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2일 일요일

<서평> 중동의 개신교 선교사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가, 아니면 문화의 전파자들인가?

원제> Book Review: Peter Pikkert's Protestant Missionaries to the Middle East

서평 글쓴이: Duane Alexander Miller
책제목: Protestant Missions in the Middle East: Ambassadors to
Christ or Culture (WEC Canada, 2008), 226 pages.
책의 저자: Peter Pikkert

Pikkert는 중동이나 터키에서 사역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중요한 책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재정을 쏟아부으면서도 중동과 터키에 개종자들이 드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한다. 먼저 그는 Samuel Huntington과 David Bosch의 이론에 근거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Huntington은 그 유명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the World Order (Simon & Schuster 1998)의 저자이다. 그는 냉전시대 이후에 세계 분쟁의 주요 원인은 문명이 될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특별히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을 예상했다.

필자는 파라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s)에 대한 Bosch의 의견을 빌어 선교 역사를 해석하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보쉬의 의견에 대한 주요 출처는 “변화하는 선교: 선교 이론에서 찾는 파라다임의 변화”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Orbis Books 1991.) 이다. 이 책은 중동과 소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카톨릭 선교 이외의 서구 선교 역사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카톨릭 선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1장부터 4장까지는 각 시대를 다루는 본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제 5장은 역사적 분석과 비판에서 다소 급격하게 방향을 돌려 신학과 현대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필자는 이 장이 이 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역를 중심으로 하는 Pikkert의 현대 역사 구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00-1918년까지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분해되는 시점이다. 혹은 데이빗 프롬킨 David Fromkin 이 말했듯이 모든 평화를 끝내는 평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미주1) 두 번째 시기는 1946년까지로, 시리아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서기 직전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79년까지로, 아랍 민족주의와 석유의 강세로 몇 나라들이 급부상하는 시점이다.(미주2) 이 시기는 또한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형성되고, 교파와 구분된 운동이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시기는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정치적 이슬람이 약진하는 시기로써, 정치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자 폭력까지 동원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Pikkert는 그의 저술 당시 (2005년)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연합군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패한 6일 전쟁이 일어난 1967년이 아니라 1979년인지를 묻고 싶을 것이다. 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많은 무슬림들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패배를 겪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와 같이 승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싼 반나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 같은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저자의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기 구분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1967년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싶어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자면, 60년대와 70년대는 범아랍주의와 공산주의 및 세속주의의 환상에서 점차 깨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1년이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한 서구의 개신교 선교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

Pikkert는 주로 The Moslem World(미주3) and the annual report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로부터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와 일지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몇 인용들은 상당히 긴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좀 길긴 하지만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저자는 부정적이다. 그가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소위 대 실험 Great Experiment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1800년대 초에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지역 무슬림들에게 직접 바로 전도하는 것을 너무나 위험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대 실험으로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죽어가는 현지 교회의 (그것이 매로니안 교회든, 아르메니안이든, 그리스 정교회든, 콥틱이든 그 무엇이든지) 부흥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교회들은 서구 개신교 전도의 이미지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인 성상파괴와 개인주의라는 덫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 고아원, 진료소, 출판사, 병원들이 소위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Pikkert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지역 지도자들에게 미심쩍게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행동이 그들의 공동체를 너무 눈에 띠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후원이나 행운 없이도 수 세기 동안 스스로 잘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교사들의 그런 잘못된 대 실험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난 중동과 소아시아의 인종 말살이나 대규모 이민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대 실험은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이 결국 대부분 정교회 배경의 신자들로 구성된 개신교 교회를 세워놓았지만, 이 서구화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갑자기 터키와 아랍 무슬림들 개종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무슬림들에게 불신과 고립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이 본서의 본론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 시기를 되돌아 보면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네 시기를 다루는 각 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잘못된 것뿐 아니라, 올바르게 진행된 것들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저자는 이곳 저곳에 매우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사회를 섬겼던 인물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 Temple Gairdner(1873-1928)로, 그는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관한 문법서를 저술했다. 그러한 접근이 죠지 켈시 George Kelsey 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암만에 있는 켈시 언어 연구소 of Kelsey Language Institute 와 같은 것들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가드너는 또한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한 아랍어 대본을 써서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꾸란에서 훌륭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 교회의 가치 조차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가드너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1923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미주4) “이집트에서 영국 국교회의 주요 목표는 비기독교 대중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콥틱 그리스도인들이나, 개신교 교회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Pikkert가 제시하는 대 실험에 관여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또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예는 루터 선교회 Lutheran Orient Mission Society’s (LOMS)가 쿠르드인들에게 했던 선교이다. 그 선교를 이끌었던 포썸 L. O. Fossum은 가드너처럼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무슬림 사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쿠르디스탄(터키, 이란, 이라크에 걸친 산악, 고원지대-역자 주) 선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41세에 죽음을 맞은 의사요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포썸이 이루어놓은 것은 놀라웠다. 큰 실패로 끝난 대 실험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저자의 역사적 관찰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지적 받아야 할 점들도 있다. 편집에 신경을 좀 쓸 필요가 있다. 한 페이지에서 기본적인 사항인 문법 실수와 글자 오류를 둘 다 발견하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예를 들어 12쪽에서 Church Mission Society가 잘못된 약자인 CSM으로 표기되어 있고, Moslem World는 Moslim World 라고 잘못 쓰고 있다. 저자가 the “importance of intermission cooperation,”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어느 시대의 intermission(중간의 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교 단체들이나 그룹들 간의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리적인 면에서도 이슬람공포증(147-149쪽)에 대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1979년에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구에서 이슬람을 악마화하고 미국 출판사들이 어떻게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비방물들을 내 놓았는지에 대해 말한다(147쪽). 저자가 헌팅턴의 문명 충돌에 관한 이론이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테러가 이슬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헌팅톤의 견해와 Pikkert가 제시하는 것이 매우 동일하다. 즉, 소위 충돌이라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적의를 조장하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대해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 두 사실을 함께 묶어놓을 수는 없다. 문명의 충돌이 있거나 아니면, 인공적으로 혹은 악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본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마지막 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결론 장에서 Pikkert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오늘날 근동 무슬림 선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넘어간다 (189쪽). 그의 권면은 그 장의 제목과 같이 교회 중심적인 신약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선교 사역은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저서 전체에서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가 비판했던 실패로 끝난 대 실험은 대부분 의료와 교육 연구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무슬림 배경의 모임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데 중동을 생각할 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저자가 “신약의 영성이 New Testament spiritualit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중동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두 극단적인 견해를 피해왔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종교심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만 치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인 군자인 것처럼 그려놓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신약의 영성” 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세상에 신약의 위대한 선교사들처럼 되고 싶지 선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은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신약의 영성” 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행해야 하고 (행 2:46) 여자들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전 11:10)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기 나사렛에 있는 그리스 카톨릭 지역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Pikkert는 신약의 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중 하나로 “기독교 메시지를 분명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201쪽) 또한 “제자화와, 훈련, 책임 이양”(206쪽)에 대해서도 말한다. 분명히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쉬가 말하는 파라다임의 변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장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Pikkert의 저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선교지에 나가기 위해 훈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선교사 지망생이 많은 한국과 중국, 남아메리카에 이 책을 읽어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세속 역사의 관점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어 있는 고전 이슬람식 사고의 측면에서 역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이슬람 학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동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무슬림들이 흔히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단순히 선전하기 위해서나, 신화, 혹은 이단으로써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주>
1 이 말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역을 맡은 현대 중동의 형성에 대한 Fromkin’s 유명한 역사서 (Holt 2001)에 등장한다.
2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Daniel Yergin’s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Free Press 1993).
3 지금은 The Muslim World 로 불린다.
4 이 인용은 가드너의 경력에 관한 Matthew Rhodes 의 글 ‘Anglican Mission: A Case Study’ available online from the Henry Marty Center at www.martynmission.cam.ac.uk. 에서 가져온 것이다.

