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8일 일요일

레이먼드 룰: 중세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무슬림들을 향해 간 선교사

원 제: Raymond Lull: Medieval Theologian, Philosopher, and Missionary to Muslims
글쓴이: J. Scott Bridger1

1. 서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윌리엄 캐리(1761-1834) 가 18, 19세기에 인도에 가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때는 보통 선교의 시작으로 본다. 그 외에는 기독교 역사 첫 3 세기 이후에는 복음 전파에 그다지 큰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5세기의 성 패드릭 St. Patrick 이나, 13, 14세기의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St. Francis of Assisi, 그리고 레이먼드 룰(미주 2), 그리고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선교사가 된 후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에게 나아갔던 19세기의 죠셉 월프 Joseph Wolff 같은 사람들의 노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무슬림들에게 이루어진 선교의 역사만을 생각한다면 복음 전파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과 대면한 것은 대부분 습격하고 다니는 지하드주의자들(성스러운 전쟁을 외치며 종교의 이름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역자 주)을 피해 다니거나, 아니면 십자군으로 이들과 맞서거나, 그도 아니면 딤미(미주 3) 정책이나 개종으로 인해 가족과 삶에 엄청난 압력을 받는 경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리스도는 항상 순교자들(즉, 증인들)을 보냈고, 따라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삼으려고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생명과 신체적인 위험을 감수한 개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끔찍한 결과를 눈 앞에 두고서도 대단한 용기와 희생 정신을 발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글은 레이먼드 룰의 삶과 사상에 관해 나눔으로써 복음 전파가 소홀했었다고 여겨지는 기간에 대한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지금의 이시기가 전투적인 이슬람이 만연하고 무슬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교적인 노력이 지극히 도전 받고 있으며, 때로 선교사들의 극단적인 희생까지도 요구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룰의 삶과 본보기는 그가 살았던 시기를 생각해 볼 때 실로 놀랍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즈웨머 Zwemer 는 이렇게 적고 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찾아볼 수 있는 선교 정신은 십자군의 정신이 전부였다. 그들은 칼을 들었고, 칼로 망했다. 그러나 레이먼드 룰은 진정으로 놀랄만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십자군이 진정한 그 분의 무기인 용서와 평화를 가지고 십자가를 위해 싸웠다면 십자군은 세상에 어떤 존재가 되었으며, 어떤 일을 하게 되었을까?’(미주 4) 룰 자신은 이렇게 적고 있다: ‘많은 기사들이 바다를 건너 거룩한 땅으로 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무기로 무장하여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얻어내기 전에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다. 하지만 내게는 거룩한 땅의 정복은 사도들이 이루어낸 것처럼 사랑과 기도, 그리고 눈물과 피를 쏟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정복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미주 5)
룰의 삶과 사상을 나누려면 두 부분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첫 부분은 룰의 배경과, 교육, 개종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부분은 신학자와 철학자로서의 룰의 사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특히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그가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 설명한 것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룰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 여기에 제시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은 때로 적대적이기까지 한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나누기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한 그의 열정이다. 그것이 그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것이었고, 그의 사상과 철학도 오직 그 빛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피어스 Peers는 룰의 저술들 가운데 하나에서 다양한 주제에 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묵상서의 이차적인 주제들 가운데 특별히 부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개종에 대한 것이다. 이 책 한 권에서만도 룰이 그렇게 자주 이 주제로 되돌아가곤 한다는 것은 그 주제가 그의 삶을 지배하는 열정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미주 6) 그의 그러한 열정이 이 글의 요점이 될 것이다.

2 룰의 생애
레이먼드 룰은 스페인 동쪽 해안에서 좀 떨어져 있는 한 섬인 마조르카 Majorca 의 팔마 Palma 에서 1232/35년에 태어났다.(미주 7) 그는 레이먼드 룰과 엘리자베스 데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1232년에 아라곤의 왕 제임스 1세가 마조르카를 무슬림들의 손에서 재탈환한 후에 그 곳에 정착했다.(미주 8) 레이먼드의 아버지는 제임스 왕이 무슬림들에 대항하여 캠페인을 벌이던 시기에 십자군으로 제임스의 군대에 있었다. 전쟁 후 제임스는 그를 따르던 자들에게 넓은 지역의 땅을 상으로 하사했다.
룰의 아버지도 그렇게 땅을 하사 받은 사람으로 아들 역시 왕실에서 좋은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했다.(미주 9) 룰은 제임스 왕의 자녀들, 특히 제임스 2세의 교사가 되었다가 후에는 행정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한 삶의 방식은 그에게 덫이 되었다. 그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이 타락한 시기에 극도로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 술, 여자, 노래가 왕과 왕자들이 가장 즐기는 것들이었다.(미주 10)
룰은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노래와 궁전시도 잘 지었다. 하지만 그 주제는 주로 ‘불법적인 사랑의 기쁨’이었다.(미주 11) 그러한 생활은 그에게 두 자녀 도메네크와 막달레나를 낳아 준 블랑카 피카니와 결혼한 후에도 계속되었다.(미주 12) 방탕과 부도덕으로 얼룩진 그의 생활은 그가 32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어떻게 개종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피어스는 그 중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두 개 다 그의 전기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고, 어디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충분한 것들이라고 말한다.(미주 13) 여기에 소개되는 것은 가장 믿을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비슷한 사건이 룰의 저서인 휄릭스 Felix 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미주 14) 또한 여기 소개되는 이야기는 그의 개종에 대한 다른 설명들과도 잘 맞는 요소들이 많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룰은 결혼한 여인인 시그노라 암브로시아 집의 창문 옆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상아빛 목과 가슴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부인은 그를 불러서 그가 그렇게도 아름답게 여기는 그녀의 가슴을 보여주었는데 그 가슴은 끔찍한 암(cancer)에게 먹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생각을 바꾸도록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레이먼드, 나는 따르라.’ 그는 그의 궁정 직위를 버리고, 그의 모든 자산을 판 후 로다 혹은 라다라고 하는 산에 있는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이것은 1266년의 일이었다.(미주 15)

개종 후 룰은 몇 달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내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슬림 선교를 위해 부르셨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미주 16) 그러나 그는 성직자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라틴어와 아랍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에서 일했던 그의 경력이 왕과 왕자들, 그리고 교황까지도 설득하여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서 선교사들을 준비시켜 ‘영적인 십자군’이 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룰은 자기 자신이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미 고난 당하신 주님처럼 자신도 고난 당하기를 바랬다.’(미주 17)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9년 동안을 신학과, 철학, 논리, 의학, 그리고 특별히 아랍어를 공부하면서 보냈다. 아랍어를 공부하기 위해 그는 무슬림 노예를 사서 그가 아랍어와 이슬람에 관해 자신을 가르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팔마에 사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과 논쟁도 하게 되었다. 그는 제임스 2세의 보호 아래서 이런 일들을 해 나갔는데, 제임스 2세는 왕자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룰은 또한 이 시기에 꾸란과 알-가잘리의 Al-Ghazzali 글들도 연구하고 싶어했다.(미주 18) 그 결과로 그는 논리와, 철학, 그리고 몇 가지 다른 분야들에 대한 저술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주요 저술은 묵상서 the Book of Contemplation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그것을 아랍어로 저술하였다.(미주 19) 그는 또한 라틴어와 자국어인 카탈란어 Catalan 로도 저술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서구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정교한 철학 논문을 작성한 첫 그리스도인 저술가가 되었다.(미주 20)
그가 자신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게 하려고 사들인 노예는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주인을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룰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고 9년 전에 했던 것처럼 한동안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반박할 수 없는 기술 Art (즉, 방법)을 만들어 내서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사람들 위에 서게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미주 21) 이 책의 제목은, 시리즈로 볼 수도 있는데, Ars Magna 혹은 Ars Generalis 이다.(미주 22) 보너 Bonner 는 그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 (노예의 자살) 후에 라몬은 집에서 그리 멀리 않은 어떤 산에 올라갔다. 평온함 가운데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기 위해서였다. 거의 일 주일 가량을 머물렀을 때, 어느 날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주님께서 앞에서 말한 그 책의 저술에 대해 어떻게 믿지 않는 자들의 오류를 보여줄 것인지 그 형태와 방법을 그의 마음에 떠올려주셨다.(미주 23) 그 책은 원래 묵상서가 될 것이었지만, 그리고 묵상서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한 룰의 모든 사상이 그 책에 드러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 책의 형태를 구성하고, 어떻게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에 있었다.(미주 24) 이것이 새롭게 영감을 받은 그 기술에 대한 주요 과제가 될 것이었다. 이제 42세가 된 룰은 그의 역작이 될 저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시작하고 있었다.(미주 25)

룰의 사상과,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변증법을 살펴 보기 전에, 룰이 개종을 하고 9년을 배우는 것에 사용한 후, 그 생의 나머지 40년이 어떠했는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룰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 볼 때, ‘영적 십자군’을 시도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여 그 가치를 깨닫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여행하고, 가르치고, 왕과 교황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수 일, 수 개월을 보냈다. 그 모든 것이 그가 갖게 된 비전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의 열망이 외면당한 적도 많이 있었지만, 그가 무언가를 이루어낸 것도 있다. 룰이 80세가 되었을 때 그는 비엔나에서 열린 협의회(1311-1312) 에 참석하여 동양어(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 Chaldean )를 가르치는 언어 학교를 설립할 것을 교황에게 직접 건의 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Paris, Oxford, Bologna, Salamanca, 그리고 교황청 Papal Court 에서 학생들이 이 언어들을 배우고 선교사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룰의 가장 큰 업적은 그의 선교 여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북아프리카로 세 번 그런 여행을 떠났다. 처음에는 튜니지아의 수도 투니스로 가서 무슬림 학자(울레마)를 만나 그들 종교를 자신에게 확신시킬 수 있으면 자신이 무슬림이 되겠노라고 제안했다. 며칠 동안의 논쟁 후 그 도시의 이맘들과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 중 몇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술탄에게 가서 룰을 감옥에 가두고 처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좀 더 유순한 리더의 중재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항구로 보내져서 몇 명 안 되는 믿는 자들과의 몇 번의 은밀한 접촉 시도 후에 강제로 유럽으로 보내졌다. 이 때가 1291년 혹은 1292년이었을 것이다. 룰은 평생에 두 번 더 그런 여행을 했는데, 마지막 여행은 1315/16년에 있었다. 그 여행은 알제리아에 있는 Bougie시에서 83세의 룰이 성난 무리들의 손에 순교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의 몸은 마침내 팔마로 다시 보내져서 샌프란시스코의 교회에 아직도 묻혀 있다.

어떻게 해서 무슬림들의 신 개념에 대한 룰의 접근이 무슬림들에게 그렇게도 위협적이었으며,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진리를 잘 드러낸 것으로 보이는가?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룰의 변증적, 복음주의적 방법과 관련된 그의 신학적 철학적 개념들을 좀 살펴볼 것이다. 특히, 룰의 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와, 그가 사용한 기술의 성격, 그리고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인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그의 접근 방법을 살펴볼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룰의 변증법의 기초가 되고 있는데, 이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이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제시되는 이 두 교리에 대한 설명은 룰의 책인 “이방인과 세 현자의 책 Book of the Gentile and the Three Wise Men”에서 가져온 것이다.(미주 28)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비록 룰이 학자이고 학자적인 방법으로 논증하고 있지만, 그가 한 개종의 경험이 그의 철학과 선교사로서의 방법론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즈웨머가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룰의 내적 생활의 열쇠가 되는 것은 그의 개종의 경험이다. 성육신적 사랑이 육적인 사랑을 극복했고, 룰의 모든 열정과 천재적인 시성 poetry 이 십자가를 향한 복종에 쏟아졌다. 그가 젊어서 본 비전이 그가 나이를 먹은 후에 내세운 모토를 설명해 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있지 않은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He who loves not lives not; he who lives by the Life can not die.’ 고난 당하시는 구세주 이미지는 그가 산 50년간 줄곧 그를 살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스도 그 분을 향한 사랑이 그의 가슴을 채웠고, 그의 정신을 빚었고, 그의 펜 pen 에 영감을 불어 넣었으며, 그의 영혼이 순교의 관 crown 을 간절히 소망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계시에 대한 그 큰 신비에 대해,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합당한 증거를 찾아내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비전을 회상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 증거였던 것이다.(미주 29)

