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8일 일요일

레이먼드 룰: 중세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무슬림들을 향해 간 선교사

원 제: Raymond Lull: Medieval Theologian, Philosopher, and Missionary to Muslims
글쓴이: J. Scott Bridger1

1. 서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윌리엄 캐리(1761-1834) 가 18, 19세기에 인도에 가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때는 보통 선교의 시작으로 본다. 그 외에는 기독교 역사 첫 3 세기 이후에는 복음 전파에 그다지 큰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5세기의 성 패드릭 St. Patrick 이나, 13, 14세기의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St. Francis of Assisi, 그리고 레이먼드 룰(미주 2), 그리고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선교사가 된 후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에게 나아갔던 19세기의 죠셉 월프 Joseph Wolff 같은 사람들의 노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무슬림들에게 이루어진 선교의 역사만을 생각한다면 복음 전파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과 대면한 것은 대부분 습격하고 다니는 지하드주의자들(성스러운 전쟁을 외치며 종교의 이름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역자 주)을 피해 다니거나, 아니면 십자군으로 이들과 맞서거나, 그도 아니면 딤미(미주 3) 정책이나 개종으로 인해 가족과 삶에 엄청난 압력을 받는 경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리스도는 항상 순교자들(즉, 증인들)을 보냈고, 따라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삼으려고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생명과 신체적인 위험을 감수한 개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끔찍한 결과를 눈 앞에 두고서도 대단한 용기와 희생 정신을 발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글은 레이먼드 룰의 삶과 사상에 관해 나눔으로써 복음 전파가 소홀했었다고 여겨지는 기간에 대한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지금의 이시기가 전투적인 이슬람이 만연하고 무슬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교적인 노력이 지극히 도전 받고 있으며, 때로 선교사들의 극단적인 희생까지도 요구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룰의 삶과 본보기는 그가 살았던 시기를 생각해 볼 때 실로 놀랍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즈웨머 Zwemer 는 이렇게 적고 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찾아볼 수 있는 선교 정신은 십자군의 정신이 전부였다. 그들은 칼을 들었고, 칼로 망했다. 그러나 레이먼드 룰은 진정으로 놀랄만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십자군이 진정한 그 분의 무기인 용서와 평화를 가지고 십자가를 위해 싸웠다면 십자군은 세상에 어떤 존재가 되었으며, 어떤 일을 하게 되었을까?’(미주 4) 룰 자신은 이렇게 적고 있다: ‘많은 기사들이 바다를 건너 거룩한 땅으로 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무기로 무장하여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얻어내기 전에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다. 하지만 내게는 거룩한 땅의 정복은 사도들이 이루어낸 것처럼 사랑과 기도, 그리고 눈물과 피를 쏟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정복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미주 5)
룰의 삶과 사상을 나누려면 두 부분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첫 부분은 룰의 배경과, 교육, 개종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부분은 신학자와 철학자로서의 룰의 사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특히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그가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 설명한 것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룰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 여기에 제시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은 때로 적대적이기까지 한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나누기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한 그의 열정이다. 그것이 그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것이었고, 그의 사상과 철학도 오직 그 빛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피어스 Peers는 룰의 저술들 가운데 하나에서 다양한 주제에 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묵상서의 이차적인 주제들 가운데 특별히 부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개종에 대한 것이다. 이 책 한 권에서만도 룰이 그렇게 자주 이 주제로 되돌아가곤 한다는 것은 그 주제가 그의 삶을 지배하는 열정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미주 6) 그의 그러한 열정이 이 글의 요점이 될 것이다.

2 룰의 생애
레이먼드 룰은 스페인 동쪽 해안에서 좀 떨어져 있는 한 섬인 마조르카 Majorca 의 팔마 Palma 에서 1232/35년에 태어났다.(미주 7) 그는 레이먼드 룰과 엘리자베스 데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1232년에 아라곤의 왕 제임스 1세가 마조르카를 무슬림들의 손에서 재탈환한 후에 그 곳에 정착했다.(미주 8) 레이먼드의 아버지는 제임스 왕이 무슬림들에 대항하여 캠페인을 벌이던 시기에 십자군으로 제임스의 군대에 있었다. 전쟁 후 제임스는 그를 따르던 자들에게 넓은 지역의 땅을 상으로 하사했다.
룰의 아버지도 그렇게 땅을 하사 받은 사람으로 아들 역시 왕실에서 좋은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했다.(미주 9) 룰은 제임스 왕의 자녀들, 특히 제임스 2세의 교사가 되었다가 후에는 행정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한 삶의 방식은 그에게 덫이 되었다. 그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이 타락한 시기에 극도로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 술, 여자, 노래가 왕과 왕자들이 가장 즐기는 것들이었다.(미주 10)
룰은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노래와 궁전시도 잘 지었다. 하지만 그 주제는 주로 ‘불법적인 사랑의 기쁨’이었다.(미주 11) 그러한 생활은 그에게 두 자녀 도메네크와 막달레나를 낳아 준 블랑카 피카니와 결혼한 후에도 계속되었다.(미주 12) 방탕과 부도덕으로 얼룩진 그의 생활은 그가 32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어떻게 개종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피어스는 그 중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두 개 다 그의 전기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고, 어디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충분한 것들이라고 말한다.(미주 13) 여기에 소개되는 것은 가장 믿을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비슷한 사건이 룰의 저서인 휄릭스 Felix 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미주 14) 또한 여기 소개되는 이야기는 그의 개종에 대한 다른 설명들과도 잘 맞는 요소들이 많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룰은 결혼한 여인인 시그노라 암브로시아 집의 창문 옆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상아빛 목과 가슴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부인은 그를 불러서 그가 그렇게도 아름답게 여기는 그녀의 가슴을 보여주었는데 그 가슴은 끔찍한 암(cancer)에게 먹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생각을 바꾸도록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레이먼드, 나는 따르라.’ 그는 그의 궁정 직위를 버리고, 그의 모든 자산을 판 후 로다 혹은 라다라고 하는 산에 있는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이것은 1266년의 일이었다.(미주 15)