2009년 2월 21일 토요일

중동의 개신교 선교사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가, 아니면 문화의 전파자들인가?

서평 글쓴이: Duane Alexander Miller
책제목: Protestant Missions in the Middle East: Ambassadors to
Christ or Culture (WEC Canada, 2008), 226 pages.
책의 저자: Peter Pikkert



Pikkert는 중동이나 터키에서 사역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중요한 책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재정을 쏟아부으면서도 중동과 터키에 개종자들이 드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한다. 먼저 그는 Samuel Huntington과 David Bosch의 이론에 근거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Huntington은 그 유명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the World Order (Simon & Schuster 1998)의 저자이다. 그는 냉전시대 이후에 세계 분쟁의 주요 원인은 문명이 될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특별히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을 예상했다.

필자는 파라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s)에 대한 Bosch의 의견을 빌어 선교 역사를 해석하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보쉬의 의견에 대한 주요 출처는 “변화하는 선교: 선교 이론에서 찾는 파라다임의 변화”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Orbis Books 1991.) 이다. 이 책은 중동과 소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카톨릭 선교 이외의 서구 선교 역사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카톨릭 선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1장부터 4장까지는 각 시대를 다루는 본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제 5장은 역사적 분석과 비판에서 다소 급격하게 방향을 돌려 신학과 현대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필자는 이 장이 이 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역를 중심으로 하는 Pikkert의 현대 역사 구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00-1918년까지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분해되는 시점이다. 혹은 데이빗 프롬킨 David Fromkin 이 말했듯이 모든 평화를 끝내는 평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1 두 번째 시기는 1946년까지로, 시리아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서기 직전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79년까지로, 아랍 민족주의와 석유의 강세로 몇 나라들이 급부상하는 시점이다.2 이 시기는 또한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형성되고, 교파와 구분된 운동이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시기는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정치적 이슬람이 약진하는 시기로써, 정치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자 폭력까지 동원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Pikkert는 그의 저술 당시 (2005년)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의 연합군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패한 6일 전쟁이 일어난 1967년이 아니라 1979년인지를 묻고 싶을 것이다. 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많은 무슬림들은 이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패배를 겪게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와 같이 승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싼 반나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 같은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했다. 저자의 시기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기 구분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1967년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싶어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자면, 60년대와 70년대는 범아랍주의와 공산주의 및 세속주의의 환상에서 점차 깨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1년이 새로운 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1년이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한 서구의 개신교 선교가 중요한 변화를 맞았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

