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The Name of the Creator Deity and the Name for God)
글쓴이: 마르틴 골드스미스(Martin Goldsmith)
원문보기: http://www.stfrancismagazine.info/ja/001Immanuel%20–%20Immanu-Allah(1).pdf
1. 들어가는 말
전직 선교사인 마르틴 골드스미스(Martin Goldsmith)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 ‘열방그리스도대학’(All Nations Christian College)에서 세계종교학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이 분야에 정평이 난 필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1960년대 OMF와의 초기 사역 이래로, 24년 동안 ‘열방그리스도대학’에서의 강의 그리고 은퇴에 다다르기까지, 마르틴은 지치는 줄 모르고, 온 세상이 복음을 알게 하는 일에 매진해 왔다. 그는 마태복음이 어떻게 교회로 하여금 선교케 하였는지에 대해 다룬 소중한 책을 저술한 바 있다(Martin Goldsmith, Matthew and Mission: The Gospel Through Jewish Eyes (Carlisle: Paternoster, 2001). 이 책에서, 마르틴은 성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또 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라’(Allah)로 칭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골드스미스는 이와 동일한 주제에 대해 2006년 12월 28일 있었던 인터서브 아랍지역 모임에서 언급한 바 있었다. 다음은 요약사본이다; 다만 골드스미스의 대화적 문체를 최대한 살리려 했음을 명기하고자 한다.
2. 성서에서의 하나님의 이름들(The Names of God in the Bible)
2.1 ‘엘’(El), 창조신의 이름
마태복음 1:21-25절의 예수탄생과 관한 복음서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임마누엘’(Immanuel)이라는 놀라운 칭호를 받는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엘’(El)이 신명으로서 들어가는 가장 전형적인 칭호이다. 하나님의 이름 ‘엘’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가? ‘엘’은 누구였는가?
우리가 창세기 13장을 살펴보면, 거기에서 ‘엘’은 찾을 수 없다. 복수형태인 ‘엘로힘’(Elohim)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의 단수는 ‘엘로하’(Eloah) 혹은 YHWH(거룩한 신성문자로 ‘아도나이’(adonai)로 바꾸어 읽는다 – 역자주)이다. ‘엘’은 창세기 14장 이전까지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 말은 히브리인이 아닌, 멜기세덱(Melchizedek)이라는 흥미로운 인물에 의해 소개된다. 사실 ‘엘’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가나안과 모압 그리고 전 구약성서 시대에 걸쳐, 중동지역 사람들에 의해 숭배되던 최고의 창조신이었다.
멜기세덱이 자신의 이름을 아브람에게 소개한 후, ‘엘’은 성서안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구약성서에서, 바로 이 말이 ‘엘로힘’(Elohim)이나 ‘엘로하’(Eloah)와 교환가능하게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은 창조주를 이제 ‘엘로힘’ 혹은 ‘엘’로 부르게 되었다.
‘엘’을 성서적 계시에 적합하게 하기 위해, ‘엘로힘’의 성서적 계시와 전혀 다른, 이신교적 배경의 ‘엘’의 성격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단어, 칭호, 이름은 취하였지만, 그 내용은 변경되고 고쳐진 것이다.
2.2 ‘엘라’(Elah), 창조신의 다른 이름
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사람들이 ‘엘라’(Elah)라는 높은 창조주를 숭배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라서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은 또한 ‘엘로힘’(Elohim)을 부른다. 그 때부터 구약성서의 창조주인 YHWH는 ‘엘로아’(Eloah), ‘엘로힘’(Elohim), ‘엘’(El), 그리고 ‘엘라’(Elah)로 불리운다. 앞의 ‘엘’과 마찬가지로, ‘엘라’의 성격은, 앞선 YHWH에 대한 성서적 계시에 적합하기 위해, 다소간 수정되어 수용되어야만 했다.
2.3 ‘테오스’(Theos), 창조신의 이름
신약성서시대로 접어들어, 창조주의 그리스어 칭호는 ‘테오스’였다. 그리스어를 공부해 보면, ‘테오스’는 보통 ‘신’(神)으로 번역하게 된다. 그리스 만신전(Greek pantheon)의 신(god)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이를 뛰어 넘었다. 즉 이들은 구약성서의 ‘엘로힘’을 ‘테오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테오스’는 그리스 종교적이고 정령숭배적 상황과 어울려 사용되었다. ‘YHWH’의 칭호가 이 단어로 바뀐 것이다. 이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 않는가? ‘테오스’라는 말은, 다양하고 복잡한 그리스적 사상들에 휩싸인 채로, 채택되고 변경되어 ‘JHWH’가 된다.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테오스’로 또한 불린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2.4 인격화된 신이 아닌 창조신 이름을 택하다
우리는 다른 면을 또한 보아야 한다: ‘엘’, ‘엘라’ 그리고 ‘테오스’가, YHWH나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으로 취사선택된 반면, 산당들에서 우상으로 숭배되던 바알이나 유사하게 인격화된 신들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들을 철저히 금지하였고, 분쇄하였다. ‘엘로힘 바알’(Elohim Baal)이라고 부르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상숭배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원리가 신약성서에도 적용 되었다. ‘테오스’는 사용되었지만, ‘비너스 신’(God Venus-사랑과 미의 여신(역자주)나 ‘머큐리 신(God Mercury-신들의 사자; 상인,도둑,웅변의 신(역자주)는 어불성설이었다.
