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살림 무나야(Salim J. Munayer, 무살라하 책임자 http://www.musalaha.org/)
원본: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pdf/2008/The%20Theological%20Challenge.pdf
1.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운명
1948년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은 팔레스타인 사회에 크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항상 논쟁이 되어 왔고, 심지어 국제적 모임에서도 늘상 있는 일이다. 1948년 전쟁의 결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단 기억에 엄청난 상흔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유대국가의 성립에 따른 일반적인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논설되어 온 바 있지만, 이 가운데 존재하는 소수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러 면에서 있어,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동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경험-즉 중동 전 지역으로의 분산, 난민으로서의 삶, 영토소실 그리고 연구기관들의 손실 등- 을 해오고 있다. 인구변화상으로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럽과 남,북미로 이주를 해 버린 팔레스타인 무슬림들 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버나드 사벨라(Dr. Bernard Sabell)의 연구에 잘 나타나 있는 바, 이러한 현상과 그 결과들은 대부분 국가 이스라엘의 태생에 기인한다.
2.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학적 의문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분산될 때,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 또한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에 관한 수 많은 신학적 문제들과 당면하였다. 이 한정된 글 내에서, 이러한 모든 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필자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베들레헴신학교(the Bethlehem Bible College)의 교학처장으로서, 필자는 성서를 팔레스타인 학생들에게 가르치곤 하는데, 종종 지금 학생들이 당면한 정치적 환경에 대한 신학적 의미에 대해 자문하곤 한다. 선생이라는 입장 때문에, 학생들은 상당히 기대하며 필자가 올바른 대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나 복잡하여 대부분의 경우, 명확한 답은 알 수 없다.
예컨대, 학생들은 가끔 매일 당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부당한 처사들에 대해 어떻게 대항하여야 할지를 묻고 한다. 검문소들(checkpoints)를 통과하면서 당하는 모욕과 차별은 커다란 상처로 남아 분노하고 심지어 경멸하게 한다. 살고 있는 동네를 떠날 수 없는(베들레험 사람들의 상황이지만) 신세는, 새장 안에 갇힌 신세이고, 어디로, 언제 가야할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몹시 두려운 경험일 것이다. 서안지구(the West Bank)를 감싸는 장벽은 그 안에 사는 이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어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독한 부정의를 허락하시는가? 이에 더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에 어찌 반응하여야 하는가? “예수님이라면 어찌 하셨을까?”라는 자문을 시작점으로 해 보지만 이로써 족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며 말씀하신, 자비한 은혜의 수여자인 동시에, 악에 저항하고 친히 몸으로 성전의 환전상들을 몰아내신, 분노하는 의로운 선생을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은 세계 모든 압박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인 것이지만,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몇 가지 독특한 문제들이 상존한다.
언젠가 한 학생이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신학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어느날 유대인 정착촌 사람들이 트렉터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에 건물을 짓고자 했다. 이 땅은 이 학생의 집안이 수백년 동안 소유하던 곳이다. 이 학생은 이스라엘 경찰에 도움을 청하였지만, 경찰들은 보호를 거절하였다. 학생 집안에서 자신들이 이 땅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이며 유대인 정착촌 사람들에게 저항을 하자, 이들은 성서를 들면서 이 땅은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 청년에게 큰 문제의식을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땅을 빼앗고자 하는 이들이 그들의 정당성을 위하여 이용한 성서는 바로 이 학생이 신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성서이기 때문이다. 이 학생은 물론 모든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적 정체성과 부르심 그리고 선교에의 사명 그리고 영적인 유산 등을 공급하는 것이 바로 이 성서였다. 이 경험은 바로 이 학생의 성서와 그 의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땅에 대한 안정성을 흔들었다. 주께서는 이곳에서 태어나시고, 사셨고, 가르치시며 병을 고치셨고, 또한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셨다. 바로 여기는 옛 예언자들의 땅이며, 수 백년 동안 이어져 온 신앙의 전통과 유산이 태동한 곳이다.
3. ‘진정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우리들의 적들에게 약속하셨는가?’
어떻게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가 자신들의 땅을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셨다는 딜레마를 다루어야 하는가? 그냥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자신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이들에게 말이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인 조상들이자, 성서이야기의 주인공들인 유대인들은 바로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싸우고 투쟁하여야 하는 바로 그 “적”인 것이다. 이 난처한 방정식에 반응하고자 했던 수없이 많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왔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적, 종교적 정체성을 억제하거나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의 종족적, 민족적 정체와 큰 충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또는 자유를 향한 정치투쟁 운동을 하는 세속적인 팔레스타인사람들과 함께 했다.
다른 이들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회피하고자, 구약성서의 중요성을 가치절하하여, 신약성서에만 집중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또 다른 반응은 구약성서를 간직하지만, 유대인과 관계된 계약이나 약속을 다루는 모든 구절 등은 생략한 채, 선택적인 읽기만을 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반응들 가운데 하나인 팔레스타인 해방신학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왜냐하면 주변인요, 피억압자요, 왜곡된 이들의 관점에서 정의에 관한 성서의 시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유대인들(이스라엘시민권자들인 이들은 대부분 군인들이나 유대인정착촌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은 어쩔 수 없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신학적 관점을 채색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독히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여야만 하는 도전이다.
4.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복잡하게 한다.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국가로서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 관한 인식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과는 판이하다. 이는 몇몇 역사적, 신학적 요인들에 의해 크게 영향 받은 바 있다. 유대인학살(the Holocaust)에 대한 엄중한 영향력과, 바로 이러한 일이 현대의 교육받아, 문명화된 그리스도교적 유럽사회에서 발생하였다는 죄의식은, 서구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에 대한 온정적 시선을 갖게 하였다.