Pikkert는 주로 The Moslem World3 and the annual report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로부터 여러 선교사들의 보고와 일지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몇 인용들은 상당히 긴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좀 길긴 하지만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저자는 부정적이다. 그가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소위 대 실험 Great Experiment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1800년대 초에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지역 무슬림들에게 직접 바로 전도하는 것을 너무나 위험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대 실험으로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죽어가는 현지 교회의 (그것이 매로니안 교회든, 아르메니안이든, 그리스 정교회든, 콥틱이든 그 무엇이든지) 부흥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교회들은 서구 개신교 전도의 이미지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인 성상파괴와 개인주의라는 덫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 고아원, 진료소, 출판사, 병원들이 소위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Pikkert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지역 지도자들에게 미심쩍게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행동이 그들의 공동체를 너무 눈에 띠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후원이나 행운 없이도 수 세기 동안 스스로 잘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교사들의 그런 잘못된 대 실험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난 중동과 소아시아의 인종 말살이나 대규모 이민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대 실험은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실험이 결국 대부분 정교회 배경의 신자들로 구성된 개신교 교회를 세워놓았지만, 이 서구화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갑자기 터키와 아랍 무슬림들 개종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무슬림들에게 불신과 고립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이 본서의 본론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 시기를 되돌아 보면서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네 시기를 다루는 각 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잘못된 것뿐 아니라, 올바르게 진행된 것들도 함께 적어놓고 있다. 저자는 이곳 저곳에 매우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사회를 섬겼던 인물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 Temple Gairdner(1873-1928)로, 그는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관한 문법서를 저술했다. 그러한 접근이 죠지 켈시 George Kelsey 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암만에 있는 켈시 언어 연구소 of Kelsey Language Institute 와 같은 것들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가드너는 또한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한 아랍어 대본을 써서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과 꾸란에서 훌륭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 교회의 가치 조차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가드너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1923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4 “이집트에서 영국 국교회의 주요 목표는 비기독교 대중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콥틱 그리스도인들이나, 개신교 교회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Pikkert가 제시하는 대 실험에 관여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또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예는 루터 선교회 Lutheran Orient Mission Society’s (LOMS)가 쿠르드인들에게 했던 선교이다. 그 선교를 이끌었던 포썸 L. O. Fossum은 가드너처럼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무슬림 사회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쿠르디스탄(터키, 이란, 이라크에 걸친 산악, 고원지대-역자 주) 선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41세에 죽음을 맞은 의사요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포썸이 이루어놓은 것은 놀라웠다. 큰 실패로 끝난 대 실험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저자의 역사적 관찰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지적 받아야 할 점들도 있다. 편집에 신경을 좀 쓸 필요가 있다. 한 페이지에서 기본적인 사항인 문법 실수와 글자 오류를 둘 다 발견하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예를 들어 12쪽에서 Church Mission Society가 잘못된 약자인 CSM으로 표기되어 있고, Moslem World는 Moslim World 라고 잘못 쓰고 있다. 저자가 the “importance of intermission cooperation,”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어느 시대의 intermission(중간의 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교 단체들이나 그룹들 간의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리적인 면에서도 이슬람공포증(147-149쪽)에 대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1979년에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구에서 이슬람을 악마화하고 미국 출판사들이 어떻게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비방물들을 내 놓았는지에 대해 말한다(147쪽). 저자가 헌팅턴의 문명 충돌에 관한 이론이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테러가 이슬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헌팅톤의 견해와 Pikkert가 제시하는 것이 매우 동일하다. 즉, 소위 충돌이라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적의를 조장하기 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대해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이 두 사실을 함께 묶어놓을 수는 없다. 문명의 충돌이 있거나 아니면, 인공적으로 혹은 악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본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마지막 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결론 장에서 Pikkert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오늘날 근동 무슬림 선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넘어간다 (189쪽). 그의 권면은 그 장의 제목과 같이 교회 중심적인 신약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선교 사역은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의 저서 전체에서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가 비판했던 실패로 끝난 대 실험은 대부분 의료와 교육 연구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무슬림 배경의 모임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말려들지 말도록 권하고 있는데 중동을 생각할 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저자가 “신약의 영성이 New Testament spirituality” 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중동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두 극단적인 견해를 피해왔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종교심 없는 정치적인 것으로만 치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인 군자인 것처럼 그려놓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어떻게 “신약의 영성” 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세상에 신약의 위대한 선교사들처럼 되고 싶지 선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은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신약의 영성” 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행해야 하고 (행 2:46) 여자들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전 11:10)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기 나사렛에 있는 그리스 카톨릭 지역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Pikkert는 신약의 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중 하나로 “기독교 메시지를 분명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하게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201쪽) 또한 “제자화와, 훈련, 책임 이양”(206쪽)에 대해서도 말한다. 분명히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쉬가 말하는 파라다임의 변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 장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Pikkert의 저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선교지에 나가기 위해 훈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선교사 지망생이 많은 한국과 중국, 남아메리카에 이 책을 읽어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세속 역사의 관점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어 있는 고전 이슬람식 사고의 측면에서 역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이슬람 학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동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무슬림들이 흔히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단순히 선전하기 위해서나, 신화, 혹은 이단으로써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주>
1 이 말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역을 맡은 현대 중동의 형성에 대한 Fromkin’s 유명한 역사서 (Holt 2001)에 등장한다.
2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Daniel Yergin’s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Free Press 1993).
3 지금은 The Muslim World 로 불린다.
4 이 인용은 가드너의 경력에 관한 Matthew Rhodes 의 글 ‘Anglican Mission: A Case Study’ available online from the Henry Marty Center at www.martynmission.cam.ac.uk. 에서 가져온 것이다.