개종 후 룰은 몇 달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내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슬림 선교를 위해 부르셨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미주 16) 그러나 그는 성직자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라틴어와 아랍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에서 일했던 그의 경력이 왕과 왕자들, 그리고 교황까지도 설득하여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서 선교사들을 준비시켜 ‘영적인 십자군’이 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룰은 자기 자신이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미 고난 당하신 주님처럼 자신도 고난 당하기를 바랬다.’(미주 17)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9년 동안을 신학과, 철학, 논리, 의학, 그리고 특별히 아랍어를 공부하면서 보냈다. 아랍어를 공부하기 위해 그는 무슬림 노예를 사서 그가 아랍어와 이슬람에 관해 자신을 가르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팔마에 사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과 논쟁도 하게 되었다. 그는 제임스 2세의 보호 아래서 이런 일들을 해 나갔는데, 제임스 2세는 왕자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룰은 또한 이 시기에 꾸란과 알-가잘리의 Al-Ghazzali 글들도 연구하고 싶어했다.(미주 18) 그 결과로 그는 논리와, 철학, 그리고 몇 가지 다른 분야들에 대한 저술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주요 저술은 묵상서 the Book of Contemplation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그것을 아랍어로 저술하였다.(미주 19) 그는 또한 라틴어와 자국어인 카탈란어 Catalan 로도 저술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서구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정교한 철학 논문을 작성한 첫 그리스도인 저술가가 되었다.(미주 20)
그가 자신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게 하려고 사들인 노예는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주인을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룰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고 9년 전에 했던 것처럼 한동안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반박할 수 없는 기술 Art (즉, 방법)을 만들어 내서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사람들 위에 서게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미주 21) 이 책의 제목은, 시리즈로 볼 수도 있는데, Ars Magna 혹은 Ars Generalis 이다.(미주 22) 보너 Bonner 는 그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 (노예의 자살) 후에 라몬은 집에서 그리 멀리 않은 어떤 산에 올라갔다. 평온함 가운데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기 위해서였다. 거의 일 주일 가량을 머물렀을 때, 어느 날 하늘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주님께서 앞에서 말한 그 책의 저술에 대해 어떻게 믿지 않는 자들의 오류를 보여줄 것인지 그 형태와 방법을 그의 마음에 떠올려주셨다.(미주 23) 그 책은 원래 묵상서가 될 것이었지만, 그리고 묵상서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한 룰의 모든 사상이 그 책에 드러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 책의 형태를 구성하고, 어떻게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에 있었다.(미주 24) 이것이 새롭게 영감을 받은 그 기술에 대한 주요 과제가 될 것이었다. 이제 42세가 된 룰은 그의 역작이 될 저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시작하고 있었다.(미주 25)

룰의 사상과,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변증법을 살펴 보기 전에, 룰이 개종을 하고 9년을 배우는 것에 사용한 후, 그 생의 나머지 40년이 어떠했는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룰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 볼 때, ‘영적 십자군’을 시도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여 그 가치를 깨닫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여행하고, 가르치고, 왕과 교황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수 일, 수 개월을 보냈다. 그 모든 것이 그가 갖게 된 비전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의 열망이 외면당한 적도 많이 있었지만, 그가 무언가를 이루어낸 것도 있다. 룰이 80세가 되었을 때 그는 비엔나에서 열린 협의회(1311-1312) 에 참석하여 동양어(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 Chaldean )를 가르치는 언어 학교를 설립할 것을 교황에게 직접 건의 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Paris, Oxford, Bologna, Salamanca, 그리고 교황청 Papal Court 에서 학생들이 이 언어들을 배우고 선교사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룰의 가장 큰 업적은 그의 선교 여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북아프리카로 세 번 그런 여행을 떠났다. 처음에는 튜니지아의 수도 투니스로 가서 무슬림 학자(울레마)를 만나 그들 종교를 자신에게 확신시킬 수 있으면 자신이 무슬림이 되겠노라고 제안했다. 며칠 동안의 논쟁 후 그 도시의 이맘들과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 중 몇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술탄에게 가서 룰을 감옥에 가두고 처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좀 더 유순한 리더의 중재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항구로 보내져서 몇 명 안 되는 믿는 자들과의 몇 번의 은밀한 접촉 시도 후에 강제로 유럽으로 보내졌다. 이 때가 1291년 혹은 1292년이었을 것이다. 룰은 평생에 두 번 더 그런 여행을 했는데, 마지막 여행은 1315/16년에 있었다. 그 여행은 알제리아에 있는 Bougie시에서 83세의 룰이 성난 무리들의 손에 순교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의 몸은 마침내 팔마로 다시 보내져서 샌프란시스코의 교회에 아직도 묻혀 있다.

어떻게 해서 무슬림들의 신 개념에 대한 룰의 접근이 무슬림들에게 그렇게도 위협적이었으며,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진리를 잘 드러낸 것으로 보이는가?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룰의 변증적, 복음주의적 방법과 관련된 그의 신학적 철학적 개념들을 좀 살펴볼 것이다. 특히, 룰의 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와, 그가 사용한 기술의 성격, 그리고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인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그의 접근 방법을 살펴볼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룰의 변증법의 기초가 되고 있는데, 이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이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제시되는 이 두 교리에 대한 설명은 룰의 책인 “이방인과 세 현자의 책 Book of the Gentile and the Three Wise Men”에서 가져온 것이다.(미주 28)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비록 룰이 학자이고 학자적인 방법으로 논증하고 있지만, 그가 한 개종의 경험이 그의 철학과 선교사로서의 방법론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즈웨머가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룰의 내적 생활의 열쇠가 되는 것은 그의 개종의 경험이다. 성육신적 사랑이 육적인 사랑을 극복했고, 룰의 모든 열정과 천재적인 시성 poetry 이 십자가를 향한 복종에 쏟아졌다. 그가 젊어서 본 비전이 그가 나이를 먹은 후에 내세운 모토를 설명해 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있지 않은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He who loves not lives not; he who lives by the Life can not die.’ 고난 당하시는 구세주 이미지는 그가 산 50년간 줄곧 그를 살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스도 그 분을 향한 사랑이 그의 가슴을 채웠고, 그의 정신을 빚었고, 그의 펜 pen 에 영감을 불어 넣었으며, 그의 영혼이 순교의 관 crown 을 간절히 소망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계시에 대한 그 큰 신비에 대해,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합당한 증거를 찾아내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비전을 회상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 증거였던 것이다.(미주 29)

3 룰의 사상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의 개종에 대한 룰의 관심이 그의 사상과 저술들에 나타나는 주요 동기요 중심이 된다. 그는 철학이 신학에 보조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강조했는데, 개종에 대한 룰의 관심만이 그가 철학에 대해 취했던 이러한 태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 줄 수 있다.(미주 30) 룰이 살았던 시대는 유럽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사상가들의 개념들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중에 있었다. 이 사상들은 중동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정교회 수도승들과 이븐 시나(아비시나) Ibn Sina (Avicenna)와 이븐 라쉬드(아베로스) Ibn Rushd (Averroes) 같은 무슬림 철학자들과 주석가들이 지니고 있었던 것들이 새롭게 소개된 것들이었다. 이 시기는 아랍 이슬람 세계가 가지고 있던 것들에 철학과 학문이 동요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룰은 그런 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 받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도하려면 그 자신이 그런 사상들을 섭렵하고 반박해서 기독교 신앙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도적 관심에 붙들려, 룰은 철학과 신학 사이에 분리의 벽을 세우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는 그의 전 생애 동안 매우 뜨거운 논쟁거리였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베로스의 주석들과 기독교 세계에 속해 있는 그의 추종자들, 즉 ‘의심스러운 진리 double truth’라고 알려진 것을 지지했던 라틴 아베로스들 Latin Averroists(즉, 기독교 세계에 살면서 아베로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역자 주)로부터 시작했다. 의심스러운 진리 이론은 철학적으로는 진리일 수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아직 진리라고 볼 수 없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이론이다.(미주 31) 룰은 그런 개점이 지식인 무슬림들 사이에 기독교 메시지가 살아날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보았다. 그는 이성이 가장 깊은 신앙의 신비를 믿을 수 있는 이성적인 바탕을 제시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St. Ramon de Penyafort 과 Ramon Marti 같은 그보다 앞선 도미니크 수도사들을 비판했다. 이들은 발렌시아에서 룰처럼 비폭력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여 무슬림들을 기독교로 이끌었지만, 룰은 마티가 기독교의 합리성을 보여주는 이성의 역할을 무시했기 때문에 튀니지의 술탄 al-Mustansir를 개종시키는데는 실패했다고 보았다.(미주 32) 마티는 술탄이 이슬람의 진리를 포기하도록 설득했지만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시키는 데는 실패함으로써, 그 술탄이 이슬람의 진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오히려 못한 상태를 만들었다.(미주 33) 룰은 이것을 큰 비극으로 보았으며, 그가 생각해낸 방법 Art 을 적절히 사용하면 이러한 비극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필연적인 이유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코플레스톤 Copleston 은 철학에 대한 룰의 태도와,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 목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준다:
무슬림들의 개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철학이 신학에 종속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주장뿐 아니라, 이성의 능력으로 신앙의 교리들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게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바탕으로 ‘필연적인 이유들 necessary reasons’로 신앙에 대한 문제들을 ‘증명’하려 하는 그의 제안을 이해해야 한다. 그가 기독교의 신비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합리화하려고 할 때 그것은 St. Anselm 나 Richard of St. Victor가 삼위일체에 대해 ‘필연적인 이유들’을 말한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룰은 신앙이 이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다룬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그는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에서 믿는 것들이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것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더 나아가, 아베로스들이 받은 비난, 즉 그들이 ‘이중 진리’를 붙잡고 있다는 비난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믿으면서, 룰은 신학과 철학이 갈라서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신학적 교리들이 이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성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미주 34)

