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상황화를 이루기 위한 교회 개척의 경계선

원제: MAKING SENSE OF CONTEXTUALIZATION: A GUIDE ON SETTING PARAMETERS FOR CHURCH PLANTERS
글쓴이: TIMOTHY HERALD[1]
원문보기: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10%20TimothyHerald-makingsenseofcontextualization(1).pdf

1 서론
‘적응주의자 accommodationists’와 ‘거부주의자 rejectionists’[2] 사이의 긴 논쟁은 무슬림 세계의 교회 개척[3] 역사에서 지겨울 정도로 계속된 문제이다. 이것은 학문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내가 만나 본 다양한 이슬람 지역의, 다양한 교파 배경의, 그리고 다양한 파송 단체들의 이슬람 지역 교회 개척 팀들이 초보자나 숙련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이 문제를 계속해서 대화의 주제로 삼고 있었다. 대부분은 각자 이 주제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주제에 대한 뜨거운 열기로 미루어보건대, 그 논쟁에 뛰어들어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나의 생각을 갖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할 수 없이 이 글에 나의 생각을 밝혀놓았다. 이는 내가 정한 경계선들이 선교신학 문서들이나 전 세계에서 실제로 교회개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논의되는 다양한 선교 철학적 발상의 와중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나의 동료들의 강한 주장에 힘입는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 나는 먼저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할 것이다. 즉, 개종자들로 이루어진 모임이 건강한 상태에 있는지를 어떻게 가늠할 것인지 그 영역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영역들 안에 어떤 평가의 기준들이 있어야 하는지를 제시해 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종종 선동적이 되어버리는 문제인, 무슬림 배경의 회중들이 꾸란이나 무함마드에[4] 대해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에게 속했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모임이 이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건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 전체를 요약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적응주의자들과 거부주의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정보들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2 문제(들)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자 하는 우리의 섬김은 우리를 무슬림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사역을 평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교회 개척 팀에 합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그들이 개척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결과로 기대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면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른 교회 구조들(전통적인 구조, 셀 혹은 가정 구조)과 다양한 지도자의 스타일 (여러 사람이 다스리는 스타일, 몇 명의 장로들, 혹은 한 명의 지도자)이 존재하며, 또한 다양한 교리적 차이 (개혁주의, 은사주의 등)가 있고, 많은 삶의 영역과 예배에 있어서 다양한 정도의 상황화 (옷 입는 방법, 언어, 의식, 정체성 등)가 가능하다.
구조나, 지도자, 교리적 차이에 대한 관점들은 결정하기가 쉽다. 개혁주의는 개혁주의를 의미하고, 가정교회 구조는 가정교회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화의 경우에는 사실상 아무도 같은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C5”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다른 문화권의 교회 개척자들을 의미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꾸란을 지니고 있는 채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모두 트래비스가 C5 형태를 이야기 했을 때 그가 의미한 것이 아니다.[5] ‘내부자’나 ‘빼내기’ 등의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역 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러한 사역 철학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을 사단으로까지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요인들은 무슬림 세계에서 하는 사역들을 조금씩 앞당기는데 서로 돕는 역할을 해 왔고, 특별한 이름표 없이 사역이 이루어지고,성급하게 전체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 제시되지 않도록 도왔다. 이런 점에서 개척 팀이 상황화라는 문제에 있어서 정확히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하는 것을 어림해 보고자 시도하면서 나는 적지 않은 슬픔을 느꼈다. 그로 인해 나는 몇 가지 원칙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 개척 팀이 건강한 교회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된 혼합주의로 빠져들고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6] 바라기는 현재 논의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방어해야 하는 사람들이건, 아니면 단순히 관찰자의 입장에 있건 간에) 이 방법을 적용하여 보면서 양 편이 모두 자신들이 판단하고 있는 방법론과 다른 교회 개척 팀들의 방법론의 기준을 다시 한 번 재고해 보게 되는 것이다.