2009년 2월 8일 일요일

베두윈의 화해 (중재) 방법

원제: Reconciliation among the Bedouin

글쓴이: Sarang Kim

1. 베두윈 사회,역사 그리고 전통

1.1 베두윈 문화의 중요성

베두윈 족은 사막에 거주하는 아랍 민족이다. 그들의 조상은 선사 시대부터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구약의 창세기에 언급된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인 셈족이다.[i] 베두윈들의 기원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욕단 (셈의 아들: 아랍인들은 예맨 의 신화적 영웅인 카흐탄 Kahtan으로 부른다)과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그 수가 늘어 부족을 형성하고 부족간 연맹체의 구조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다.[ii] 비록 그들이 사막에서 이곳 저곳을 떠도는 유목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아랍어를 쓰는 귀족 출신의 배경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이슬람교가 아랍에 확립(7th century) 되기 이전부터 베두윈들의 언어는 아랍어였고, 그들은 움마야드 왕조 당시의 귀족 이였다 (the Umayyad, 661-750). 그러므로 당시 일부 움마야드 왕가의 상류층 자제들은 아랍어를 배우기 위하여 사막에 찾아와서 그들과 함께 살기도 했으며 또한 중기 시대에도 문법학자들과 이슬람 법학자들이 베두윈 들을 찾아와 그들의 선례를 중시하여 법적 판결을 행하고 그들의 어법에 맞춰 문법규칙을 정했다.[iii] 그러므로 베두윈 들의 전통과 가치관들은 여전히 아랍인들 가운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베두윈들 역시도 그 자신들의 귀족 출생과 아랍 문화의 뿌리가 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실제 베두윈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화해(중재)의 방법들을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늘날 베두윈들은 아라비아, 걸프, 네게브와 북 아프리카 시나이 반도 등에 널리 퍼져서 살고 있으며 대부분 사막뿐만이 아니라 도시 등에도 정착해서 살고 있고 문명화된 현대 도시 베두윈들도 많은 수를 차지한다. 게다가 연대감이 강한 부족의 구조하에서, 지역들마다 각각의 부족과 씨족들에 따라 다양한 화해의 규율과 방법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다양한 규율과 방법들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가 사람들을 중재하는 제 3자라는 공통적인 필요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본 고는 베두윈 부족간에 행해지고 있는 화해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그들 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베두윈 뿐만 아니라 다른 아랍인들과의 관계에서도 한층 더 다가가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1.2 사회 구조와 전통의 영향들

베두윈들 간에 행해지는 화해의 방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부족간의 구조와 그 연대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랍 국가들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아랍 반도 전역을 거쳐 아랍인들은 수 많은 지역부족과 씨족들로 나눠져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정치적 조직이나 이념이 아닌, 같은 전통적 정서를 나누는, 혈연 공동체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iv] 일반적으로, 부족은 수 많은 단위의 씨족들로 형성되어 있으며, 씨족은 더 나아가 많은 가문(가족)들로 나뉘어져 있다. 영어의 개념으로 흔히 혈통, 혹은 가계 (lineages)들을 일컬으며 보통 5대로 형성되어 있는 부계 사회이다 (great-great-grand father). 같은 혈통을 갖는 가계는 베두윈 삶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단위이다. 이 단위는 적어도 1년 중 한 때는 함께 무리 지어 텐트를 치며 사는 목축 경제의 기본 단위가 되기도 한다. 이 다양한 가계 혹은 가문의 리더들은 씨족 의회를 구성한다. 이렇게 강하게 연결된 각각의 가문 그룹들이 베두윈 친족들인 것이다. 한 사람의 베두윈의 삶은 그의 친족들을, 또한 그의 친족들은 그를 의지하며 서로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v]

베두윈들의 부족이나 씨족 심지어 친족에 대한 가치는 일반적으로 비 아랍 세계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며 강력하다. 그러므로 눈에 보여지는 많은 베두윈들의 성격이나 특징들은 이 부족 구조와 그 유대감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베두윈 사회에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인 명예는 그룹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부족과 씨족에 대한 전적인 충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이슬람교가 아랍인들의 공식적인 종교이기는 하지만, 베두윈들 에게는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내려오는, 그들만의 전통과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사막에는 모스크들도 많지 않았었고 공식적으로 학교 교육( 요르단에서는 베두윈들에 대한 공교육이 약 3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을 받기 이전까지는 이슬람의 교리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베두윈들의 전통은 코란의 가르침보다도 강력할 수 있었으며 아직도 베두윈들 사이에는 민속 신앙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두윈들의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여전히 어느 정도의 제한된 주 정부 통치권 밖에서의 삶의 방식 때문에, 그들은 그들 부족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자치적인 사회적 기구(부족에서 추방한다든지 혹은 피 값의 징수라든지 범죄에 대한 복수 집행 등을 할 수 있는 기능)를 가지고 있다. 아랍인들에게는 권리(정의)보다는 관습(전통)이 더 강력하며 실제로 관습(전통)은 도덕과 종교 면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정의인 것이다.[vi]

베두윈 들에게는 세가지 법이 있다: 베두윈 법, 이슬람 법(샤리아) 그리고 일반 법(국가 법). 부족과 씨족의 쉐이크(장로)들은 분쟁의 경우에서 재판관으로서 행사한다. 분쟁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할 경우 부족 안에서 세습적으로 내려오는 재판관들도 또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좋은 평판을 가진 두 사람의 증인들이 죄를 인정하는데 요구 된다.[vii] 비록 베두윈 법이 공식적인 법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다스리는 가장 강력한 법으로 행사되고 있다.