이러한 ‘필연적인 이유들’을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룰은 알고 있었다. 무슬림들과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충돌을 피하면서, 어느 정도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타당성을 보여야 했을 것이다. 룰은 자신이 이성주의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섬세한 조화를 강조하고, 그의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그런 노력에 따르기 마련인 위험을 피하기 위해 룰은 종종 세 종교 모두에 존재하는 기초적인 전제(신학적, 철학적)부터 출발하는 것을 선택했다.(미주 35) 보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룰은 신에 대한 일련의 전제에서부터 시작한다. 신은 존재하시고, 한 분이시며, 모든 것의 근원(first cause)이 되시고, 등등. 그리고 나서 그는 세 종교 모두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의 속성으로 들어간다 (비록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룰은 이러한 속성들을 특성 properties, 미덕 virtues, 이성 reasons (rationes), 혹은 종종 위엄 dignities 이라고 칭한다.(미주 36)

룰은 그의 사상의 하위 구조가 되는 신과 세계에 대한 다섯 가지 원칙을 나열한다.(미주 37)
1. 신은 그 자신의 본질적인 함과, 위대함, 영원성, 능력, 지혜, 의지, 미덕, 진리, 영광을 가지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9가지 이상 되는 신의 속성들을 나열한다. 따라서 여기에 나열된 것들이 모든 속성을 다 나열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2. 이 속성들 혹은 위엄들은 서로 대치됨 없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본질이 합쳐져서 그 속성들이 서로 융통성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 속성들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한 분 이라는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단순함의 개념이다.)
3. 이 위엄들은 실재하는 것이다.
4. 실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룰의 사실주의적 존재론을 보여준다.)
5. 각 위엄들은 이 세상에 있는 각 창조물의 역량에 맞도록 영향력을 발휘하여, 각 창조물들이 그들의 제 1 원인이 되는 것 (즉, 신)을 닮도록 한다. 각 창조물의 역량은 그 창조물이 얼마나 그 위엄과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설명을 하면서 룰은 창조물이 하나님의 속성에 맞는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매우 일반적인 중세 사상을 반영한다. 룰은 사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구조를 갖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그의 방법(Art)의 목적은 ‘진리를 알고 그에 동의하는 방법이 가능한 한 실재하는 방법에 가장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The aim of his Art was ‘to make the modus intelligendi [the mode or manner of knowing or assenting to truth] conform as closely as possible to the modus essendi [the mode or manner of existing or imbibing/exuding essence].’) (미주39)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신비를 우주 구조의 한 부분으로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설명’ 혹은 증거가 ‘필요한 이성’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미주40) 보너는 룰의 방법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가 그 방법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룰 자신도 조심스럽게 지적했듯이 논리도 아니고 형이상학도 아닌 오히려 그 둘 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본질에 대한 가장 확실한 설명은 룰이 사용한 ‘방법(Art)’ 이라는 말에 있다. 그리스어 tevcnh를 학문적으로 해석한 이 말은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리가 아니라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룰은 전체 우주 구조 the modus essendi 를 가지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다른 구조를 올려놓고 있는데 그것은 그 최초 the first 와 관련되었고 또 그것에서부터 나온 the modus intelligendi의 구조이다.(미주41)

이와 같은 룰의 사상의 대체적인 윤곽을 가지고 우리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타당성에 대한 그의 주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서 우리는 그의 주장을 소개할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과 룰에게 미친 중세 철학자들의 다양한 영향에 대해서는 미주와 참고서적 목록에 소개되어 있는 저술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룰의 작품인 ‘이방인과 세 현자의 책’ (Book of the Gentile and the Three Wise Men)은 룰의 일반적인 변증학적 접근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그가 란다 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쓰여진 비유적인 allegorical 책이다.(미주 42)

네 인물이 있다: 이방인, 유대인 현자, 기독교인 현자, 그리고 무슬림 현자.
이 가운데 세 대표자들은 유일신 종교를 믿고 있고 종교적 문제와 관련해 종종 모이게 되는 친구들이다. 이방인은 먼 땅에서 온 사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는 동안 그 세 친구들은 한 훌륭한 목초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그 곳에는 다섯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에 물을 대는 한 샘이 있다. 그 샘 옆에는 지성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을 만나서 그들은 그 다섯 그루의 나무들이 무엇인지 그 각각의 꽃들에 쓰여져 있는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미주 43) 그녀는 그 나무들과 꽃들이 하나님의 본질, 창조되지 아니한 미덕 virtues, 창조된 미덕, 죽음에 이르는 죄,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 이외의 많은 사항들 conditions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라고 설명한다.(미주 44) 더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고, 알고,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 모든 사항들이 꽃들을 다스리는데, 그 꽃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고, 심지어는 그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교정하는 원리요 교리가 됩니다.(미주 45) 그 여인이 그들 셋을 떠나간 후에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여러분 하나의 분파에 속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해 harm 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종교에 속할 때 오는 좋은 점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이 나무들 아래에 앉아서 꽃들과 이 나무들이 나타내는 사항들에 따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권위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으니, 논증적이고 필요한 이성 demonstrative and necessary
reasons 에 의해 어떤 동의점에 도달하도록 해 봅시다.”(미주46) 그들이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그 이방인이 그 장소에 도착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자 그가 누구든지 자신에게 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이방인의 책 the Book of the Gentile’은 시작이 된다. 결국, 각각의 세 현자는 그 이방인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고, 그 와중에 그 이방인은 교리의 성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각 현자들이 대답을 한다. 룰은 유대인과 무슬림의 신앙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그의 이 두 신앙에 대한 설명은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바르게 보여주는 것은 룰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이것이 바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부 한다고 보는 것이다.-역자 주) (미주47)하나님의 완전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시대에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미주48)
- 계속됩니다.
원본바로가기 Raymond Lull: Medieval Theologian, Philosopher, and Missionary to Muslims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내부자 운동, 무엇의 내부인가, 교회, 문화, 종교?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가?