3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먼저, 우리는 교회개척 팀을 평가하면서 그들이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교회가 현재 어느 시점에 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 기준을 삼지 않는 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두고 싶다. 현재의 상황을 평가해 보는 것이 어느 영역에 제자화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한 팀이 건강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혼합주의적인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는 그 팀이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그가 첫 편지를 보내기 전의 상황을 가지고 우리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교회 개척 팀(바울 자신을 포함하는) 을 평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교회는 간음과, 분열, 심지어는 배고픈 형제 자매들 앞에서 마구 먹어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오히려 그의 팀은 그들이 고린도 교회를 어디로 이끌고자 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팀이 했던 모든 교회 개척에 대해서 똑같이 적용된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적용하면서 회중이 세례를 받는지 안 받는지를 묻는 것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것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당신의 생각에는 무엇이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보는가?” 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답은 그 교회 개척 팀이 새 신자들을 어디로 이끌고자 하는가를 알자는 것이다.

내가 본 글의 초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양 편의 논의들을 읽어 보았을 때 우리는 마치 지역 교회가 현재 보이는 모습이 앞으로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종종 생각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별로 좋은 예측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새 신자들의 신학과 실천이 시간이 변하면서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청년 신자 그룹들의 신학과 습관도 시간과 함께 변화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건강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를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4 기준 Criteria
4.1 기준의 필요성
우리가 평가해야 하는 것은 교회 개척 팀이 기도하는 그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채, 그 다음 질문은 “우리가 평가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압둘 아사드 Abdul Asad 는[7] 그 목표가 C단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C5 공동체로 시작하는 교회는 장차 C4를 향해서 나갈 것이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게 될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C5 공동체가 개척 팀에 의해 영향을 받는 내용 즉, C5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내용은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다. 나는 압둘 아사드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C단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못 이해되고 있고 무슬림 사역 내에서 몹시 왜곡되어 있다.[8] C4와 C5에 대해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9]
따라서 우리가 목표하는 공동체가 가야 하는 곳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의 영역과, 교리적 신앙의 영역, 행위와 의식의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 이상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팀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좀 더 나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평가를 위해 네 가지 영역을 제안하기는 했지만, 이 각 영역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종종 서구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정통은 정통실천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통 실천이 정통을 낳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네 가지 영역(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교리적 신앙, 행위와, 의식)이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나는 삶의 다양한 면을 (그리고 따라서 믿음의 다른 면들을) 구획 짓는 경향이 있는 세속 사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나는 근동에 있는 무슬림들 가운데 살면서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은 교리적 신앙이 행동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 만큼, 의식 역시 신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꽤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내가 전체적인 건강에 대해 생각하면서 단순히 교리적 신앙만이 아니라 네 측면을 모두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4.2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역사적 사건)은 우리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으며, 누구와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빈 무덤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의미하는 것이고, 인간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전체 믿음에 절대적인 기초가 된다. 이 신앙 고백이 다른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간다. 따라서 부정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부정확하다면 우리의 믿음은 열매 없는 것이 되고 만다.[10] 이것을 명심한다면 공동체가 그 신앙과 실천, 삶의 기초로 삼고 있는 신앙 고백이 그 공동체를 평가하는데 절대적인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복음의 내용에 일관성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이 뿔뿔이 흩어져버리게 되기 때문에, 이 영역이 가장 근원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고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이 영역을 부지런히 평가해 보아야 한다. 다행히도, 복음의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응주의자나 거부주의자나 별 이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사실, 가장 적응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팀의 경우에도, 그들이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슬람의 내용을 사용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면서도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1]

교회 개척 팀이 스펙트럼의 어느 끝에 자리를 잡고 있든지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기준을 정해 놓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서구의 자유주의 학파의 영향은 복음의 내용이 뒤틀리고 빗나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가장 좋은 기준은 사도 신경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내용을 가지고 있고, 보편적으로 확증된 것이며, 짧고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 온 것이다. 공동체가 거부주의자이건 적응주의자이건 상관 없이 그들이 사도신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직 가르칠 것이 남아있는 것이다.[12] 그리고, 만일 어떤 팀이 공동체를 이끌 때 그러한 기본적인 복음의 내용을 고백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자 하지 않는 다면 그들이 어떤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염려가 제기될 수 있다.