1.3 베두윈 삶의 특성

베두윈들의 화해 과정은 공식적인 절차라기 보다는 오히려 가치관의 관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그들의 문화적 가치와 도덕관들이 이 화해 과정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 깊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막에서의 거친 삶 때문에 베두윈들은 독특하고 다양한 특성과 삶의 양식들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호전성과 충성도가 뛰어난 민족으로 유명하다. 사막으로부터 삶에 필요한 충분한 자원을 얻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다른 부족을 습격하여 재물을 얻는 것이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허용되었다. 상인들과 경작자(개발자)들은 그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카와스(khawas) 라는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viii] 그러나 베두윈들의 습격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그들이 다른 유목 부족으로부터 여자들을 잡아 왔을 때 그들은 여자들에게 어떤 폭력이나 성적 희롱을 행하지 않고 단지 노예로만 삼았을 뿐 이였다. 그들에게 타 부족을 습격한다는 것은 사막의 지루하고도 단순한 삶에 있어서, 생명의 손실 없이 노예와 음식과 교통 수단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수단 이였으며 일종의 삶에 활력소를 주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랍 선교의 선구자인 즈베머(Samuel Zewemer)는 이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습격이란 유목민들 사이에 정교한 예술이다; 도덕성이 놓은 아랍의 습격자들은 정직하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규율적이다. 그는 그의 희생자들을 밤에 습격하지 않으며 갑작스런 침략에 의한 피 흘림을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 또한 만약 그의 습격이 실패한다면 그는 가능한 첫 번째 텐트에 들어가 그 텐트 주인의 명예에 호소하여 보호를 요청할 수 있었다.”[ix]

그러나 피 흘림에 관해서 만큼은 그들은 매우 엄격했다. 과거 한 사람의 생명은 씨족의 힘 이였다. 씨족의 세력은 재산으로서가 아닌 얼마나 많은 전사를 가졌는가에 의해 평가되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두 눈을 잃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과 동등하게 여겨졌다. 두 눈을 잃은 사람은 전사로서 전투에 나서거나 낙타를 몰거나 경작자로서 소용이 없기에 부족의 관점에서는 먹여 살려야 하는 쓸모 없는 골치거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한 생명에 해당하는 피 값이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요구 되었다.[x]

손님에 대한 환대 역시 가장 기본적이며 규례[xi]이며 또한 사막의 고초와 위험에 의하여 배어난 베두윈 특성중의 하나이다. 커피는 오늘날도 여전히 손님에 대한 주인의 환대의 표시이며 동시에 친구인지 적인지를 분간하는 방법 중 하나로서 제공된다. 명예의 관례 역시 베두윈들의 화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개인 뿐 만이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유지하는 명예(Sharaf)에 대한 관례는 아주 엄격하다. 가족 혹은 부족의 전체 명성의 유지와 손실은 세대와 세대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명예는 가족이나 씨족의 유착 (아사비야Asabiyyah)과 관련이 있다.‘아사비야’란 씨족이나 부족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끝이 없는 충성을 의미한다. 아랍 역사가인 이븐 칼둔(14세기) 은‘아사비야’란 역사를 움직이는 에너지이며 인류 사회의 기장 기본적인 결속이라고 말했다.[xii]

부족간 습격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자연적 상황에 의하여, 가족의 부와 운명이 불확실 했던 그 이전 때부터, 베두윈들은 모든 것이 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숙명론을 발전시켰다. 오직 유일하게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품위와 명예를 지키는 것 이였다. 유목생활의 환경으로 말미암아 궁핍하게 될지라도 베두윈들은 부를 가진 다른 어떤 자들보다도 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가진 물질적 소유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성과 행동에 의해 평가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xiii]

물질적 부나 소유보다 명예에 대한 높은 평가는 베두윈들로 하여금 자신의 명예를 화해 조정의 과정 속에서도 소중하게 지키게 한다. 만약 누군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면 설령 그의 마음속에서는 상대방을 용서했다 할지라도 그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야만 한다. 실제로 베두윈들의 화해 조정 과정을 보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빨리 화해를 맺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과정들을 통하여 올바로 그들의 명예를 되찾는 일없이, 신속한 화해를 맺는 것은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화해를 맺는 것 그 자체 보다 화해의 과정가운데 그들의 명예를 바르게 되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2. 분쟁의 종류들과 화해(조정)의 방법들

확대 가족은 아랍사회의 매우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아랍 사회는 개인주의가 아닌 전체 씨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베두윈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의 부족과 강한 결속력이 있으며, 같은 부족의 사람들은 그에게 있어서 더 큰 가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확대 가족은 위기의 때나 특별한 때에 함께한다. 만약 부족이나 가족의 구성원 중 누군가가 곤란에 처한다면 전체 가족들은 그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동원할 것이다.


2.1 부족들 간의 분쟁

만약 어떤 사람이 타 부족의 누군가와 분쟁이 생긴다면 이것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두 부족간의 문제로 확대 된다. 각 부족은 각각의 서열 체계와 문제들을 판결할 수 있는 조직체를 가진 수많은 씨족들로 구성 되어 있다. 만약 씨족이나 부족 내부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각 부족의 쉐이크나 판결자들이 이것을 다루게 된다. 그러나 부족간의 분쟁이 생긴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좋은 평판을 가진 제 3 부족에서의 쉐이크나 판결자 (al-Qadir)가 중재자로 요구 되어지고 그가 두 부족간의 화해 조정 과정을 이끌게 된다.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각 부족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가 없다. 조정을 이루는 쉐이크가 두 부족을 방문하며 각 부족을 대표하는 쉐이크나 어른들과 오랜 협상을 거치며 그 후 손실(피해)에 대한 대가를 결정하게 된다. 두 부족간에 제 3의 중재자가 필요한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 부족들간에 습격이 일어났고, 한 사람이 살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 후 두 부족간에는 피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원칙아래 반드시 한 사람의 동일한 피 흘림이 요구되었다. 살인을 행한 부족의 쉐이크는 자원하여 화해를 맺기 위해 상대 부족을 방문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여 입을 열기도 전 길 한가운데서 상대 부족에 의하여 총격을 당하여 죽고 말았다.”[xiv]