내부자 운동, 무엇의 내부인가, 교회, 문화, 종교?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가?
원제: Inside What? Church, Culture, Religion and Insider Movements in Biblical Perspective
글쓴이: KEVIN HIGGINS

1. 서론
소위 ‘내부자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선교학자들과 선교 현장에 있는 사람들 내에서 점점 더 많은 논의가 일어나고 있으며 많은 논쟁점들이 대두되고 있다. 본 글은 이 계속되는 논의 가운데 교회와, 문화, 종교의 세 주요 요소에 대해 간단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이 주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 다섯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부자 운동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종교와 문화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선교 실재에 있어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2. 내부자 운동이란 무엇인가?
2004년과 2007년 사이에 내부자 운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문제의 양면에 대한 글들이 내부자 운동이라는 주제로 발표되었는데 그 중 몇 개의 중요한 글들은 국제 저널 프론티어 선교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logy) 에서도 발표되었다.국제 단체 프론티어 선교의 관련자들이 모두 모여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가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심사 숙고하였고, 그 결과 역시 출판되어 나왔다.[1]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내부자 운동에 대한 생각을 다듬기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두 개의 결과물을 내 놓았다. 나는 좀 더 길게 내부자 운동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점점 더 많은 수의 가족들과, 개인들, 부족들, 친구들 그룹이 종교를 포함하는 그들의 인종 문화권내에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이 신실한 제자들은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문화권 안에 머물면서, 그리고 성경이 인정하는 한 그 문화의 종교적 삶을 살면서 문화적으로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자신들을 표현할 것이다. 성령님 또한 성경 말씀과 그 분의 사람들을 통해 그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적 삶과 세계관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실 것이다.[2]

레베카 루이스(Rebecca Lewis)가 최근에 좀 더 짧은 정의를 내렸다: 내부자 운동은 그들이 원래 속해 있는 공동체내에 그 공동체와 함께 머물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여느 다른 운동과 같다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들은 아래의 두 가지 구별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1 복음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공동체에 또는 사회 구조 내에 뿌리를 내리고, 그 공동체 혹은 사회 구조가 ‘교회’가 이루어지는 주요 장소가 된다.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사회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계속 유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살아간다.[3]

위의 두 정의 모두에서 공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자 운동은 사람들의 운동 혹은 대중운동의 특징을 겸비하고 있으며, 종종 C5라고 일컬어지는 관점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4]

위의 두 가지 정의에서, 종교를 어떻게 가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3. 교회란 무엇인가?
루이스가 제안한 내부자 정의는 교회가 이미 존재하는 사회 구조 안에 세워질 수 있다,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기존의 사회 구조가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이 개념이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는 하였지만,[5] 선교학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선교 문헌에서 대중 운동은 이와 유사하게 기존의 구조 (가족, 마을, 부족)가 단체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6] 성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신약의 단체 개종의 예는 고넬료, 루디아, 빌립보 감옥의 간수, if Sychar?? 마을이 있다.

그러나 내부자운동의 교회학은 적어도 두 가지 방향에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논쟁으로, 내부자 운동으로 세워진 교회에 내부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포함하는 사회 정체성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이제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방향에서 제기되는 의문은 내부자 운동의 신자들과 좀 더 폭 넓은 교회와의 관계를 염려하는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됨을 염려하는 소리이다.

나는 먼저 그리스도의 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이전의 종교 상황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나는 여기서 종교에 관한 논의보다는 다중 정체성의 가능성에 관해 몇 가지 코멘트를 제시하고 싶다.[7]

먼저, 교회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다(에베소서 2:8-10). 어떤 의미에서 아무도 교회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교회의 일원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서 삶의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요청 받는다.

따라서,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삶의 다른 면에서의 그의 정체성과 겹쳐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에베소서에서 종들과 주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님께 하는 것처럼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변화 되는 첫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교회의 첫째가는 전략은 사도행전 14:21-28에서 열거되어 있는 것들(잃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을 제자 훈련하고, 제자들을 격려하고 강화하고, 각 교회의 지명된 장로들을 택하여 훈련하고, 복음의 지속적인 확장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서로 연결되고 참여하는 것)과 같은 기능들을 통해 스스로 증식하는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전통적인 말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 동일한 성경적 기능들이 내부자 운동 안에서 변형된 형태와 용어로 일어날 수 있다.[8]

셋째로, 비록 교회가 우리가 방금 사도행전 14장에서 지적한 그런 구조로 발전한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성전과 회당에 여전히 참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종교적 표현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된다.[9] 그들은 또한 가정과 성전 마당 같은 공공 장소에서도 만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의 모임을 가졌다.[10] 믿는 자들은 성전 예배에서 교회의 일원이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가정 모임에서 유대교의 일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11] 그들은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12]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메시야를 따르는 유대교 신자들의 성전과 회당으로부터의 분리가 박해와 파문, 그리고 회당의 의식(liturgy)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겨냥하는 저주가 포함되면서 촉진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3] 이 분리는 신자들 편에서가 아니라, 이전 종교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더욱 선동되었다. 분리가 일어날 때 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고 심지어 분리가 발생했을 때도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14]

넷째로, 제자들은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전의 구조에 남아있었다. 내부적 접근은 사람을 정직하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는 구조 안에 남는다는 것은 그 구조의 신학과 종교에 동의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15]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들과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분명히 나타났고, 점점 더 커졌다. 그 차이는 이미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부터 존재했고, 그 결과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초기 설교들에서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50년 이상 동안 완전한 결별은 일어나지 않았다.[16]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닫힌 모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다른 사회 혹은 심지어 다른 종교 구조나 종교적 표현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17] 아래의 종교적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질문의 두 번째 단계는 좀 더 폭넓은 몸의 하나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5장은 ‘운동들’ 사이에서 하나됨과 교제에 대해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을 적용하려고 하면 하나됨에 대한 두 가지 ‘간단한’ 대답을 찾게 된다. 그 한가지는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시며, 따라서 우리가 내부자들 가운데서 구별된 운동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본문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과 갈라디아서 3장을 보라.)

반면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운동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고린도 전서 9:19 하반절에서 바울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21장 17절 하반절의 메시야를 따르는 토라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 예가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15장은 두 가지 경우 모두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새로운 운동을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각각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살도록 자유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분리된 운동들이 서로 상대편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로 인정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인들이 분명히 가끔만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제그룹으로 만난 것이 분명하다. 로마서 14장과 15장은 이러한 현실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적어도,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서신서, 특히 바울의 서신서에 나와 있는 적지 않은 분량의 자료들이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 문제들은 두 운동의 분리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이 아니라, 어떻게 서로 상호 반응해야 하는 가에 대한 것들이다.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서는 종종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자체는 성경적으로 분명해 보인다.