3 룰의 사상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의 개종에 대한 룰의 관심이 그의 사상과 저술들에 나타나는 주요 동기요 중심이 된다. 그는 철학이 신학에 보조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강조했는데, 개종에 대한 룰의 관심만이 그가 철학에 대해 취했던 이러한 태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 줄 수 있다.(미주 30) 룰이 살았던 시대는 유럽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사상가들의 개념들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중에 있었다. 이 사상들은 중동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정교회 수도승들과 이븐 시나(아비시나) Ibn Sina (Avicenna)와 이븐 라쉬드(아베로스) Ibn Rushd (Averroes) 같은 무슬림 철학자들과 주석가들이 지니고 있었던 것들이 새롭게 소개된 것들이었다. 이 시기는 아랍 이슬람 세계가 가지고 있던 것들에 철학과 학문이 동요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룰은 그런 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 받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도하려면 그 자신이 그런 사상들을 섭렵하고 반박해서 기독교 신앙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도적 관심에 붙들려, 룰은 철학과 신학 사이에 분리의 벽을 세우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는 그의 전 생애 동안 매우 뜨거운 논쟁거리였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베로스의 주석들과 기독교 세계에 속해 있는 그의 추종자들, 즉 ‘의심스러운 진리 double truth’라고 알려진 것을 지지했던 라틴 아베로스들 Latin Averroists(즉, 기독교 세계에 살면서 아베로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역자 주)로부터 시작했다. 의심스러운 진리 이론은 철학적으로는 진리일 수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아직 진리라고 볼 수 없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이론이다.(미주 31) 룰은 그런 개점이 지식인 무슬림들 사이에 기독교 메시지가 살아날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보았다. 그는 이성이 가장 깊은 신앙의 신비를 믿을 수 있는 이성적인 바탕을 제시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St. Ramon de Penyafort 과 Ramon Marti 같은 그보다 앞선 도미니크 수도사들을 비판했다. 이들은 발렌시아에서 룰처럼 비폭력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여 무슬림들을 기독교로 이끌었지만, 룰은 마티가 기독교의 합리성을 보여주는 이성의 역할을 무시했기 때문에 튀니지의 술탄 al-Mustansir를 개종시키는데는 실패했다고 보았다.(미주 32) 마티는 술탄이 이슬람의 진리를 포기하도록 설득했지만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시키는 데는 실패함으로써, 그 술탄이 이슬람의 진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오히려 못한 상태를 만들었다.(미주 33) 룰은 이것을 큰 비극으로 보았으며, 그가 생각해낸 방법 Art 을 적절히 사용하면 이러한 비극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필연적인 이유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코플레스톤 Copleston 은 철학에 대한 룰의 태도와,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 목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준다:
무슬림들의 개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철학이 신학에 종속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주장뿐 아니라, 이성의 능력으로 신앙의 교리들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게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바탕으로 ‘필연적인 이유들 necessary reasons’로 신앙에 대한 문제들을 ‘증명’하려 하는 그의 제안을 이해해야 한다. 그가 기독교의 신비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합리화하려고 할 때 그것은 St. Anselm 나 Richard of St. Victor가 삼위일체에 대해 ‘필연적인 이유들’을 말한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룰은 신앙이 이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다룬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그는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에서 믿는 것들이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것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더 나아가, 아베로스들이 받은 비난, 즉 그들이 ‘이중 진리’를 붙잡고 있다는 비난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믿으면서, 룰은 신학과 철학이 갈라서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신학적 교리들이 이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성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미주 34)

이러한 ‘필연적인 이유들’을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룰은 알고 있었다. 무슬림들과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충돌을 피하면서, 어느 정도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타당성을 보여야 했을 것이다. 룰은 자신이 이성주의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섬세한 조화를 강조하고, 그의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그런 노력에 따르기 마련인 위험을 피하기 위해 룰은 종종 세 종교 모두에 존재하는 기초적인 전제(신학적, 철학적)부터 출발하는 것을 선택했다.(미주 35) 보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룰은 신에 대한 일련의 전제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은 존재하시고, 한 분이시며, 모든 것의 근원(first cause)이 되시고, 등등. 그리고 나서 그는 세 종교 모두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의 속성으로 들어간다 (비록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룰은 이러한 속성들을 특성 properties, 미덕 virtues, 이성 reasons (rationes), 혹은 종종 위엄 dignities 이라고 칭한다.(미주 36)

룰은 그의 사상의 하위 구조가 되는 신과 세계에 대한 다섯 가지 원칙을 나열한다.(미주 37)
1. 신은 그 자신의 본질적인 함과, 위대함, 영원성, 능력, 지혜, 의지, 미덕, 진리, 영광을 가지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9가지 이상 되는 신의 속성들을 나열한다. 따라서 여기에 나열된 것들이 모든 속성을 다 나열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2. 이 속성들 혹은 위엄들은 서로 대치됨 없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본질이 합쳐져서 그 속성들이 서로 융통성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 속성들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한 분 이라는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단순함의 개념이다.)
3. 이 위엄들은 실재하는 것이다.
4. 실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룰의 사실주의적 존재론을 보여준다.)
5. 각 위엄들은 이 세상에 있는 각 창조물의 역량에 맞도록 영향력을 발휘하여, 각 창조물들이 그들의 제 1 원인이 되는 것 (즉, 신)을 닮도록 한다. 각 창조물의 역량은 그 창조물이 얼마나 그 위엄과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설명을 하면서 룰은 창조물이 하나님의 속성에 맞는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매우 일반적인 중세 사상을 반영한다. 룰은 사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구조를 갖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그의 방법(Art)의 목적은 ‘진리를 알고 그에 동의하는 방법이 가능한 한 실재하는 방법에 가장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The aim of his Art was ‘to make the modus intelligendi [the mode or manner of knowing or assenting to truth] conform as closely as possible to the modus essendi [the mode or manner of existing or imbibing/exuding essence].’) (미주39)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신비를 우주 구조의 한 부분으로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설명’ 혹은 증거가 ‘필요한 이성’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미주40) 보너는 룰의 방법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가 그 방법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룰 자신도 조심스럽게 지적했듯이 논리도 아니고 형이상학도 아닌 오히려 그 둘 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본질에 대한 가장 확실한 설명은 룰이 사용한 ‘방법(Art)’ 이라는 말에 있다. 그리스어 tevcnh를 학문적으로 해석한 이 말은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리가 아니라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룰은 전체 우주 구조 the modus essendi 를 가지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다른 구조를 올려놓고 있는데 그것은 그 최초 the first 와 관련되었고 또 그것에서부터 나온 the modus intelligendi의 구조이다.(미주41)

이와 같은 룰의 사상의 대체적인 윤곽을 가지고 우리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타당성에 대한 그의 주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서 우리는 그의 주장을 소개할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과 룰에게 미친 중세 철학자들의 다양한 영향에 대해서는 미주와 참고서적 목록에 소개되어 있는 저술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룰의 작품인 ‘이방인과 세 현자의 책’ (Book of the Gentile and the Three Wise Men)은 룰의 일반적인 변증학적 접근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그가 란다 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쓰여진 비유적인 allegorical 책이다.(미주 42)

네 인물이 있다: 이방인, 유대인 현자, 기독교인 현자, 그리고 무슬림 현자.
이 가운데 세 대표자들은 유일신 종교를 믿고 있고 종교적 문제와 관련해 종종 모이게 되는 친구들이다. 이방인은 먼 땅에서 온 사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는 동안 그 세 친구들은 한 훌륭한 목초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그 곳에는 다섯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에 물을 대는 한 샘이 있다. 그 샘 옆에는 지성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을 만나서 그들은 그 다섯 그루의 나무들이 무엇인지 그 각각의 꽃들에 쓰여져 있는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미주 43) 그녀는 그 나무들과 꽃들이 하나님의 본질, 창조되지 아니한 미덕 virtues, 창조된 미덕, 죽음에 이르는 죄,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 이외의 많은 사항들 conditions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라고 설명한다.(미주 44) 더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고, 알고,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 모든 사항들이 꽃들을 다스리는데, 그 꽃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고, 심지어는 그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교정하는 원리요 교리가 됩니다.(미주 45) 그 여인이 그들 셋을 떠나간 후에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여러분 하나의 분파에 속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해 harm 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종교에 속할 때 오는 좋은 점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이 나무들 아래에 앉아서 꽃들과 이 나무들이 나타내는 사항들에 따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권위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으니, 논증적이고 필요한 이성 demonstrative and necessary
reasons 에 의해 어떤 동의점에 도달하도록 해 봅시다.”(미주46) 그들이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그 이방인이 그 장소에 도착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자 그가 누구든지 자신에게 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이방인의 책 the Book of the Gentile’은 시작이 된다. 결국, 각각의 세 현자는 그 이방인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고, 그 와중에 그 이방인은 교리의 성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각 현자들이 대답을 한다. 룰은 유대인과 무슬림의 신앙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그의 이 두 신앙에 대한 설명은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바르게 보여주는 것은 룰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이것이 바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부 한다고 보는 것이다.-역자 주) (미주47)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시대에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미주48)
- 계속됩니다.
원본바로가기 Raymond Lull: Medieval Theologian, Philosopher, and Missionary to Muslims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내부자 운동, 무엇의 내부인가, 교회, 문화, 종교?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가?

내부자 운동, 무엇의 내부인가, 교회, 문화, 종교?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가?
원제: Inside What? Church, Culture, Religion and Insider Movements in Biblical Perspective
글쓴이: KEVIN HIGGINS

1. 서론
소위 ‘내부자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선교학자들과 선교 현장에 있는 사람들 내에서 점점 더 많은 논의가 일어나고 있으며 많은 논쟁점들이 대두되고 있다. 본 글은 이 계속되는 논의 가운데 교회와, 문화, 종교의 세 주요 요소에 대해 간단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이 주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 다섯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부자 운동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종교와 문화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선교 실재에 있어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2. 내부자 운동이란 무엇인가?
2004년과 2007년 사이에 내부자 운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문제의 양면에 대한 글들이 내부자 운동이라는 주제로 발표되었는데 그 중 몇 개의 중요한 글들은 국제 저널 프론티어 선교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logy) 에서도 발표되었다.국제 단체 프론티어 선교의 관련자들이 모두 모여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가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심사 숙고하였고, 그 결과 역시 출판되어 나왔다.[1]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내부자 운동에 대한 생각을 다듬기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두 개의 결과물을 내 놓았다. 나는 좀 더 길게 내부자 운동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점점 더 많은 수의 가족들과, 개인들, 부족들, 친구들 그룹이 종교를 포함하는 그들의 인종 문화권내에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이 신실한 제자들은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문화권 안에 머물면서, 그리고 성경이 인정하는 한 그 문화의 종교적 삶을 살면서 문화적으로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자신들을 표현할 것이다. 성령님 또한 성경 말씀과 그 분의 사람들을 통해 그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적 삶과 세계관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실 것이다.[2]

레베카 루이스(Rebecca Lewis)가 최근에 좀 더 짧은 정의를 내렸다: 내부자 운동은 그들이 원래 속해 있는 공동체내에 그 공동체와 함께 머물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여느 다른 운동과 같다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들은 아래의 두 가지 구별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1 복음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공동체에 또는 사회 구조 내에 뿌리를 내리고, 그 공동체 혹은 사회 구조가 ‘교회’가 이루어지는 주요 장소가 된다.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사회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계속 유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살아간다.[3]

위의 두 정의 모두에서 공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자 운동은 사람들의 운동 혹은 대중운동의 특징을 겸비하고 있으며, 종종 C5라고 일컬어지는 관점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4]

위의 두 가지 정의에서, 종교를 어떻게 가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3. 교회란 무엇인가?
루이스가 제안한 내부자 정의는 교회가 이미 존재하는 사회 구조 안에 세워질 수 있다,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기존의 사회 구조가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이 개념이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는 하였지만,[5] 선교학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선교 문헌에서 대중 운동은 이와 유사하게 기존의 구조 (가족, 마을, 부족)가 단체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6] 성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신약의 단체 개종의 예는 고넬료, 루디아, 빌립보 감옥의 간수, if Sychar?? 마을이 있다.

그러나 내부자운동의 교회학은 적어도 두 가지 방향에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논쟁으로, 내부자 운동으로 세워진 교회에 내부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포함하는 사회 정체성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이제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방향에서 제기되는 의문은 내부자 운동의 신자들과 좀 더 폭 넓은 교회와의 관계를 염려하는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됨을 염려하는 소리이다.

나는 먼저 그리스도의 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이전의 종교 상황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나는 여기서 종교에 관한 논의보다는 다중 정체성의 가능성에 관해 몇 가지 코멘트를 제시하고 싶다.[7]

먼저, 교회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다(에베소서 2:8-10). 어떤 의미에서 아무도 교회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교회의 일원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서 삶의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요청 받는다.

따라서,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삶의 다른 면에서의 그의 정체성과 겹쳐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에베소서에서 종들과 주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님께 하는 것처럼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변화 되는 첫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교회의 첫째가는 전략은 사도행전 14:21-28에서 열거되어 있는 것들(잃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을 제자 훈련하고, 제자들을 격려하고 강화하고, 각 교회의 지명된 장로들을 택하여 훈련하고, 복음의 지속적인 확장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서로 연결되고 참여하는 것)과 같은 기능들을 통해 스스로 증식하는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전통적인 말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 동일한 성경적 기능들이 내부자 운동 안에서 변형된 형태와 용어로 일어날 수 있다.[8]

셋째로, 비록 교회가 우리가 방금 사도행전 14장에서 지적한 그런 구조로 발전한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성전과 회당에 여전히 참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종교적 표현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된다.[9] 그들은 또한 가정과 성전 마당 같은 공공 장소에서도 만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의 모임을 가졌다.[10] 믿는 자들은 성전 예배에서 교회의 일원이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가정 모임에서 유대교의 일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11] 그들은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12]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메시야를 따르는 유대교 신자들의 성전과 회당으로부터의 분리가 박해와 파문, 그리고 회당의 의식(liturgy)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겨냥하는 저주가 포함되면서 촉진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3] 이 분리는 신자들 편에서가 아니라, 이전 종교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더욱 선동되었다. 분리가 일어날 때 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고 심지어 분리가 발생했을 때도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14]

넷째로, 제자들은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전의 구조에 남아있었다. 내부적 접근은 사람을 정직하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는 구조 안에 남는다는 것은 그 구조의 신학과 종교에 동의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15]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들과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분명히 나타났고, 점점 더 커졌다. 그 차이는 이미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부터 존재했고, 그 결과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초기 설교들에서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50년 이상 동안 완전한 결별은 일어나지 않았다.[16]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닫힌 모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다른 사회 혹은 심지어 다른 종교 구조나 종교적 표현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17] 아래의 종교적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질문의 두 번째 단계는 좀 더 폭넓은 몸의 하나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5장은 ‘운동들’ 사이에서 하나됨과 교제에 대해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을 적용하려고 하면 하나됨에 대한 두 가지 ‘간단한’ 대답을 찾게 된다. 그 한가지는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시며, 따라서 우리가 내부자들 가운데서 구별된 운동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본문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과 갈라디아서 3장을 보라.)