쉐이크는 다양하게 적용되는 호칭으로 학교 선생님이나 모스크의 관료들 혹은 영어의 “sir”에 해당하는, 나이들은 낯선 이를 부를 때도 사용된다. 그러나 사막에서는 일반적으로 공통체를 대표하는 부족 혹은 가족의 수장 등을 의미한다. 이상적인 쉐이크란 모든 법 집행자나 행정관 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들 부족의 번영은 그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xv] 오늘날 쉐이크의 중요성은 부족들의 구성원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자치 지구의 정부 관료들과의 협상을 잘 이루어내는 능력에 달려있다.[xvi]


2.2 직계 혹은 확대 가족간의 분쟁

씨족이나 친족간에 분쟁이 있을 때는, 일반적으로 그 씨족의 쉐이크나 노인들이 중재자가 된다. 분쟁의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가족 그룹들을 기본단위로 하는 연속된 공의회들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결정이 내려지며 때로는 씨족들의 공의회를 거쳐 또한 부족의 자체 공의회까지 가기도 한다.[xvii] 가족간의 분쟁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손 위 남자 형제가 중재를 이끄며, 연장자를 공경하는 문화적 영향으로, 여성 역시도 나이가 들게 되면 그 위치가 부상하여,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상속 같은 가족 구성원내의 남자와 여자 형제들간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베두윈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큰 오빠(남자 동생)가 여성의 후견인이 된다. 과거에 여성은 법적인 위치가 없었기에 오직 아버지나 남자 형제의 그늘 속에서만 존재하였다.[xviii] 그러나 비단 과거뿐만이 아닌 오늘날에도 여성들은 전통 관습 속에서 자신의 법적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는 여전히 어려움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야르묵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인 무함마드 슈나크는 베두윈 여성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아랍여성들까지 동일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상속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상속권리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아버지의 재산에 대하여, 마을에서 받아들여지는 일반적인 관습처럼, 자신들에게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 권리는 전적으로 남자 형제들이나 혹은 부계 쪽의 남자 친척들에게만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 여성들 중 하나가 그녀의 권리를 요구하고 그녀의 남자형제들과 상속권에 대하여 논쟁한다면 그녀는‘여자는 그녀의 부모의 집에서 결혼할 때까지 머무는 손님이다.’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즉 딸은 아버지의 상속에 대한 권리는 없으며 단지 손님과도 같은 환대를 받을 자격만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xix]


2.3 배우자들 간의 분쟁

베두윈들은 일처다부제의 결혼제도를 갖고 있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날 베두윈들 가운데는 두 명의 부인이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부 부족에서는 주간 중에는 시내에서 일을 하며 주말에는 사막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보통 이런 경우 각각의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xx] 여자들은 보통 사촌과 결혼하며 여성이 결혼 할 연령에 도달하면 양가의 부모들에 의하여 적합한 신랑감이 결정된다. 이러한 친족간의 결혼과 엄격한 관례들은 그들 가문의 명예를 지키며 더욱 안정된 부족간 결속을 원하는 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베두윈들 사이에서 이혼은 일반적인 일상사이며 당사자들에게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양쪽 모두 그들의 평판에 손실 없이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다. 이혼을 원하는 남성은 다른 증인들 앞에서 단지 그의 의지만을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여성은 결혼 당시 받았던 지참금을 지킬 수 가 있다. 반면 아내가 남편과 이혼을 원한다면 남편이 했던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단지 남편을 떠나서 아버지의 텐트로 돌아오면 된다. 만약 여성이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원한다면 남편은 곧 이혼에 응하게 되고 지참금의 반환이 협상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xxi]

전통적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연대감보다도 아버지와 딸 혹은 형제 자매간의연대감이 더 강한 사회가 베두인 사회이다. 윌리엄 랭체스터( William Lancaster)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베두윈 여성은 누구 누구의 딸 누구로 알려지며 그 것이 그녀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그녀는 누구의 아내로서나 누구의 엄마로서 그녀의 정체성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와 그녀의 남편 혹은 아들은 법률적으로는
전적으로 다른 그룹에 속하며 심지어 부족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법적 책임은 아버지나 남자 형제들 혹은 부족의 남성 친척에게 있는
것이다.”[xxii]

아내와 남편간의 문제가 있는 경우 흔히 부인의 큰 오빠 혹은 동생이 중재자가 된다. 문제가 클 경우에는 베두윈의 법과 전통을 잘 아는 쉐이크 혹은 종교적인 법률을 잘 아는 부족은 판단관 (qaadi) 혹은 정부의 관료들 (muktar)이 회의를 소집하여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여자는 그 모임에 참여할 수 없고 그녀의 오빠(남동생)나 아버지가 참석한다. 때로 법정까지 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에도 그녀는 아버지나 오빠(남 동생)를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3. 화해 언약들 (계약들)[xxiii]


3.1 커피 언약

베두윈들은 어떤 손님이라도 신이 보낸 손님으로 여기고 따뜻하게 맞이한다. 커피는 이러한 환대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베두윈들은 언제나 그의 고귀한 손님을 환대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xxiv] 방문을 하자마자 접대 받는 커피는 평화의 언약을 맺는 것을 의미한다. 세 잔의 커피가 접대되는데 각 잔마다 의미를 갖고 있다: 환대 (Daif), 번영(Keif) 그리고 어떠한 문제나 사고에서의 보호 (Sayf).[xxv] 그러나 양쪽 당사자들 간에 문제가 있는 경우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손님은 보통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커피를 접대하고 마시는 것은 손님과 주인간에 평화를 주고 받는 표시인 것이다.