4.3 행위 Virtue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행위의 문제들을 많이 다루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무슬림에서 개종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도전이 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이 행동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의도까지도 모두 정결해지도록 부르신다. 예수님이 보고 들으셨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그렇게 보고 듣는 눈과 귀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을 열심히 따르는 공동체의 목표이다. 산상수훈이 매우 훌륭한 기중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에게 그것이 매우 이해되는 말씀이고 (문화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회 내에서 문화에 반하여 행동하라는 말씀이 그들의 상황에 잘 맞기 때문이다.[13] 우리는 그들이 개척하고 있는 공동체가 산상수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명령을 행위의 목표로 삼고 그에 순종하도록 가르치지 않는 교회 개척 팀에 대해 심각한 염려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산상수훈을 가지고 교회 개척 팀의 행위 기준을 평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패와 우리를 보낸 교회 공동체가 서구에서 계속 해서 실패하고 있는 것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처제를 택하고, 배우자를 학대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가 갖는 이혼율(단호한 일처제) 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서구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배우자 학대의 통계를 기억하면서 어느 공동체나 그들의 믿음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죄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는 여전히 같다 – 변화된 삶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 예수님의 기준을 따라 살기에 실패했을 때 하는 회개는 변하지 않는 목표이다.

4.4 교리 Doctrine
거부주의자들이 적응주의자들에 대해서 염려하는 가장 큰 부분이 바로 교리(바른 지적 신앙)에 대한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구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상황화 되었는지에 대한 짧은 설명이 왜 이슬람권에서 일하는 서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 문제가 그렇게도 중요한 논제가 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그리스-로마 유산과, 개혁, 계몽이 서구에서 교리가 형성되는데 가장 중대한 기여를 한 것들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철학적 지적 영향들로 인해, 우리의 문명은 전체적으로 철학과 바른 사고에 매료되었고, 따라서 바른 지적 신앙에 열중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관심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무슨 질문을 던지는가를 지배해 왔다. 본 논의에 초점을 맞추어보자면, 우리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무슨 질문을 던지는가를 지배해 온 것이다. 우리가 하는 질문들은 단순한 행동(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한 이해까지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즉,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 이러한 것들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른 교리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의 상황화가 때로는 행위와, 의식, 내용을 잃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14] 서구 신자나, 공동체, 혹은 교회개척 팀의 경우에, 교리에 초점을 맞추느라 믿음의 다른 영역에 소홀해진다면, 우리는 마음만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할 것이다.[15]

왜 바른 교리의 문제가 이 논의에서 그렇게도 중요한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모든 신념들이 똑같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신념들은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지만, 다른 것들은 기독교의 특별한 표현과는 구분되는 것이고, 또 다른 것들은 단지 추측이거나, 가정이거나, 전통이거나, 의견인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이지를 교회개척팀이 마음 속에 그릴 때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가? 니케아 신조가 그 본질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짧고,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훌륭한 기준이 될 수 있다.[16]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 것은, 문제는 공동체가 현재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교리적 목표이고 그러한 방향으로 그들이 인도함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쯤 해서, 거부주의자들은 아마도 ‘그것 봐! 그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예수님을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극도로 상황화된 공동체는 스스로를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이라고 본다. – 번역자) 이러한 반응은 실제로 순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렸던 강조가 니케아 신조를 정확하게 모두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새로 신자가 된 형제였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만 동행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초기 공동체를 형성하는 단계에서도 함께 동행해야 한다. 한 명의 무슬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만이 아니라 (즉,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계-번역자),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번역자) 계속해서 바른 교리를 알려주고, 어떤 잘못을 먼저 지적해 줄지, 그리고 어떻게 지적해 줄지에 대해 지혜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17]
“무슬림 신자들”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 실재로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바로 이슬람 사회 내에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형제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산 증인들이다. 사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덜 익은 푸른 열매를 따려고 하지 않고, 대신에 성령님의 때를 기다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상황 안에서 니케아 신조를 이해하고자 하는데 상당히 열려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공동체는 아마도 “니케아의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우리 마음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려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적으로는 분명하게 니카아 신조를 고백합니다.” 하고 말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즉, 그들이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 (문화, 언어 등)에만 민감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도 생각해 줄 줄 알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18] 그러나 이것은 과정이고,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가 개종의 모든 경우에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심지어 데살로니가 교회도 니케아 신조에 반대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19]