내부자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여러 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안전의 문제를 염두에 둔 채,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된 모임이 되기 위한 상황에 대해 주의 깊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오는 내부자들과, 다양한 교파 배경을 가진 바깥 사람들이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씩은 모여서 일주일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다른 상황에서는, 내부자 운동이 의도적으로 잠잠하면서 자세를 낮추고, 그러나 국제 기독교 교파와 공식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연결은 서로 각자의 사역과 정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부자들은 내부자들이 되는 것을 그만두도록 요구 되지 않을 것이다. 교파 지도자들은 내부자들의 사역과 ‘안수’를 인정해준다. 이 연결에는 재정적인 차원은 관련되어 있지 않다.[18] 이것은 좀 더 신실한 종말론적 ‘전 세계적인’ 교회 즉, 본질적으로 지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교회[19] 차원의 매우 유익하고,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교회에 대한 정체성과 하나됨의 관점에 대한 문제들을 개괄해 보았다. 결론을 내려 보자면, 내부자 운동은 그리스도의 몸에 있어서 그리고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그들의 삶의 상황에 있어서 지역적 성육신적 정체성의 복잡한 혼합으로 표현되는 교회의 파라다임을 나타낸다. 동시에, 우리는 성격이 말하는 하나됨의 문제를 더욱 자세히 그리고 실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종교적인 질문으로 돌아서야 할 때이다.

4. 우리는 종교와 문화를 분리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새로운 신자들이 그들의 문화에 남아 있으면서, 성경적 진리를 비판적으로 잘 적용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건전하고 좋은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0]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해서는 적응(accommodation)과, 토착화(indigenization), 문화화(enculturation), 그리고 상황화에 대한 계속된 논의의 역사와 그 전제들에 대한 특별한 이론들을 깊이 있게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21]

일반적으로 자신의 문화에 남아 있는 것이 항상 종교적인 면에서도 그 문화에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또한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종교와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문화인류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것으로 보인다. (즉, 문화인류학자들마다 각각 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는 뜻이다 –역자 주) 어떤 단순한 정의는 문화를 ‘특정 인간 집단의 전통, 그 집단의 구성원들로부터 배웠고, 서로 공유하고 있는 삶의 방식’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22] 이 정의는 주로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좀 더 인식력이 있는 문화에 대한 이해는 Spradley의 다음과 같은 정의이다: ‘문화는 사람들이 경험을 해석하고, 행동을 유발하는데 사용하는 습득된 지식이다.’[23] 이러한 폭 넓은 설명은 종종 그보다 좀 더 좁은 영역으로 이루어진 하위 구조를 갖게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졌는데, 주로 문화, 경제, 사회 구조, 가치들, 세계관 등의 영역으로 이루어졌다.[24] 이 두 관점은 서로 완전히 다르지 않은데, 그것은 분명하게 서로 관계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행동과 그것을 생산하고, 해석하는 인식적인 구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논의에서 종교가 끼어들 자리가 어디인가? 모든 언어가 종교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와 일반적인 유럽언어들에서 종교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누군가를 신들과 묶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많은 언어들에서 종교를 나타내는 구별된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언어란 ‘문화에 대한 친밀하고 정확한 표현’[25]이라는 라민 싸네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종교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어떤 세계관에서는 종교와 문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26]

비록 일부 세계관에서 문화와 종교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로서의 종교’라는 제목이 붙은 섹션에서 Malefijt 는 종교를 ‘그가 소속된 사회에서 사람이 습득하게 되는 조직화된 믿음과, 가치, 그리고 행동 양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27]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종교는 분명 문화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Malefijt가 책 제목을 ‘종교의 인류학’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저자는 단순히 ‘인류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의 한 장으로 종교를 다루기 보다는, 종교라는 제목을 따로 붙일 만큼 충분히 종교가 구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Danial Shaw는 문화의 하위구조를 몇 가지로 제시하는데, 경제와, 이데올로기, 친족관계, 사회구조, 그리고 정치 구조가 이에 해당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원인과 현재 상태, 그리고 미래와 연관된 믿음과 관찰의 체계’라고 정의된다.[28]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종교적 믿음과, 실천들, 구조에 대한 표현을 포함하는데 반하여,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특별한 종교 형태들은 근원적인 문화적 실재의 연장이 된다.[29]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문화의 하위 구조(이데올로기)의 하위구조(종교)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자세하게 문화의 하위 구조로서의 종교를 살펴 보도록 하자.[30]

Malefijt와 Shaw는 모두 종교를 인식적이고 행동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Shaw는 또 다른 요소를 첨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 구조이다. 논의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나는 믿음과, 행동과 소속으로서의 종교의 세가지 면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제자가 된 사람이 그가 속했던 종교에 계속해서 머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종교에 대한 이 세가지 관점 모두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즉, ‘남는다’는 의미가 믿음의 차원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행동이나 소속의 차원에서 혹은 이 세 요소들 중에 두 개가 서로 연합된 차원에서 그런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어느 정도나 그 사람이 남아있는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31] 이제 문화와 종교에 대한 질문에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5. 종교란 무엇인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 논할 때 세 가지 차원의 유형을 사용한다: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가 그것이다.[32] 다른 종교들에 대한 그 각각의 접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정의를 살펴보고자 한다.[33]

배타주의: 기독교가 아닌 모든 다른 종교들을 인간 스스로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한 반역적인 시도로 보거나 혹은 사단의 활동을 본다.[34]

포용주의: 그리스도가 모두의 주님이시고, 모두에게 빛을 주시는 참 빛이라는 사실에 기인하여, 비록 사람들이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종교와 문화에서도 예수님이 활동하고 계시다고 본다. 종종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통찰을 가장 잘 완성시킨 것으로 여겨진다.[35]

다원주의: 모든 종교가 다 동일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일부 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길이지,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36]

단순히 ‘이 세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성경적 입장인가?’ 하고 묻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그렇게 질문한다는 것은 이 세가지 입장 중에서 하나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먼저, 우리는 ‘종교’라는 형태의 가면을 쓴 반역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것으로 성경에 종교가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서 1:18ff에서 말하는 것도 그 일부이다. 예언자들은 우상들이 사람이 만든 조형물이고,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들만이 그런 우상에 경배한다고 증거한다. (이사야 40장의 예를 보라)

둘째로, 어떤 본문에서는 종교가 사단의 활동과 연관되어, 사단과 맺어진 것으로 그려진다. 고전 8-10은 우상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 숭배는 사단을 숭배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라. 갈 4장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 아닌 자들’에 매여 있었다고 말한다(8절).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율법아래에 있는 것은 초등한 영에 매여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2절). 엡 2장은 모든 사람들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있었고, 그것은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세력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전에는 우리(유대인들)도 다 그 가운데서 지냈다고 말한다.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이 타종교들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도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방 제사장)의 만남은 창세기의 저자가 엘과 야훼를 같은 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37]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다는 사실은 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이 인정 받았다는 것과, 따라서 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은 신약의 멜기세덱에 대한 관점에서도 더욱 확고해 지는데, 신약은 멜기세덱을 메시아의 가장 결정적인 선임자중에 하나로 보고 있다. 이는 다른 종교 전통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이 된다.

아모스는 비유대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출애굽기 사건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것과 동일한 관계로 기술한다 (아모스 9:7) 하나님은 이 다른 민족들과도 먼저 관계를 맺기 시작하신 것이다.