반면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운동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고린도 전서 9:19 하반절에서 바울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21장 17절 하반절의 메시야를 따르는 토라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 예가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15장은 두 가지 경우 모두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새로운 운동을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각각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살도록 자유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분리된 운동들이 서로 상대편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로 인정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인들이 분명히 가끔만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제그룹으로 만난 것이 분명하다. 로마서 14장과 15장은 이러한 현실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적어도,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서신서, 특히 바울의 서신서에 나와 있는 적지 않은 분량의 자료들이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 문제들은 두 운동의 분리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이 아니라, 어떻게 서로 상호 반응해야 하는 가에 대한 것들이다.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종종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자체는 성경적으로 분명해 보인다.

내부자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여러 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안전의 문제를 염두에 둔 채,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된 모임이 되기 위한 상황에 대해 주의 깊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오는 내부자들과, 다양한 교파 배경을 가진 바깥 사람들이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씩은 모여서 일주일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다른 상황에서는, 내부자 운동이 의도적으로 잠잠하면서 자세를 낮추고, 그러나 국제 기독교 교파와 공식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연결은 서로 각자의 사역과 정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부자들은 내부자들이 되는 것을 그만두도록 요구 되지 않을 것이다. 교파 지도자들은 내부자들의 사역과 ‘안수’를 인정해준다. 이 연결에는 재정적인 차원은 관련되어 있지 않다.[18] 이것은 좀 더 신실한 종말론적 ‘전 세계적인’ 교회 즉, 본질적으로 지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교회[19] 차원의 매우 유익하고,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교회에 대한 정체성과 하나됨의 관점에 대한 문제들을 개괄해 보았다. 결론을 내려 보자면, 내부자 운동은 그리스도의 몸에 있어서 그리고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그들의 삶의 상황에 있어서 지역적 성육신적 정체성의 복잡한 혼합으로 표현되는 교회의 파라다임을 나타낸다. 동시에, 우리는 성격이 말하는 하나됨의 문제를 더욱 자세히 그리고 실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종교적인 질문으로 돌아서야 할 때이다.

4. 우리는 종교와 문화를 분리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새로운 신자들이 그들의 문화에 남아 있으면서, 성경적 진리를 비판적으로 잘 적용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건전하고 좋은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0]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해서는 적응(accommodation)과, 토착화(indigenization), 문화화(enculturation), 그리고 상황화에 대한 계속된 논의의 역사와 그 전제들에 대한 특별한 이론들을 깊이 있게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21]

일반적으로 자신의 문화에 남아 있는 것이 항상 종교적인 면에서도 그 문화에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또한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문화인류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것으로 보인다. (즉, 문화인류학자들마다 각각 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는 뜻이다 –역자 주) 어떤 단순한 정의는 문화를 ‘특정 인간 집단의 전통, 그 집단의 구성원들로부터 배웠고, 서로 공유하고 있는 삶의 방식’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22] 이 정의는 주로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좀 더 인식력이 있는 문화에 대한 이해는 Spradley의 다음과 같은 정의이다: ‘문화는 사람들이 경험을 해석하고, 행동을 유발하는데 사용하는 습득된 지식이다.’[23] 이러한 폭 넓은 설명은 종종 그보다 좀 더 좁은 영역으로 이루어진 하위 구조를 갖게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졌는데, 주로 문화, 경제, 사회 구조, 가치들, 세계관 등의 영역으로 이루어졌다.[24] 이 두 관점은 서로 완전히 다르지 않은데, 그것은 분명하게 서로 관계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행동과 그것을 생산하고, 해석하는 인식적인 구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논의에서 종교가 끼어들 자리가 어디인가? 모든 언어가 종교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와 일반적인 유럽언어들에서 종교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누군가를 신들과 묶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많은 언어들에서 종교를 나타내는 구별된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언어란 ‘문화에 대한 친밀하고 정확한 표현’[25]이라는 라민 싸네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종교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어떤 세계관에서는 종교와 문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26]

비록 일부 세계관에서 문화와 종교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로서의 종교’라는 제목이 붙은 섹션에서 Malefijt 는 종교를 ‘그가 소속된 사회에서 사람이 습득하게 되는 조직화된 믿음과, 가치, 그리고 행동 양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27]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종교는 분명 문화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Malefijt가 책 제목을 ‘종교의 인류학’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저자는 단순히 ‘인류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의 한 장으로 종교를 다루기 보다는, 종교라는 제목을 따로 붙일 만큼 충분히 종교가 구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Danial Shaw는 문화의 하위구조를 몇 가지로 제시하는데, 경제와, 이데올로기, 친족관계, 사회구조, 그리고 정치 구조가 이에 해당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원인과 현재 상태, 그리고 미래와 연관된 믿음과 관찰의 체계’라고 정의된다.[28]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종교적 믿음과, 실천들, 구조에 대한 표현을 포함하는데 반하여,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특별한 종교 형태들은 근원적인 문화적 실재의 연장이 된다.[29]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문화의 하위 구조(이데올로기)의 하위구조(종교)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자세하게 문화의 하위 구조로서의 종교를 살펴 보도록 하자.[30]

Malefijt와 Shaw는 모두 종교를 인식적이고 행동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Shaw는 또 다른 요소를 첨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 구조이다. 논의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나는 믿음과, 행동과 소속으로서의 종교의 세가지 면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제자가 된 사람이 그가 속했던 종교에 계속해서 머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종교에 대한 이 세가지 관점 모두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즉, ‘남는다’는 의미가 믿음의 차원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행동이나 소속의 차원에서 혹은 이 세 요소들 중에 두 개가 서로 연합된 차원에서 그런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어느 정도나 그 사람이 남아있는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31] 이제 문화와 종교에 대한 질문에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5. 종교란 무엇인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 논할 때 세 가지 차원의 유형을 사용한다: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가 그것이다.[32] 다른 종교들에 대한 그 각각의 접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정의를 살펴보고자 한다.[33]

배타주의: 기독교가 아닌 모든 다른 종교들을 인간 스스로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한 반역적인 시도로 보거나 혹은 사단의 활동을 본다.[34]

포용주의: 그리스도가 모두의 주님이시고, 모두에게 빛을 주시는 참 빛이라는 사실에 기인하여, 비록 사람들이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종교와 문화에서도 예수님이 활동하고 계시다고 본다. 종종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통찰을 가장 잘 완성시킨 것으로 여겨진다.[35]

다원주의: 모든 종교가 다 동일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일부 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길이지,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36]

단순히 ‘이 세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성경적 입장인가?’ 하고 묻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그렇게 질문한다는 것은 이 세가지 입장 중에서 하나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먼저, 우리는 ‘종교’라는 형태의 가면을 쓴 반역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것으로 성경에 종교가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서 1:18ff에서 말하는 것도 그 일부이다. 예언자들은 우상들이 사람이 만든 조형물이고,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들만이 그런 우상에 경배한다고 증거한다. (이사야 40장의 예를 보라)

둘째로, 어떤 본문에서는 종교가 사단의 활동과 연관되어, 사단과 맺어진 것으로 그려진다. 고전 8-10은 우상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 숭배는 사단을 숭배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라. 갈 4장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 아닌 자들’에 매여 있었다고 말한다(8절).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율법아래에 있는 것은 초등한 영에 매여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2절). 엡 2장은 모든 사람들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있었고, 그것은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세력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전에는 우리(유대인들)도 다 그 가운데서 지냈다고 말한다.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이 타종교들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도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방 제사장)의 만남은 창세기의 저자가 엘과 야훼를 같은 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37]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다는 사실은 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이 인정 받았다는 것과, 따라서 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은 신약의 멜기세덱에 대한 관점에서도 더욱 확고해 지는데, 신약은 멜기세덱을 메시아의 가장 결정적인 선임자중에 하나로 보고 있다. 이는 다른 종교 전통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이 된다.

아모스는 비유대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출애굽기 사건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것과 동일한 관계로 기술한다 (아모스 9:7) 하나님은 이 다른 민족들과도 먼저 관계를 맺기 시작하신 것이다.

이방 선지자 발람은 선견자로서 징조와 점치는 것을 사용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과는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들었다 (민 22-24). 그는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관계는 그가 점을 치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민 23:1ff).[38] 요나서에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순종하는 것이 히브리인인 요나가 아니다. 야훼께서 들어주신 기도는 다름 아닌 이방 뱃사람들이 드린 기도였다. 그들이 제비를 뽑았을 때, 그 대답으로 이끄신 것도 바로 야훼 하나님이셨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서 갔고, 성경의 예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인도함을 받아서 그들이 어디로 가야 그리스도가 나신 곳으로 갈 수 있는지 정확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사도행전 17장은 사람이 태어나는 때와 장소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획하신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신 것은 모든 남녀가 그분을 찾고 마침내 그 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17:27을 보라). 이는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성경의 내용들을 통해 내가 내리는 결론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종교를 논할 때 고려하는 세 가지 유형들 모두 정확하게 성경적인 관점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39]

먼저 내가 이해하는 성경의 입장을 요약하고 나서, 각각의 세 입장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인간들은 반역과, 왜곡을 저지르고, 그것이 일반 계시든, 특별 계시든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한다. 이방 종교들의 경우 이것이 사실이고, 바울에 의하면,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종교들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이를 논지로 삼고 있다).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잠정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일부 사람들이 그런 관계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둘째로, 살아있으면서 우리를 속이는 악한 영이 존재한다. 그 속이고, 타락시키는 영향은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고, 종교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가지 점은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비록 잠정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는 있어도, 그리고 실제로 몇 명을 그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모들 사람들이 그런 관계 가운데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셋째로, 위에서 언급한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거기에는 이 세상의 종교들도 포함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가 보통 ‘그분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제한되지 않고 그 경계와 범주를 넘어 사람들을 그분께서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넷째로, 몇 몇의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이스라엘이나 교회라는 범주를 넘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그러한 관계가 구원으로 연결되는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들은 정확하게 별의 인도함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성경을 통해 더 먼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했다. 고넬리우스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보내 복음을 설명해 주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성경 자료들을 요약하면서 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종교 생활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포함하지만, 교회보다 더 크다. 그 나라는 우주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의 모든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종교도 포함된다.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또 다른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람들의 충성과 마음과 생각에 대한 전투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타종교를 다루는 모범이 되어 버린 세 가지 차원(배탖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의 모델과 이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을 어떻게 비교해야 할까? 세 가지 차원의 모델이 어떤 면에서 성경적으로 맞고 또 그렇지 않을까?

배타주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향한 유일한 길이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라는 사실을 바르게 지적해 준다. 그러나 이 모델은 내가 위에서 세 번째로 제시한 성경적 관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소위 ‘진정한 종교’로 불리는 것 내에 존재하는 잠정적인 인간의 반역과 사단의 속박을 보지 못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된다.)

포용주의 모델은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약속의 백성의 범주를 넘어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바르게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동방박사들이나 사도행전 17장과 같은 일들은 종종 복음과 예수님 그 분에 대한 좀 더 확실한 만남으로 결론지어진다는 사실이다.