반면에, 어떤 적응주의자들은 “그거 별로 좋지 않네요. 그 신조는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로 생긴 공동체가 그들의 신조와 신앙의 진술을 결정하도록 그들에게 맡겨야 합니다.”하고 말할 수도 있다.[20] 이것 역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새로 생긴 공동체가 새로 믿게 된 형제들이고 자매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신조를 통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영이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고 계시다면, 왜 그들을 수 세기 동안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동일한 최소한의 교리 고백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21]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예배 중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상황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는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팀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는 니케아 신조와 같은 신앙를 가르치는 것을 불편해 한다면 우리는 그 팀이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개척하고자 하는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4.5 의식 Rituals
세례와 성찬식은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 받아들여지는 두 개의 보편적인 의식들이다. 세례는 시작하는 의식이고, 성찬식은 계속되는 교제와 형제들 사이의 선한 함께함(동거)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이 용어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별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만일 공동체가 정결케 하는 의식에 대해 그들의 상황에 맞는 용어(alghusl al-‘adhiim 처럼)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만일 그들이 우리가 영어로 하듯이 세례를 음역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적응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의식들은 그들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습을 굳이 새로운 공동체에게 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두 사람이 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면 형제들이 세례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제들이 아직 순례 중에 있으며, 믿음 안에서 성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의식이며, 사도행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었고, 내가 알기로는 폐기된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이 두 가지 의식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도록 그들과 함께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잘 훈계하고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개척 팀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즉, 형제들이 첫 발을 내디딜 때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 함께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식은 우리가 함께 나누는 신앙에서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세례와 성찬식이 없는 공동체를 목표로 하는 교회 개척 팀에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에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새로운 공동체들도 있을 것이다. 즉, 세례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정기적으로 성만찬을 하는 소위 “성숙한” 공동체들 중에는 지옥의 자녀들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미성숙한 사람들 때문에 혹은 스스로의 심판을 위해 먹고 마시는 사람들 때문에 주님이 하라고 하신 두 의식을 오해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공동체가 나아가는 방향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5 무함마드와 꾸란
첫째로, 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라거나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로,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무함마드를 높이 보고 있고, 그가 그의 백성들이 하나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러한 면에서 보여준 노력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이고,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만난 세 명의 교회 개척자들에 대해서 심각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는 것(그를 깎아 내리는 것)과, 꾸란을 불신하는 태도가 효과적인 증거에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내가 만난 다른 교회 개척자들에 대해서도 나는 동일하게 심각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다.

이러한 나의 분명한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고,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며, 삶이 변화 받았지만, 여전히 무함마드를 높게 보는 무슬림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갖는 문제의식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몇 명의 그런 젊은이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참으로 신선한 것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슬람 배경을 가진 한 믿는 젊은 형제에게 (믿은 지가 3년 된) 무함마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무함마드가 예수님을 가리킨 예언자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본다고 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예수님이 신이시고 구원자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답했다. 꾸란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꾸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22] 성경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느냐고 했더니, 그는 두 경전이 서로 차이가 없다고 했다. “다른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만든 전통이기 때문에, 그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꾸란을 재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23] 그에게 꾸란을 정기적으로 읽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꾸란을 읽지, 대부분의 시간은 성경을 읽는데 사용한다고 대답했다.

이 형제가 한 간증 중에서 또 하나 격려가 되는 부분은 그들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열려 있는 가를 보는 것이다. 위의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 형제는 사실 설명을 시작하면서 “내가 지금 현재 처해 있는 위치에서 볼 때 나는 무함마드가…. 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매우 건강한 것이다. 그는 무함마드의 역할에 대해 씨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무함마드의 가르침(그리스도 없는 법)을 따라 살 때 보다 분명히 더 잘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 그래야 하듯이 말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그가 무함마드를 예언자라고 말하고, 꾸란을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은 것은 교회 개척 팀에게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만일 그가 무함마드를 증오하고 그를 멸시하는 태도를 갖도록 만들었다면 그가 가족들에게 효과적인 증거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역시 교회 개척 팀에게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24]

