)가 붙어있다. 라마단 동안 모스크 주변을 걷다보면 작은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쌓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언자가 음식을 먹은 후 이를 쑤셨다고 하는데서 기원한 것이다. 또한 라마단에 해가 진 후 예언자가 대추야자를 먹는 것으로 금식을 깨었다고 해서 라마단 달 저녁 무슬림들이 금식을 깰 시간이 되면 대추야자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예언자의 말과 행동에서 유래한 풍습들은 많이 있다.
풍습뿐 아니라 건물, 모스크의 문양 등에서도 예언자의 언행에서 유래한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무함마드가 가장 칭송할 만한 자비로운 행동으로 꼽은 두 가지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것과 무지한 자에게 종교를 알려주는 것이었다는 점에 기인하여 이집트에는 싸빌(سبيل, 길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식수를 모아놓은 건물) 쿠탑(كتاب, 꾸란 학교)이 유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예언자의 언행을 따라 해도 예언자는 죽은 사람이고, 남아있는 것은 문자들뿐이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창조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깨닫는다거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잘 깨닫고 있지 못하지만 문자만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는 커다란 빈 공간이 있다. 영적인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기도를 듣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느냐고 물으면 인간을 만드시고 귀를 만드신 분이 왜 기도를 듣지 못하시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그들의 기도는 올라가는 한쪽 방향만 열려 있는 기도이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기도보다는 어떤 일을 해결받기 위한 기도일 수밖에 없다. 일이 잘 해결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이다. 함두릴래 الحمد لله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의 이 말은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다.

영적인 공백을 채워주지 못하는 종교는 오래 가기 힘들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갈급함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이슬람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은 후 천국에 가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무슬림이기만 하면 천국에 가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나쁜 무슬림이라도 정해진 기간 동안 지옥에서 벌을 받고 나면 결국은 천국에 가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슬람을 떠나기 힘들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갈급함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수피즘이다.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은 이슬람의 영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수피즘을 이슬람의 영성이라고 말한다. 이 글에서는 수피즘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자 개념, 사람들이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는 실제적인 공간이 되는 사당(마깜 مقام)이 하는 역할과 그 곳을 찾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수피즘은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수피즘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이집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실제적인 공간과 사람들을 언급하기 위해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수피즘(앗타사우프, التصوف)이란?
수피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움마이야드 왕조가 세계 정복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 이러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세속화 되어가는 세상을 경계하며 지옥의 공포를 외치고 다녔던 경건한 신자들에게서 수피즘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수피
صوفى라는 이름도 이들이 입고 다녔던 어두운 색깔의 양모 옷 수프 صوف에서 그 유래를 찾는 학자들이 많다.

이에 반해 이슬람의 영성은 예언자 무함마드시기부터 존재해 왔으며, 드러나지 않은 채 무함마드 사후에도 계속해서 지속되고 풍성해져 가다가 나중에 수피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파즐루 라흐만은 예언자 무함마드는 알라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신비적인 알라의 임재를 이미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한 그의 영성은 강력한 종교적, 윤리적 사회의 건설을 통해 역사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마틴 링은 수피즘이 곧 이슬람이며, 이슬람의 참 영성은 선택받은 수피들을 통해 이어져 왔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첫 수피 스승 (쉐이크 شيخ)이었으며 모든 영성을 지닌 자로서 이후의 다양한 영성을 지닌 모든 수피들의 영적 스승이요 기원이 된다.

이와 같이 수피즘의 기원이 예언자 무함마드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수피즘의 정통성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다. 그 중 가장 크고 분명한 이유는 수피즘이 추구하는 바가 정통 이슬람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수피들이 추구하는 것은 알라로부터 직접적으로 얻게 되는 지식과 알라와의 하나됨이다. 이는 화나 فناء(소멸)와 바까 بقاء (머무름)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화나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남’, 바까는 자신 안에서 또는 신과 함께 머묾으로써 진실한 ‘나’ 곧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바까의 상태는 수피의 기본적인 가르침인 ‘세상의 본질은 신’이라는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은 그 본질이 신의 현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까의 상태에서 신은 수피에게 존재하고 그를 통해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수피는 신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신의 대리자로서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화나와 바까의 상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육신(훌룰 حلول)과는 현저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화나의 상태는 성육신이라기보다는 신의 임재 앞에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알라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정통 이슬람은 수피즘의 이러한 이론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으며, 이는 꾸란과 하디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외부의 영향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더 나아가 9세기 후반에 주요 논쟁점으로 등장했던 성자 개념은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성자라는 특별한 계층을 대두시킴으로써 알라와 인간 사이에 중재자 개념을 용납하지 않는 울라마(علماء이슬람법학자들)와 더욱 첨예한 대립을 가져왔다. 수피즘은 무함마드 사후 더 이상 예언자를 기대할 수 없는 이슬람에서, 예언자의 영성을 잇는 특별한 사람들인 성자들이 예언자를 계승하여 신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이어나간다고 말한다. 수피즘에서 예언자 무함마드는 신에게 가까이 가기를 추구하는 모든 성자들의 모델이며, 또한 신의 현현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완전한 인간이다.