포용주의자들은 멜기세덱의 예를 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는데, 그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인들의 ‘엘’과 유대인들의 ‘야훼’를 같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용주의자들이 그러한 멜기세덱의 예를 들면서 따라서 모든 종교는 같은 방향으로 인도된다는 결론에 이를 때 그것은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 반대되는 이유로 제시했던 많은 성경적 자료들을 무시해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포용주의자들의 입장은 인간의 죄와 영적인 악함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40]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선교하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종교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이 세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든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하는 반응을 요구할 것이다. 각각의 특정 종교 상황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모든 경우에 똑같이 들어맞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그가 이전에 속했던 종교에 머무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이제까지 한 논의에 따르면, 이 질문의 대답은 특정 종교 상황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머무른다’는 표현이 적어도 세가지 믿음, 행동, 소속의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잇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 우리가 실제로 선교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한 논의들이 선교 실제에서 의미하게 되는 것들을 몇 가지 제시하면서 적용해 보고자 한다.
6.1복음의 중심성 유지
우리가 위에서 한 어떤 논의도 선교실제에서 전도를 중심에 놓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한 모든 논의들은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더욱 확증해 준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기 위해 많은 것을 사용하신다. 심지어 다른 종교도 사용하시지만 여전히 복음만이 유일한 길이다.
6.2 실제적인 비판적 숙고 Engage in Concrete Critical Reflection
하나님이 만일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다른 종교에서도 활동하고 계시다면,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이 여전히 이전의 종교 안에 머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맞는 말일 수도 있게 된다. 그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정말로 맞는 말인지, 또 어느 정도나 맞는 말인지는 그 독특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고, 또한 어느 만큼이나 그 상황이 반역적이고, 사단에 매어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 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서도 역사하신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진리가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될 수 있고, 또 그에 대한 반응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성경적인 내용을 계속해서 알려주고, 적당한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제자들이 그들의 이전 종교 상황 내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41] 이러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실제 상황 안에서 계속해서 비판적인 숙고를 해 보아야 할 것이다.
6.3 관점에 있어서의 지속적인 개종 Keep Conversion in Perspective
앞에서 한 논의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개종’의 의미를 굳게 붙들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개종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는 소속적인 의미 보다는 마음과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로마서 12:1ff).
6.4 ‘보편적이면서도 지역적’인 교회 되기 Encourage ‘Glocal’ Expressions of Church
내부자 운동의 지도자들이 실제적이고 의미 있는 방법으로 서로 축복이 되는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은 성경적 의미의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안전한 방법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 그러한 관계를 맺을 내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찾아 내는 것, 존중과 형제 된 겸손함으로 그러한 만남을 이루어 나갈 사람을 찾아 내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도전이 될 것이다.
6.5 상황에 맞는 성경적 신학 개발 Develop Biblical Theology in Context
본 논문에서 제시한 내가 내린 내부자 운동의 정의에 의하면, 우리는 선교 실제에 있어서 ‘내부자’들이 그들의 재능을 개발하여 자신의 문화적 상황에 맞는 성경적 신학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42] 그러한 노력에는 상황에 맞는 성경 번역과, 비판적 숙고를 위해 계획된 과정, 그리고 내부자 자신들의 능력 향상이 포함된다. 상황에 맞는 성경 신학은 하나님의 영이 계속해서 역사하시면서 당신의 사람들의 만들어가시고, 고쳐 가시는 방법이 될 것이며, 혼합주의를 막는 안정장치가 될 것이다.[43]
6.6종교를 신앙과, 행동, 소속의 기반으로 보는 관점 View Religion as a Matrix of Belief, Behavior and Belonging
나는 이처럼 세 부분으로 된 분류법을 이미 몇 번 언급하였다. 이제 어떻게 그것이 적용될 것인가 하는 전체적인 틀을 제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성경의 예를 들면서,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종종 인용하는 왕하 5:44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예로 택하고자 한다.
신앙: 나아만 장군의 경우 적어도 그의 신앙의 어떤 부분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15절).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옛 사고 방식이 일부 남아있다: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기 때문에, 그는 아람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스라엘의 흙을 좀 달라고 청한다 (17절). 예언자는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흙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을 묵인한다. 내부자의 신앙 체계가 변하는 과정은 역동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는 분명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행동: 내부자 옹호자들은 나아만이 림몬 신당에 계속해서 들어갈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8, 19절). 분명 이것은 행동에 대한 것이고, 옛 종교에 남아 있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아만의 행동에도 역시 변화가 있었다. 나아만은 이제부터는 다른 신에게는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17절). 이것 역시 행동이고, 과거의 모든 행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44]
소속: 나아만은 아람 사람으로 남는다. 그는 유대교 개종자가 되어 율법을 지키는 외국인이 되지 않았다. 그는 아람으로 돌아갔다 (19절). 그는 이스라엘의 적인 아람 군대의 장관 자리로 돌아갔다 (18절에 분명하게 그렇게 암시되어 있다). 그의 종교적인 소속은 어디라고 해야 할까? 아람으로, 그리고 림몬 신전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아람 사람들은 그를 림몬에 속한 사람들에게 ‘속해 있는’ 사람으로 볼 것이 분명하다.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서 우리는 복합적인 상황을 본다. 그의 신앙과 행동의 일부는 변했지만, 다른 부분은 이전과 동일하게 남아있다. 소속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는 이전과 다름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점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경우에 우리의 지혜로운 반응은 왕하 5:19절과 같이 ‘평안히 가라’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7. 결론
Charles Kraft는 새로 오게 될 서구 선교사들에 대해 한 나이지리아 그리스도인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그 나이지리아 인은 전통적인 부족 종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선교사들이 와서는 성경의 하나님과 나이지리아 인들이 믿는 하나님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이 그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 선교사들을 보내서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을 이해하고 헌신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45] 그는 새로 올 선교사들이 그것을 좀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부자 운동 패러다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민족들 사이에서 (여기에는 종교도 포함된다) 직접적으로 일하고 계시면서, 각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그분의 운동이며, 그분이 진정한 내부자이시다.
[1] 특히 Tennent, Timothy의 글을 주목하여 보라. ‘Followers of Jesus (Isa) in Islamic Mosques: A Closer Examination of C-5 “high spectrum” contextualization’, in IJFM (24:1, Spring 2007); Gary Corwin, ‘A Humble Appeal to C-5/InsiderMovement Muslim Ministry Advocates to Consider Ten Questions’, in IJFM (24:1, Spring 2007). Kevin Higgins,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 Movements: A brief Paper Inspired by Timothy C. Tennent’s Critique of C-5 Thinking’, in IJFM (23:6, Fall 2006).
[2] Higgins, Kevin,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The Devoteds’ of Acts’, in IJFM 21:4; Winter 2004, pp. 155 ff.

[3] 이는 출판되지 않은 자료로써 저자에게 한 논평 자료이다.
[4] John Travis의 C-단계들은 ‘The C1 to C6 Spectrum: A Practical Guide for Defining Six Types of ‘Christ-Centered Communities’ (‘C’) Formed in Muslim Contexts’ in Evangelical Missions Quarterly 34(4): 1998, pp. 407-408에 기록되어 있다. 트래비스 자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선교 실천가들이 C-단계들로부터 떠나고 있고, 적어도 C-5와 ‘내부자 운동’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C5라고 부르고 있다.
[5] 특별히 이에 반대하는 비평에 대해서는 Bill Nikides, ‘Evaluating Insider Movements’, St. Francis Magazine Number 4, (March 2006). Nikides addresses Lewis’ viewpoints directly on p. 11.ff을 보라. 다른 비평들에 대해서는 John Piper in discussion with John Travis and others in Mission Frontiers가 있다. John Piper, ‘An Extended Conversation About Insider Movements: Responses to the September-October 2005 Mission Frontiers’, in Mission Frontiers (January-February 2006)을 보라.

[6] 예를 들어 McGavran, Donald A., The Bridges of God (New York, Friendship Press, 1955); Pickett, J. Waskom, Christian Mass Movements in India (New York, Abingdon Press, 1933)을 보라.
[7] 나는 교회가 내부자 운동에 갖는 관계의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좀 다른 관점에서 다루어보려고 한다 Kevin Higgins,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
Movements: A brief Paper Inspired by Timothy C. Tennent’s Critique of C5 Thinking’.
Kevin Higgins, ‘Acts 15 and Insider Movements Among Muslims: Questions, Process,
and Conclusions’, in IJFM (24:1, Spring 2007).

[8] 나의 관점으로는 내부자 운동이 교회의 형태가 없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문제를 Tennent의 글 에 대한 나의 답에서 설명해 놓았다. Higgins, IJFM (Fall 2006)을 보라.
[9] Tennent은 그들이 한동안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와 내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주로 무엇이 혹은 누가 결국 발생한 분열을 시작되게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교회가 분열의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Tennent의 견해), 아니면 여전히 유대교 내에 머물고 있을 때에 이미 교회가 탄생되어 있었는지(나의 견해) 하는 것이다.
[10] 사도행전 3:1과 9:2를 보라. 바울은 다마스커스에 있는 회당에서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자신을 회당 지도자들에게 추천해 줄 공문을 구하고 있었다. 후에 사도행전 21:17 후반부에서 (예수를 메시야로 따르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이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들은 많은 유대인 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염려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공적으로 바울이 유대인적이라는 것(즉,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라고 강권한다.
[11] Luzbetak은 문화권내에 있는 그룹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사회 내에 기능하면서도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더 설명될 필요가 있다. Louis J. Luzbetak, S.V.D., The Church and Cultures (New York, Orbis, 1988)을 보라.
[12] 여기서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예수를 따르는 유대교 신자들’이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예수를 따르는 이슬람 종교인들’과 같은 관계가 되는 지가 중요해 진다. 이 글에서 이것을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각주 15와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룬 나의 이전의 글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The Devoteds’ of Acts, IJFM (21:4; Winter 2004)을 추천하고 싶다.
[13] 요한복음에 관한 Whitacre의 주석(IVP 시리즈)에서 이 과정에 대한 논의를 보라. 244쪽에서 Whitacre는 회당으로부터의 분리가 1세기 후반에 일어났다고 결론짓는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여러 사건들 이후 약 한 세대에 일어난 것이다.
[14] Whitacre는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이 이미 회당에서 축출된 신자들과 아직 회당에 속해 있는 두 부류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두 그룹 모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Rodney Whitacre, Johannine Polemic (SBL Dissertation Series 67, 1982), p. 19. 또한 Raymond 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Paulist Press, 1979)을 보라.
[15] 예를 들어 Nikides, 2006을 보라.
[16] 여러 가지 면에서 유대교가 이슬람과는 다르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매우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예수를 따르던 초기 유대인들 역시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당면 했던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내부적 접근을 좋게 보지 않는 일부 사람들은, 개종자들이 여전히 모스크에 가는 한 진정한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들은 복음과 반대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1세기 성전의 경우에도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초기 운동은 그런 이유 때문에 성전에 참석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마치 계속해서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행위를 한 것처럼 말한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전 8:10). 바울이 그런 행동을 바로 잡은 것은 다른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잠재적인 영향 때문이지, 그들이 정말로 이방 신전의 식탁에 참여했기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17] 나의 말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도 교회가 닫힌 구조를 갖는 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연합한 자들만이 교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회나 종교 구조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의 누룩과 같이 그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18] 여기에 덧붙이기에는 좀 이상하지만, 중요한 사실이라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부자 운동의 지도자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어떤 공식적이고 인정 받는 방식으로 역사적인 전 세계의 하나님의 사람들과 연결을 갖는 것이라는 것이다.
[19] 이 용어는 Leonard Sweet 가 처음으로 교회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Leonard
Sweet, Soul Tsumani: Sink or Swim in the New Millennium Culture (Grand Rapids, Zondervan, 1999).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보편적인 것으로 유지할 필요에 대한 유익한 논의는 데이빗 보쉬의 삶을 개괄한 짧은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Timothy Yates, ‘David Bosch: South African Context, Universal Missiology – Ecclesiology in the Emerging Missionary Paradigm’, in IBMR (Vol. 33, Nr. 2, April 2009), pp. 72ff.
[20] 히버트의 비판적인 상황화 모델이 표준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Paul Hiebert, ‘Critical Contextualization’, in IBM (11(3): 1987), pp. 104-111을 참조하라.
[21] 로마 카톨릭의 관점에서 보는 유용한 논의에 대해서는 Robert J.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New York, Orbis, 2007)을 보라. 또한, 개신교의 관점에 대해서는 Andrew J. Kirk, What is Mission?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0)을 보라.
[22] Annemarie de Waal Malefijt, Religion and Culture (New York, Macmillan, 1968),p.3.
[23] James P. Spradley, Participant Observation (New York, Hol, Rinehart, and Winston,
1980), p. 6, quoted in Daniel, R. Shaw, Transculturation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88), p. 25.
[24] 그 한 예로는 Shaw, 1988를 보라.
[25] Lamin Sanneh, Translating the Message (New York, Orbis Books, revised edition, 2009), p. 3.
[26] Kirk, What is Mission?, 122ff.
[27] Malefijt, Religion and Culture, p. 6.
[28] Shaw, Transculturation, p. 24.
[29] Ibid., p. 57.
[30] Kraft는 종교와 세계관에 대해 다루면서 종교와 문화가 서로 겹치면서도,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Kraft에게 있어서, 종교는 세계관 이상이고 또한 그 이하이기도 하다. 종교가 세계관 이상인 이유는 종교는 세계관이 포함하고 있지 않은 행동들과 의식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세계관 이하인 이유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모든 믿음과 가정들을 종교가 다 포함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Charles Kraft, Anthropology for Christian Witness (New York, Orbis, 1996), p. 199. Hiebert는 종교와 문화를 좀 더 덜 구분적인 것을 보고 있다. Paul Hiebert, Cultural Anthropology (Grand Rapids, Baker, 1983), pp. 371ff.).
[31] Van Engen은 종교와 문화에 대한 논의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종교와 문화가 아니라) 믿음과 문화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를 통해 Van Engen는 문화와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복음과 믿음을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문화에서나 복음과 믿음이 상황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Charles Kraft와 노선을 같이 하여, Van Engen은 하나님이 문화를 운송 수단과 같이 사용하여, 운동수단이 승객을 나르듯이 믿음을 나를 수 있다고 본다. (1995, p. 192ff.)
[32] Van Engen는 이 유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나서, 이 세 영역에 네 번째 영역을 첨부한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각각의 영역이 주는 통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데, 그는 이 네 번째 영역을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Kirk는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바꾸어서 좀 더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기본적인 유형을 사용한다. Bosch는 두 개의 주요 패러다임을 보는데, 그것은 배타주의가 한 편에 있고, (비록 그가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포용주의와 다원주의가 합해져서 다른 한 편에 있는 것이다. 보쉬는 그 둘의 균형을 잡을 세 번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Hans Kung은 네 번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이 패러다임은 무신론자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가 제시하는 유형에서 (그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배타주의와 다원주의 패러다임은 분명한 반면에 포용주의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그는 모든 종교는 하나의 종교의 진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참고. Van Engen, The Uniqueness of Christ in Mission Theology, in Edward Rommen and Harold Netland, eds., Christianity and the Religions (Pasadena, CA, William Carey publishers, 1995); Kirk, What is Mission?, pp. 118ff.; David Bosch, Witness to the World (Eugene, Oregon, Wipf and Stock, 1980). Hans Ku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nium (New York, Doubleday, 1988), esp. pages 230 and 235.
[33] 이와는 대조적인 것이지만, 또한 동일하게 중요하고, 이와 연관된 신학적 관점으로서 기독론과, soteriology와, 그 각각의 위치가 내포하고 있는 계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Van Engen의 논의가 이 다른 토픽들에 대해 좋은 개관을 제시해 준다 (1995: 183ff.). 또한 Kirk, What is Mission? pp. 118ff.), and Smith, (1995: 9ff.)을 보라.
[34] Van Engen를 제외하면, 이것은 기독교와 종교들에 기여한 사람들이 주로 취하는 입장인 것 같다. 위에서 인용.
[35] Van Engen의 논의를 보라. 특히 Kirk의 것을 보라.
[36] 이 입장에 대한 뛰어난 예를 Ku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nium, p. 254 에서 찾아볼 수 있다.
[37] See the discussion in Ed Mathews가 그의 소논문 Yahweh and the Gods, p. 33. 에서 기독교와 종교들에 대해 다루면서 한 논의를 보라. Mathews는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지만, 엘과 멜기세덱 사건의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38] 나는 모든 점치는 행위가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발람의 경우에 그러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39] Gordon Smith는 또한 이 세가지 유형의 범주가 그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바른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가에 의문을 제시한다. 기독교와 종교에 대한 그의 개시장(the opening chapter)을 보라. (The Christianity and the Religions volume, 특히 p. 16).
[40] Van Engen은 각 패러다임의 장점만을 함께 모을 다른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것은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믿음에 있어서는 특정주의, 교회에 있어서는 포용주의, 문화 접근에 있어서는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말한다. Van Engen, 1995, 197ff.
[41] 심지어 이런 경우에도, 나는 그들이 이전에 믿었던 종교적 세계관과 신앙에 대해 많은 방향 조정과 재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나는 이를 이전에 쓴 나의 글에서 설명하려고 해 보았다. 앞에서 인용된 나의 글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and,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 Movements를 보라.
[42] 여기에는 몇 가지 가능한 모델이 있다. Hiebert의 비판적 상황화 모델이 아마 가장 잘 알려진 것일 것이다. 좀 더 복잡하고, 확장된 모델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haw and Van Engen. See Paul Hiebert, ‘Critical Contextualization’, in IBMR (11(3): 1987), pp. 104-111, and Daniel Shaw and Charles Van Engen, Communicating God’s Word in a Complex World (Boulder, CO, Rowan and Littlefield, 2003).
[43] Nikides는 삼위일체 같은 교리들에 대한 연역적 가르침이 없다면 믿는 자들이 성경만 연구해 가지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교회의 지도 없이 성경 공부 교재나 다른 연역적인 도구들을 사용해서는 이런 것들을 배울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2006, p. 8). 귀납적, 연역적 방법을 통한 제자훈련이 적당하게 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Nikides의 주장은 좀 과장되어 있다. 교부들 역시 성경을 수 세기 동안 연구하여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교리들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리는 문화를 반영하고 있고, 이단이 마치 새로운 가르침인양 떠들어대던 시기에 이단을 구별해 내기 위해 그러한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44] 나아만 장군의 예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Stuart Caldwell, ‘Jesus in Samaria: A Paradigm for Church Planting Among Muslims’, in IJFM, (17:1, Spring 2000)을 보라. 나아만에 대한 더 많은 자료는 위에서 인용된 Higgins, The Key to Insider Movements을 보라.
[45] Charles Kraft, Christianity in Culture (New York, Orbis, 2005), p. 16. Emphasis in original.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이븐 알-아라비 : 창조에 대해서