3.2 소금과 만사프( mansaf- 아랍 전통 양고기 정식)언약

비록 화해가 성사되었다 할지라도 만약 주인이 소금이 들어 있지 않는 빵이나 음식을 대접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화해 후에 그들은 소금이 들어간 빵과 만사프를 먹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실상 만사프라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보다 동물을 죽여 피를 흘린다는 것에 더욱 의미를 둘 수 있다. 이러한 동물을 죽이는 절차는 일종의 속죄를 의미하며 피의 복수에 대한 보상으로 또 다른 피가 흘려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언약을 잘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xxvi] 1929년경 마프락의 베니 핫산 과 제라쉬의 파우리라는 요르단 두 부족 간에 피 흘림의 분쟁이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싸움이 계속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화해를 위한 여러 모임들이 있었으나 언제나 소금없는 빵과 만사프만이 접대될 뿐이었다. 즉 화해가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죽고 죽이는 것만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핫산 왕자(훗날 후세인왕의 동생)는 이것을 알게 되고 중재자로 나설 것을 결심하게 된다. 화해를 주선하는 모임에서 그는 그녀의 어린 딸을 데리고 화해를 요청하게 된다. 그는 양쪽 장로들에게 자신의 딸을 피를 취할 것을 제안한다. 두 부족의 장로들은 중재자로서의 왕자의 결단에 깊게 감동을 받고 결국 화해를 맺게 된다.그 딸의 피 흘림 없이 그들은 소금이 들어간 빵을 함께 나누어 먹은 것이다.

사막 지역에서 음식은 매우 귀한 것으로 대부분의 베두윈들은 그들은 삶에서 때로 배고픔을 경험한다. 고기는 오직 결혼 향연이나 기념적인 행사 혹은 손님들이 있는 경우에만 먹을 수 있으며 [xxvii], 빵은 아주 귀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소금이 들어간 빵과 만사프를 함께 나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들이 마음을 열고 화해가 맺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3.3 피의 언약- 피 값(blood money)[xxviii]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암몬 족속의 후손들로서 베두윈들은 생명을 그 어느 것보다도 귀하게 여긴다.[xxix]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죽은 자의 가족에게 생명을 빚졌다는 것이 고대 아랍사회의 법률이었다. 피의 복수에 대한 법은 코란에서도 인정되어있고 아라비아의 어느 지역에서도 신성한 권리로 여겨진다. 아랍인에게 있어서는 피 흘림에 대하여 어떤 마땅한 댓가나 복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법은 계속 되는 분쟁이나 피 흘림을 막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아랍의 타운이나 사막에서는 그 어떤 큰 몸 싸움 없이 몇 시간 동안 계속 말다툼만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맞부딪쳐 싸우기를 겁내기 때문이 아니라, 피 흘림과 또 그에 따라 야기되는 피의 복수를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이다.[xxx]

피 흘림의 복수에 대한 법은 누구든지 피를 흘린 사람은 그 죽은 자의 가족에게 피에 대한 대가로 피 값이나 혹은 생명을 빚졌다는 것이다.[xxxi] 그 가족들은 살인자의 생명을 요청하거나[xxxii],혹은 그와 관련된 5대를 포함하는 가족에 대한 생명 값을 주장할 수 있다.[xxxiii] 이 “ 5대의 그룹”은 그의 부계 쪽의 5대를 모두 포함한다. 분노에 가득 찬 처음 5일 동안 생명이 취해지지 않았다면 일반적으로 피 값의 거래가 받아들여진다.[xxxiv] 때때로 공식적인 언약 문서가 오고 가거나 (sulha) [xxxv] 혹은 화해 후의 특별한 예식등이 거해지기도 한다. 게투르드 벨은 그 화해 예식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랍인들이 그들의 피의 분쟁을 끝내려고 할 때 두 원수들은 상해자의
텐트 앞에 함께 선다. 그 텐트의 주인은 그의 칼집에서 칼을 빼어 들고
남쪽으로 돌아선 후 마당에 원을 그리며 신을 부른다. 그 후 그는 텐트의
자락을 베어내어 화로에서 한 줌의 재로 만든 후 원안으로 던지고
일곱 번 그의 칼로 선을 내려친다. 그 후 가해자가 그 원안에 들어가고
그의 적의 친척 중 한 명이 크게 외친다.‘나는 나에게 죄를 범한 살인자를 취합니다!’”[xxxvi]

그러나 오늘날 베두윈들은 현대 문명에 많이 노출되었고 또한 도시에 거주하는 베두윈들도 많다. 그러므로 중대한 범죄가 아닌 이상은 흔히들 사과의 표시로 선물을 주기도 한다. 남자들은 낙타나 칼 혹은 새 옷들을 여자들은 보석이나 옷 혹은 음식 등을 요리해 준다.


4. 제 삼자의 필요

베두윈들의 화해 과정에는, 어떤 수준의 화해(조정)에서도 일반적으로 제 3자의 개입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족간의 분쟁뿐만이 아닌 개인의 분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제 3자가 필요한지에 대한 그 배경을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랜 기간 동안 전통을 통하여 형성 된 것 이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조건들이 있는데 제 3자는 반드시 양쪽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자여야만 한다.[xxxvii] 중재자는 또한 높은 도덕적 명성을 가져야 하며 양쪽 부족만이 아닌 그 지역에서도 존경 받는 자여야 한다. 그는 공정한 자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자여야 하고 또한 양쪽 부족으로부터 어떤 원망이나 원성이 없는 자여야 한다. 그러므로 중재자는 그저 제 3 부족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이다.