수피즘이 꾸란에서 기원한 것인지, 즉 원래부터 이슬람에 존재하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이슬람 역사 내내 수피즘은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수피즘은 9세기에 이르러서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13세기에 절정을 이루면서 사람들 사이에 깊이 파고들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유명한 이슬람법학자였다가 11세기 후반 수피가 되어 이슬람 법학자들로 하여금 수피즘을 다시 생각하도록 도전한 가잘리의 의견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이슬람에서 수피즘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신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식의 한계를 수피즘이 채워준다는 것이었다. 가잘리는 이슬람에 빠져있는 영성을 채워주는 수피즘의 역할을 인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성자(왈리, ولى)들은 누구인가?
성자들은 수피들 중에서 수피의 길(타리까, طريقة)의 마지막 단계, 즉 화나와 바까의 단계에 도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 자들이다. 수피즘에는 모든 수피들이 걷게 되는 수피의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걷는 수피들 중 일부만이, 극소수만이 성자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수피들의 최대의 목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얻는 단계인 성자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성자들은 예언자의 영적인 계보를 잇는 존재들로서 일반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은 성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하는 자들인 성자들은 예언자들이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듯이, 신에게 근접한 자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만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자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예언자 무함마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적 계보이다. 혈연적인 가족 계보와는 구분되는 영적인 계보(이스나드, اسناد)는 성자가 예언자에게서 축복 (바라카, بركة)을 유전적으로 계승받았다는 증거이며, 또한 영적 능력이 이어져 내려오는 통로로 인정되었다.

성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으로 인해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고, 또한 하나님에게 근접한 자들로서, 또한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자들로서 그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언자를 계승하는 자들로서 계시된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움마(أمة,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실제적인 힘이라고 수피들은 주장한다.