원제: REFLECTIONS ON THE CONCEPT OF CREATION IN MUHYI’AD-DĪN IBN AL-
‛ARABĪ1
글쓴이: Phil Bourne
번역자: 소피아 김

1. 서론
소위 ‘범신론’이라고 불리는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 신학자들 모두에게 많은 비판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1] 따라서 이 주제를 다시 살펴본다는 것은 오래된 논란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필자가 의도하는 것은,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에 대한 찬반론을 검토하는 것보다는, 오늘날 수피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븐 알-아라비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실재 reality 에 대한 근본적인 가정들을 함께 재검토해 봄으로써 오늘날 수피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싶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작업은 성경이 제시하는 실재에 대한 견해가 신비주의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러한 차이가 창조에 대한 의미와 목적에 대한 다른 관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은 오늘날의 수피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사상 전부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신비주의의 탐색은 그가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창조의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좀 더 이븐 아라비에게 동정적인 저술가들은 그가 신비주의가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 종교간의 이해를 돕는데 기여하였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이븐 알-아라비는 살아 생전에 수피즘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시하였고, 이는 동서양 간에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방법으로 친밀감을 가져다 주었다. 이 바탕위에 무언가를 세워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탕이 반석같이 견고한 것인지 아니면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인지를 먼저 질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창조
그렇다면 이븐 알-아라비가 말한 창조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매우 방대한 주제이고 따라서 이 짧은 글에 모든 것을 다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글들은 그 본질적인 부분들을 설명할 것이며, 이븐 알-아라비가 어떻게 창조를 이해했고,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였는지 알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 1165년 (1165AD/560AH)에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광범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젊을 때에 이미 수피즘을 향한 길에 들어섰다. 그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면서 지식을 추구하고, 경건과 지식에 명성을 얻었다. 1201년(598AH)에 비전을 보고 그는 서구를 떠나 동양으로 여행하기로 결심한 후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첫 목표는 메카였다. 거기에서 그는 몇 번의 매우 중요한 영적인 만남을 가지고, 그의 영적 탐색에 한 층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 카바를 순회하면서 신비주의적 경험을 한 결과로 그는 광범위한 지식을 담은 al-Futū}hāt al-Makkiyyah[2]를 저술하기 시작하는데 그가 주장하기는 그것이 어떤 변증론이나 당대 학문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계시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님이 나의 증언자이시며, 나는 다음과 같이 맹세한다. 나는 신이 명하신 것 이외에는 단 한 글자도 적지 않았으며, 깊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숭고한 영감만을 기록하였다. 내 심중에 있는 신의 영으로부터 온 영감에서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3]

메카를 떠난 후에 그는 중동의 여러곳을 방문하면서 종종 1207/604년과, 1210/607년, 1214/611년에 다시 메카로 돌아오곳 했다. 결국 그는 1223/620년에 다마스커스에 자리를 잡고 1240/638년에 생을 마감했다.

이븐 아라비가 이해한 실재, 즉 창조는 전통있는 하디스 H}adīth al-Qudsī 인 ‘나는 숨겨진 보물이다. 나는 알려지기를 갈망한다. 나는 알려지기 위해 창조를 했다. I was a hidden Treasure and I yearned to be known. Then I created creatures in order to be known by them’에서 시작된다.[4] 하나님의 슬픔(pathos)과 스스로를 계시하고자 하는 원함이 창조의 동기가 되며 그 중요성을 가늠하게 한다. 하나님의 한숨이 구름을 만들어냈으며 그로부터 다른 창조물들이 생겨났다. 이븐 알-아라비의 작품은 당시의 지배적인 과학적 파라다임에 있어서 플라톤주의와 꾸란의 유산에 각각 동등한 무게를 둔다. 10세기 지중해 세계의 과학과 대부분의 다른 지식들은 플라톤주의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이븐 러쉬드 Ibn Rushd 의 영양으로 인해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d. 1274)의 작품에서 유럽의 기독교세계에 반영된 운동이다. 유럽의 기독교세계는 라틴어로 번역된 아랍어 작품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븐 알-아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수피즘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을것을 곧바로 인식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영적인 만남이 실제로 초자연적인 것들과의 실재 만남이 되는 신비주의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영혼 soul’의 개념을 지성의 근본적인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반면에 플라톤주의는 어떤 자연적 과정으로 인해 우주가 발산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창조해내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이븐 알-아라비의 궁극적 의지 ultimate will 와 하나님의 원함에 대한 이해는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는 하나님의 원함 즉, 그의 창조물과 함께 느끼는 공감 sympathy이 표현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함께 하는 감정은 창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되도록 하며, 그 사랑은 그의 창조물들이 그의 신적 존재를 반영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표현된다.

그러나 이는 그 그림의 일부일 뿐이다. 이븐 알-아라비 역시 하나님 즉, 신의 본질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다. 아무도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보고 있다. 정통 이슬람이 지적하듯이, 그의 창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그를 기술할 수도 없다. 그는 그의 창조물 어느 것과도 다른 분이시다. 그러나 이슬람 학자들이 ‘하나님은 어떤 어떤 분이 아니시다’라는 진술을 넘어서는 더 나아갈 수 없도록 스스로 제한한 한편, 이븐 알-아라비의 플라톤주의는 그가 그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창조는 저편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즉, 신적 존재[5]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신과 창조된 세계 사이에는 일련의 신의 자기 계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계시는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듯 일련의 발산[6], 즉 존재의 확장이라기 보다는 일련의 신의 현현이다. 즉, 신의 본질의 어떤 부분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신으로써 숭배하는 것은 신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이미지대로 창조된 것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적 존재의 일면이다. 그것이 바로 신의 이름들이다. 이런 식으로 이븐 알-아라비는 정통 이슬람내에 머물면서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우리가 하나님을 알수는 없지만 그의 이름들을 통해서 그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역설적으로 보는 것의 바탕위에 신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험이 실재가 되는 수피즘의 이론이 서 있는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실재를 일반적인 사물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로 그리고 있으며, 신과 그의 창조물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가 이 구조를 그리고 있는 방법이 모든 자세한 사항들에 있어서 항상 일관적이지는 않으며,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의 원함은 ‘이름들’을 발산해 냈고, 각 이름은 서로 다른 독특한 신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름들’ 역시 알려지기를 원하고 있고, 이 원함은 더 나아가 일련의 사물들 즉, 존재하는 단계에 있는 것들에 신의 현현으로 나타난다. 이 이름들에 더하여, 이 사물들은 영들의 천사와도 같은 세계, 각 영혼의 세계, 아이디어와, 이미지와,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물질 세계에 속한 세계이다.[7]

이러한 접근은 신의 본질과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 사이에 여전히 거리가 존재하는 이점이 있다.(수피즘은 범신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확실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역자주) 또한 플라톤주의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구별 즉, 영과 혼은 물질 세계보다 월등하다는 구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꿈과 정신 이미지의 심리 세계를 설명해 준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들은 아이디어의 세계에서 실재로 존재한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의 비전은 실재이고 단순한 공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비전을 추구하는 것은 신의 본질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기원origin으로 가까이가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비주의의 핵심을 보게 된다. 신비주의자의 목적은 창조의 깊이와 높이를 헤아려보는 것이고, 그 모든 것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과 목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있는 하디스 (H}adīth al-Qudsī)로 돌아가서 시작했다. 신이 알려지기를 원한다면, 신은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좀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긴 했지만, 신은 그의 제자들이 신에 대해 알고있는 지식만큼 스스로를 안다. 제자들은 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 없다: 신의 본질은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 사실 그런 지식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은 그가 창조된 신의 이름에 계시된 신의 측면에 대해서만큼은 알고 있다.

이는 모든 것이 신이라는 범신론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븐 알-아라비는 신비주의 경험을 서술할 때 창조자와 창조물, 즉 주인 the Lord 과 그의 종 his vassal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일반적인 친교, 즉 신과 그의 제자 disciple 사이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창조물에 합당한 역할이 있고, 신에 합당한 역할이 있다. 제자는 신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 신을 알고, 신은 제자가 신의 그 자기 계시에 반응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안다. 이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과 그의 종 사이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게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Corbin이 ‘신이 현현하는 기도의 방법 Method of Theophanic Prayer’[8]이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신비주의적 헌신/기도(devotion)의 정점에 이를 때 더욱 그러하다. 이 기도를 수라 화타하 장에 기초하여 반응하는 하나의 기도문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자는 기도하고 신은 반응한다; 각각은 상대방의 기도에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각각은 리더와 응답자의 역할을 취한다. 창조 질서와 반대되는 방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기도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 이라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알-무쌀리’라는 단어의 뜻을 깊이 음미하고서 이 놀라운 결과에 이른다.[9]

이는 우리의 존재가 신과 합체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과 우리의 존재는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신의 역할과 제자의 역할이 혼동될 수는 있다. 즉, 제자가 신의 역할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만큼이나, 신도 제자의 역할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Corbi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처럼 신이 무살리 ‘기도하는 사람’ 과 ‘마지막에 오는’ 자가 될 때, 신은 ‘마지막’ 즉 ‘계시된 분’ 이라는 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인다. 신의 현현은 그가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그 신실한 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신실한 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신이 자신을 나타내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역자주) ‘우리를 향해 기도하는 신’이란 다시 말해 우리 앞에 현현한 신이다… 그 신은 그 신실한 자가 묵상이나 깊은 숙고를 통해서든지, 그가 확신하고 굳게 붙드는 특별한 신앙에 의해서 자기 마음에 만들어낸 신이다. 따라서 그 신은 ‘신자의 마음에 만들어내진 신’ 즉, 결정하고, 수용자의 역량에 따라 개별화된 신이며, 그의 혼은 신이 현현한 것이고, 그는 이런 저런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비, 공의, 능력 등등의 99가지로 정하고 있다 – 역자주).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향해 기도하는 신’은 ‘우리의 존재’ 이후의 것이다. 즉, 우리의 존재 다음에 오는 것이고, 우리의 존재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 신은 우리의 신의 현현이 신으로 확립한 신이다. 왜냐하면 숭배받는 자는 숭배하는 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숭배받는 자는 숭배하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마지막’이고, ‘계시된 분’이다. 이렇게 볼 때 ‘처음’ 이라는 신의 이름과, ‘숨겨진 자’라는 신의 이름은 신실하게 신을 좇는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이름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자’가 될 때, ‘마지막’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도 어울리는 이름이다. 우리는 신의 다음에 온 자들이고, 신 이후의 사람들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신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이 된다. (왜냐하면 ‘숨겨진 보물’인 신은 알려지기를 원하고, 사물 안에 그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신은 우리보다 속행하는 신이고, ‘처음’ 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숨겨진 보물’(즉, 신 – 역자주)이 신비의 세계로부터 무한한 신의 이름들의 다양성 안에서 여러 믿음의 형태로 실재하는 존재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그것들이다. 그 분은 숨겨진 분이고, 계시된 분이고, 처음이고, 마지막이다.[10]