6 정체성
상황화된 사역에 관해 근래에 논의되고 있는 것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슬림의 정체성이 그 문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숙하게 될 때 자아와 공동체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방향을 잡아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에 대한 논의는 내가 알기로는 선교신학 문서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에 따라 결정된다. 즉, 이슬람이 종교일 뿐인지[25] 아니면 사회, 문화, 문명인지 하는 문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만일 이슬람이 종교일 뿐이라면, 우리는 그 자리를 밀어내도록 해야 한다. 만일 종교가 이슬람 문명의 한 요소일 뿐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구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26]


수 년간 문서들을 연구해보고, 무슬림들과 관계를 하면서 (종교 지도자들과도 만나보고, 일반인들도 보고), 나는 이슬람이 종교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7] 이슬람은 사회이고, 문화고, 그 자체가 문명일 수 있다.[28] 나의 생각이 맞는다면, 우리가 너무 심하게 사람들을 그들의 유산에서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그 사회 내에 임하도록 그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예로 사용하곤 한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나는 문화적으로 미국인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미국인이다. 미국에서는 낙태가 합법이고, 옷을 별로 단정하게 입지 않아도 되고, 간통이 받아들여진다. 나는 그러면 어떠해야 할까? 신학적으로 나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나는 미국 문화가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나의 이런 자세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나의 증거를 약하게 할 것이다. 나는 단지 참여하지 않는 것뿐이다. 미국 정부와 사회가 허용하는 것들 그리고 심지어 격려하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와 상반된다면 그것은 나의 영역 밖이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나쁜 미국인으로 만들까? 누군가는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나를 더 좋은 미국인으로 만든다고 반박하고 싶다. 따라서 나는 미국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며,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 더 큰 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더 나은 미국 시민으로 만든다고 설명할 것이다. 내가 미국인의 삶의 어떤 부분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부끄럽지 않으며, 여전히 나 자신은 미국인으로 남아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정체성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정체성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듣는 것에 매우 열려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네가 가는 길이 내가 가는 길과 같은 곳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포스트 모던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아마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러한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의 또 다른 한 면은 노동자(redneck[29])로서의 정체성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바깥 일을 좋아하고, 블루 칼라들이 하는 일을 힘들어 하며, 대형 트럭과 싼 음료를 즐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취하도록 맥주를 마시지 않으며, 인종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노동자들은 내가 한 물 갔다고 말할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웃기지 말라고 해! 누군가가 나의 노동자로서의 유산을 가져가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분명한 모욕으로 간주할 것이다. 나는 거의 확실한 노동자이지만, 구속 받은 사람이다. 이 그룹(구속 받은 사람의 그룹)에 속하기 위한 열쇠는 하나님 나라에 위배되는 공동체 내의 현존하는 어떤 철학이나, 태도, 행동에도 하나님 나라가 우선하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정체성이 모든 다른 것에 우선하는 것이다. 이는 이슬람 문명에도 적용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만들어낸 어떤 종교 이상이다. 움마(공동체)는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정치, 가족, 부족과 사업까지 모두 포함한다. 이슬람에 등을 돌리는 것은 종교적인 면 이외의 영역에 있어서도 공동체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에서 종교적인 부분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떠난” 사람이 사실상 움마의 다른 면에도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30] 이슬람 세계에서 내가 만난 몇몇 교회 개척 자들은 이슬람 내의 교회 개척 운동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를 거절하는 공동체에 대해서 말해 주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형제 자매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떠나지만, 그들의 유산은 굳게 잡아야 한다는 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무슬림 (복종하는 자)으로 여기며,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무슬림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운동 중에 하나가 다르 알-이슬람[31]의 심장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형제들은 신앙을 위해서 심한 박해를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보다 더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무슬림)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 다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도 동시에 이슬람과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와 같아, 내가 미국인이고, 포스트 모던 시대에 살고, 노동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처럼, 사실상 질문은 어느 정체성이 가장 우선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 공동체가 (성경의) 예수님의 왕 되심과 그분의 가르침보다 꾸란에 더 복종한다면 이것은 건강하지 못하고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공동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적응주의자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32] 대부분은 예수님을 왕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그 분의 백성으로 보고 있고, 이것이 그들을 대표하는 가장 우선하는 정체성으로 여기고 있다.