특히 서구 그리스도교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 역사가 유대인학살을 가능케한 유럽의 시대정신(Zeitgeist)으로 기능하였다는 사실을 염두할 때, 유대인들을 잘 대접하고자 하는 뜻은 이해할만하다. 신학적으로, 이는 중대한 변화였다. 또한 대체로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Evangelical Christians) 가운데, 유대인들에 대한 신학적,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예컨대,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예컨대 성서고고학에 대한 열정 등으로 나타난다)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국가 이스라엘에 관한 정치적, 신학적 성원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아주 당연하고 더할 나위없는 태도였을 것이다. 이는 수백년 동안의 박해에 대한 보상적 차원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성서예언의 성취로서 환영하였다.
유대인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1948년(혹은 1967년) 이래, 미국과 유럽사회에 풍미한 바 있는,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 이해는 이스라엘을 향한 정치적 후원과 순전한 사랑으로 지속적으로 견지되어 오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평화정착 노력이나 이 땅에 관한 협상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사람들과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반대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과 약속을 불경하게 거절하는 것요, 예수님 재림의 장애물로 이해한다.
5. 새로운 신학적 시각의 요청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신학적 논제는 심각한 반향을 불러 온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상실에 대한 정의로운 분배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된다든가 혹은 팔레스타인사람들과 이들의 공동체는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로막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는 또한 수백년 동안의 소수자로서, 성지(the Holy Land)에서의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한 오랜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충격적인 메시지는, 일부 그리스도교 시온주의자(Christian Zionists)의 냉담한 태도에 의해 형성된다.
많은 그리스도교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인내심이 거의 없다. 하여 국가 이스라엘에서의 정치적 열의에 순복하든지, 떠나 버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재는 그저 시간을 지연시키는 일이기에, 이들이 떠나는 것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더 많은 유대인들을 위해 양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두말 할 것 없이, 이러한 주장은 당신의 가족이나 집 그리고 땅이 그 결과로 고통를 겪지 않을 때, 더욱 쉽게 진전된다. 이러한 측면은 서구사회의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소소한 신학적 문제일찌는 몰라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와 관계된 중심적인 문제이다.
만약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의 거부하는 태도와 그리스도교 시온주의자의 냉담한 태도, 모두가 잘못이라면, 질문이 생기는데: 무엇이 올바른 태도인가? 우선, 감정적으로 휩쓸릴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유대인(the Jewish people)과 정치국가 이스라엘(the political State of Israel)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에서 유대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우리들은 국가는 정치적 실체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유대인(the Jews)에 관해 언급할 때, 그는 유대인에 대해 말하고 있지, 오늘날의 정치국가 이스라엘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 둘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정치국가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목적으로 태동하였다. 그래서 유대인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유대인들은 성서적, 역사적 이해를 기반으로, 국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신실하심을 성취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아무리 복잡해도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기에, 반드시 다루어져야 한다.
둘째로,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이해를 위한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이스라엘의 부정의와 모든 이스라엘을 등치시켰던 반유대주의의 사냥감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서도, 예언자들도, 무엇보다 메시야가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60년 동안의 정치적 사건들이 유대인에 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일을 거부한다.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이 땅(the Land)에 관해 갖고 있는 성서적 주장을 용인해야만 한다. 뿐 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인할 수 없고, 서구교회(the Western Church)에 의해 무시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존재는, 땅의 신학(theology of the Land)이나 하나님의 계약(God’s covenant)의 실현 등과 같은 주제에 관한 논쟁을 유도하고, 이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역할에 관한 단순한 가정에 관해 도전하기 때문이다.
많은 작업들이 여전히 요청된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 하나님의 유대인과의 계약 그리고 땅의 신학 등에 결코 과거에도 지금도 몰입된 적이 없다. 그러나 1948년의 사건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주제에 관한 연구와 질문들을 하게 했다. 어떤 이들은 성서로 돌아가, 위의 복잡한 신학적 주제들과 이에 따른 정치적 의미들에 관한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스라엘 문제에 관해 세계 그리스도교계는 큰 갈등을 맛 보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진영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세대주의자들로 알려진,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시온주의 진영(Evangelical Christian Zionist)은 친 이스라엘 그리고 반 팔레스타인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정의와 사회복음을 옹호하는 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대해 보다 비판적 입장을,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대해 우호적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특정한 이들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 어떤 형태의 신학도 우리의 근본적 신앙원리와 상충함을 천명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믿는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이 함정을 거부하여야 한다. 우리는 비록 이 문제에 관한 최종적이고 올바른 해결과는 아직 멀리 있지만, 바로 여기가 훌륭한 시작점이다.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은, ‘무살라하’(‘화해’를 뜻하는 아랍어-번역자 주)가 지지하는 화해의 장 내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야닉 유대인들(Israeli Messianic Jews)과 교제가 필요하다. ‘무살라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투영된 것처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화해를 증진하려는 비영리기구이다. 우리는 우선,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과, 메시야닉 이스라엘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공동체 안에서, 화해의 격려자와 촉매제가 되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앉아서 대화하고, 함께 이 모든 주제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모든 견해를 개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은 두 공동체의 부족한 신학적 안정망을 발전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소홀히 다룰다면 그 어떤 신학도 궁극적으로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주제들을 특정한 바 있고, 서로 만나야만 하는 이유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해의 신학을 모색하는 도상에 있다. 이 신학은 팔레스타인에게는 정의를, 이스라엘에게는 희망과 안녕이라는 각기 공동체가 공히 바라는 필요를 전달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함께 이 도전에 응전하여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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