이방 선지자 발람은 선견자로서 징조와 점치는 것을 사용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과는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들었다 (민 22-24). 그는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관계는 그가 점을 치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민 23:1ff).[38] 요나서에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순종하는 것이 히브리인인 요나가 아니다. 야훼께서 들어주신 기도는 다름 아닌 이방 뱃사람들이 드린 기도였다. 그들이 제비를 뽑았을 때, 그 대답으로 이끄신 것도 바로 야훼 하나님이셨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서 갔고, 성경의 예언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인도함을 받아서 그들이 어디로 가야 그리스도가 나신 곳으로 갈 수 있는지 정확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사도행전 17장은 사람이 태어나는 때와 장소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획하신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신 것은 모든 남녀가 그분을 찾고 마침내 그 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17:27을 보라). 이는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성경의 내용들을 통해 내가 내리는 결론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종교를 논할 때 고려하는 세 가지 유형들 모두 정확하게 성경적인 관점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39]

먼저 내가 이해하는 성경의 입장을 요약하고 나서, 각각의 세 입장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인간들은 반역과, 왜곡을 저지르고, 그것이 일반 계시든, 특별 계시든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한다. 이방 종교들의 경우 이것이 사실이고, 바울에 의하면,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종교들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이를 논지로 삼고 있다).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잠정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일부 사람들이 그런 관계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둘째로, 살아있으면서 우리를 속이는 악한 영이 존재한다. 그 속이고, 타락시키는 영향은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고, 종교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가지 점은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비록 잠정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는 있어도, 그리고 실제로 몇 명을 그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모들 사람들이 그런 관계 가운데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셋째로, 위에서 언급한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거기에는 이 세상의 종교들도 포함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가 보통 ‘그분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제한되지 않고 그 경계와 범주를 넘어 사람들을 그분께서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넷째로, 몇 몇의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이스라엘이나 교회라는 범주를 넘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그러한 관계가 구원으로 연결되는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들은 정확하게 별의 인도함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성경을 통해 더 먼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했다. 고넬리우스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보내 복음을 설명해 주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성경 자료들을 요약하면서 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종교 생활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포함하지만, 교회보다 더 크다. 그 나라는 우주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의 모든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종교도 포함된다.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은 또 다른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람들의 충성과 마음과 생각에 대한 전투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타종교를 다루는 모범이 되어 버린 세 가지 차원(배탖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의 모델과 이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을 어떻게 비교해야 할까? 세 가지 차원의 모델이 어떤 면에서 성경적으로 맞고 또 그렇지 않을까?

배타주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향한 유일한 길이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라는 사실을 바르게 지적해 준다. 그러나 이 모델은 내가 위에서 세 번째로 제시한 성경적 관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소위 ‘진정한 종교’로 불리는 것 내에 존재하는 잠정적인 인간의 반역과 사단의 속박을 보지 못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된다.)

포용주의 모델은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약속의 백성의 범주를 넘어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바르게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동방박사들이나 사도행전 17장과 같은 일들은 종종 복음과 예수님 그 분에 대한 좀 더 확실한 만남으로 결론지어진다는 사실이다.

포용주의자들은 멜기세덱의 예를 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는데, 그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인들의 ‘엘’과 유대인들의 ‘야훼’를 같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용주의자들이 그러한 멜기세덱의 예를 들면서 따라서 모든 종교는 같은 방향으로 인도된다는 결론에 이를 때 그것은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 반대되는 이유로 제시했던 많은 성경적 자료들을 무시해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포용주의자들의 입장은 인간의 죄와 영적인 악함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40]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선교하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종교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이 세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든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하는 반응을 요구할 것이다. 각각의 특정 종교 상황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모든 경우에 똑같이 들어맞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그가 이전에 속했던 종교에 머무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이제까지 한 논의에 따르면, 이 질문의 대답은 특정 종교 상황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머무른다’는 표현이 적어도 세가지 믿음, 행동, 소속의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잇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 우리가 실제로 선교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한 논의들이 선교 실제에서 의미하게 되는 것들을 몇 가지 제시하면서 적용해 보고자 한다.
6.1복음의 중심성 유지
우리가 위에서 한 어떤 논의도 선교실제에서 전도를 중심에 놓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한 모든 논의들은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더욱 확증해 준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기 위해 많은 것을 사용하신다. 심지어 다른 종교도 사용하시지만 여전히 복음만이 유일한 길이다.
6.2 실제적인 비판적 숙고 Engage in Concrete Critical Reflection
하나님이 만일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다른 종교에서도 활동하고 계시다면,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이 여전히 이전의 종교 안에 머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맞는 말일 수도 있게 된다. 그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정말로 맞는 말인지, 또 어느 정도나 맞는 말인지는 그 독특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고, 또한 어느 만큼이나 그 상황이 반역적이고, 사단에 매어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 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서도 역사하신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진리가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될 수 있고, 또 그에 대한 반응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성경적인 내용을 계속해서 알려주고, 적당한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제자들이 그들의 이전 종교 상황 내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41] 이러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실제 상황 안에서 계속해서 비판적인 숙고를 해 보아야 할 것이다.
6.3 관점에 있어서의 지속적인 개종 Keep Conversion in Perspective
앞에서 한 논의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개종’의 의미를 굳게 붙들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개종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는 소속적인 의미 보다는 마음과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로마서 12:1ff).
6.4 ‘보편적이면서도 지역적’인 교회 되기 Encourage ‘Glocal’ Expressions of Church
내부자 운동의 지도자들이 실제적이고 의미 있는 방법으로 서로 축복이 되는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은 성경적 의미의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안전한 방법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 그러한 관계를 맺을 내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찾아 내는 것, 존중과 형제 된 겸손함으로 그러한 만남을 이루어 나갈 사람을 찾아 내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도전이 될 것이다.
6.5 상황에 맞는 성경적 신학 개발 Develop Biblical Theology in Context
본 논문에서 제시한 내가 내린 내부자 운동의 정의에 의하면, 우리는 선교 실제에 있어서 ‘내부자’들이 그들의 재능을 개발하여 자신의 문화적 상황에 맞는 성경적 신학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42] 그러한 노력에는 상황에 맞는 성경 번역과, 비판적 숙고를 위해 계획된 과정, 그리고 내부자 자신들의 능력 향상이 포함된다. 상황에 맞는 성경 신학은 하나님의 영이 계속해서 역사하시면서 당신의 사람들의 만들어가시고, 고쳐 가시는 방법이 될 것이며, 혼합주의를 막는 안정장치가 될 것이다.[43]
6.6종교를 신앙과, 행동, 소속의 기반으로 보는 관점 View Religion as a Matrix of Belief, Behavior and Belonging
나는 이처럼 세 부분으로 된 분류법을 이미 몇 번 언급하였다. 이제 어떻게 그것이 적용될 것인가 하는 전체적인 틀을 제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성경의 예를 들면서,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종종 인용하는 왕하 5:44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예로 택하고자 한다.
신앙: 나아만 장군의 경우 적어도 그의 신앙의 어떤 부분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15절).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옛 사고 방식이 일부 남아있다: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기 때문에, 그는 아람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스라엘의 흙을 좀 달라고 청한다 (17절). 예언자는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흙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을 묵인한다. 내부자의 신앙 체계가 변하는 과정은 역동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는 분명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행동: 내부자 옹호자들은 나아만이 림몬 신당에 계속해서 들어갈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8, 19절). 분명 이것은 행동에 대한 것이고, 옛 종교에 남아 있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아만의 행동에도 역시 변화가 있었다. 나아만은 이제부터는 다른 신에게는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17절). 이것 역시 행동이고, 과거의 모든 행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44]
소속: 나아만은 아람 사람으로 남는다. 그는 유대교 개종자가 되어 율법을 지키는 외국인이 되지 않았다. 그는 아람으로 돌아갔다 (19절). 그는 이스라엘의 적인 아람 군대의 장관 자리로 돌아갔다 (18절에 분명하게 그렇게 암시되어 있다). 그의 종교적인 소속은 어디라고 해야 할까? 아람으로, 그리고 림몬 신전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아람 사람들은 그를 림몬에 속한 사람들에게 ‘속해 있는’ 사람으로 볼 것이 분명하다.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서 우리는 복합적인 상황을 본다. 그의 신앙과 행동의 일부는 변했지만, 다른 부분은 이전과 동일하게 남아있다. 소속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는 이전과 다름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점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경우에 우리의 지혜로운 반응은 왕하 5:19절과 같이 ‘평안히 가라’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7. 결론
Charles Kraft는 새로 오게 될 서구 선교사들에 대해 한 나이지리아 그리스도인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그 나이지리아 인은 전통적인 부족 종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선교사들이 와서는 성경의 하나님과 나이지리아 인들이 믿는 하나님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이 그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 선교사들을 보내서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을 이해하고 헌신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45] 그는 새로 올 선교사들이 그것을 좀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부자 운동 패러다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민족들 사이에서 (여기에는 종교도 포함된다) 직접적으로 일하고 계시면서, 각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그분의 운동이며, 그분이 진정한 내부자이시다.
[1] 특히 Tennent, Timothy의 글을 주목하여 보라. ‘Followers of Jesus (Isa) in Islamic Mosques: A Closer Examination of C-5 “high spectrum” contextualization’, in IJFM (24:1, Spring 2007); Gary Corwin, ‘A Humble Appeal to C-5/InsiderMovement Muslim Ministry Advocates to Consider Ten Questions’, in IJFM (24:1, Spring 2007). Kevin Higgins,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 Movements: A brief Paper Inspired by Timothy C. Tennent’s Critique of C-5 Thinking’, in IJFM (23:6, Fall 2006).
[2] Higgins, Kevin,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The Devoteds’ of Acts’, in IJFM 21:4; Winter 2004, pp. 155 ff.