3) 이슬람 사회 속의 성자들: 수피 사당 문화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성자들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슬람 사회에서 수피즘의 영향과 성자 개념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곳은 수피 사당이다. 수피 사당은 성자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성자가 죽은 후 그 무덤을 중심으로 세운 건물로, 보통 돔으로 덮여 있는 작은 건물이며, 그 건물 안에 관이 놓여 있고, 관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유명한 성자들의 경우에는 관 주위에 아름다운 문양의 울타리가 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관을 보호하고 있다. 관에 가까이 할수록 더 좋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성자로부터 축복을 축적하고, 사업이나, 질병 등의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방문자들이 성자에게 요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것은 병으로부터 치유 받는 것이다. 이 경우 무덤 주위의 물품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며, 때로 병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생명을 상징하는 물의 경우, 무덤 근처에 있는 샘에서 물을 떠서 사용하기도 하고, 무덤 근처에 있는 나뭇잎이나 나무 열매도 특별한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병이 잘 낫기로 유명한 한 사당을 방문한 남성은 그 곳에서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다리가 아픈 사람, 머리가 아픈 사람이 많이 치유 받는 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아팠다가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실제로 들은 적은 없다고 했다. 실제로 본 적이 없는데도 그토록 확신하는 모습이 순박하고 정겨워 보이면서도, 있지도 않은 사실에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필자가 루까이야 수피 사당(السيدة رقية , 1133)을 방문 했을 때 마침 그 곳을 찾았던 한 부부가 있었다. 아내가 며칠 후 수술을 할 예정이라서 이곳을 방문했다는 아저씨는 마당에 떨어져 있는 나무 열매를 주어서 아내에게도 주고 자신도 먹었다. 함께 방문한 친구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 아저씨는 이 열매를 먹으면 곧 결혼하게 될 것이라며 친구에게도 열매를 주었다. 그 부부는 이 사당 뿐 아니라 다른 큰 사당들을 모두 돌고 있었다. 바라카는 많이 축적할수록 좋은 것이고, 어느 사당에서 기도한 것이 효험을 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부부들처럼 유명한 여러 사당들을 모두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들이 사당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에게 근접한 존재인 성자들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사정을 아뢰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당을 찾는 사람들은 성자들이 방문자들의 요청을 언제든 기쁘게 받아 주며, 하나님과 방문자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 준다고 믿고 있다. 무슬림들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 힘든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성자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특별한 존재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무슬림들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는 존재로 여겨진다. 무슬림들은 성자를 찾아가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토로하고 위로와 응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4) 이집트의 수피즘
오늘날은 과거보다 수피들의 수가 줄어들었다고들 한다. 영성을 추구하고, 세속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수피즘의 성향이 이슬람 세계 전반에 불고 있는 현대화의 과정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시골이나 변두리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수피즘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이집트이다. 이집트에는 리화이, 샤딜리야, 티자니야, 아흐마디야, 바다위야, 부르하니야, 루화이야, 나끄쉬반디야, 알 바지야 등 여러 종단들이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또한 이집트의 하산 알-반나가 창설하였고, 아랍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무슬림 형제단은 티자니야 종단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수피 인구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서마다 수치의 차이도 크다. 이집트 인구의 3분의 1정도로 보는 자료에서부터 90퍼센트까지 보는 자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남자만 수피로 가입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집트 인구의 1/3이라는 숫자가 적은 숫자는 아니다.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이집트 곳곳에서 여러 수피 종단들과 많은 사당들, 지크르 홍보문, 지크르 ذكر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집트에서 수피즘의 강세를 느낄 수 있다. ⌜이집트의 신비주의자들⌟이라는 책은 수피즘이 원래 이집트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 중에 하나로 이집트에 수피의 수가 가장 많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집트에서 신실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혹시 수피세요?’ 하고 물어보면,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재차 물으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집트에 수피즘이 왕성하기는 하지만 수피즘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피가 아닌 사람들의 수피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은 수피들도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약간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수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좀 난감해 하면서 그들도 분명 무슬림들이라는 사실을 먼저 강조한다. 그런 후에 그들은 정도를 걷는 다기 보다는 좀 옆길을 걷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준다. 카이로의 모스크에서 만난 한 아저씨는 ‘함두릴래, 나는 수피가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왜 그것이 ‘함두릴래’냐고 물으니, 수피들은 나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수피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신도 호세인 모스크에 가고 그 곳의 사당을 방문하지만 수피들과는 다른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의 경우에는 자신이 수피임을 적극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별로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수피들이 자신이 수피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수피즘이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수피들의 경우에는 숨기고자 하는 기색이 많이 보였다. 한 아저씨는 수피냐는 질문에 나는 순니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순니인 것은 알고 있는데 혹시 수피시냐고 재차 물으니 말없이 그렇다는 표시를 했다.

필자가 만나 수피들은 대부분 신실하고, 친절하며,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슬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기 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나누며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방에게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슬람이 참 종교임을 강조하다가 결국에는 무슬림이 되기 위한 신앙고백(샤하다, شهادة)을 고백하라고 강요하다시피 말하기도 한다.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지 않느냐며, 어서 신앙고백을 하고 무슬림이 되라고 조르다시피 한다. 다른 것은 아예 보지도 듣지도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수피가 아니었다. 이러한 차이가 율법에 매어 있는 것과 영성을 추구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좀 지나친 것일까?

5) 카이로의 사당 문화
① 카이로의 사당들
카이로에는 호세인 모스크나, 사이에다 자이납, 아이샤 모스크, 싸이에다 나피사 등 사당을 포함하고 있는 크고 유명한 모스크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구석 구석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규모의 사당들이 여기 저기에 많이 있다.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 생겨난 마을이나, 옛 거리들을 걷다보면 이런 작은 사당들을 자주 보게 된다. 어떤 것들은 버려져서 쓰레기가 쌓여 있어서 이곳은 이제 사당이 아닌가 하고 물으면 그래도 여전히 사당은 사당이라고 사람들이 말해 준다. 크고 화려한 사당들은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사당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많은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 주변이 아름다운 울타리로 둘려 있다. 반면에 작은 사당들은 대부분 수놓은 깨끗한 천으로 덮여 있고,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거나 어떤 특별한 장식들이 되어 있지는 않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 고양이가 들어가서 앉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 옛 거리에서 발견한 사당에는 여자들이 서 너 명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있을 곳이 없어서 그곳에 살림을 차리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데 오가며 자주 들른다고 말했다. 다른 곳에 있는 한 사당은 지역 성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성자인지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수리 중이라서 들어가 확인해 볼 수는 없었지만 그 곳에 그 성자와 일곱 아들이 함께 묻혀 있다는 것, 이집트의 다른 성자들처럼 그 성자도 이집트인들을 품은 사람이라는 설명을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유명한 사람이냐고 물으니까 그렇지는 않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성자라고 말했다.