7 적용
본 글을 통해 적용주의자와 거부주의자 모두에 대해 동일하게 깊은 숙고를 하게 되었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목적은 내가 어느 한 교회 개척 팀과 함께 일할 것을 고려해 볼 때 그 팀이 건강한 교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건강하지 못한 혼합주의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내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하는 것을 나누는 것이다. 다르 알 이슬람에서 섬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팀과 얼마나 많이 상호작용 하는가의 문제와는 상관 없이, 우리는 교회 개척을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방법론이 좀 바뀔 필요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슬람권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계속해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방법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다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좀 다른 말이지만, 나는 어렵지만 매혹적인 무슬림 사역 세계로 첫 발을 디딘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광대한 양의 문서와 의견들 사이를 지나면서 기도 가운데 결정하고 어떤 사역 철학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이끄시는지를 따라 나갈 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는 거부주의자들과 적응주의자들에게 하는 다소 직접적인 제안들과 질문들로 글을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째로 거부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 공동체가 (적응주의자든, 거부주의자든)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보다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실제 신앙(복음의 내용과 교리)과 실천 (행위와 의식)이 향하고 있는 목표를 바탕으로 평가를 내려야 한다. 또한 다소 불분명한 용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고 평가를 내려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슬람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거부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대개 종교로만 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33] 종교는 단지 이슬람의 한 면을 뿐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적응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공동체를 위해 거부주의자들이 개발해 놓은 몇 가지 형태의 기준에서 보이는 교리적 의식적 관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고, 우리가 그들(예수님을 따르는 무슬림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만큼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슬림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 중에 하나가 기독교 역사와 용어에 대한 이해와 학습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방법이 그들의 방법보다 낫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이슬람을 문명으로 보고 그것을 구속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문명에 대한 불만족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그분 자신에게 모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양편 모두가, 나 자신을 포함해서, 겸손과, 인내, 그리고 하나됨이라는 건강에 좋은 쓴 약을 삼킬 필요가 있다. 나는 양 편에서 논의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서로에게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맺은 열매들에게도 이러한 우리의 자세를 물려주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슬람을 떠난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이슬람에 남은 사람들은 자라가면서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과연 어떤 본을 보이고 있는가?