[3] 이는 출판되지 않은 자료로써 저자에게 한 논평 자료이다.
[4] John Travis의 C-단계들은 ‘The C1 to C6 Spectrum: A Practical Guide for Defining Six Types of ‘Christ-Centered Communities’ (‘C’) Formed in Muslim Contexts’ in Evangelical Missions Quarterly 34(4): 1998, pp. 407-408에 기록되어 있다. 트래비스 자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선교 실천가들이 C-단계들로부터 떠나고 있고, 적어도 C-5와 ‘내부자 운동’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C5라고 부르고 있다.
[5] 특별히 이에 반대하는 비평에 대해서는 Bill Nikides, ‘Evaluating Insider Movements’, St. Francis Magazine Number 4, (March 2006). Nikides addresses Lewis’ viewpoints directly on p. 11.ff을 보라. 다른 비평들에 대해서는 John Piper in discussion with John Travis and others in Mission Frontiers가 있다. John Piper, ‘An Extended Conversation About Insider Movements: Responses to the September-October 2005 Mission Frontiers’, in Mission Frontiers (January-February 2006)을 보라.

[6] 예를 들어 McGavran, Donald A., The Bridges of God (New York, Friendship Press, 1955); Pickett, J. Waskom, Christian Mass Movements in India (New York, Abingdon Press, 1933)을 보라.
[7] 나는 교회가 내부자 운동에 갖는 관계의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좀 다른 관점에서 다루어보려고 한다 Kevin Higgins,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
Movements: A brief Paper Inspired by Timothy C. Tennent’s Critique of C5 Thinking’.
Kevin Higgins, ‘Acts 15 and Insider Movements Among Muslims: Questions, Process,
and Conclusions’, in IJFM (24:1, Spring 2007).

