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1일 토요일

중동의 개신교 선교사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가, 아니면 문화의 전파자들인가?

서평 글쓴이: Duane Alexander Miller
책제목: Protestant Missions in the Middle East: Ambassadors to
Christ or Culture (WEC Canada, 2008), 226 pages.
책의 저자: Peter Pikkert



Pikkert는 중동이나 터키에서 사역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중요한 책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재정을 쏟아부으면서도 중동과 터키에 개종자들이 드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한다. 먼저 그는 Samuel Huntington과 David Bosch의 이론에 근거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Huntington은 그 유명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the World Order (Simon & Schuster 1998)의 저자이다. 그는 냉전시대 이후에 세계 분쟁의 주요 원인은 문명이 될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특별히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을 예상했다.

필자는 파라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s)에 대한 Bosch의 의견을 빌어 선교 역사를 해석하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보쉬의 의견에 대한 주요 출처는 “변화하는 선교: 선교 이론에서 찾는 파라다임의 변화”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Orbis Books 1991.) 이다. 이 책은 중동과 소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카톨릭 선교 이외의 서구 선교 역사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카톨릭 선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1장부터 4장까지는 각 시대를 다루는 본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제 5장은 역사적 분석과 비판에서 다소 급격하게 방향을 돌려 신학과 현대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필자는 이 장이 이 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역를 중심으로 하는 Pikkert의 현대 역사 구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00-1918년까지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분해되는 시점이다. 혹은 데이빗 프롬킨 David Fromkin 이 말했듯이 모든 평화를 끝내는 평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1 두 번째 시기는 1946년까지로, 시리아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서기 직전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79년까지로, 아랍 민족주의와 석유의 강세로 몇 나라들이 급부상하는 시점이다.2 이 시기는 또한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형성되고, 교파와 구분된 운동이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시기는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정치적 이슬람이 약진하는 시기로써, 정치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자 폭력까지 동원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Pikkert는 그의 저술 당시 (2005년)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연합군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패한 6일 전쟁이 일어난 1967년이 아니라 1979년인지를 묻고 싶을 것이다. 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많은 무슬림들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패배를 겪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와 같이 승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싼 반나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 같은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저자의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기 구분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1967년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싶어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자면, 60년대와 70년대는 범아랍주의와 공산주의 및 세속주의의 환상에서 점차 깨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1년이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한 서구의 개신교 선교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