베두윈들은 명예를 높이 평가한다. 그들이 직접 조정 과정에 참여한다면, 적들과 직접 대화한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 3자를 가졌을 때 그들은 어떤 명예의 손실이나 또 다른 분쟁 없이 정확히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형태로든 그들이 명예를 손실했다면 그들은 다른 부족들(제 3 자들)앞에서 그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 3자라는 증인을 가졌을 때 이것은 더욱 유익하게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제 3자는 중재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명예를 회복한 것에 대한 증인도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제 3자는 또한 두 부족간의 또 다른 분쟁을 막을 수 있으며 그 어떤 손실 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5. 전도적 제안

다른 무슬림들과 같이 베두윈들은 죄를 행위적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과 종교적 의무를 행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선행이나 악행을 헤아리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과 우리간의 관계라는 면을 더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지 죄를 저지른 것뿐 만이 아니라 죄인이 된 것이다. 우리의 속 사람은 이미 더럽혀 졌으며 온전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피의 복수에 대한 전통으로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되며 제 3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단 피가 흘려졌다면 이것은 반드시 또 다른 피로만 배상 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피 값(돈)으로 지불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는 그 어떤 다른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죄에 대한 대가로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망 (롬 6:23, 히 9:27)

베두윈들에게는 두 부족간의 관계에서 아무런 죄책이 없는 제 3 부족의 쉐이크만이 평화 협정을 이룰 수 있다. 아무 죄책이 없는 자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전통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제 3 자 쉐이크로서 베두윈들에게 강조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 하나의 죄도 없이 완전한 삶을 사신 분이다.(고후 5:21).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재자로 나서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재자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한다면 베두윈들에게 있어 이해하기에 쉬운 접촉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i] Alan Keohane, Bedouin, (London, kyle Cathie limt, 1994), p.9.
[ii] Ibid.p.16
[iii] 공일주, 아랍문화의 이해, (서울: 대한 출판사, 1996), pp.247-250.
[iv] S.M. Zwemer. Arabia: The Cradle of Islam, (USA: The caxton press, 1900), p.159.
[v] Shirley Kay, The Bedouin, (USA: Crane, Russak & company, 1978), p.78.
[vi] Samuel Ives Curtiss, Primitive Semitic Religion Today,(UK:London, 1902), p.65
[vii] Shirley Kay, p.80.
[viii] Alan Keohane, p.10.
[ix] S. M. Zwemer, p.264.
[x] Ibid.
[xi] Shirley Kay, p.19.
[xii] 공일주, p.265.
[xiii] Alan Keohane, p.70.
[xiv] S. M. Zwemer, p.265.
[xv] Austine Kennett, Bedouin Justic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5), p.145.
[xvi] Shirley Kay, p.80.
[xvii] Ibid., p.79.
[xviii] William Lancaster, The Rawala Bedouin Today, (USA: Waveland, 1997), p.45.
[xix] Mohammed Shunnaq, Women and the Social Reality behind the process of inheritance: An Anthropological Study of a Society in Northern Jordan, (Jordan; Department of Anthropology Institute of Archeology and Anthropology, 1995), p.6.
[xx] 사막의 텐트를 방문하다 보면 나이들은 베두윈 여성 혼자 거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남편은 시내에서 젊은 부인과 살고 있고 그녀의 자녀들 역시 시내에서 또 다른 어머니의 집에 거하면서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기 때문이다.
[xxi] Mohammed Shunnaq, p.108.
[xxii] William Lancaster, p.58.
[xxiii] 요르단의 선교 병원 창설자와 행정 담당자와의 인터뷰(저자가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음) 07.07.2008
[xxiv] Gerturde Bell, Syria:The Desert and the Sown,(UK: London, 1908),p.33.
[xxv] 공일주, 아랍문명의 이해, (서울: 예영, 2006), p.189.
[xxvi] A.C와의 인터뷰(저자가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음)
[xxvii] http://kcm.co.kr/ 11.2008
[xxviii] 피 값으로서의 시나이 반도에서 한 사람의 생명 값은 낙타 41마리에 해당되며 여성의 경우에는 남자에 의해 죽었는가 여자에 의해 죽었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만약 여자가 죽인 것이라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동등한 힘이 있었던 결로 추정되어 일반적인 피 값의 낙타 41마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남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면 일반적 피 값의 4배가 요구된다. - Austine Kennett, pp.131-133.
[xxix] 생명을 중시하는 영향으로 흔히 사막에서의 자살의 경우는 도시보다도 훨씬 적은 편이다.- E. H. Palmer, Desert of the Exodus, (UK: Cambridge university, 1871), p.80.
[xxx] S. M. Zwemer, p.265.
[xxxi] Claude Reignier Conder, Heth and Moab, (UK:London, 1883), p.318.
[xxxii] William Charles Maughan, Alps of Arabia, (UK:London, 1875, reprint 2005), p.185.
[xxxiii] Numbers 1
[xxxiv] Shirley Kay, p.79.
[xxxv] Joseph Ginat, Blood Disputes among Bedouin and rural Arabs in Israel,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1987), p.34.
[xxxvi] Gertude Bell, p.42.
[xxxvii] Joseph Ginat, 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