3. 어떻게 초대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이름들을 받아드렸나?
유럽에서의 1세기 그리스도교 역시 유사한 과정을 밟았다. 예전과 성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교의 창조신이 차용되었다. ‘God’, ‘Gott’, ‘Dieu’, ‘Bog’ 등등이 그것이다. 당시 이교도의 나라 영국은 이교의 창조신인 ‘God’을 그리스도교 도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God’이라는 말은 완전히 이교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이 차용되었다; lesser deity and 성전숭배는 유럽 그리스도교에서 금지되었다.
이상한 것은, 몇몇 낮은 수준의 신들은, 달력 속의 평일의 이름으로 상존하고 있다. 우리들은 태양의 날, 달의 날, Tiu신의 날, Ouden이나 Wodan신의 날, Thor신의 날, Freya여신의 날, 토성의 날 그리고 다시 태양의 날로 돌아오는 일련의 순서를 알고 있다. 웬일인지 때론 그리스도인들 조차 Thor의 날이나 Freya의 날에 상존하는 신을 숭배하는 일을 꺼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4. 이슬람에서의 창조신
4.1. 무함마드와 낮은 신들(the lower deities)
이슬람세계로의 선교라는 입장에서 보면, 무함마드는 이미 우리들에게 낮은 수준의 신이다. 할렐루야! 무함마드 사후 직전, 그가 메카로 돌아와 정복했을 때, 그는 카바(the Ka’aba)의 모든 우상들과 그곳에서 숭배되던 ‘알라’(Allah)의 딸들을 모신 모든 사당을 제거했다 : Uzza, al Manat, al Arusa, ‘알라’의 딸 혹은 배우자로 추정되는 신비스런 al Lat 등이다. (여러분들은 왜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상에 대해 민감히 반응치 못하였는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딸들을 제거한 후, 하나님이 아들이 있다라는 사실은 그의 세계관으로는 퇴보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4.2 알라는 ‘엘’과 같은가?
알라는 엘로힘과 같은 분인가? 알라는 창조주를 뜻하는 셈어로 엘로아나, 엘로힘, 엘, 엘라와 어원적으로 매우 가깝다. 그러나 El이나 Elah, Theos, God, Gott, Deui, Bog와 마찬가지로 그 성격이나, 알라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그가 일하는 방식이나, 그가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 혹은 관계하지 않는 방식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일부 그리스도인 저자들이 말하듯이 알라가 사단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영국 사람이나, 미국 혹은 호주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은 사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분이 될 수 없다. 알라는 알라다. 알라가 알라 이외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4.3 부적절한 이해들 그러나 같은 사람
만약 내가 여러분들께 나에 대한 인상 즉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에 대해 써 달라고 한다면, 내 생각에, 여러분들 가운데 몇 사람은 몇몇 좋은 점을 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몇몇 사람들은 불쾌한 이야기를 쓰리라. 하지만 여러분들은 나의 인상에 대한 여러분들 각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들의 설명은 틀릴 수도 있고 실제와 다른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나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에게 가서, ‘내가 생각하기에 마르틴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나의 아내는 여러분들에게 ‘사실 제가 당신들 보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잘 알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마르틴은 이러저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간파하지 못한 그의 성격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여러분들의 견해를 수정해 줄 것이다.
물론 만약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써 달라고 한다해도, 그것은 내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또 다를 것이다. 우리가 결혼하여 산지도 40년이 넘었을찌라도 말이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가서, 골드스미스는 어떤 사람인가를 묘사해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에 대한 인상은, 여러분들의 나에 대한 인상은 물론이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나 엘리자베스가 생각하는 나와 또 다를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나에 대한 것이지만, 아마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것이리라. 물론 나 역시도 조지 부시(George Bush)나 다른 어떤 사람들에 대해 위와 똑같이 할 수 있다. 여러분 역시 정치인들에 대한 여러분 각자의 견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치인들의 배우자들은 실제로 우리들의 생각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알라(Allah)나 하나님(God)에 대한 이해는 부적절하거나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 모두 부적절하거나 틀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어두운 안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로 그 계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들이 구원받아 우리 앞에 성경이 있을찌라도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점진적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충만할찌라도, 여전히 가야할 길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가 직전에 돌아가셨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께서 얼마나 뛰어나신 분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최고로 뛰어난 아버지셨다. 내가 아이였을 때, 나는 아버지의 사진을 내 침대 옆에 늘 두곤 했다. 아이일 때부터 아니 청소년기 때까지 밤에 나는 아버지께, 아니 아버지의 사진를 향해, 내게 아버지는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등에 대해 되내이곤 했다.