[8] 나의 관점으로는 내부자 운동이 교회의 형태가 없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문제를 Tennent의 글 에 대한 나의 답에서 설명해 놓았다. Higgins, IJFM (Fall 2006)을 보라.
[9] Tennent은 그들이 한동안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와 내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주로 무엇이 혹은 누가 결국 발생한 분열을 시작되게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교회가 분열의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Tennent의 견해), 아니면 여전히 유대교 내에 머물고 있을 때에 이미 교회가 탄생되어 있었는지(나의 견해) 하는 것이다.
[10] 사도행전 3:1과 9:2를 보라. 바울은 다마스커스에 있는 회당에서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자신을 회당 지도자들에게 추천해 줄 공문을 구하고 있었다. 후에 사도행전 21:17 후반부에서 (예수를 메시야로 따르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이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들은 많은 유대인 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염려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공적으로 바울이 유대인적이라는 것(즉,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라고 강권한다.
[11] Luzbetak은 문화권내에 있는 그룹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사회 내에 기능하면서도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더 설명될 필요가 있다. Louis J. Luzbetak, S.V.D., The Church and Cultures (New York, Orbis, 1988)을 보라.
[12] 여기서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예수를 따르는 유대교 신자들’이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예수를 따르는 이슬람 종교인들’과 같은 관계가 되는 지가 중요해 진다. 이 글에서 이것을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각주 15와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룬 나의 이전의 글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The Devoteds’ of Acts, IJFM (21:4; Winter 2004)을 추천하고 싶다.
[13] 요한복음에 관한 Whitacre의 주석(IVP 시리즈)에서 이 과정에 대한 논의를 보라. 244쪽에서 Whitacre는 회당으로부터의 분리가 1세기 후반에 일어났다고 결론짓는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여러 사건들 이후 약 한 세대에 일어난 것이다.
[14] Whitacre는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이 이미 회당에서 축출된 신자들과 아직 회당에 속해 있는 두 부류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두 그룹 모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Rodney Whitacre, Johannine Polemic (SBL Dissertation Series 67, 1982), p. 19. 또한 Raymond 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Paulist Press, 1979)을 보라.
[15] 예를 들어 Nikides, 2006을 보라.
[16] 여러 가지 면에서 유대교가 이슬람과는 다르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매우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예수를 따르던 초기 유대인들 역시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당면 했던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내부적 접근을 좋게 보지 않는 일부 사람들은, 개종자들이 여전히 모스크에 가는 한 진정한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들은 복음과 반대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1세기 성전의 경우에도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초기 운동은 그런 이유 때문에 성전에 참석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마치 계속해서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행위를 한 것처럼 말한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전 8:10). 바울이 그런 행동을 바로 잡은 것은 다른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잠재적인 영향 때문이지, 그들이 정말로 이방 신전의 식탁에 참여했기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17] 나의 말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도 교회가 닫힌 구조를 갖는 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연합한 자들만이 교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회나 종교 구조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의 누룩과 같이 그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18] 여기에 덧붙이기에는 좀 이상하지만, 중요한 사실이라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부자 운동의 지도자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어떤 공식적이고 인정 받는 방식으로 역사적인 전 세계의 하나님의 사람들과 연결을 갖는 것이라는 것이다.
[19] 이 용어는 Leonard Sweet 가 처음으로 교회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Leonard
Sweet, Soul Tsumani: Sink or Swim in the New Millennium Culture (Grand Rapids, Zondervan, 1999).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보편적인 것으로 유지할 필요에 대한 유익한 논의는 데이빗 보쉬의 삶을 개괄한 짧은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Timothy Yates, ‘David Bosch: South African Context, Universal Missiology – Ecclesiology in the Emerging Missionary Paradigm’, in IBMR (Vol. 33, Nr. 2, April 2009), pp. 72ff.
[20] 히버트의 비판적인 상황화 모델이 표준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Paul Hiebert, ‘Critical Contextualization’, in IBM (11(3): 1987), pp. 104-111을 참조하라.
[21] 로마 카톨릭의 관점에서 보는 유용한 논의에 대해서는 Robert J.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New York, Orbis, 2007)을 보라. 또한, 개신교의 관점에 대해서는 Andrew J. Kirk, What is Mission?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0)을 보라.
[22] Annemarie de Waal Malefijt, Religion and Culture (New York, Macmillan, 1968),p.3.
[23] James P. Spradley, Participant Observation (New York, Hol, Rinehart, and Winston,
1980), p. 6, quoted in Daniel, R. Shaw, Transculturation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88), p. 25.
[24] 그 한 예로는 Shaw, 1988를 보라.
[25] Lamin Sanneh, Translating the Message (New York, Orbis Books, revised edition, 2009), p. 3.
[26] Kirk, What is Mission?, 122ff.
[27] Malefijt, Religion and Culture, p. 6.
[28] Shaw, Transculturation, p. 24.
[29] Ibid., p. 57.
[30] Kraft는 종교와 세계관에 대해 다루면서 종교와 문화가 서로 겹치면서도,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Kraft에게 있어서, 종교는 세계관 이상이고 또한 그 이하이기도 하다. 종교가 세계관 이상인 이유는 종교는 세계관이 포함하고 있지 않은 행동들과 의식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세계관 이하인 이유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모든 믿음과 가정들을 종교가 다 포함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Charles Kraft, Anthropology for Christian Witness (New York, Orbis, 1996), p. 199. Hiebert는 종교와 문화를 좀 더 덜 구분적인 것을 보고 있다. Paul Hiebert, Cultural Anthropology (Grand Rapids, Baker, 1983), pp. 371ff.).
[31] Van Engen은 종교와 문화에 대한 논의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종교와 문화가 아니라) 믿음과 문화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를 통해 Van Engen는 문화와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복음과 믿음을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문화에서나 복음과 믿음이 상황화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Charles Kraft와 노선을 같이 하여, Van Engen은 하나님이 문화를 운송 수단과 같이 사용하여, 운동수단이 승객을 나르듯이 믿음을 나를 수 있다고 본다. (1995, p. 192ff.)
[32] Van Engen는 이 유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나서, 이 세 영역에 네 번째 영역을 첨부한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각각의 영역이 주는 통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데, 그는 이 네 번째 영역을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Kirk는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바꾸어서 좀 더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기본적인 유형을 사용한다. Bosch는 두 개의 주요 패러다임을 보는데, 그것은 배타주의가 한 편에 있고, (비록 그가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포용주의와 다원주의가 합해져서 다른 한 편에 있는 것이다. 보쉬는 그 둘의 균형을 잡을 세 번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Hans Kung은 네 번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이 패러다임은 무신론자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가 제시하는 유형에서 (그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배타주의와 다원주의 패러다임은 분명한 반면에 포용주의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그는 모든 종교는 하나의 종교의 진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참고. Van Engen, The Uniqueness of Christ in Mission Theology, in Edward Rommen and Harold Netland, eds., Christianity and the Religions (Pasadena, CA, William Carey publishers, 1995); Kirk, What is Mission?, pp. 118ff.; David Bosch, Witness to the World (Eugene, Oregon, Wipf and Stock, 1980). Hans Ku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nium (New York, Doubleday, 1988), esp. pages 230 and 235.
[33] 이와는 대조적인 것이지만, 또한 동일하게 중요하고, 이와 연관된 신학적 관점으로서 기독론과, soteriology와, 그 각각의 위치가 내포하고 있는 계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Van Engen의 논의가 이 다른 토픽들에 대해 좋은 개관을 제시해 준다 (1995: 183ff.). 또한 Kirk, What is Mission? pp. 118ff.), and Smith, (1995: 9ff.)을 보라.
[34] Van Engen를 제외하면, 이것은 기독교와 종교들에 기여한 사람들이 주로 취하는 입장인 것 같다. 위에서 인용.
[35] Van Engen의 논의를 보라. 특히 Kirk의 것을 보라.
[36] 이 입장에 대한 뛰어난 예를 Ku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nium, p. 254 에서 찾아볼 수 있다.
[37] See the discussion in Ed Mathews가 그의 소논문 Yahweh and the Gods, p. 33. 에서 기독교와 종교들에 대해 다루면서 한 논의를 보라. Mathews는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지만, 엘과 멜기세덱 사건의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38] 나는 모든 점치는 행위가 야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발람의 경우에 그러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39] Gordon Smith는 또한 이 세가지 유형의 범주가 그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바른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가에 의문을 제시한다. 기독교와 종교에 대한 그의 개시장(the opening chapter)을 보라. (The Christianity and the Religions volume, 특히 p. 16).
[40] Van Engen은 각 패러다임의 장점만을 함께 모을 다른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것은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믿음에 있어서는 특정주의, 교회에 있어서는 포용주의, 문화 접근에 있어서는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말한다. Van Engen, 1995, 197ff.
[41] 심지어 이런 경우에도, 나는 그들이 이전에 믿었던 종교적 세계관과 신앙에 대해 많은 방향 조정과 재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나는 이를 이전에 쓴 나의 글에서 설명하려고 해 보았다. 앞에서 인용된 나의 글 The Key to Insider Movements, and, Identity, Integrity and Insider Movements를 보라.
[42] 여기에는 몇 가지 가능한 모델이 있다. Hiebert의 비판적 상황화 모델이 아마 가장 잘 알려진 것일 것이다. 좀 더 복잡하고, 확장된 모델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haw and Van Engen. See Paul Hiebert, ‘Critical Contextualization’, in IBMR (11(3): 1987), pp. 104-111, and Daniel Shaw and Charles Van Engen, Communicating God’s Word in a Complex World (Boulder, CO, Rowan and Littlefield, 2003).
[43] Nikides는 삼위일체 같은 교리들에 대한 연역적 가르침이 없다면 믿는 자들이 성경만 연구해 가지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교회의 지도 없이 성경 공부 교재나 다른 연역적인 도구들을 사용해서는 이런 것들을 배울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2006, p. 8). 귀납적, 연역적 방법을 통한 제자훈련이 적당하게 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Nikides의 주장은 좀 과장되어 있다. 교부들 역시 성경을 수 세기 동안 연구하여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교리들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리는 문화를 반영하고 있고, 이단이 마치 새로운 가르침인양 떠들어대던 시기에 이단을 구별해 내기 위해 그러한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44] 나아만 장군의 예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Stuart Caldwell, ‘Jesus in Samaria: A Paradigm for Church Planting Among Muslims’, in IJFM, (17:1, Spring 2000)을 보라. 나아만에 대한 더 많은 자료는 위에서 인용된 Higgins, The Key to Insider Movements을 보라.
[45] Charles Kraft, Christianity in Culture (New York, Orbis, 2005), p. 16. Emphasis in origi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