[1] 가명. Timothy는 여러 곳에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개척에 관여하고 있다. 그의 주요 사역은 아랍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다. herald.tim@gmail.com를 통해 그와 직접 교류할 수 있다.
[2] 이 두 용어는 본 글에서 계속 등장하게 될 것이다. 거부주의자들은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적응주의자들은 이슬람을 하나의 문화, 혹은 문명으로 보면서 어느 정도의 (그 정도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차이가 있지만) 가능성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는 Duane Alexander Miller가 St. Francis Magazine 5:3 (June 2009) 에 발표한 ‘재고: 이슬람적 기독교에 대한 한 적응주의자의 해석 Reappropriation: An Accommodationist Hermeneutic of Islamic Christianity’이라는 글에서 초보적인 형태로 등장했는데, 그는 출판되지 않은 글 ‘이슬람적 기독교에 대한 두 경향의 가설: 적응주의자와 거부주의자 The Two Stream Hypothesis in Islamic Christianity: Accommodationists and Rejectionists’라는 글에서 이를 ‘두 경향의 가설’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나의 의견에는 그가 사용한 이 두 용어가 선교신학적으로 종종 사용되는 그리고 때로 오용되기도 하는 모호한 용어들 (즉, C5나, 빼어냄, 내부, 상황적인 등)보다 훨씬 명확한 것 같다.
[3] “교회란 무엇인가?” 혹은 “교회개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교회이고 무엇이 교회가 아닌가에 대한 내 의견이 본문에서 부분적으로 종종 등장하기는 하겠지만 논지에 필요한 단순한 정의 정도에 만족해야 할 뿐, 불행히도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전체적인 의견은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 정의를 정리해보자면, 교회란 스스로를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을 따르는데 헌신한 공동체로 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4] “무함마드는 누구인가?”와 “꾸란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그가 받은 계시(꾸란)가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꾸란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은, 그의 사도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대신하여 말한 사람 (예언자)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5] Travis, John, ‘The C1 to C6 Spectrum’ in Evangelical Mission Quarterly 34:4 (October 1998) 과 Travis, John, ‘Messianic Muslim Follower of Isa: A Closer Look at C5 Believers and Congregation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17:1 (Spring 2000)을 보라.
[6] 거부주의자의 경계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지만, 적어도 빼내기의 사역 철학을 피하는 것에는 나도 동일하게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는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저자는 빼내기의 사역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 – 번역자.)
[7] Abdul Asad, ‘Rethinking the Insider Movement Debate: Global Historical Insights’ in St. Francis Magazine 5:4 (August 2009)을 보라.
[8] Abdul Asad는 사실 C4와 C5의 신학과 실천에 있어서 그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말할 때 C단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라비스에 의하면 그 두 단계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정체성에 대한 것 뿐이다. 그들은 이상한 그리스도인 혹은 이상한 무슬림들인가? 이것이 내가 C단계(위의 각주 5를 보라)에 대해 읽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이었고 2008년에 트라비스와 대화하고 나서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용어 사용이 상황화 논의에 있어서 주요 이슈들 중 하나이다. 일관성 없이 어디에나 사용되는 용어에 대해서 우리는 용어에 대한 일단의 오해를 없애고 우리가 개척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9] 또한 개인이 속한 기구의 정책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에 나는 한 미국인 형제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선교학에 대한 학위 두 개를 가지고 있었고 절대적으로 “C5 형태가 아닌” 기구를 섬기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특별한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그것이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C단계 중 어디에 해당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 C4” 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운동을 2008년에 존 트라비스에게 설명했을 때 그는 그것이 “성경적인 C5 운동의 아주 좋은 예”라고 말했다.
[10]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1] 이는 교회 개척 팀이 거부주의자의 사역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은 일단의 지역 지도자들을 소개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거부주의자의 사역 철학을 가지고 있는 교회 개척 팀이 기른 지도자들이었다. 그 팀은 아랍어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하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언어)가 아니라 교회 개척 팀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아랍어로 질문을 하자 대부분의 지역 형제 자매들은 복음의 내용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매우 적응주의자적인 방법을 계발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외국이 교회 개척 팀이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지역 공동체에게는 C4로 보이지만, 교회 개척 팀에게는 스스로를 C3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12] 사도신경의 고백은 “구원 받기” 위해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가 고백하도록 해야 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13] 어떻게 그리고 왜 산상수훈이 무슬림 배경의 공동체에게 이해가능하고 도전이 되는가를 자세히 다루는 것은 본 연구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산상수훈을 무슬림과 함께 읽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그 내용이 문화적으로 그들과 가깝고, 이슬람 사회에 혁명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14] 이것을 동방 정교회(서구 복음주의보다 지형적, 문화적, 의식적으로 이슬람과 훨씬 가까운)와 비교해 보라. 동방정교회는 교리보다 의식을 더 강조한다. 동방 정교회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에 대해서는 Timothy Ware, The Orthodox Church (London: Penguin, 1997)을 보라.
[15] 서구 복음주의 전통에서 이 문제로 교제가 깨어진다는 사실이 좋은 증거가 된다. 우리는 행위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공동체, 교파 등을 형성한다.