그 때, 나는 아버지께 내 마음과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 했다. 그 날 그 날 내가 골을 넣은 것이나 수학에서 백점 받은 일 등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모든 일을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었다. 사실 그것은 한 조각 사진에 지나지 않았고, 그가 없기에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나는 성장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나는 하늘의 아버지에게 그렇게 똑같이 했다. 내 아버지는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분이신지 이야기 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예배 혹은 찬양이라 부른다. 나는 그 분과 골을 넣거나 더 좋은 성적을 받는 일 보다는 좀더 성숙한 것들에 대해 나누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답을 하지 않는다; 그는 멀리 계시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성령께서는 내가 가까이 이야기해 주신다.
그러나 아버지는 멀리 계시고, 거기 계시지 않는다. 스스로나 그 뜻을 모두 알리지 않으신다. 이것이 성서적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선교사가 되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열방그리스도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비로서 내 유년시절이 일정부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나의 이해를 결정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의 배경에 기인하였기에,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나의 이해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일은 여러분 모두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성격, 심리형성과정, 혹은 여러분들의 교단배경이나 특정한 영성형성과정 등으로 인해, 여러분들의 하나님 이해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여러분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확하다고 나는 확신하다. 여러분의 하나님 이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생각,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방법 등에 대해 나열해 보는 것은 상당히 유익한 시도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진실이되 모두다가 진실은 아니며, 오류되 진실과 오류가 공존하는, 아주 재미있는 왜곡된 견해들의 목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5. 임마누엘과 선교
인간으로서, 구원받았든지 받지 못하였든지,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다. 이제서야 나는 영어 단어 ‘좋은/선한’(goog)이라는 말은 다소 뭔가 모자라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좋은/선한’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하나님 스스로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성품을 묘사하는 아주 분명한 말이다. 하나님은 좋으신/선한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고, 보기에 좋다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창세기 3장은 인간의 본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여, 진리는 오류와 섞이고, 선함은 죄와 혼합되었다고 말한다. 비슷하게도,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진리와 비진리가, 선함과 죄가 함께 뒤섞였다. 이 말로 인해 여러분이 걱정할 듯하여, 존 칼빈이 기독교강요(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한 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칼빈은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로 인하여 이것이 완화되고, 누그러지며 약화된다. 최고의 창조주, 임마누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엘’(El)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여러분들은 이를 창조주의 계약 이름인 YHWH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바로 이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YHWH이다. 왜냐하면 이 분은 위대한 ‘나’(I Am)이자 위대한 YHWH이다. 나는 바로 나이다(I am who I am). 그러나 이 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YHWH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창조신이시다. 이 신은 숨겨진 신이고 성서 밖의 종교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신이다; 이는 모압, 가나안 그리고 바빌론 그리고 그리스 종교 등에서, 예배가 종종 최고의 창조신을 향해서가 아니라, 알려지고 접근 가능한 낮은 수준의 신들을 위해서 드려진 이유이다.
우리들의 선교에 바로 이러한 것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랍세계에서 우리 메시지의 최고봉은 예수님이다. 여러분은 그의 이름을 ‘예수아’(Yeshua), ‘이사’(Isa)로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분이 그의 백성을 죄로 부터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임마누엘이다. 이 분은 멀리서, 숨겨진채로 있지 않고, 우리와 함께 바로 여기에 계신 최고의 창조주이다. 여러분이 ‘알라’를 알기 원하는가? ‘알라’와 관계하고자 하는가? 좋다! ‘알라’는 주도적으로 메시야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사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깨끗케 하시고,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서 ‘임마누-엘’로 그의 사역을 이루신다. 또한 인류의 창조주인 ‘임마누-알라’로 우리 주변에 계신다.
6. 결론
기억컨데 우리 열방그리스도대학의 이슬람과정에서 무슬림 지도자를 초대하여 강연을 부탁하고 학생들과 질의하였던 적이 있다. 질문도 기억이 나지 않고, 대답 또한 대부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 무슬림 지도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신약성서를 여러번 읽었습니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항상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에 대해 논쟁도 하지요. 나는 정말 그리스도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계속 말을 했다: ‘내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계속해서 내게 말하는 것인데, 내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계속 질문을 해 보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
내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내게, 그들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안다고 계속 말하는 거예요. 그런 일은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알라’는 위에 계시고, 전혀 다른 분이며, 저 멀리 계신 분입니다. 알라는 영광스러운 최고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지요.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킵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섭리가운데 나와 우리가족 그리고 우리백성과 우리 인간을 지켜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알라’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십니다.
영광스럽게도 ‘알라’는 실제로 영화롭고 영광스러운 모습의 메시야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영어의 ‘God’로 번역된 ‘엘’(El)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교도 종족인 영국의 알려지지 않은 신 God는 영화롭고, 알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한다. 그 분을 따를 가치가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이 예수가 바로 ‘엘’이며, 이 예수가 우리와 함께 하는 ‘알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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