이런 의미에서 각각은 창조자가 되고, 창조물이 된다. 각각은 창조하고, 신의 현현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종은 그 자신의 이미지 안에 주님 즉, 신앙의 신, 그 자신의 개인적인 주를 창조하고, 이는 바꾸어 말하면, 신이 그를 창조했던 바로 그 형태이다. 이는 신의 형태를 실재화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은 제자 안에서 그리고 제가가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 안에서 신 스스로를 알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이븐 알-아라비의 글은 그가 ‘신의 현현으로서의 창조’에서 그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중요한 것은 창조된 형태가 아니라, 창조는 신의 본질의 계시이고, 그 계시 안에서 신의 본질은 스스로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신은 그의 목적을 이루어 낸다. 즉, 제자를 통해서 그 자신을 알고, 창조의 싸이클을 완성시킨다. 즉, 신은 그가 제자 안에서 그리고 제자를 통해서 그 자신을 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이것이 모든 신비주의 경험의 목적이고 목표가 된다. 즉, 유일한 신적 존재에 대한 진정한 숭배로 표현되는 그의 창조물을 향한 신의 목적(objective)을 이해하는 것이 목표(goal)요 목적(purpose)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수피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나는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들어 Tom Wright의 책 ‘희망에 놀라다’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창조의 물질적인 상태를 다시 강조하고 부활후에 유사하지만 변형된 물질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많은 부분에서 그는 서구 기독교가 플라톤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는 것에 비판을 가한다. 서구 기독교는 미래에 우리는 육체를 가지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고, 우리의 존재의 본질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혼’이라고 말했던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직 우리의 혼만이 죽음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Wright는 신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신약의 많은 부분에서 구속의 의미와 중요성이 ‘육체의 구속’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고(로마서 8:23), 또한, 육체의 부활을 새로운 삶으로 보고 있다고 본다(에베소서 4:30). 여기서 부활은 물론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다름아닌 육체인 것이다. 계시의 마지막 드라마에서 우리는 하늘로 들려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하늘이 내려와서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계시록21장을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에서 그들의 주님과 만나는 장면은 단지 환영 인사일 뿐이다. 예수는 이 땅으로 다시 오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신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여기서 Wrights의 주장을 다시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그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4차원의 시공연속체인 이 세상과,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언제가 없애버리려고 그러신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 분의 목적은 더욱 풍성한 결실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목적의 일부는 땅에 사람이 살게 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들은 창조의 과정에서 그와 함께 할 사람들이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알려지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또한 동시에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창조물과 맺으시는 관계는 스스로가 알려지기 원해서 생겨난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창조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는 이븐 알-아라비가 ‘목표’로 세워놓은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븐 알-아라비에게 있어서 종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 중에 하나가 아니다. 그에게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신이 미리 짜 놓은 구조이고 상황이며, ‘이 낮은 세상’에서 인간의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고 궁극적인 영적 운명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삶을 인식해 본다면 그것은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그 자신의 원초적인 실재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11]

다시 말해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돌아감에 대한 신화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주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로 되돌아 간다.”(꾸란11) 그것을 안다면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분에게 돌아가라. 이를 피할 길이 없으며 반드시 그 분에게로 돌아가야만 한다.’[12] 이 돌아감은 존재론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헌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우리의 목적을 완성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우리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에 의하면 영적 단계에 높이 올라간 수피들에게는 죽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들은 이미 영원에서 궁극적으로 이루게 될 신과의 합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꾸란이 부활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오직 이 삶에서 아직 신의 역량에 미치지 못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무함마드와 연계되거나 혹은 그들이 무슨 신을 섬겼던 그 신과 연계되는 것을 통해 보상을 받게 된다. 이는 낙원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육체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자들에게 얼마만큼 그것이 끌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든다. 이븐 알-아라비는 이 문제를 하킴 알-티르미디의 일흔 한번째 질문인 ‘모든 개인이 그의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은 그가 어느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고, 신앙의 계열과, 그 차이, 그 적고 많음 가운데에서 그가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있다.’[13]에 대한 응답에서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일 뿐이고, 또 그렇게 남을 것이다.


3 아름다움과 불완전함 beauty and brokenness
이븐 알-아라비가 보는 하나님은 아름다운신 분이고, 아름다움 가운데 계시된다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중요한 영적 일면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al-futūh}āt al-makkīyah 에서 Corbin이 철학적 시라고 표현했던 그 부분일 것이다.[14] 열렬한 소망의 설명자 the Interpreter of Ardent Desires 라고 제목이 붙은 이 시는 이븐 알-아라비가 메카에 머무는 동안 환영을 받았던 집 주인 자히르 이븐 루스탐의 딸인 니잠에게 느꼈던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는 단순한 사랑의 시인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당시의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본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이븐 알-아라비가 이 시의 구절들에 대해 쓴 주석에서 그는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소망의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그 소녀에 대해 느꼈던 자연스러운 감정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녀는 그가 영적 탐색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되었다. 코빈은 신비주의에서 사랑이란 일반적으로 느끼는 자연적인 사랑과 영적 사랑의 합일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소녀의 역할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에 비교한다.[15] 육체적인 갈망의 대상이 신을 향한 문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Fas}ūs} al-H}ikam의 마지막 장에서 이를 확실히 하고 있다: “신비주의자는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가장 고차원적인 신의 비전을 얻게 된다. 창조된 여성‘Creative Feminine’ 은 창조물로서 신의 가장 고차원적인 표현 즉, 창조적인 신성 creative divinity 을 숙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 수도자들을 분개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깜짝 놀라서 외떨어진 사막의 암자로 달려가는 수도자들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영적인 사랑과 일반적인 사랑 사이의 조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The Fas}ūs} al-H}ikam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모든 것에서 선한 것, 본질적으로 오직 선한 것만을 사랑하도록 통찰력을 주신다.’[17]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적 시각에서도 이것이 맞는 말일까? 창조가 오직 선하고 오직 아름다운 것이기만 할까? 이 문제는 우리가 악과 불완전한 것의 기원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가 창조하신 물질적인 것들이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것의 기원은 영적인 것, 사단의 반항에서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선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악한 영이 패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이슬람이 성경이 의미하는 창조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 과거의 어떤 때에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 이슬람은 ‘타락’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설명할 수가 없다. 보통 이슬람은 이러한 불완전함을 부주의함 혹은 무지의 탓으로 돌린다. 이븐 알-아라비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에 기인하여 그러한 불완전함을 신적 존재에서 멀어졌기에 생기는 일로 보았다. 비록 이븐 알-아라비가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고, 특히 이슬람 법학자들인 울라마 ulamā’와 관련하여 사탄의 계략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는 하지만,[18] 단순한 천사의 활동들이 신의 목적에 어떤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에는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불완전함의 근원이 물질적 세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천국’을 다시 얻기 위해서 궂이 창조된 상태를 없애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곳은 현실에서 유리된 채 ‘천국’이라고 불리는 어떤 곳, 신이 사실 우리에게 뜻했던 어떤 영적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현재 세계를 다시 정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Tom Wright 의 의견이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땅으로 내려온 하늘, 사람이 있는 곳(땅)에 하나님도 계시게(하늘) 되는 그런 식으로 땅으로 내려온 하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매우 물질적인 것이다. 이 경우에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그러한 현실적인 새로와짐이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어떤 영적인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속을 위한 우리의 활동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것을 바로 잡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많은 수피 신비주의자들이 그러한 개념을 놓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증거는 Tom Wright 가 여러번 강조하듯이, 우리 미래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에 있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밑그림에 불과하다. 이븐 알-아라비의 저술과 같이 너무나 방대한 글을 평하고,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단지 그가 다룬 주제들을 더 늘려놓았을 뿐, 영어로 된 그의 작품의 적은 양도 다 소화해내지 못했다. 다만 그의 저술이 제시하는 논의점들을 다루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븐 알-아라비의 창조에 대한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술의 아름다움이나 그의 사고의 깊이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아름다움과 깊이가 진정한 지식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참고서적
Titus Burckhardt, The Wisdom of the Prophets (Beshara Publications,
1975). An English translation, by Angela Culme-Seymour, of Burkhardt’s
French translation of some sections of Ibn al-Arabī’s fas}ūs} alh}
ikam.
Henry Corbin, Alone with the Alone: Creative Imagination of the Sūfism
of Ibn ‛Arabī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1997). This is based on
lectures originally given in French in 1955 and 1956.
Michael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Two volumes originally
published by Rothko Chapel, 1988 and reprinted by Pir Press in 2002 and
2004. These are translations by William Chittick, James Morris, Cyrille
Chodkiewicz and Denis Gil of selected passages. The second volume
contains a translation of Michael Chodkiewicz’s introduction to the
French translation of al-Futūh,āt al-Makkiyya.
Michael Chodkiewicz, Seal of the Saints: Prophethood and Sainthood in
the Doctrine of Ibn ‛Arabī, English translation of the French Original by
the Islamic Texts Society (Cambridge, 1993).
Tom Wright, Surprised by Hope (SPCK, 2007).

[1] 예를 들어 Ah}mad Sirhindi는 분명하게 이븐 알-아라비의 ‘존재 Being’ 개념을 거부한다. 참고. Muhammad Abdul Haq Ansari, Sufism and Shari‛ah (Leicester: Islamic Foundation, 1986). Sirhindi는 wah}dah al-wajūd 라는 용어를 문제 삼은 것 같다. 하지만 이븐 알-아라비 자신은 그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Ibn Taymīya (d 728/1328) 는 대대적으로 성자 숭배를 배척하였는데 이는 이븐 알-아라비의 성자 개념 sainthood에 대한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개혁운동이라고 할만한 많은 운동들의 특징이 되고 있다. 참조. Michael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Pir Press, 1988, 2002 and 2004), pp. 8ff.

[2] al-Futū}hāt al-Makkiyyah는 보통 ‘메카에서 받은 계시 The Meccan Revelations’로 번역되는데 종종 다른 번역이 제시되기도 한다. Corbin은 Jāmī의 영향을 받아 ‘메카에서 영적으로 얻게 된 것 The Spiritual Conquests of Mecca’이라고 번역한다. 참고. Henry Corbin, Alone with the Alone: Creative Imagination of the Sūfism of Ibn ‛Arabī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199), p. 357
footnote 1.
[3]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 III:101 cited Meccan Revelations II:6, 또한 이는 이러한 종류의 유일한 진술이 아니다. 사실 이븐 알-아라비는 그 자신의 저술의 무질서한 순서를 꾸란에 비유한다. 꾸란의 내용은 계시될 때마다 그 의미가 통하든 통하지 않든 지정된 장소에 끼워 넣도록 되어 있었다. 순서적으로는 좀 맞지 않을 수 있지만, 더 깊은 세계로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자료는 1329AH/1911AD에 발간된 네 권의 아랍어로된 카이로 텍스트에서 따온 것이고, 두 번째 자료는 Chodkiewicz의 두 권의 번역 및 주석서에서 따온 것이다.)
[4]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114. H}adīth Qudsī는 무함마드에게서 온 전통으로,
무함마드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학자들은 이 하디스가 믿을 만한 것인지를 놓고 논쟁의 벌이기도 하는데, 이는 다른 일반 하디스 모음에서는 나오지 않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피들은 이 구절을 매우 자주 인용하기 때문에 그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5] 여기서 논의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븐 알-아라비가 신의 존재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를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븐 알-아라비는 신의 존재를 필연적인 존재와, 잠재적인 존재, 그리고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로 나누었다. 유일하게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존재는 신 그 자신으로서 신의 본질이며,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잠재적인 존재는 바로 창조된 세계로써, 이는 하나님의 한 분의 원함과 활동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이븐 알-아라비는 계속되는 창조를 믿었다는 것이다. 전 우주는 계속해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의지와 원함에 의해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에 연속성이 없으며, 잠재적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혹은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이로 순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꿈과, 비전과,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게 하였다.
[6] 이븐 알-아라비는 아랍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전문 용어인, 발산 emanate 이라는 의미의 Fayyad 혹은 sadar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계시라는 의미인 tajallī 를 더 선호한다.
[7]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224를 보라. 메카에서 받은 계시에서 이븐 알-아라비는 신의 단계를 포함하는 다섯가지 존재의 단계를 말한다.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I, p. 128ff을 보라.
[8]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246.
[9] 모호성은 신비주의에서 늘 있기 마련인 것 같다. 친구 라는 뜻의 왈리 walī 라는 용어 차제가 모호하다. 꾸란 45:19에서는 신의 이름을 뜻하기도 하고, 신비주의자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사 용어를 찾아보려면 Michael Chodkiewicz, Seal of the Saints: Prophethood and Sainthood in the Doctrine of Ibn ‛Arabī (Cambridge, 1993), pp. 21ff을 보라.
[10]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p. 265ff.
[11] James Morris in Meccan Revelations I, p. 94.
[12]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h: II, p. 86 lines 19-21, translation in Meccan Revelations I, p. 124.
[13]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h: III:223 from lines 8-10, translation in Meccan Revelations I, p. 105.
[14]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p. 136ff.
[15] 위의 책, p. 52. Chodkiewicz는 Miguel Asin Palacios가 그의 논문에서 단테가 이븐 알-아라비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부분을 미심쩍게 생각한다. 코빈은 그 논문에 동의하지만, 그 관계는 현상학적일 뿐 ‘실제적’으로 빌려온 것은 없다고 본다. 코빈의 아름다운 문구를 읽을 때는 좀 조심하는 것이 좋다. 무엇이 이븐 알-아라비가 하는 말인지, 아니면 코빈이 이븐 알-아라비에 근거한 추론을 말하는 것인지가 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수피들에 대해 Fedeli d’amore 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할 때 좀 혼란스럽다. 그 용어는 단테와 그의 친구들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6]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159 Fas}ūs} al-H}ikma I, p. 217 에서 인용. Titus Burckhardt 에 있는 마지막 장의 번역의 일부인 ‘선지자들의 지혜’를 보라. (Beshara Publications, 1975), pp. 116ff, 거기에서 이븐 알-아라비는 무함마드의 향수와, 여자, 기도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코빈이 말하는 창조된 여성 Creative Feminine’ 은 창조에 대한 또 다른 면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 면에 있어서 코빈은 칼 융 Carl Jung 의 저술에서 지나치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칼 융의 정신 Psyche 에 대한 개념은 요즘에는 다소 구시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7] Burkhardt, Wisdom of the Prophets, p. 126.
[18]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 III:67-71, in Meccan Revelations II:77ff.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중동 여성 제자삼기