[16] 이슬람 세계에 맞게 상황화된 형태의 니케아 기독교에 대해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Abu Daoud, ‘Mission and Sacrament Part III: A Paleo-Orthodox Approach to Contextualization in the Muslim World’, St. Francis Magazine 5:2 (April 2009)를 보라.
[17] 사도 바울은 때로는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처럼 온유했고, 때로는 상당히 담대하게 질책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바울의 본을 잘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의 새로운 형제들과 동행할 때, 강하게 질책해야 하는지 부드럽게 격려해야 하는지를 잘 결정해야 할 것이다.
[18] 또한 단순히 니케아에 나오는 특별한 질문들뿐만 아니라, 그 답에 사용되는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 혹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유일하신 분” 이라는 표현은 4세기에 라틴이나 그리스에서는 매우 상이한 차이를 가졌겠지만, 21세기에 아랍어나 우르두어, 혹은 만다린에서는 그렇게 상이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다. 공동체 내에 이런 인식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성숙한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19] 살후 2: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20]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 Eastern Orthodoxy, 네스토리안주의, 동양 정교회 Oriental Orthodoxy, 서구 개혁주의,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심지어 Branch Davidians도 성경과 일치한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어떤 이들은 꽤 다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21] 더 나아가, 서구 복음주의에서 등장하고 있는 어떤 개인주의적인 선교신학 이론들과는 상반되게 신약 모델은 서로 의존적이다. 보편적인 교회내에 있는 지역 공동체는 그들의 배경에 상관없이 서로 배우고 서로 서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22] 나의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대답은 좀 예외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적응주의자 형제들은 꾸란이 중요하고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성경과 일치하는 부분에 한해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꾸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23]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가 한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구약은 꾸란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꾸란을 사용하는 방법이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과, 정경이 아닌 유대 문서들, 이방의 시들과 심지어는 이방의 “예언자들”까지도 다루면서 사용했던 방법과 전혀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복음주의 안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이지만, 그 방법론이 유사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신약이 영감을 받은 구약의 저자들과, 영감 받지 않은 이방인 저자들의 것들을 사용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우리 형제들이 꾸란의 문서와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 이의도 없는 것 뿐이다. 적응주의자들이 이슬람 문서를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Duane Alexander Miller가 St.Francis Magazine 5:3 (June 2009)에서 발표한 ‘Reappropriation: An Accommodationist Hermeneutic of Islamic Christianity’를 추천하고 싶다. 우리의 형제들이 사용한 방법들을 영역화하는 것에 더하여, 밀러는 또한 이러한 형태의 이슬람 문서의 사용을, 그리스도에 충성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람을 더 나은 로마 시민으로 만들었던 초기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변증에 비교한다. 그가 한 방법론의 영역화나 비교 모두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24] 이슬람의 배경을 가진 새로 믿게 된 형제들이 공통으로 갖는 감정은 그들의 공동체와 특히 무함마드를 배신했다는 느낌이다. 만일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대신에 서구의 관점으로만 무함마드를 보는 잘못된 정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동을 받게 된다면, 이 새로운 신자는 공개적으로 무함마드를 깎아 내리는 위험을 감수하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보다는 한 사람에 대한 감정적인 폭발(이것은 죄이다)로 인해 증거의 기회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25] 종교라는 말은 참으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이다. 본 논문이 주로 서구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나는 매우 서구적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즉, 신 (혹은 신들)에 관한 일단의 신앙들이라는 의미로 종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26] 각주 2를 보라.
[27] 그가 이슬람 문명을 “다루는” 방식이 나와 다르기는 하지만, 유명한 세속 정치 과학자인 사무엘 헌팅턴 역시 그의 책 ‘문명의 충돌과 세계 질서의 재편’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New York, New York: Touchstone, 1996)에서 이슬람을 나와 마찬가지로 문명으로 보고 있다.
[28]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나는 선교신학자들이 조만 간에 이 주제를 다루기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29] 이는 미국의 시골 지역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햇볕에 목이 타서 붉게 된 것을 말한다. 이들은 미국의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고 (남부가 북부보다 더 태양이 강하고 더 덥다), 보통 컨트리 뮤직이나, 트럭, 상스러운 말, 담배, 술 취함, 문맹, 인종주의 같은 시골의 유산이나 활동과 관계된 외부인(outsider)을 일컫는다.
[30] 움마의 다른 면들을 분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과 함께 우리는 이슬람의 뿌리가 기독교와 유대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섯 기둥은 (무함마드가 사용한 예배의식을 포함하여) 각각 유대교에 혹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J. Dudley Woodberry ‘Contextualization Among Muslims Reusing Common Pillars’ in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13:4 (Oct-Dec 1996)을 보라. 이것이 이교의 영향 및 종족의 영향과 합쳐져서 무함마드는 전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닌 심하게 혼합화된 형태의 기독교인 이슬람을 이끌게 된 것으로 보인다.
[31] 보안상의 문제로 정확한 위치는 밝히지 않는다.
[32] 적어도 내가 아는 공동체들 중에서는 그렇다.
[33] 이것이 바로 우리 가족이 무슬림 사역에 들어섰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관점이다. 삶의 모든 면이 녹아있는 사회 집단에서 그들 가운데 살고 그들로부터 배운 후에야 나의 관점이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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