Pikkert는 주로 The Moslem World3 and the annual report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로부터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와 일지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몇 인용들은 상당히 긴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좀 길긴 하지만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저자는 부정적이다. 그가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소위 대 실험 Great Experiment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1800년대 초에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지역 무슬림들에게 직접 바로 전도하는 것을 너무나 위험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대 실험으로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죽어가는 현지 교회의 (그것이 매로니안 교회든, 아르메니안이든, 그리스 정교회든, 콥틱이든 그 무엇이든지) 부흥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교회들은 서구 개신교 전도의 이미지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인 성상파괴와 개인주의라는 덫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 고아원, 진료소, 출판사, 병원들이 소위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Pikkert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지역 지도자들에게 미심쩍게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행동이 그들의 공동체를 너무 눈에 띠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후원이나 행운 없이도 수 세기 동안 스스로 잘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교사들의 그런 잘못된 대 실험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난 중동과 소아시아의 인종 말살이나 대규모 이민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대 실험은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이 결국 대부분 정교회 배경의 신자들로 구성된 개신교 교회를 세워놓았지만, 이 서구화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갑자기 터키와 아랍 무슬림들 개종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무슬림들에게 불신과 고립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이 본서의 본론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 시기를 되돌아 보면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네 시기를 다루는 각 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잘못된 것뿐 아니라, 올바르게 진행된 것들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저자는 이곳 저곳에 매우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사회를 섬겼던 인물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 Temple Gairdner(1873-1928)로, 그는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관한 문법서를 저술했다. 그러한 접근이 죠지 켈시 George Kelsey 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암만에 있는 켈시 언어 연구소 of Kelsey Language Institute 와 같은 것들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가드너는 또한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한 아랍어 대본을 써서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꾸란에서 훌륭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 교회의 가치 조차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가드너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1923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4 “이집트에서 영국 국교회의 주요 목표는 비기독교 대중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콥틱 그리스도인들이나, 개신교 교회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Pikkert가 제시하는 대 실험에 관여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또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예는 루터 선교회 Lutheran Orient Mission Society’s (LOMS)가 쿠르드인들에게 했던 선교이다. 그 선교를 이끌었던 포썸 L. O. Fossum은 가드너처럼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무슬림 사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쿠르디스탄(터키, 이란, 이라크에 걸친 산악, 고원지대-역자 주) 선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41세에 죽음을 맞은 의사요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포썸이 이루어놓은 것은 놀라웠다. 큰 실패로 끝난 대 실험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저자의 역사적 관찰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지적 받아야 할 점들도 있다. 편집에 신경을 좀 쓸 필요가 있다. 한 페이지에서 기본적인 사항인 문법 실수와 글자 오류를 둘 다 발견하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예를 들어 12쪽에서 Church Mission Society가 잘못된 약자인 CSM으로 표기되어 있고, Moslem World는 Moslim World 라고 잘못 쓰고 있다. 저자가 the “importance of intermission cooperation,”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어느 시대의 intermission(중간의 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교 단체들이나 그룹들 간의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리적인 면에서도 이슬람공포증(147-149쪽)에 대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1979년에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구에서 이슬람을 악마화하고 미국 출판사들이 어떻게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비방물들을 내 놓았는지에 대해 말한다(147쪽). 저자가 헌팅턴의 문명 충돌에 관한 이론이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테러가 이슬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헌팅톤의 견해와 Pikkert가 제시하는 것이 매우 동일하다. 즉, 소위 충돌이라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적의를 조장하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대해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 두 사실을 함께 묶어놓을 수는 없다. 문명의 충돌이 있거나 아니면, 인공적으로 혹은 악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본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마지막 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결론 장에서 Pikkert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오늘날 근동 무슬림 선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넘어간다 (189쪽). 그의 권면은 그 장의 제목과 같이 교회 중심적인 신약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선교 사역은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저서 전체에서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가 비판했던 실패로 끝난 대 실험은 대부분 의료와 교육 연구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무슬림 배경의 모임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데 중동을 생각할 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저자가 “신약의 영성이 New Testament spiritualit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중동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두 극단적인 견해를 피해왔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종교심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만 치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인 군자인 것처럼 그려놓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신약의 영성” 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세상에 신약의 위대한 선교사들처럼 되고 싶지 선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은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신약의 영성” 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행해야 하고 (행 2:46) 여자들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전 11:10)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기 나사렛에 있는 그리스 카톨릭 지역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Pikkert는 신약의 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중 하나로 “기독교 메시지를 분명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201쪽) 또한 “제자화와, 훈련, 책임 이양”(206쪽)에 대해서도 말한다. 분명히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쉬가 말하는 파라다임의 변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장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Pikkert의 저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선교지에 나가기 위해 훈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선교사 지망생이 많은 한국과 중국, 남아메리카에 이 책을 읽어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세속 역사의 관점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어 있는 고전 이슬람식 사고의 측면에서 역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이슬람 학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동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무슬림들이 흔히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단순히 선전하기 위해서나, 신화, 혹은 이단으로써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주>
1 이 말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역을 맡은 현대 중동의 형성에 대한 Fromkin’s 유명한 역사서 (Holt 2001)에 등장한다.
2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Daniel Yergin’s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Free Press 1993).
3 지금은 The Muslim World 로 불린다.
4 이 인용은 가드너의 경력에 관한 Matthew Rhodes 의 글 ‘Anglican Mission: A Case Study’ available online from the Henry Marty Center at www.martynmission.cam.ac.uk. 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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