작은 사당들이 모여 있는 곳은 복잡한 시내 거리 보다는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나, 옛 거리들이다. 언젠가 방문한 적이 있는 한 무덤 마을은 사람들에게서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곳이었다. 길 가면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던 아이를 안고 있던 한 아주머니는 마치 돈을 맡겨 놓은 듯이 ‘우리 가난하고 불쌍하니까 돈을 달라’고 말했다. 외국인에게 돈을 바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길가에 있는 무너져 가는 싸빌-쿠탑의 사진을 찍으려 하자 지나가던 한 아저씨가 그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다. 왜 안 되느냐고 묻자 이유도 말하지 않으면서 절대 안 된다고 소리 지르듯이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물어보니 그 마을에 있는 모스크에 있는 사람(아마 이맘이 아닐까 싶다)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보다 조금 전에 모스크에서 만났던 불친절하던 한 사람이 생각났다. 나중에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그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며 외국인이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말해 주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별로 위협까지는 느끼지 못했지만, 외부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지고, 이집트 사람들은 친절하다는 통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곳이었다.

② 사당을 찾는 사람들
사당을 찾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라마단이나 성자의 축일 때에는 더욱 많아지지만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도 사람들은 사당을 자주 찾는다. 지역 성자로 알려진 루까이야 사당의 경우 하루 평균 50명 정도 방문을 하고 금요일에 하는 지크르 때에는 200명 정도 모인다고 한다. 그 곳에서 조금 더 가면 있는 싸이에다 나피사 모스크는 사당을 포함하고 있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모스크인데 그 곳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한 무덤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사당은 평소에는 잠가 두었다가 방문객이 와서 요청을 하면 열어주곤 하는데, 그 작은 모스크에도 하루 평균 8명 정도의 방문객이 있다고 했다. 필자가 참석했던 한 지크르에는 남자들만 250-300명 가량의 수피들이 참석했었다. 그 사당의 경우 지크르가 일주일에 2번 있었는데 그렇게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지크르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셈이다.

사당을 찾는 사람들이 모두 다 수피는 아니다. 성자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은 메카 순례를 의미하는 하즈 حج와는 구분하여 지야라 زيارة(방문이라는 뜻)라고 하는데, 전통에 의하면 지야라는 원래 이슬람 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죽음과 내세를 상기한다는 의미로 행해진다. 수피가 아니라고 밝힌 한 사람 역시 호세인 모스크에 가고 사당을 방문하지만 그곳에 대고 기도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그 곳에 대고 기도하는 것은 이슬람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알라에게 개인적으로 아뢰고 싶은 것들은 하루 5번 행하는 기도시간에 두아에를 통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무슬림들에게 지야라는 단순한 상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매일의 고달픈 문제들을 가지고 사당을 찾으며, 그 곳에서 응답과 위로를 구한다. 반드시 수피 종단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해도 성자의 무덤을 찾는 것이다.

호세인 모스크나, 싸이에다 나피사, 사이에다 자이납, 아이샤 모스크 같이 크고 유명한 사당의 경우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에서도 찾아온다. 어렵게 여행 경비를 모아 1년에 한 번 정도 방문하면서 주변의 큰 모스크들을 모두 돌아보고 가기도 하고, 몸이 안 좋거나,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루 날을 잡아 좋아하는 사당을 방문하기도 한다. 남편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멀리서 오는 경우도 있고, 다른 여자 친척들과 함께 오기도 한다. 멀리서 온 한 여성을 만나 굳이 이렇게 멀리까지 올 이유가 있느냐고 물으니, 동네에도 사당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크고 훌륭한 것은 없다고 답했다. 머리가 아파서 왔다는 그 여성의 말을 참고로 할 때 크고 좋은 사당이 더 효험이 좋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당이 딸린 한 모스크에서 만난 여성은 사당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가슴 아프고 문제가 있어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사당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아프거나, 수술을 앞두고 있거나, 시험을 준비하고 있거나 등의 실제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직업이 없어서 오랫동안 고통 받고 있는 사람, 도저히 나눌 수 없는 사연이어서 눈물로 대신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유명한 사당에서 관 주변의 울타리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여성을 본 적이 있다. 오랫동안 어찌나 서럽게 흐느끼는지 보고 있는 사람도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여성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며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 내가 그 중 한 사람에게 왜 우는지 아느냐고 묻자, ‘하나님은 아신다 (الله هو عارف 알라, 후와 아에리프)’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도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함께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나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기에 남의 슬픔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많이 힘들어 보였다.