원 제: Discipling Arab Women
글쓴이: 김 사랑[1]
번역자: 양다영, 조주옥

1 서문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근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가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슬람 배경에서 신앙을 갖게된 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어내려간 저의 일기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슬람 관련 주제를 다룬 전문 논문이나 여러가지 원리의 개발을 찾기위해 쓰여진 글은 아닙니다. 중동에서 6년의 사역기간동안, 출신을 불문하고 제자훈련의 핵심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서로를 또 어떻게 사랑하는 지에 대한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 없이는 저의 힘으로 다른 민족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을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거주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저의 신앙의 체험을 공개적으로 나누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최근 이슬람권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찾아가는 공동체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공동체 스스로가 본국가의 타지역에서 일 할 수 있는 일꾼을 파송하여, 재정적으로 돕고 있는것을 볼 때 큰 격려가 됩니다. 이슬람권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되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숙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슬람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되는데, 여기서 몇 가지를 경우를 살펴보면서, 제자훈련사역과 새신자 양육을 하는데 그들이 미치는 영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한 이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도울수 있으며, 동시에 신앙의 자유가 제한된 곳에서 어떻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제자화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해답을 찾기위해 제자훈련에서 제가 했던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제자훈련를 위한 스스로의 준비라고 일컫는, 내 자신에 대해서 깨달은 부분을 나눌려고 합니다. 그 후에 새신자 제자사역 중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에 대해 살펴보겠으며, 제자훈련과정에서 배웠던 부분을 나눔으로 마치겠습니다.

2 스스로의 준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제자훈련에 지속적으로 연관되는 두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과 복음의 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 과정 속에서 진전이 없어보이던지 혹은,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느끼게되어 낙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새롭게 신앙을 갖게된 이들을 양육할 때 하나님앞에 신실한 모습으로 남아 있기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깨달았을때, 그리고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을 체험하였을때, 새신자들과 함께 나의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연약함에서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이럴때에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이해하며, 생명을 변화시키는 그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삶속에서 그 변화의 힘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자신과 다른 바탕과 경험을 가진 이들의 삶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복음과 복음의 메세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와같은 개인적인 경험과 이해 없이는 종교적인 문화만을 흉내내는것이지, 복음의 힘으로 전파하는 것이 아니기 떄문입니다.

그 밖에도 저의 여정과 준비과정에 연관된 중요한 두가지가 있는데, 둘 다 지역교회에 관한것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은 제자훈련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현지 지역교회에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현지의 환경과 교인들이 속해있는 지역 단체나 그들의 성향 또는 현지인들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이해 증진에 도움이 됩니다. 대부분의 이슬람권에 있는 많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 교회는 그들의 환경에 맞는 교리와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타종교의 지배 아래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소수 공동체로써 갖는 그들만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역 교회들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지역 형제, 자매들을 격려하고 약함을 강하게하는 역활을 할 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함께 나눌수 있게 합니다. 개인적인 배경과 하나님과 그리고 그분의 지체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지체들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자원들을(재정 자원이 아니라) 충당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공동체와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지역교회의 리더 여성들을 섬기기위해 소그룹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하였습니다. 기도 사역에 관심이 있는 여러사람들과 함께 중보기도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우리의 기도는 우선 지역교회의 이해와 나눔에 대한 것으로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 그룹은 신뢰와 정직으로 함께 성장해갔으며, 일년 후에는 기도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역교회나 가정의 여성리더 중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여성들과 기도에 대해 배우기를 희망하는 여성들을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모임을 시작하였을때는 우선 세계를 향해 특히 중동을 향한 중보자가 되기위해서 모였지만, 지금은 이 여성들이 본인이 속해있는 지역사회의 선교와 제자훈련을 감당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 모임은 제자훈련자들을 멘토링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공동체들은 초신자들을 제자훈련하는 과정에 있는 제가 성장하는데 큰 부분을차지 하였습니다. 지역교회는 저에게 많은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지역사회의 문화를 이해 할 수 있게 도왔고, 제가 양육하는 이들을 소개할 수 있는 안전한 돌봄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지역교회는 제가 제자양육과정에서 어려움에 직면하였을때 조언을 주고 기도를 통한 통찰력을 제시해 주는 곳입니다. 제자훈련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고, 신앙의 기초적인 훈련에 헌신하는 본을 보이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지역 상황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 것은 모두 저의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3 새신자들과 관계의 어려움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7

가부장제도 안에서 이슬람 가족이 갖는 특성은 여성들이 제자훈련에 임할때 많은 어려움을 갖게 합니다. 이로 인해 많은 여성들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그것을 매우 개인적인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비밀로 해야하며, 교제에 대해서도 극히 제한적이 되거나, 고립되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것들로인해 제자훈련의 상호작용이 제한되게 됩니다. 각각의 여성들의 상황을 이해하는것이 중요하며, 양육과 가르침, 사랑과 격려와 같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도울수 있는 길을 찾아야합니다.

신앙의 가정 안의 있는 여성과, 과부나 이혼의 상황에 있는 여성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새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종교적인 교육과 함께 양육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2007년도 세미나에서 20년 가까운 경험을 가진 MBB에 따르면 새신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것이 가장 중대한 사안이며, 새신자들 양육시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성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더 고심해야 하며, 이로써 그들의 자녀들을 영적으로 양육할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실시하는 신앙관을 방해하는 종교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어느때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지 혹은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교육을 하지 않으면, 그들과 그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논점을 다루는 것은 건강하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되기 위해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새신자들을 믿음의 삶으로 양육하는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숙제로 저에게 남아있습니다.

새신자들을 믿음의 삶으로 양육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보다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때때로 낙심될 때가 있지만, 한 명이 나무를 심고, 다른이가 물을 주지만, 결국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로 돌아갈 때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새신자를 양육하는 과정에 있기 전에는, 그들에게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양육하는 과정에서는 막상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온 것은, 내 스스로가 약함을 통해 그들에게 믿음의 성장과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신자들은 제가 나누는 말보다 내 삶에서 관찰되어지는 모습을 통해 믿음에 삶에 대해 더 많이 이해했습니다. 저에게 큰 도전은 그들에게 모델이 되는 믿음의 삶을 꾸준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에도 그것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경우는 가족과 개인적인 어려움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이에게 통용될 수는 없겠지만 새신자들의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어머니의 죽음이나, 자매들의 죽음, 암, 교통사고, 심한 요통 같은 어려움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새신자의 믿음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어떤이는 제자양육에서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도전은 저에게 깊은 기도의 생활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새신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 그리고 고난에 대한 성장을 돕는 도구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인 삶에 좀 더 일찍 이러한 가르침을 구했어야 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새신자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과정에 있지만, 이러한 영적 싸움에 대면하지 않았으며, 고난이 인내의 모델이 될수 있기에 아픔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먼저 우리가 깨닫고 그 깨달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어려움으로 제게 다가온 것은 그들의 필요와 요구에 상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습니다. 새신자들 중에는 때로 저를 통해서 그들의 생활적, 정서적, 영적인 필요가 전부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필요가 정말 절실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들의 필요를 모두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해 나누는 친구의 관계임을 강조합니다. 부족한 대답인것처럼 들리지라도 의존관계를 만들기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신자의 양육을 돕기위해서 새신자들에게 좋은 기초를 다져주면서, 실질적인 많은 어려움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는 교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교제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제는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지만 이슬람권의 새신자들을 위해 삶을 양육할 교제는 극히 제한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4.새신자 제자훈련을 통하여 배운 교훈
새신자들을 양육하는동안 항상 염두해야 할 점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이며, 우리들 관계안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은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과 관계 안에서의 평안의 감각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지체간의 관계의 성장 또한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말씀의 진리 가운데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큰 도전일 것 입니다.

저는 제가 양육하고 있는 새신자들이 제가 속해있는 공동체와 만남을 갖도록 노력합니다. 한 새신자의 경우 아랍 지역 여성들과 함께 하는 중보기도회에 참석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스도 공동체로써 갖는 교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던 너무나 많은 것들을, 짧은시간 동안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른 이들과 교제함으로써 깨닫게 되었고, 그분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 나눴던 부분들, 특히 성경공부만을 통해서는 가르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신앙적 선배와의 교제를 통해 삶으로 나타나는 모델을 보고나서 비로서 살아있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정직과 진실함과 사랑으로 함께 성장함으로써, 저는 현재 새신자들과 각 지역의 성숙한 신앙인들을 연결해줄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는 이슬랍권 여성을 양육할 때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새신자들과 성숙한 신앙인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지체가 무엇인지 깨닫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주안점은 언제 새신자들에게 이러한 그룹을 소개하는가 입니다. 새신자의 상황을 이해해야 하며, 그 새신자와 새신자를 받게 될 그룹에게 그 만남이 의미하게 될 것을 잘 이해해야 하며, 또한 새신자 믿음의 성장 단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또한 새신자가 예수그리스도의 지체의 한 부분으로써 사랑과 교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며, 저 혼자서는 모든 것을 공급해 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 분이 저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삶의 방식의 모든것을 변화시키신 분이심을 인식하도록 해야하며, 새신자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되거나 전파자의 문화만을 흉내도록 하지 말고, 언제나 성경의 진리로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믿음과 가식적인 기독교적 행동을 차별화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희망하는 것은 새신자들에게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므로써,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을 삶과 상황속에서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지, 제가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새신자를 믿음의 삶으로 양육하는 방법에 대해 유용한 몇 가지 단계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복음 전파보다는 믿음의 양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받은 지침이 되는 여러 방침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서로의 집에서 시간 보내기. 새신자들을 우리집에 초대하거나, 집에 초대받았을때도 흥쾌히 승낙하기
2. 성경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와 성경 읽은 것을 확인해주는 것도 포함
3. 회계와 고백의 중요성을 포함하여 영적 훈련에 대해 모델이 되어주며, 가르쳐주기. 인간관계와 문제에 대한 해결, 기도생활, 십일조 대한 성경적인 모델이 되어주기
4. 가족과의 관계가 개선되도록 격려해주며, 응원해주기. 이는 가정 안에서 행하는 이슬람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먼저 그리스도 인의 삶의 본이 되어주며, 가족를 위한 중보자가 되는 것을 포함.
5.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을 훈련시켜주어,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어도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임을 부정하였다고 느끼지 않게하기

요한복음 4장에 예수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하며, 교리적이고 성경적인 질문의 해답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이론적인 설명이나 요구를 덧붙히지 않으셨습니다. 새신자의 양육에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 그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것들과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써 인내와 온유함으로 그들을 도와야 하며, 지체의 한 부분이 되는 기회를 가로막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진정한 제자양육입니다.
(쓰여진 성경말씀은 NIV판입니다.)

[1] 아랍세계에서 일하고 있는 인터서브 선교사

2009년 2월 22일 일요일

<서평> 중동의 개신교 선교사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가, 아니면 문화의 전파자들인가?

원제> Book Review: Peter Pikkert's Protestant Missionaries to the Middle East

서평 글쓴이: Duane Alexander Miller
책제목: Protestant Missions in the Middle East: Ambassadors to
Christ or Culture (WEC Canada, 2008), 226 pages.
책의 저자: Peter Pikkert

Pikkert는 중동이나 터키에서 사역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중요한 책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재정을 쏟아부으면서도 중동과 터키에 개종자들이 드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한다. 먼저 그는 Samuel Huntington과 David Bosch의 이론에 근거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Huntington은 그 유명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the World Order (Simon & Schuster 1998)의 저자이다. 그는 냉전시대 이후에 세계 분쟁의 주요 원인은 문명이 될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특별히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을 예상했다.