③ 사당 문화
사람들은 사당에 가서 무엇을 할까? 사당을 찾는 가장 큰 목적은 성자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것이다. 사당을 찾은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관 주위를 돌면서 입을 맞추고 꾸란 구절을 외우고, 죽은 성자의 사방에 대고 기도하기 위해 관 주변을 돌면서 소원을 아뢴다. 관의 머리 있는 부분에 특별한 장식을 해 놓아서 머리 부분이 어디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관의 사방에 대고 기도를 한다. 인격체라면 어느 방향에서 기도를 하든지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데, 그들은 성자의 사방에 대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간절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간절한 마음이 역력히 보이는 표정으로 관을 향해 고개를 든다.
관 앞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를 넣기도 하고 돈을 넣기도 하는 함이 따로 있지만, 사람들은 가능하면 관이 있는 곳 주변에 종이나 물건을 놓기를 원한다. 유리로 막혀 있고 울타리가 둘려 있는 관 주변에 성자에게 주는 선물들, 소원을 적은 종이들, 돈, 스카프 등의 물건들이 들어가 있다. 몸이 아파서 직접 오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그 사람에게 속한 물건을 관 옆에 놓아둠으로써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도 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결혼을 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경우에는 자기 옷을 넣어 놓기도 한다. 사당을 찾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보이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사당은 문제 해결을 위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위로를 얻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쉬는 날 사당을 방문한다. 2년째 남편이 직업을 찾지 못해 하루 하루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는 한 여성은 쉬는 날마다 사당을 방문한다고 했다. 그 여성에게 사당은 힘든 삶을 지탱할 힘을 얻는 곳으로 보였다. 어려운 살림에 조금씩 돈을 모아 멀리서 큰 사당을 찾아오는 여성들에게도 사당은 단순한 문제 해결 장소가 아니라, 삶의 고통을 하소연 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위로를 얻는 곳일 것이다. 사람들은 사당에 앉아서 도란 도란 이야기도 하고, 한 구석에 앉아 꾸란을 읽기도 한다. 그냥 조용히 앉아 쉬기도 하고, 학교 간 딸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수술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는 곳이고, 시험을 앞두고 기도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의 눈에 사당은 힘든 삶에서 잠시 벗어나 사랑하는 성자 옆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비쳤다.

사람들은 성자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크고 화려한 사당으로 향하는 골목길 내내 꽃을 파는 사람들, 향수를 파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꽃들은 사당에 있는 성자에게 주는 꽃이라고 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보니 정말로 관 주변의 울타리에 아까 밖에서 보았던 꽃들이 여기저기에 많이 꽂혀 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꽃은 왜 꽂아 놓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더니 누군가를 사랑하면 선물을 주기 마련이라며 성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사람들 사이에 거하는 성자들을 향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내재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기에 기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알라에게 대신 아뢰어 주는 성자들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가는 말
이슬람의 성자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흡사하다. 사당 옆에 살고 있던 한 가난한 여성은 성자들이 자신들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성자들은 초월하시는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고, 기꺼이 인간들의 소원을 대신 말해주는 존재들이다. 그들도 이 땅에 살다가 죽었기에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고 기꺼이 들어준다. 그런 성자들에게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하고 위로를 구한다.

성자들은 우리들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여성에게 왜 그러냐고, 죄 때문에 그런 것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자신들은 하루에 5번 기도하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펄쩍 뛰었다. 그런데 왜 성자가 필요하냐고 재차 물었더니 답변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곳에 살면서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사람, 죽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두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교제하면 할수록 두려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당의 관 주변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를 잡고 하염없이 울던 여인이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았다. 어떤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을까? 이혼당한 여인은 아니었을까? 성경은 한 여성과만 결혼할 것을 말하고 있고 이혼을 금하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 여성들이 성경이 말하는 결혼관을 동경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많은 무슬림 여성들에게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일 뿐이다.

댓글 2개:

  1. 참 귀한 글이군요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용어의 통일이 필요합니다

    1)하나님과 알라(이슬람의 알라는 하나님과 다르니까요) * 물론 다른 의견도 있지만
    2)성자와 왈리(우리가 생각하는 성자/성인과 왈리의 의미가 같은지요?)
    3) 성자가 예수그리스도와 같다고 하는 표현은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리서치가 아주 잘 된 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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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덧글 감사합니다.
    예, 성자와 왈리는 같은 의미입니다.
    이슬람에서 성자의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와 유사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아서 오해를 불러있으킨 점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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