필자는 파라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s)에 대한 Bosch의 의견을 빌어 선교 역사를 해석하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보쉬의 의견에 대한 주요 출처는 “변화하는 선교: 선교 이론에서 찾는 파라다임의 변화”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Orbis Books 1991.) 이다. 이 책은 중동과 소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카톨릭 선교 이외의 서구 선교 역사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카톨릭 선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1장부터 4장까지는 각 시대를 다루는 본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제 5장은 역사적 분석과 비판에서 다소 급격하게 방향을 돌려 신학과 현대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필자는 이 장이 이 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역를 중심으로 하는 Pikkert의 현대 역사 구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00-1918년까지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분해되는 시점이다. 혹은 데이빗 프롬킨 David Fromkin 이 말했듯이 모든 평화를 끝내는 평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미주1) 두 번째 시기는 1946년까지로, 시리아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서기 직전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79년까지로, 아랍 민족주의와 석유의 강세로 몇 나라들이 급부상하는 시점이다.(미주2) 이 시기는 또한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형성되고, 교파와 구분된 운동이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시기는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정치적 이슬람이 약진하는 시기로써, 정치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자 폭력까지 동원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Pikkert는 그의 저술 당시 (2005년)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연합군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패한 6일 전쟁이 일어난 1967년이 아니라 1979년인지를 묻고 싶을 것이다. 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많은 무슬림들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패배를 겪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와 같이 승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싼 반나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 같은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저자의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기 구분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1967년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싶어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자면, 60년대와 70년대는 범아랍주의와 공산주의 및 세속주의의 환상에서 점차 깨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1년이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한 서구의 개신교 선교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

Pikkert는 주로 The Moslem World(미주3) and the annual report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로부터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와 일지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몇 인용들은 상당히 긴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좀 길긴 하지만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저자는 부정적이다. 그가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소위 대 실험 Great Experiment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1800년대 초에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지역 무슬림들에게 직접 바로 전도하는 것을 너무나 위험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대 실험으로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죽어가는 현지 교회의 (그것이 매로니안 교회든, 아르메니안이든, 그리스 정교회든, 콥틱이든 그 무엇이든지) 부흥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교회들은 서구 개신교 전도의 이미지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인 성상파괴와 개인주의라는 덫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 고아원, 진료소, 출판사, 병원들이 소위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Pikkert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지역 지도자들에게 미심쩍게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행동이 그들의 공동체를 너무 눈에 띠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후원이나 행운 없이도 수 세기 동안 스스로 잘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교사들의 그런 잘못된 대 실험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난 중동과 소아시아의 인종 말살이나 대규모 이민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대 실험은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이 결국 대부분 정교회 배경의 신자들로 구성된 개신교 교회를 세워놓았지만, 이 서구화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갑자기 터키와 아랍 무슬림들 개종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무슬림들에게 불신과 고립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이 본서의 본론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 시기를 되돌아 보면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네 시기를 다루는 각 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잘못된 것뿐 아니라, 올바르게 진행된 것들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저자는 이곳 저곳에 매우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사회를 섬겼던 인물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 Temple Gairdner(1873-1928)로, 그는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관한 문법서를 저술했다. 그러한 접근이 죠지 켈시 George Kelsey 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암만에 있는 켈시 언어 연구소 of Kelsey Language Institute 와 같은 것들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가드너는 또한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한 아랍어 대본을 써서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꾸란에서 훌륭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 교회의 가치 조차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가드너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1923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미주4) “이집트에서 영국 국교회의 주요 목표는 비기독교 대중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콥틱 그리스도인들이나, 개신교 교회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Pikkert가 제시하는 대 실험에 관여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또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예는 루터 선교회 Lutheran Orient Mission Society’s (LOMS)가 쿠르드인들에게 했던 선교이다. 그 선교를 이끌었던 포썸 L. O. Fossum은 가드너처럼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무슬림 사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쿠르디스탄(터키, 이란, 이라크에 걸친 산악, 고원지대-역자 주) 선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41세에 죽음을 맞은 의사요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포썸이 이루어놓은 것은 놀라웠다. 큰 실패로 끝난 대 실험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저자의 역사적 관찰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지적 받아야 할 점들도 있다. 편집에 신경을 좀 쓸 필요가 있다. 한 페이지에서 기본적인 사항인 문법 실수와 글자 오류를 둘 다 발견하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예를 들어 12쪽에서 Church Mission Society가 잘못된 약자인 CSM으로 표기되어 있고, Moslem World는 Moslim World 라고 잘못 쓰고 있다. 저자가 the “importance of intermission cooperation,”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어느 시대의 intermission(중간의 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교 단체들이나 그룹들 간의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리적인 면에서도 이슬람공포증(147-149쪽)에 대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1979년에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구에서 이슬람을 악마화하고 미국 출판사들이 어떻게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비방물들을 내 놓았는지에 대해 말한다(147쪽). 저자가 헌팅턴의 문명 충돌에 관한 이론이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테러가 이슬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헌팅톤의 견해와 Pikkert가 제시하는 것이 매우 동일하다. 즉, 소위 충돌이라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적의를 조장하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대해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 두 사실을 함께 묶어놓을 수는 없다. 문명의 충돌이 있거나 아니면, 인공적으로 혹은 악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본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마지막 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결론 장에서 Pikkert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오늘날 근동 무슬림 선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넘어간다 (189쪽). 그의 권면은 그 장의 제목과 같이 교회 중심적인 신약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선교 사역은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저서 전체에서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가 비판했던 실패로 끝난 대 실험은 대부분 의료와 교육 연구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무슬림 배경의 모임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데 중동을 생각할 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저자가 “신약의 영성이 New Testament spiritualit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중동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두 극단적인 견해를 피해왔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종교심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만 치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인 군자인 것처럼 그려놓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신약의 영성” 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세상에 신약의 위대한 선교사들처럼 되고 싶지 선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은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신약의 영성” 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행해야 하고 (행 2:46) 여자들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전 11:10)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기 나사렛에 있는 그리스 카톨릭 지역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Pikkert는 신약의 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중 하나로 “기독교 메시지를 분명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201쪽) 또한 “제자화와, 훈련, 책임 이양”(206쪽)에 대해서도 말한다. 분명히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쉬가 말하는 파라다임의 변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장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Pikkert의 저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선교지에 나가기 위해 훈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선교사 지망생이 많은 한국과 중국, 남아메리카에 이 책을 읽어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세속 역사의 관점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어 있는 고전 이슬람식 사고의 측면에서 역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이슬람 학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동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무슬림들이 흔히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단순히 선전하기 위해서나, 신화, 혹은 이단으로써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주>
1 이 말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역을 맡은 현대 중동의 형성에 대한 Fromkin’s 유명한 역사서 (Holt 2001)에 등장한다.
2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Daniel Yergin’s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Free Press 1993).
3 지금은 The Muslim World 로 불린다.
4 이 인용은 가드너의 경력에 관한 Matthew Rhodes 의 글 ‘Anglican Mission: A Case Study’ available online from the Henry Marty Center at www.martynmission.cam.ac.uk. 에서 가져온 것이다.

2009년 2월 21일 토요일

중동의 개신교 선교사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가, 아니면 문화의 전파자들인가?

서평 글쓴이: Duane Alexander Miller
책제목: Protestant Missions in the Middle East: Ambassadors to
Christ or Culture (WEC Canada, 2008), 226 pages.
책의 저자: Peter Pikkert



Pikkert는 중동이나 터키에서 사역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중요한 책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재정을 쏟아부으면서도 중동과 터키에 개종자들이 드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한다. 먼저 그는 Samuel Huntington과 David Bosch의 이론에 근거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Huntington은 그 유명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the World Order (Simon & Schuster 1998)의 저자이다. 그는 냉전시대 이후에 세계 분쟁의 주요 원인은 문명이 될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특별히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을 예상했다.

필자는 파라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s)에 대한 Bosch의 의견을 빌어 선교 역사를 해석하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보쉬의 의견에 대한 주요 출처는 “변화하는 선교: 선교 이론에서 찾는 파라다임의 변화”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Orbis Books 1991.) 이다. 이 책은 중동과 소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카톨릭 선교 이외의 서구 선교 역사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카톨릭 선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1장부터 4장까지는 각 시대를 다루는 본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제 5장은 역사적 분석과 비판에서 다소 급격하게 방향을 돌려 신학과 현대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필자는 이 장이 이 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역를 중심으로 하는 Pikkert의 현대 역사 구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00-1918년까지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분해되는 시점이다. 혹은 데이빗 프롬킨 David Fromkin 이 말했듯이 모든 평화를 끝내는 평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1 두 번째 시기는 1946년까지로, 시리아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서기 직전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79년까지로, 아랍 민족주의와 석유의 강세로 몇 나라들이 급부상하는 시점이다.2 이 시기는 또한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형성되고, 교파와 구분된 운동이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시기는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정치적 이슬람이 약진하는 시기로써, 정치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자 폭력까지 동원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Pikkert는 그의 저술 당시 (2005년)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연합군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패한 6일 전쟁이 일어난 1967년이 아니라 1979년인지를 묻고 싶을 것이다. 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많은 무슬림들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패배를 겪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와 같이 승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싼 반나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 같은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저자의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기 구분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1967년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싶어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자면, 60년대와 70년대는 범아랍주의와 공산주의 및 세속주의의 환상에서 점차 깨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1년이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한 서구의 개신교 선교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

Pikkert는 주로 The Moslem World3 and the annual report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로부터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와 일지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몇 인용들은 상당히 긴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좀 길긴 하지만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저자는 부정적이다. 그가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소위 대 실험 Great Experiment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1800년대 초에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지역 무슬림들에게 직접 바로 전도하는 것을 너무나 위험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대 실험으로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죽어가는 현지 교회의 (그것이 매로니안 교회든, 아르메니안이든, 그리스 정교회든, 콥틱이든 그 무엇이든지) 부흥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교회들은 서구 개신교 전도의 이미지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인 성상파괴와 개인주의라는 덫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 고아원, 진료소, 출판사, 병원들이 소위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Pikkert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지역 지도자들에게 미심쩍게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행동이 그들의 공동체를 너무 눈에 띠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후원이나 행운 없이도 수 세기 동안 스스로 잘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교사들의 그런 잘못된 대 실험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난 중동과 소아시아의 인종 말살이나 대규모 이민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대 실험은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이 결국 대부분 정교회 배경의 신자들로 구성된 개신교 교회를 세워놓았지만, 이 서구화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갑자기 터키와 아랍 무슬림들 개종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무슬림들에게 불신과 고립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이 본서의 본론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 시기를 되돌아 보면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네 시기를 다루는 각 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잘못된 것뿐 아니라, 올바르게 진행된 것들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저자는 이곳 저곳에 매우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사회를 섬겼던 인물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 Temple Gairdner(1873-1928)로, 그는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관한 문법서를 저술했다. 그러한 접근이 죠지 켈시 George Kelsey 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암만에 있는 켈시 언어 연구소 of Kelsey Language Institute 와 같은 것들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가드너는 또한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한 아랍어 대본을 써서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꾸란에서 훌륭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 교회의 가치 조차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가드너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1923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4 “이집트에서 영국 국교회의 주요 목표는 비기독교 대중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콥틱 그리스도인들이나, 개신교 교회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Pikkert가 제시하는 대 실험에 관여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또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예는 루터 선교회 Lutheran Orient Mission Society’s (LOMS)가 쿠르드인들에게 했던 선교이다. 그 선교를 이끌었던 포썸 L. O. Fossum은 가드너처럼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무슬림 사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쿠르디스탄(터키, 이란, 이라크에 걸친 산악, 고원지대-역자 주) 선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41세에 죽음을 맞은 의사요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포썸이 이루어놓은 것은 놀라웠다. 큰 실패로 끝난 대 실험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저자의 역사적 관찰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지적 받아야 할 점들도 있다. 편집에 신경을 좀 쓸 필요가 있다. 한 페이지에서 기본적인 사항인 문법 실수와 글자 오류를 둘 다 발견하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예를 들어 12쪽에서 Church Mission Society가 잘못된 약자인 CSM으로 표기되어 있고, Moslem World는 Moslim World 라고 잘못 쓰고 있다. 저자가 the “importance of intermission cooperation,”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어느 시대의 intermission(중간의 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교 단체들이나 그룹들 간의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리적인 면에서도 이슬람공포증(147-149쪽)에 대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1979년에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구에서 이슬람을 악마화하고 미국 출판사들이 어떻게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비방물들을 내 놓았는지에 대해 말한다(147쪽). 저자가 헌팅턴의 문명 충돌에 관한 이론이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테러가 이슬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헌팅톤의 견해와 Pikkert가 제시하는 것이 매우 동일하다. 즉, 소위 충돌이라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적의를 조장하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대해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 두 사실을 함께 묶어놓을 수는 없다. 문명의 충돌이 있거나 아니면, 인공적으로 혹은 악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본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마지막 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결론 장에서 Pikkert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오늘날 근동 무슬림 선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넘어간다 (189쪽). 그의 권면은 그 장의 제목과 같이 교회 중심적인 신약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선교 사역은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저서 전체에서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가 비판했던 실패로 끝난 대 실험은 대부분 의료와 교육 연구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무슬림 배경의 모임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데 중동을 생각할 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저자가 “신약의 영성이 New Testament spiritualit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중동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두 극단적인 견해를 피해왔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종교심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만 치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인 군자인 것처럼 그려놓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신약의 영성” 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세상에 신약의 위대한 선교사들처럼 되고 싶지 선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은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신약의 영성” 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행해야 하고 (행 2:46) 여자들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전 11:10)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기 나사렛에 있는 그리스 카톨릭 지역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Pikkert는 신약의 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중 하나로 “기독교 메시지를 분명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201쪽) 또한 “제자화와, 훈련, 책임 이양”(206쪽)에 대해서도 말한다. 분명히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쉬가 말하는 파라다임의 변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장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Pikkert의 저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선교지에 나가기 위해 훈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선교사 지망생이 많은 한국과 중국, 남아메리카에 이 책을 읽어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세속 역사의 관점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어 있는 고전 이슬람식 사고의 측면에서 역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이슬람 학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동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무슬림들이 흔히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단순히 선전하기 위해서나, 신화, 혹은 이단으로써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주>
1 이 말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역을 맡은 현대 중동의 형성에 대한 Fromkin’s 유명한 역사서 (Holt 2001)에 등장한다.
2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Daniel Yergin’s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Free Press 1993).
3 지금은 The Muslim World 로 불린다.
4 이 인용은 가드너의 경력에 관한 Matthew Rhodes 의 글 ‘Anglican Mission: A Case Study’ available online from the Henry Marty Center at www.martynmission.cam.ac.uk. 에서 가져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